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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舍人) 증부제학(贈副提學) 용재선생(慵齋先生) 이종준(李宗準) 가장(家狀)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11. 20. 15:47

慶州李氏金石錄卷之十三(경주이씨금석록 권지십삼)
後孫 裕元編輯(후손 유원 편집)

舍人贈副提學慵齋先生家狀(사인 증부제학 용재선생 가장)
弟弘準述(제 홍준 술)

墓誌(묘지)
弟弘準撰公準書(제 홍준 찬 공준 서)

成均進士訥齋公墓誌銘(성균진사 눌재공 묘지명)
弘準自製(홍준 자제)


 

 

 

 

 

 

 

 

 

 

 

 

 

仲兄莊六堂公家狀(중형장륙당공가장)
-弟(제) 弘準(홍준)


公姓李諱宗準字仲勻。自號莊六居。士又稱慵齋。系出慶州新羅佐命大臣謁平之後也。至麗季有曰之秀。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是生揆官之四宰諡貞烈。是生元林。入我 朝判司僕寺事。是生蔓實吏曹判書。於公爲曾祖也。祖諱繩直進士于。世宗朝。行楊州牧慶尙道觀察使。以大司憲終。淸白見重於朝。考諱時敏。俱中生進。以淸望名。於世延及癸酉之禍。被禁錮。妣永嘉權氏。縣監啓經之女也。公生于永嘉之金溪村。幼而岐嶷。五歲屬文。七歲讀書通大義。生員公以詩戒之曰一飯都忘歲月輕。豈知斯世樹風聲。空身雖向窓前坐。逸意應馳野外行。公雖在妙齡。心誦此詩。益勉課業。十歲言于生員公曰。經書皆是聖贒傳授文字。而或出於門人之記。至於易經則文王周公孔子三聖之手書。此眞聖人書也。生員公聞而大奇之。手植一株杏於大廳之前。生員公曰此夫子講學之樹也。汝他日當與盛德君子。講習於此樹下。對曰東方亦有聖人乎。生員公曰行聖人之道。皆可爲聖人徒。况我東箕子遺風。至今流傳。豈可無贒人君子也。十三歲文章已成。筆法蒼古。欲赴鄕解。生員公以學業未成不許。缺 嘗遊學于京中。生員公慮其才勝。以書戒之。其略曰汝之遊學。非豪俠輩可比。謹言行戒酒色無慢遊。無友狂吾之先世。爲朝家名臣。及余之身。不幸坎軻。余則已矣。積善之久。豈無餘慶。汝兄不學無才。汝弟亦不好學。吾之所望者汝也。汝亦學而不誠。不誠則無實。吾所謂實者。德行之謂也。非才華也。苟無其行。雖有七步之才。何足取焉。公佩服玆訓。雖微言細行。不敢不謹。癸巳丁生員公喪。哀毁過禮。服闋後以慈夫人命。入竹林寺讀書。同里裴裀隨而課讀。志倦神疲。則裴掩卷而息。公終宵不輟。如是數月。精力如初。裴曰君以血氣之身。勤苦過人。乃能若是耶。公曰至樂在此。有何疲倦也。每月朔。歸覲慈夫人。課誦一月所讀於夫人之前。無一字訛漏。然後夫人供別饌而給之。丁酉中司馬試。寓居于京城。一日與南秋江乘月遊於杏花坊。權景裕見其儀容淸秀。邀而虛座曰子非塵埃中人。眞所謂仙鶴在人間也。君饒先唱四韻。先生應口而對。故爲出塵之態。君饒大驚挽手止之。