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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이종준] 鴨脚亭記(압각정기)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1. 2. 17:42

□용재공 이종준(慵齋公 李宗準)

 

【계대(系代)】 ①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 → 1世孫 ①정렬공(貞烈公) 규(揆) → 2世孫 판사복시사공(判司僕寺事公) 원림(元林) → 3世孫 ①화헌공(花軒公) 만실(蔓實) → 4世孫 ③대사헌공(大司憲公) 승직(繩直) → 5世孫 ⑤금호공(琴湖公) 시민(時敏) → 6世孫 ②용재공(慵齋公) 종준(宗準)

 

〈압각정기(鴨脚亭記)〉는 금계촌(金溪村)에 있는 몇백 년 된 유서 깊은 은행나무인 압각정에 대한 것이다. 이 나무는 그늘이 넓게 드리워져 강독(講讀)도 하고 연회(宴會)도 하는 등 마을의 대소사가 여기서 벌어져 언제나 기억 속에 푸근하게 존재하던 것인데, 감여가(堪輿家)의 말을 듣고 이씨(李氏)가 그 나뭇가지를 베어버리자 이씨(李氏)의 후손에게 다시 잘 가꾸어 줄 것을 당부하며 쓴 글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강여진(姜麗眞) | 2010
*한국문집총간 해제 > 산택재집(山澤齋集) 구성과내용 중에서

 


鴨脚亭記(압각정기)
-山澤齋 權泰時(산택재 권태시)

 

福之西金溪村。有大樹焉。其名鴨脚亭。其大四十圍有餘。其上枝摩九天。不知幾千尺。其下枝傍布交錯。可庇數百人。蟲蛇不能近。烏鳶不敢巢。是神鬼呵噤而守護之也。世傳慵齋李先生成化中登第。聞喜宴。懸鼓而樹撓。知其時尙少也。弘治戊午。忘軒李公命駕而至。與慵齋敲碁樹下。因忽被拿而西。知其時已蔭也。今去戊午凡二百有一年矣。自戊午去其栽植。亦不知幾何歲。而樹在李氏祠堂前。是李氏之先手植而世守之也。余以溪村兒。生長樹下。耳聞相傳。只此懸鼓敲碁數事而已。嘗目見老少宴集於斯。講讀於斯。進退於斯。揖讓於斯。其流風遺韻。有足觀者。而射者碁者吟風者詠月者。亦各乘興而來。未嘗有一日虛無人也。斯固斯亭之勝。而名於國列於志。又載於勝覽之新增。其亦爲人所愛惜而不爲剪伐也宜哉。余以淸主康煕之壬戌。寓鶴山陽居五歲。移眞安之文海。文海號多名山水。日夕消遙。趣味淸適。宜無慕乎外者。而鴨腳之勝。猶寤寐不釋也。前年冬。余自天燈還過樹下。樹之西北。蕩然未有存者。惟東南三兩枝在耳。余愕然驚慘然傷。問之村人。曰李氏子伐之耳。問何故。曰堪輿氏惑之耳。堪輿氏云何。曰大樹能洩氣以害人耳。惡是何言也。天地至公至大之氣。流行不息。或鍾于人而人有大人焉。或鍾于物而物有大樹焉。人自人物自物耳。果如堪輿之言。大樹之下。未嘗有大人者生。然則大人之世。亦宜無大樹也。此樹之生于此村。凡幾百年矣。而村之有大人。亦幾人哉。入而爲公爲卿爲大夫。出而爲伯爲牧爲守尉。功垂簡策而澤被生民。或高尙而志益烈。或深藏而學益明。道繼往哲而師表百世。彬彬焉蔚蔚焉。踵相躡也。于斯時也。樹亦大樹而式至于今日。時漸降俗漸渝。非復昔日之金溪。而樹於是時而斬伐焉。吾未知樹果害于人歟。人反害于樹歟。樹如彼盛時。人亦如彼盛。人如是衰。而樹亦如是衰。然則以人之盛衰而樹亦隨而盛衰也歟。噫嘻甚矣。李氏之惑也。昔者龍灣道上有大樹。吾人之北朝者。北使之來我國者。必停車駐節。游賞而留連。府尹李某以爲樹之弊於州也大矣。遂奮然拔之。吾人多有議者。而北使亦以詩刺之。其詩正畫出今日事迹乎。事反之心。前後兩李固有同而有不同者矣。伐樹而去弊智也。狂惑而伐樹愚也。如其智猶被北使之譏刺。况乎愚而能免於吾人之議乎。村人相與顧瞻嗟惜。或有流涕而不忍正視也。曰自此樹下。無吾之迹矣。嗚呼。已刑不可續。刑餘猶可庇。願李氏不惑於堪輿氏。惟其先是思。愛之敬之。漑之培之。思古人講讀而吾亦講讀於斯。思古人吟詠而吾亦吟詠於斯。其志其行。必則古先。則樹之茂而人亦從而茂矣。嗚呼。其無惑也夫。其無忝也夫。余悲樹之遭斬伐。如是之酷。作鴨腳亭記。以戒李氏云爾。李氏名某。以慵齋旁孫。嗣守鴨腳亭者也。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7
한국문집총간 > 산택재집 > 山澤齋文集卷之三 / 記 > 鴨脚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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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각정기(鴨脚亭記) 역문(譯文)
-산택재 권태시(山澤齋 權泰時)

