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게시판/금석록◆정민록

황산찰방공(黃山察訪公) 이덕장(李德璋) 묘갈명(墓碣銘)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11. 20. 16:17

慶州李氏金石錄卷之十四(경주이씨금석록 권지십사)
後孫 裕元編輯(후손 유원 편집)

黃山察訪公墓碣銘(황산찰방공 묘갈명)
左贊成李滉撰(좌찬성 이황 찬)


 

 

 

 

附察訪公碣陰銘(부찰방공갈음명) 幷序(병서)
–退溪(퇴계) 李滉(이황)

公諱德璋。字慶簿。慶州人。新羅始祖赫居世佐命大臣謁平之後。曾祖繩直。大司憲。祖時敏。生員。考弘準。進士。公生於成化壬寅十二月十九日。少習擧業。嘗屢擧於鄕試。禮部不中。蔭補黃山道察訪。嘉靖癸未*)。丁外艱。服闋。爲家貧親老。求再遂祿仕計。勉赴京師。明年四月二十七日。遇病不起。享年四十二。癸未十二月十七日。葬于皆丹縣雲峯山艮坐坤向之原。公自少軒輊尙氣。不肯齷齪庸流中。其在京師日。嘗草疏。欲陳時事。已而。戒出位而止。敎子弟甚嚴。鄕里後生。亦加勸督。不以生産作業爲務。嘗稱貸以自給。公配曰豐山柳氏。進士子溫之女。工曹典書從惠之後。成化癸卯十二月二十日生。稟性閒靜。平居無疾言遽色。公歿。家益窮。猶不聽家人之歎貧曰。吾分止是。何恨焉。其訓子。以爲寧受凍餒。不可取不義之物。睦族交隣。盡心無慊。或拔貧以周急。又未嘗虛受人饋。族人有以祀事見推。柳氏無辨而行其祀惟謹曰。彼之用心如此。雖强令行之。祖考肯享之乎。數歲。其人感愧而止。其宅心精且善。皆此類也。生四男一女。男長艿。次茹。次葎。後公十餘年。相繼死。其季曰苞。己酉生員。爲 齊陵參奉。女適生員李薰。嘉靖丙辰正月十三日。柳氏歿。享年七十四。是年十二月。祔葬于公。銘曰。

月城之李。遙遙厥緖。公則是承。其儀擧擧。以充觀國。胡命之阻。試于郵官。思馬斯臧。中替求復。爲親在堂。齎志永已。旅櫬悲傷。公有賢婦。豐山茂族。淑愼其身。閨門雍穆。亦旣長育。粲粲蘭玉。喪禍仍荐。克持其家。季也至性。誠孝靡他。天之報騭。於是匪差。有崇其原。白楊號風。同其翳然。永保幽宮。


--------------------------------------------
*) 嘉靖癸未。 : 嘉靖癸未。可疑。

*용눌재집(慵訥齋集) > 訥齋先生遺稿 > 附錄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9
*한국문집총간 > 퇴계집 > 退溪先生文集卷之四十六 > 墓碣誌銘 > 黃山察訪李公碣陰銘 幷序
*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144A_0460_010_0160_2004_A030_XML



●찰방월성이공묘갈명(察訪月城李公墓碣銘) 병서(幷序) 역문(譯文)
   -진안(眞安) 퇴계(退溪) 이황(李滉) 찬(撰)

공의 휘는 덕장(德璋)이요, 자는 경부(慶簿)나 경주인(慶州人)이라.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좌명대신(佐命大臣) 알평(謁平)의 후손이며 증조는 승직(繩直)이니 대사헌(大司憲)이요, 조부는 시민(時敏)이니 생원(生員)이며, 부친은 홍준(弘準)이니 진사(進士)라.