終宵吟咏。朝日視之。乃於背洞寓居進士李某也。自後爲莫逆之友。每與伯恭君饒語及 魯陵往事。未嘗不歔唏流涕。乙巳登第。對策綱與目。丁未以正字遷吏郞。是年日本使來聘。 上以關防甚重。且彼國使有文才。命極擇護送使。銓曹以公生應㫖。公奉命至東萊。縣倭使得公書畫。拜受曰始得天下重寶。冬又受平安評事之 命。至祥原郡。題三笑圖。後南秋江過此大驚曰。此必吾友手段也。戊申除弘文校理。以徐居正薦選湖堂賜暇讀書。 上幸環翠亭。公應 製居首。聲名籍甚。無爭鋒者。時論推以第一淸望。尋拜正言。是時愼守勤始登淸顯。公以外戚得權之漸。力諫其不可。直聲震朝廷。壬子拜修撰。陳疏歸覲。癸丑以撿詳陞舍人。又以書狀赴燕。見館驛畫屛不佳。以筆塗抹殆書。譯官招通事恠詰之。通使曰書狀善書畫。必以不滿其意而然也。譯官首肯之。回程至其處。張新糚素屛二座。公一書一畫。俱臻其妙。觀者歎賞。又以詩律鳴於皇朝。後華使至而傳誦。甲寅除義城縣令。慈夫人時尙康寧。以居官愛民之意。作五言詩四十韻與之。公拜受誦之。顯見校宮之頹廢。擇地移建。出俸祿以助工費。宏敞規模。招境內之有儒望者。敎授鄕子弟。誦詩習禮。一如古法。絃誦常聞。時人以聞韶比武城。作竹樓於客館之南。爲公退休息之所。作記揭之。一時文士傳誦。至於訴帖揮灑筆跡。邑人皆珍而藏之。戊午棄官歸鄕里。是時柳子光,李克墩搆誣淸流。禍在朝夕。公怡然自樂。不以爲憂。與李忘軒胄圍碁於杏亭。外人傳言紅衣官人一隊直入洞壑。左右請輟碁。公徐曰未聞拿 命則猶是閒散。對局如故。俄頃金吾郞果至。公曰老母在。願與之訣。金吾郞惻然而許之。拜辭慈夫人。夫人引范滂事諭之曰汝得其死。我何悲爲。汝往善死善死。無以我爲念。與忘軒同席被拿。及就鞠之日。不變神色。以手畫地作一字如長杠。無一言也。奴貴成者能解文字。公之所信任而使之常隨者也。同被鞠。亦畫地無言。及定罪之日。決杖八十流北界。定烽燧庭爐干之役。路經高山驛。書孤忠自許衆不與一律于壁上而去。監司以聞。喬桐主以爲有㤪意。逮鞠殺之。時朝廷危懼。無敢言者。獨洪貴達上書救解不得。被刑之日。容色與平日無異。但勵聲曰首陽邈矣。埋我無地。聞者爲之墮淚。返葬于金溪之沙芒洞艮坐之原。夫人永嘉權氏。無嗣以弟公準第三子德淵奉祀焉公之遺意也。公容貌端雅。如淸水芙蓉。志操瀅潔。如冰壺秋月。爲文發越。信筆滔滔。直與漢唐之文。同一體格。詩亦優游不迫。出於性情。有古詩人之風韻。至於書畫醫藥卜筮。無不精巧。嘗師事佔畢齋金先生。先生器之曰自見李某。胷次灑落。與鄭一蠧金寒兩暄。爲道義交。又與金濯纓,南秋江諸賢友善。秋江最敬重焉。茂豐副正見而奇之曰。公我東之詩仙也。以綠陰紅葉之時必邀於楊花渡。乘月同舟酬唱至百餘篇。公嘗見洪裕孫歎曰。斯人也有此奇才高行不顧地閥而。與之友洪由是見重於士類云。公自幼少時。無疾言遽色。雖在倉卒。未嘗失操。其經幄講論。一遵河南夫子。霜臺直言。無愧漢庭長孺。倜儻淸議。便是海東魯連。痛矣。嘉言善行。䧺詞健筆。不傳於世。者史禍家故也。 厪得在人 耳目者和涙而書以待秉筆家采述。

*용재유고(慵齋遺稿) > 訥齋先生遺稿 > 仲兄莊六堂公家狀


●중형장륙당공가장(仲兄莊六堂公家狀) 역문(譯文)
  -제(弟) 홍준(弘準) 찬(撰)