 

복(福)의 서쪽 금계촌(金溪村)에 대수(大樹)가 있으니 그 이름은 압각정(鴨脚亭)이라. 그 크기가 사십여(四十餘) 아름이 되는데 그 위가 지는 구천(九天)을 어루만지며 그 천척(千尺)이 될는지 알지 못하고 그 아래 가지 곁에 퍼지고 서로 엉키고 얼크러져 가(可)히 수백인(數百人)을 덮을만하고 벌레나 뱀이 능(能)히 접근하지 못하고 까마귀나 솔개가 감히 깃들이지 못하는 것은 이 신귀(神鬼)가 꾸짖어 못하게 지키니 때문이다.
세대(世代)가 용재(慵齋) 이선생(李先生, 이종준李宗準)에 전하여 성화년중(成化年中)에 과거(科擧)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여 잔치할새. 북을 달아매고 나무를 흔드니 그때에 오히려 젊은 것을 알 것이다. 홍치무오(弘治戊午)에 망헌(忘軒) 이공(李公, 이주李胄)이 수레를 메워 이르러 용재(慵齋)와 더불어 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다가 인(因)하여 홀연(忽然)히 잡힌 바 되니 때는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이제부터 무오년(戊午年) 가기가 무릇 이백일년(二百一年)이라. 무오년(戊午年)으로부터 그 심는 것을 버린 것이 또한 몇 해가 되는지 알지 못하고 나무가 이씨(李氏)의 사당(祠堂) 앞에 있으니 이것은 이씨(李氏)의 선조(先祖)가 손수 심어 대대(代代)로 지켜온 것이다.
내 계촌(溪村)의 아이로서 나무 아래에서 생장(生長)하여 귀로 듣고 서로 전(傳)하니 다만 이 북을 달고 바둑을 두었다는 두어가지 일은 일찍이 노소(老少)가 눈으로 보아서 잔치하고 여기 모이며 강(講)하고 여기에서 읽으며 여기서 진퇴(進退)하며 여기서 읍(揖)하고 사양(辭讓)하여 그 유풍(流風)과 유운(遺韻)을 족(足)히 볼만한 것이 있어 활 쏘는 사람과 바둑두는 사람과 바람을 읊고 달을 노래하는 사람이 또한 각각(各各) 흥(興)겹게 와서 일찍이 하루라도 헛되이 사람이 없지 않았도다. 이 진실로 이 정자(亭子)의 경승(景勝)이 나라에 이름나 지(志)에 벌리고 또한 승람(勝覽)의 신증(新增)에 게재(揭載)되어 또한 사람에게 애석(愛惜)하게 여긴 바 되어 치고 베이지 아니한 것이 마땅하도다.
내가 청(淸)나라 강희황제(康熙皇帝) 임술년(壬戌年) 학산(鶴山) 양지(陽地)쪽에 머물러 살다가 내 해를 진안문해(眞安文海)로 옮기려 하니 문해(文海)란 산수(山水)가 많은 것을 이름한 것이다. 낯과 저녁에 거닐며 맑고 쾌적(快適)한 취미(趣味)를 붙여 밖을 생각함이 없는데 마땅하매 압각(鴨脚)의 승지(勝地)가 오히려 오매(寤寐)에 놓을 수 없는지라. 전(前)해 겨울에 내가 천등(天燈)으로부터 돌아와서 나무 아래를 지내더니 나무의 서북(西北)쪽이 탕연(蕩然)이 없어져서 오직 동남(東南)의 두세 가지만 남아있었다.
내가 악연(愕然, 놀라는 모양)이 놀라고 참연(慘然, 슬프고 참혹한 모양)히 아파서 마을 사람에게 묻기를 “이씨의 아들이 베었는가? 무슨 연고(緣故)인가”하고 물으니 말하기를 감여씨(堪輿氏, 풍수가風水家)에 혹(惑)함이니 감여씨(堪輿氏) 이르기를 어찌하여 큰나무가 능(能)히 설기(洩氣)가 되어 해인(害人)을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된 말인가? 천지(天地)의 지공(至公)하고 지대(至大)한 기운(氣運)이 유행(流行)하여 쉬지 않아 혹(或) 사람사람에 모여 사람에 대인(大人) 있고 혹(或) 물건에 모여 물건에 큰 나무가 있으니 사람은 스스로 사람이오. 물건은 스스로 물건인데 과연(果然) 감여(堪輿)의 말처럼 큰 나무 아래에 일찍이 대인(大人)이 낳은 이치(理致)가 있지 않다고 하니 그렇다면 대인(大人)의 세상(世上)에 또한 마땅히 큰 나무가 없을 것이니 이 나무의 이 마을에 난 것이 무릇 기백 년(幾百年)이라. 마을에 대인(大人)이 있는 것이 또한 몇 사람이던가?
내가 나무의 참벌(斬伐)을 만난 것이 이같이 참혹(慘酷)함을 슬퍼하여 압각정기(鴨脚亭記)를 지어서 이씨(李氏)를 경계(警戒)한다 이르노라. 이씨(李氏)의 이름은 아무개라는 용재(慵齋)의 방손(傍孫)으로 압각정(鴨脚亭)을 대(代)로 이어 지켜온 사람이었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