공이 성화(成化) 임인년(壬寅年, 1482년 성종13) 12월 19일에 태어났다. 일찍부터 학업에 힘을 써서 여러 번 향시예부(鄕試禮部)에 응시했으나 합격을 못 하고 음직(蔭職)으로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이 됐다. 가정(嘉靖) 계미년(癸未年, 1523년 중종18)에 부친상을 당해 퇴직했다가 복(服)을 마치고 나니 집은 가난하여 늙은 모친을 봉양하기 어려워 다시 벼슬을 구해서 서울에 갔더니 이듬해 4월 27일 병에 걸려 객지에서 뜨니 향년(享年)이 42세라.
갑신년(甲申年, 1524년 중종19) 12월 17일에 개단현(皆丹縣) 운봉산(雲峯山) 간좌곤향(艮坐坤向) 언덕에 안장했다. 공이 젊을 때부터 장부의 기상이 있어 속이 좁고 용렬(庸劣)한 무리와는 교유를 싫어하고 서울에 있을 때 상소문을 지어 모든 일을 진술하고자 하더니 친상(親喪)으로 인하여 벼슬에서 물러 나왔다. 자제들을 가르침이 심히 엄했고 마을에 후학들을 위하여도 권학(勸學)하고 독려하며 생산작업(生産作業)에는 힘쓰지 않고 빌리고 갚는 것으로 자급자족(自給自足)하다.

공의 배(配)는 풍산류씨(豐山柳氏)니 진사(進士) 자온(子溫)의 따님이요, 공조전서(工曹典書) 종혜(從惠)의 후손이다. 성화(成化) 계묘년(癸卯年, 1483년 성종14) 12월 20일에 출생하나 품성(稟性)이 정숙하고 평상시에 빠른 말고 급한 기색이 없더니 공이 죽은 뒤로 집이 더욱 궁색하니 가난함을 한탄하지 않고 「내 분복(分福)이 이뿐이니 무엇을 한탄하리오」 하고 아들을 교훈하되 차라리 굶고 죽을지언정 불의에 물건을 취하지 말아야 하며 친족간에 화목하고 이웃을 사귀되 정성껏 하여 혐의 지는 일이 없으니 남이 혹 가난을 돕고 급한 일을 구해주면 공짜로 남이 주는 받는 일이 없었다. 한번은 일가 사람들이 제사 일로 류씨를 헐어서 말하기를 「제사를 분별없이 지낸다고 꾸짖으며 마음 씀이 이 같으니 억지로 지내는 제사를 그 조상이 흠향(歆饗)할까?」 하더니 수년이 지난 후에 그 사람들이 부인 정성에 감회 되어 부끄러워하고 다시는 헐뜯는 알아 없었으니 그 마음가짐이 정숙하고 착함이 이와 같았다.

4남과 1녀를 두었으니 장남에 잉(艿) 이고 다음은 여(茹)며 셋째는 률(葎) 이고 끝이 포(苞)니 공이 별세 후 10년 뒤 위로 3형제가 따라 사망하고 끝인 포(苞)가 기유년(己酉年, 1489년 성종20)에 생원(生員)으로 제릉참봉(齊陵參奉)이 됐고 따님은 생원(生員) 이훈(李薰)에게 출가하다. 가정(嘉靖) 병진년(丙辰年, 1496년 연산군2) 정월 13일에 류씨(柳氏)가 별세하니 향년이 74세라. 공의 묘소에 합장(合葬)했다. 명(銘)을 지으니 명(銘)하 가로대

월성 이씨는 그 유래(由來)가 깊고 멀다. 공이 이 집에 태어나서 그 거동(擧動)이 빼어나다. 충실한 성품으로 나라에 나갔건만 명(命)이 어찌 막는고. 우관(郵官)에 응시하니 여의치 않도다. 중년에 다시 다시 벼슬을 구한 것은 어버이를 위함이라. 뜻은 가졌으나 몸이 먼저 가니 객사(客死)함이 원통하다. 어진 아내를 두었으니 풍산류씨(豐山柳氏) 화벌(華閥)이라 몸가짐이 맑고 삼가니 규문(閨門)이 화목하도다. 자녀를 길러내니 찬란한 난초(蘭草)요, 빛나는 옥(玉)이로다. 화액(禍厄)을 자주 당하니 그 짐을 보존할까. 끝 아들이 성품이 지극하니 효성이 따로 있나 하늘이 도와주니 차착(差錯)이 없으리라. 높은 언덕이 백양(白楊)이 바람에 우니 그 가려짐을 같이하면서 유궁(幽宮)을 길이 보전하리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