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양평공◇이양생

보물 제1380호 신경행 청난공신교서 및 관련문적 (辛景行 淸難功臣敎書 및 關聯文籍)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5. 7. 12:40

보물 제1380호 신경행 청난공신교서 및 관련문적 (辛景行 淸難功臣敎書 및 關聯文籍)


서지
종목: 보물 제1380호
명칭: 신경행 청난공신교서 및 관련문적(辛景行 淸難功臣敎書 및 關聯文籍)
시대: 조선 선조 37년(1604)~조선 후기
수량: 일괄(1축,4건,4책)
분류: 국왕문서/교령류
지정일: 2003.08.21
소유자: 영산신씨충익공파종중
소재지: 충북 괴산군
문화재형태: 권자장

해제
신경행(辛景行, 1559∼1623)과 관련하여 보물로 지정된 유물은 모두 8종 9점이다. 이 중 신경행과 직접 관련이 있는 유물은 공신교서(功臣敎書)를 비롯하여 유서(諭書), 시호서경(諡號署經), 증시교지(贈諡敎旨), 시장(諡狀) 등 5종 6점이며 그의 후손들과 관련이 있는 유물은 청난원종공신록권(淸難原從功臣錄券)과 이십공신회맹록(二十功臣會盟錄) 및 이십일공신회맹록(二十一功臣會盟錄) 등 3종 3건이다.
신경행은 충청도 청안현(淸安縣) 출신으로 선조 6년(1573)에 진사(進士)에 합격한 후 같은 왕 10년(1577)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선조 29년(1596) 7월에 이몽학(李夢鶴)이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난을 일으키자 순찰사 종사관이었던 신경행은 난을 평정하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그래서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책봉되고 후에 영성군(靈城君)으로 봉해졌다. 사후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증직되었고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번역 해제 】
(1축)
이 문서는 조선 선조 29년(1596)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을 토평(討平)하는 데 공을 세운 공신들에게 서훈(敍勳)과 상사(賞賜)를 시행하면서 3등 공신 신경행(辛景行)에게 내린 교서(敎書)이다.

상사 시행은 시점은 선조 37년(1604) 6월이며, 교서 작성 일자는 만력(萬曆) 32년, 즉 선조 37년(1604) 10월이다. 이 공신의 훈호(勳號)는 통칭 청난공신(淸難功臣)인데, 1등은 분충출기합모적의청난공신(奮忠出氣合謀迪毅淸難功臣), 2등은 분충출기적의 청난공신(奮忠出氣迪毅淸難功臣), 3등은 분충출기청공신(奮忠出氣淸難功臣)으로 구분하였으며, 신경행은 3등 공신으로서 분충출기청난공신에 서훈되었다. (작성자 : 김능하)


[ 번역 해제 ]

『신경행청난공신교서(辛景行淸難功臣敎書) 및 관련문적(關聯文籍)』

1. 개관

이 문적은 충청북도 괴산군 영산신씨(靈山辛氏) 충익공파(忠翼公派) 종중에 전해온 것으로 조선 선조 때 문신 신경행(辛景行, 1559∼1623)의 공신교서(功臣敎書)를 비롯하여 유서(諭書), 시호서경(諡號署經), 증시교지(贈諡敎旨), 시장(諡狀) 등 5종 6점과 신경행의 아들 신면(辛勉)의 청난원종공신록권(淸難原從功臣錄券)과 후손의 이십공신회맹록(二十功臣會盟錄) 및 이십일공신회맹록(二十一功臣會盟錄) 등 3종 3건이다. 이는 모두 보물 제1380호로 지정되었고,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신경행은 충청도 청안현(淸安縣) 출신으로 선조 6년(1573)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1577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산 군수, 충청도병마절도사 등의 벼슬을 하였다. 선조 29년(1596) 7월에 이몽학(李夢鶴)이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난을 일으키자 순찰사 종사관으로서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청난공신(淸難功臣) 3등에 책봉되고, 뒤에 영성군(靈城君)으로 봉해졌다. 사후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증직되었고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 서지

1) 청난공신교서(淸難功臣敎書) 1축
상하단변(上下單邊), 난고(欄高) 35.7cm, 1행(行) 15자(字), 37.0cm×291.2cm (絹本 35.7×200.8cm)
상하변(上下邊)에 주연(朱緣)이 있고, 59행, 15~17자 묵서(墨書). 발급연월일 위에 ‘시명지보(施命之寶)’ 날인. 처음과 끝에 감색(紺色) 비단을 덧대어 보강.