공의 성(姓)은 이씨(李氏)요, 휘는 종준(宗準)이며 자는 중균(仲勻)이고 호는 장륙거사(藏六居士)라고도 하고 또 용재(慵齋)라고도 하니 경주로 관향(貫鄕)을 하고 신라좌명대신(新羅佐命大臣)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고려(高麗)말에 지수(之秀)가 있으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봉월성군(封月城君)이요. 규(奎)를 낳으니 벼슬이 사재(四宰)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렬(貞烈)이며 휘 원림(元林)을 낳으니 아조(我朝, 朝鮮)에 들어와서 벼슬이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고 휘 만실(蔓實)을 낳으니 이조판서(吏曹判書)라. 공에게는 증조가 되고 조부는 휘 승직(繩直)이니 세종조(世宗朝)에 벼슬하시어 양주목사(楊州牧使)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으로 마치니 청백(淸白)하심으로 조정에 중용되었고 부친의 휘는 시민(時敏)이시니 생원진사(生員進士)에 합격하시고 청백(淸白)으로 세상에 명망이 높으시더니 계유(癸酉)에 화(禍)가 미치매 금고(禁錮)형을 당하셨다.
모친은 영가권씨(永嘉權氏) 시니 현감(縣監) 계경(啓經)의 따님이시다. 공이 안동(安東) 금계촌(金溪村)에서 나시니 어려서부터 상모가 우뚝하시고 5세에 글을 부치시고 7살에 글을 읽어 대의(大義)를 통달하시니 생원공(生員公, 용재공 부친)께서 글을 지어 경계하시니 글에 가로대

일반도망세월경(一般都亡歲月輕) / 한 밥에 세월 빠른 것을 잊으니
기지사세수풍성(豈知斯世樹風聲) / 어찌 세상 소리를 알까 보냐
공신수향창전좌(空身雖向窓前坐) / 빈 몸이 비록 창 앞에 앉았으니
일의응치야외행(逸意應馳野外行) / 뜻을 응당 야외로 달아난다.

이때 공이 비록 어린 나이시나 마음에 이글을 외우고 더욱 학업에 힘쓰시더니 10세 때 부친께 말씀하기를 경서(經書)는 다 성현(聖賢)이 전해 준 문자(文字)이나 혹은 문인(門人)들의 기록에서 나왔고, 주역(周易)인즉 문왕(文王)·주공(周公)·공자(孔子) 세 분 성현(聖賢)의 친히 쓴 글이오니 진성인(眞聖人)의 글이라 하오니 생원공(生員公)이 들으시고 크게 기이하게 여기시어 손수 은행나무 한 그루를 대청 앞에 심으시고 생원공(生員公)이 가로대

『이 나무는 부자(夫子)께서 배우고 강하든 나무라 내가 뒷날 성덕군자(盛德君子)로 더불어 이 나무 아래서 강학(講學)하라』

하심에 대답하여 가로대

『동방(東方)에도 성인(聖人)이 있습니까』

생원공(生員公)이 가라사대

『성인(聖人)의 도(道)를 행하면 성인이 될진대 하물며 우리 동방은 기자(箕子)의 유풍(遺風)이 지금까지 흐르니 어찌 현인군자(賢人君子)가 없다』 할 것인가.

13세에 문장(文章)을 이루고 필법(筆法)이 옛사람을 압도하시더니 향시(鄕試)에 응시코자 한데 생원공(生員公)은 학업이 부족하다 하시어 허락지 않으시다. 일찍 서울로 유학(游學)할새 셍원공(生員公)이 그 재주가 덕보다 앞설까 염려하시어 글로 경계하시니 그 대략이 이러하였다.

「너의 유학(游學)하는 것이 호협(豪俠)한 무리에 비교할 바가 아니니 언행(言行)을 삼가고 주색(酒色)을 경계하며 게을리 놀지 말고 미친 벗은 사귀지 말라. 우리 선대(先代)가 조정에 이름있는 신하(臣下)이니 나에 이르러 불행(不幸)하게 구렁에 빠졌으니 나는 그만이다마는 적선(積善)을 오래 하면 어찌 경사가 없겠느냐? 너의 형은 배우지 못하고 재주도 없으며 너의 동생도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나의 바람은 너뿐인데 너도 또한 배움이 성실치 않으니 성실치 않으면 실(實)지가 없을지라. 내가 말하는 실(實)이란 덕행(德行)을 말함이요, 화려한 재주를 말함이 아니라 그 덕행이 없으면 비록 칠보시(七步詩, 중국 위魏나라 조식曹植이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지은 詩)를 짓는 재주가 있은들 취할 바가 아니다.」

공이 이 훈계(訓戒)를 가슴에 새겨서 비록 적은 말과 조그마한 행동이라도 감히 삼가지 않음이 없다 하시다.
계사(癸巳, 성종 4, 1473년)에 생원공(生員公)이 별세(別世)하시니 슬퍼하심이 예(禮)에 지나치고 복(服)이 끝남에 모친의 명령으로 죽림사(竹林寺)에 들어가 글을 읽을새 한마을에 사는 배인(裵裀)이 같이 가서 공부함에 심신이 피곤함에 배씨(裵氏)는 책을 덮고 쉬는 데도 공은 밤이 새도록 쉬지 않으시고 몇 달이나 계속하시되 정력(精力)이 여전하시니 배씨(裵氏)가로되 「군(君)의 혈기(血氣)가 부지런하기를 사람에 지남에 이와 같은가.」 공이 답하여 가로대 「지극히 즐거움이 여기 있는데 어찌 되곤 하리오」 하시더라 매월 초하루에 모친을 뵈러 집에 오시어 한 달 읽은 글을 모친 앞에서 외우시되 한자도 그릇됨이 없어야 모친이 별찬(別饌)을 장만하여 주시고 극찬하였다.
정유년(丁酉年, 성종8 1477)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시고 서울에 우거(寓居)하실 때 하루는 남추강(南秋江, 남효온南孝溫)과 더불어 달을 따라 행화방(杏花坊)에서 노시니 권경유(權景裕)가 공의 품위와 용모가 청수(淸秀)하심을 보고 맞아서 자리를 비켜 가로대 『자네는 티끌 세상 사람이 아니고 참으로 선학(仙鶴)이 인간에 왔다』라고 이르더라. 군요(君饒, 권경유權景裕)가 글을 먼저 사운(四韻)을 불음에 공이 응구첩대(應口輒對) 하니 참으로 진세(塵世)에서 뛰어난 태도인지라. 군요(君饒)가 매우 놀라 손을 잡고 앉아 밤이 새도록 글을 읊다가 아침에 보니 이에 배동(背洞)에 우거(寓居)하는 진사(進士) 이모씨(李模氏)라. 이 뒤로부터 막연한 벗이 되어 매양(每樣) 백공(伯恭, 남추강南秋江)과 군요(君饒, 권경유權景裕)로 더불어 노릉(魯陵, 단종端宗)의 지나간 일을 말하다가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때가 없으셨다.

을사년(乙巳年, 성종16 1485) 급제(及第)하시고 강목(綱目)을 글로 대답하셨으며 정미(丁未, 성종18 1487)에 정자(正字)로부터 이랑(吏郎)에 옮기셨다. 이해에 일본(日本) 사신을 맞을세 임금이 정조에 명하시기를 관문방어(關門防禦)가 심히 중요하고 또 저 나라 사신이 글재주가 있다 해서 엄격히 호송사(護送使)를 가릴세. 전조(銓曹, 인물 가리는 곳)에서 공을 철거하여 공이 임금 명을 받들고 동래현(東萊縣)에 이르러서 왜국(倭國, 일본) 사신이 공의 글씨와 그림을 얻고 극찬의 절을 하면서 가로대 처음으로 천하 보배를 얻었다 하더라.
겨울에 또 평안평사(平安評事)로 명령을 받으시고 상원군(祥原郡)에 이르시어 삼소도(三笑圖)란 시와 그림을 쓰셨더니 뒷날 남추강(南秋江, 남효온南孝溫)이 이곳을 지나다가 보고 매우 놀라 가로대 이는 반드시 나의 친구 솜씨라 하였다. 무신(戊申)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제수받으시고 어세겸(魚世謙)의 추천으로 호당(湖堂)에 뽑히시고 여가를 얻어 글을 읽게(賜暇讀書) 하셨다.
임금이 환취정(環翠亭)에 행차할 세 공이 응제(應製, 임금의 물음에 응답하는 벼슬)로 우두머리에 계시니 명성이 자자하고 칼날을 다투는 자가 없으니 그때 공론이 제일가는 명망으로 추대하느니 조금 뒤에 정언(正言)에 배명(拜命) 되시다. 이때 신수근(愼守勤)이 처음으로 청현직(淸顯職)에 오르시니 공이 말하되 이는 외척(外戚)으로 권력을 잡을 징조라 해서 그 옳지 않음을 역간(力諫) 하시니 바른 소리가 조정에 진동하다. 임자(壬子)에 수찬(修撰)에 배명(拜命) 되시니 모친을 모시고 뵙고자 글을 올려 집에 돌아오시다.