2) 충청도병마절도사유서(忠清道兵馬節度使諭書) 1건
상하단변(上下單邊), 난고(欄高) 42.9cm, 1행(行) 9자(字); 46.5cm×128.0cm

3) 사헌부 시호서경(諡號署經) 1건
행자수부정(行字數不定); 57.9cm×82.7cm

4) 사간원 시호서경(諡號署經) 1건
행자수부정(行字數不定); 58.2cm×84.3cm

5) 증시교지(贈諡敎旨) 1건
행자수부정(行字數不定); 58.6cm×94.9cm

6) 조은신공시장(釣隱辛公諡狀) 1책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32.7cm×25.6cm, 반엽(半葉) 10행(行) 18자(字), 주쌍행(注雙行); 41.7cm×31.7cm

7) 청난원종공신녹권(淸難原從功臣錄券) 1책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7.1cm×17.5cm, 유계(有界), 반엽(半葉) 10행(行) 19자(字), 상하내향삼엽화문어미(上下內向三葉花紋魚尾); 34.2cm×21.2cm

8) 이십공신회맹록(二十功臣會盟錄) 1책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5.0cm×17.1cm, 유계(有界), 반엽(半葉) 10행(行) 18자(字), 상하내향삼엽화문어미(上下內向三葉花紋魚尾); 34.0cm×21.7cm

9) 이십일공신회맹록(二十一功臣會盟錄) 1책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4.7cm×17.9cm, 유계(有界), 반엽(半葉) 10행(行) 18자(字),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34.0cm×21.5cm


3. 내용

1) 청난공신교서(淸難功臣敎書)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통정대부 행 장흥도호부사 신경행(辛景行)을 청난공신 3등에 책록하고 포상한 교서이다. 청난공신은 1596년(선조29) 7월에 이몽학이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난을 일으킨 것을 평정한 공신이다. 영의정 이항복(李恒福), 우의정 김명원(金命元) 등의 건의에 따라 1604년(선조37) 6월 25일 녹훈하였다. 공신호는 1등 洪可臣은 ‘奮忠出氣合謀迪義清難功臣’, 2등 박명현(朴名賢)과 최호(崔湖)는 ‘奮忠出氣迪義清難功臣’, 3등 신경행(辛景行)과 임득의(林得義)는 ‘奮忠出氣清難功臣’이다.
대략적인 내용은 난을 평정한 공을 치하하고, 초상화를 그려 후세에 길이 전하도록 하고 한 품계 올려주도록 한다. 그리고 반당(伴倘) 4인, 노비 7구(口), 구사(丘史) 2명를 지급하고 밭 60결(結), 은자(銀子) 5냥, 표리(表裏) 1단(段),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한다는 내용이다.

2) 충청도병마절도사유서(忠清道兵馬節度使諭書)
선조 41년(1608) 6월 16일에 신경행을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로 임명하면서 할 때 제1부(符)의 밀부(密符)를 내리면서 내린 유서(諭書)이다. 12행 9자로 썼고, 세 군데 ‘諭書之寶’가 찍혀 있다.
밀부란, 병란 등에 대비하여 유사시에 군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왕이 유수(留守), 관찰사(觀察使), 총융사(摠戎使), 수어사(守禦使), 통제사(統制使), 절도사(節度使), 방어사(防禦使) 등에게 주던 것이다. 모양은 둥글고 납작한 나무패 앞면에 ‘第一符’라 쓰고 뒷면에는 어압을 새겼는데 둘로 나누어 하나는 관리들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궁중에 보관하였다.

3) 사헌부 시호서경(諡號署經)
신경행의 시호를 ‘충익(忠翼)’으로 정하는 데 대하여 사헌부에서 동의한 문서이다. 1811년(순조11)에 발급되었다.

4) 사간원 시호서경(諡號署經)
신경행의 시호를 ‘충익(忠翼)’으로 정하는 데 대하여 사간원에서 동의한 문서이다. 1811년(순조11)에 발급되었다.