계축(癸丑, 성종24 1493)에 검상(檢詳)으로부터 사인(舍人)에 승진하시고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 중국 수도인 베이징의 옛 이름)에 가실 때 사관(使館, 지금의 여관)의 병풍 그림이 낡은 것을 보고 심히 못마땅하게 여겨 붓으로 다 망쳐놓았더니 역관(譯官)이 통사(通使)를 불러서 물은즉 통사(通使) 가로대 서장관(書狀官)이 서화(書畫)를 잘하시니 반드시 그 뜻에 차지 않아서 이렇게 한 모양이라 대답하니 역관(譯官)이 수긍했는데 중국서 돌아오는 길에 그곳에 당도하니 새로 흰 병풍 두 개를 만들어 놓았거늘, 공이 하나는 글씨를 쓰고 하나는 그림을 그리시니 그 묘(妙)가 극에 이르니 보는 자 다 탄성을 하였다. 또 시율(詩律)로 중국 서울에서 그 명성을 울렸더니 뒷날 중국 사신이 왔을 때 그 글을 외쳤다 한다.

갑인(甲寅, 성종25 1494)에 의성현령(義城縣令)이 되니 그때 모친께서 기력이 강녕(康寧)하시어 벼슬에 계실 때 백성 사랑하라는 뜻으로 5언시(五言詩) 40수를 지어 공에 주시니 공이 절하고 받아 현(縣)에 도착하여 보시니 향교(鄕校)가 퇴락하거늘 터를 새로 구해서 옮겨 지으실 제 봉급을 털어 공사비에 보충하여 지으니 규모가 굉장한지라. 현내(縣內) 글 잘하는 사람을 불러 향중자제(鄕中子弟)들을 가르치게 하시어 시(詩)를 외우고 예(禮)를 익히되 옛날 법과같이 하시니 현송(絃誦, 거문고를 타면서 詩를 읊음)의 소리가 항상 들리는지라. 그 당시 사람들이 의성(義城)을 무성(武城)에 비유하면서 객관(客官, 숙소를 말함) 남쪽에 죽루(竹樓)를 짓고 공을 위하여 퇴근 후 휴식하시는 곳으로 정함에 기(記)를 지어 현판(懸板) 하시니 한때 문사(文士)들이 전해가며 외우고 소장에 글씨까지 명필이라 해서 읍 사람들이 보배로 여겨서 깊이 간직하였다 한다.

무오년(戊午年, 연산군4 1498)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계셨는데 이때 조정에서 류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이 청류명현(淸流名賢)들을 상(上, 임금님)에 모함(謀陷)하니 화(禍)가 조석(朝夕)에 있으나 공은 아무 걱정도 안 하시고 이망헌(李忘軒, 이주李冑)으로 더불어 행정(杏亭)에서 바둑을 두시니 바깥사람들이 와서 말하기를 붉은 옷을 입은 관인(官人)들이 동구(洞口)에 들어온다고 하거늘 좌우 사람들이 바둑을 거두어 치우라 한 데도 공이 조용히 가로대 잡으라는 명을 받지 않았으니 나는 죄인이 아니라 하시고 여전히 바둑을 두실 세. 조금 후에 금오랑(金吾郞, 죄인 잡는 관인)이 도착하거늘 공이 가로대

『노모(老母)가 계시니 작별할 시간을 달라』

하시매 금오랑(金吾郞)이 측은히 여겨 허락하였다.
모친께 절하시고 작별인사를 올리니 모친께서 옛날 범방(范滂, 중국 한나라 사람)의 일을 비유하시면서

『네가 죽을 자리를 얻었으니 내가 어찌 슬퍼하랴. 너는 죽기를 잘하고 내 생각은 조금도 말라』

하시다.

망헌(忘軒, 이주李胄)과 함께 잡혀서 국문(鞠問)당하는 날 안색이 조금도 변함이 없이 손으로 한일자(一)를 그어 장강(長杠, 길고 굵은 멜대) 모양을 만드시고 한 말씀도 없으셨다. 귀성(貴成)이란 종이 있었는데 능히 글도 알고 공의 신임을 받아 항상 따라다니더니 함께 국문을 당하는데 또한 땅을 그며 한 말도 없었다. 죄를 결정하는 날 곤장 80대를 맞고 북계(北界)로 귀양 가서 봉화(烽火) 불을 드는데 불 살리는 역을 담당하고 떠나갈 때 고산역(高山驛)을 지나게 되어

「고충자허중불여(孤忠自許衆不與, 외로운 충절을 남이 몰라준다는 뜻)라는 글 한수」를 벽 위에 써 붙이고 가신지라.

감사(監司)가 이를 나라에 알리되 연산군(燕山君)이 자기를 원망한다 해서 다시 잡아 죽이니 그때 조정이 두려워서 감히 말하는 자가 없고 홀로 홍귀달(洪貴達)이 글을 올려 구원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지라. 사형을 집행하는 날 공은 안색이 전일과 다름이 없고 다만 소리를 높여 가로대

『수양산(首陽山)이 멀고 머니 내가 칠 땅이 없구나』 하시니 듣는 자가 모두 눈물을 흘렸다 한다.

금계사망동(琴溪沙芒洞) 간좌(艮坐) 언덕에 안장하다.
부인은 영가권씨(永嘉權氏)니 아들이 없어 동생 공준(公準)의 셋째 아들 덕연(德淵)으로 봉사(奉祀)케 하니 공의 유언이신지라. 공은 용모가 단정하시여 맑은 물에 핀 부용(芙蓉)과 같으시고 지조는 결백하시어 빙호(氷壺)에 비친 가을 달과 같으시며 글은 활발하고 글씨는 절묘하며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문장들과 같은 체격(體格)이었고 또 노는 데도 여유가 있어 궁색함이 없으심이 천성에서 나시니 옛날 시인(詩人)들의 풍채가 있으셨으며 글과 글씨·그림과 음율(音律)·의약(醫藥)과 복서(卜筮)에 무불통지(無不通知)하시더라.
일찍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김선생(金先生)을 스승으로 섬기심에 선생이 큰 그릇이라 보시고 가로대

『이모(李模)를 본 뒤로 흉금(胸襟)이 트는 것 같다』

하시더라.

정일두(鄭一蠧, 정여창鄭汝昌)·김한훤(金寒暄, 김굉필金宏弼)으로 더불어 도의(道義)의 벗을 하고 또 김탁영(金濯纓, 김일손金馹孫)·남추강(南秋江, 남효온南孝溫) 제현(諸賢)과 좋은 벗이 되시니 추강(秋江)이 가장공(家狀公)에게 공경하고 중히 여기신다.
무풍부정(茂豐副正, 왕족 이총李摠)이 공을 보고 기이히 여겨 가로대

『우리 동방에 시선(詩仙)이다.』

하면서 녹음(綠陰)과 홍엽(紅葉)때는 반드시 양화도(楊花渡)에 공을 영접(迎接)하여 달을 따라 배를 타고 글을 지으신 것이 백여 수에 이르시더라. 공이 일찍 홍유손(洪裕孫)을 보시고 탄식하시어 가로되 이 사람이 이런 기이한 재주와 높은 행실이 있으니 지위는 불구하고 더불어 사귐 직한 바라 하시니 홍씨가 이로 인하여 사림(士林)에 중요하게 보이다.

공이 어릴 때부터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고 비록 창졸(倉卒)간이라도 행동에 실수가 없으시며 그 경악(經幄, 글을 강론하는 곳)에 있어 강의하시고 의논하실 때는 하남부자(河南夫子, 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 선생을 말함)의 법을 따랐고 상대(霜臺, 정언正言 간관諫官)에 계실 때는 바른말 하는 것이 한나라 조정에 장유(長孺, 중국의 급암汲黯이란 사람)에 부끄럼이 없으셨고 활달하고 밝은 의논은 해동(海東) 노연(魯連, 제齊나라 노중련魯仲連)이라 하였다. 아름다운 날과 착하신 행실이며 웅장하든 글과 건장유력(建章有力)한 필법이 후세에 전하지 못한 것은 사화(史禍)를 당한 집인 탓이리라. 겨우 보고 들은 것을 모아 눈물을 섞어 이 글을 쓰고 후일 명필군자(名筆君子)의 채술(采述)을 기다리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