5) 증시교지(贈諡敎旨)
1812년(순조12) 1월에 신경행에게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내린 교지이다.

6) 조은신공시장(釣隱辛公諡狀)
신경행의 시장(諡狀) 외에, 시호를 받는 과정에 생성된 <시호 망(望)>, 시호를 청원서, 가장(家狀), 신경행을 추모하는 정자 율수당(聿修堂)의 기문과 위 교서와 유시를 필사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 <분충출기청난 공신 증 자헌대부 예조판서 행 병조참지 영성군 신공 시장(奮忠出氣淸難功臣贈資憲大夫禮曹判書行兵曹參知靈城君辛公諡狀)> : 병조 참판 김이영(金履永, 1755~1845)이 쓴 신경행의 시장이다.
- <시호(謚號) 망(望)> : 신경행이 시호를 받을 때 의망 단자이다. 충익(忠翼), 정민(貞敏), 숙정(肅靖) 세 가지를 올려 ‘충익’으로 낙점을 받았다.
- <청난공신 증 예조판서 영성군에 대하여 시호를 내려주기를 청하는 상언(淸難功臣贈禮曹判書靈城君請謚上言)> : 신경행에게 시호를 내려달라는 청원서와 비답 내용이다. 충청도(忠淸道) 청안(淸安)의 유학(幼學) 신 윤석리(尹錫履) 등의 이름으로 올렸고 참봉(參奉) 홍준모(洪俊謨)가 지었다. 1804년(순조4) 8월 청원하여 11월에 비답을 받았다.
- <분충출기청난 공신 증 자헌대부 예조판서 행 병조참지 영성군 조은 신공 가장(奮忠出氣淸難功臣贈資憲大夫禮曹判書行兵曹參知靈城君號釣隱辛公家狀)> : 신경행의 가문에서 지은 전기로 1770년(영조 46) 3월에 후손 신택종(辛宅宗)이 지은 것이다.
- <율수당기(聿修堂記)> : 신경행의 후손이 그를 추모하며 지은 정자이다. 청안현(淸安縣) 칠보산(七寳山) 아래 군방동(羣芳洞)에 신경행이 은둔하던 별장이 있었는데, 7세손 신택종(辛宅宗)이 옛날 집을 철거하고 가까운 곳으로 옮겨 지으면서, 옛 사당에 그대로 유상을 봉안하고 그 앞에 한 채의 당을 지은 것이다. 명칭은《시경》의 ‘네 선조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 덕을 닦아야 하리라.[無念爾祖 聿修厥徳]’라고 한 데서 따온 것이다. 1774년(영조 50) 7월에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의 증손인 권진응(權震應)이 명명하고 기문을 지었다.
- <분충출기 청난공신 통정대부 행 장흥 도호부사 신경행에게 내린 교서(教奮忠出氣淸難功臣通政大夫行長興都護府使辛景行書) : 앞의 공신 교서를 전사한 것이다.
- <수 충청도병마절도사 신경행에게 유시함[諭守忠清道兵馬節度使辛景行]> : 앞의 유서를 전사한 것이다.
- <한산 군수 때 상소[韓山郡守時上䟽]>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신경행이 한산 군수로 있으면서 올린 상소문을 전사한 것이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신경행이 1592년(선조 25) 9월 10일 한산 군수에 제수되었다. 신경행의 문집 《조은집(釣隱集)》 권2에는 <한산군수를 사직하는 상소[辭韓山郡守疏]>로 되어 있다. 내용 중에 “신이 지금에 한산 군수에서 체직되었으니 의리상 군사를 정비하여 전하께서 계신 곳으로 달려가야 마땅합니다.[臣今遞韓山 義當整兵勤王]”라고 한 것으로 볼 때 체직된 뒤에 올린 것으로 보이는데, 이 문서의 제목과 다른 것은 어떤 이유인지 미상이다.