○이종준의 일생을 적은 가장(家狀)으로서 이홍준이 씀.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났는데 이를 보고 부친이 공자께서 은행나무 아래서 학문을 강(講)하셨다는 고사에 따라 대청 앞에 은행나무를 심어 주며 훗날 성덕군자(盛德君子)와 함께 이 나무 아래서 강습할 것을 당부하였다는 일화와 관직생활을 하며 문명(文名)을 떨친 일 등이 적혀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先兄藏六堂公墓誌(선형장륙당공묘지)
-弟(제) 弘準(홍준), 弟(제) 公準(공준)


公諱宗準。字仲勻。姓李月城世家。父生員時敏。祖大司憲繩直。丁酉生員。乙巳文科。戊午被禍。世稱慵齋。削官職及第而己。諱節義黨人而己。返葬金溪先人之壠也。奉祀德淵家李之子也。葬後七年。乙丑二月日。 弟弘準撰。公準書。

*용재유고(慵齋遺稿) > 訥齋先生遺稿 > 墓誌文


●선형장륙당공묘지(先兄藏六堂公墓誌) 역문(譯文)
-제((弟) 홍준(弘準) 찬(撰), 제(弟) 홍준(公準) 찬(書)

공(公)의 휘(諱)는 종준(宗準)이고 자(字)는 중균(仲勻)이다. 성은 월성이씨(月城李氏)1)로 세가(世家)2)이다. 부친은 생원(生員) 시민(時敏)이요, 조부는 대사헌(大司憲) 승직(繩直)이다. 정유년(丁酉年, 성종8 1477년)에 생원(生員)에 합격하고 을사년(乙巳年, 성종16 1485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했으며 무오년(戊午年, 연산군4 1498년)에 사화(史禍)를 당했으니 세상이 용재(慵齋)라 일컬었다.
벼슬을 삭탈(削奪) 당하자 당인(黨人)3)은 절의(節義, 절개와 의리)라 했다. 선인(先人)의 묘가 있는 금계(琴溪)에서 반장(返葬)4)하고 질(姪)인 덕연(德淵)을 아들로 삼라 봉사(奉祀)케 했다. 장례를 치른 7년 후 을축년(乙丑年, 연산군11 1505년) 2월 일에 동생 홍준(弘準)이 찬(撰)하고 공준(公準)이 글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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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성이씨(月城李氏) : 경주의 옛 이름이 월성(月城)이므로 경주이씨(慶州李氏)를 월성이씨(月城李氏)라고도 한다.
2) 세가(世家) : 대대로 나라의 중요한 자리에 있거나 큰 녹을 받았던 집안을 이르는 말. 세족(世族).
3) 당인(黨人) : 당파(黨派)를 이룬 사람.
4) 반장(返葬) : 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제가 살던 곳이나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지냄.



成均進士訥齋公墓誌銘(성균진사눌재공묘지명)
-弘準(홍준) 自製(자제)

噫悅生惡死。人之常情以死爲。諱口不敢言。惑之甚矣。有如漆園。㝕之忘骸楊王孫之裸葬。世無人矣。其知死生之說而。不爲懷者。有幾人哉。余嘗有詩曰。無生卽無死​。有生卽有死。生死兩悠悠。造物無終始。雖未及達觀。之徒所見如斯而。己凡人觀化之後。倩人碣辭。虛張逸筆以沒其實尤可笑也。此老平生懶拙。力農以給妻孥。七擧不中。優遊溪山以。是終焉。銘曰。
旣無才又無德。人而己。生無爵死無名。魂而已。憂樂空毁譽息。土而已。


*출처: 용재유고(慵齋遺稿) > 訥齋先生遺稿 > 自製碑文


●성균진사눌재공묘지명(成均進士訥齋公墓誌銘) 역문(譯文)
-홍준(弘準) 자제(自製)

아! 슬프다.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통 가지는 마음이다. 죽음을 싫어하되 입으로 감히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미혹한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일이다. 칠원(漆園, 장자가 몸이라는 곳에 있는 칠원에 옻 밭을 맡아보는 관리가 되었었다)의 늙은이 같은 이는 그 해골이 어디에 있는지도 확인하지 못하였으며 양왕손(楊王孫, 한나라 성고(城固) 사람. 황노(黃老)의 술을 배워서 죽을 때 아들에게 수의를 입히지 말고 나체로 매장하라고 유언하였다.)의 나매장(裸埋葬) 같은 경우는 세상에 그러한 사람이 없다. 죽고 사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에 생각지 않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내가 일찍이 시를 한 수 지었으니 가로되

생이 없으면 죽음도 없으리라. / 無生卽無死
생이 있으면 죽음이 따르리라. / 有生卽有死
살고 죽는 것이 다 아득하니 / 生死兩悠悠
조물은 처음도 끝이 없도다. / 造物無終始

내가 비록 달관(達觀)한 사람은 못되나 보는 바가 이와 같을 따름이다. 평범한 사람이 죽고 난 뒤에 묘갈(墓碣)의 내용을 남에게 청하여 붓을 들어 허장성세(虛張聲勢)하여 사실을 바꾸면 더욱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이 늙은이가 천성이 게을러서 농사하여 처자를 먹여 살릴 뿐이고 일곱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다 낙방하였으니 시내와 산에 마음껏 놀다가 이로써 마칠 것이다. 명에 이르되
이제 재주도 없고 또 덕도 없으니 그저 평범한 사람일 따름이요. 살아서 관작(官爵)이 없고 죽어서 이름이 없으니 그저 한 넋일 따름이다. 기쁨과 근심이 훼예(毁譽, 비방과 칭찬)가 그쳤으니 그저 한 줌의 흙이 될 따름이다.


●진사(進士) 이홍준(李弘準)의 묘

개단부곡(皆丹部曲) 운봉산(雲峯山)에 있다. 스스로 갈명을 지어 이르기를 다음과 같이 했다. “아!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함은 인간의 상정(常情)이라, 죽음을 꺼려 입으로 감히 말하지 못함 또한 미혹됨이 심하다. 저 장자(莊子)가 형해를 잊는다는 것과 왕양손(王楊孫)이 벌거벗은 몸으로 장사를 지낸다는 말과 같은 것은 지금 세상엔 다시없구나. 그는 생사(生死)를 잘 알면서도 이를 마음속에 두지 않는 자라 하겠다. 이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 일찍이 시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생(生)이 없으면 곧 사(死)도 없고
생이 있으면 곧 사가 있게 되나니
생과 사는 모두 덧없는 것이요
조물(造物)도 끝과 시작이 없는 것을

비록 달관(達觀)에 이르지 못한 무리라 하더라도, 본 바가 이와 같을 뿐이다. 대개 사람이 관화(觀化)한 뒤에 자손 된 자가 남에게 갈사(碣辭)를 청하여 헛된 이야기를 늘어놓고 붓을 제멋대로 놀리어 그 실상을 없게 만드니 더욱 가소롭구나, 이 늙은이는 평생토록 게으르고 졸렬한 것으로 자임(自任)하여 항상 농사에 힘씀으로써 처자식을 먹여 살렸고 일곱 번이나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했지만 계산(溪山)에서 우유(優游)*)하면서 평생을 마쳤다. 이에 명(銘)하여 말하노라,
‘이미 재주도 없고 또 덕도 없으니 사람일 뿐이요, 살아서 작록도 없고 죽어서 명성도 없으니 혼일 뿐이며, 근심과 즐거움이 없어지고 헐뜯음과 칭찬이 사라졌으니 흙일 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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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유(優游): 1.유유자적하다 2.우물쭈물하다 3.망설이다


*영가지(永嘉誌)


○이홍준이 쓴 자신의 비문(碑文).
○사람이 죽은 뒤에 허세를 부려 그 실제를 고쳐서 비문을 쓰니 우스운 일이라고 하며‚ 자신은 스스로 비문을 작성하되 재주도 덕(德)도 관직도 없으며 죽어서 드러날 혼(魂)도 없는 사람이라고 적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