7) 청난원종공신녹권(淸難原從功臣錄券)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605년(선조 38) 4월 16일에 공신도감에서 주부(主簿) 신면(辛勉)에게 내린 공신 녹권이다. 신면은 신경행의 장자이다. 청난원종공신은 정공신(正功臣) 책봉 1년 뒤에 정공신에 들지 못한 공로자 995을 책봉하였으며 신면은 3등공신에 들었다. 녹권 첫머리에 수급자의 신분과 성명을 기재하였고, 다음에 1605년(선조 38) 4월 16일 우승지 신 유몽인(柳夢寅)이 전지(傳㫖)를 받들었다는 내용을 적었는데, 이는 선조실록 기사와 일치한다. 다음에 책록 사유를 적고, 3등으로 구분하여 공신 명단을 적고, 말미에 공신으로서의 특전을 적었다.
뒤에 별장으로 공신도감(功臣都監)의 유사 명단이 있다.

8) 이십공신회맹록(二十功臣會盟錄)
남인(南人)이 대거 실각하여 정권에서 물러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에 공을 세운 보사공신(保社功臣)이 복훈되어 추록한 것을 계기로 1680년(숙종6) 8월 30일 역대의 개국(開國)·정사(定社)·좌명(佐命)·정난(靖難)·좌익(佐翼)·적개(敵愾)·익대(翊戴)·좌리(佐理)·정국(靖國)·광국(光國)·평난(平難)·호성( 扈聖)·선무(宣武)·청난(淸難)·정사(靖社)·진무(振武)·소무(昭武)·영사(寧社)·영국(寧國)·보사(保社) 공신 및 그 적장자들이 모여서 회맹제를 행하고 참여한 사람들을 수록한 명단이다.
앞에 회맹문(會盟文)이 있고, 뒤에 명단이 있는데, 그 중에 “청난 공신(淸難功臣) 신경행(辛景行)의 적장손 학생 신 신득중(辛得中)”이 있어 신경행의 후손이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뒤에 <공훈을 회복할 때 종묘 제사의 축문[復勲時告宗廟祭祝文]>, <중외의 대소 신료와 기로와 군민과 한량 등에게 내린 교서[教中外大小臣僚耆老軍民閑良人等書]>, <복훈도감 계하 별단[復勲都監啓下別單]> 등 부속 문서가 첨부되어 있다.

9) 이십일공신회맹록(二十一功臣會盟錄)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의 녹훈을 계기로 영조 4년(1728) 7월 18일에 개국공신 이하 각 공신의 적장손들이 모여서 회맹제를 행하고 그 참여자를 수록한 명단이다. 이 회맹록에는 신경행의 6세손인 신광우(辛光禹)가 참여하여 기록되어 있다.

4. 자료의 가치

공신녹권은 그 수가 제한되어 있는 데다 완전하게 보존된 것도 많지 않다. 특히 이처럼 정공신 녹권과 아들의 원종공신 녹권 및 후손들의 회맹록이 빠짐없이 보존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로써 청난공신의 책록 과정과 포상 규정, 그 영향이 후손에게 이어지는 사례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13쪽>
扈 聖功臣(辛大容)繼嫡長孫嘉善大夫
(寧陽君)【臣】(辛裕)。
靖難功臣(奉石柱)嫡長孫嘉善大夫、行龍
驤衛副護軍【臣】(奉鶴周)。
敵愾功臣(李陽生)嫡長孫嘉善大夫、行龍
驤衛副護軍【臣】(李橚)。

靖社功臣(李厚源)嫡長孫折衝將軍、行
龍驤衛副司直【臣】(李顯禄)。
靖社功臣(申景裕)嫡長孫通政大夫、行
(礪山)都護府使【臣】(申徳夏)。

<14쪽>
靖 社功臣(朴惟明)嫡長孫通政大夫、前
行(河東)都護府使【臣】(朴道常)。
振武功臣(南以興)嫡長孫折衝將軍、守(京
畿)水軍防禦使、兼(永宗鎭)僉節制使【臣】(南益華)。
靖難功臣(權蹲)嫡長孫折衝將軍、前行僉
知中樞府事【臣】(權㝢)。
佐理功臣(李石亨)嫡長孫折衝將軍、僉知
中樞府事【臣】(李莘老)。
宣武功臣(金時敏)嫡長孫折衝將軍、僉知


국역

<13쪽>
호성 공신(扈聖功臣) 신대용(辛大容)의 계적장손인 가선대부(嘉善大夫) 영양군(寧陽君) 신 신유(辛裕).
정난 공신(靖難功臣) 봉석주(奉石柱)의 적장손인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신 봉학주(奉鶴周).
적개 공신(敵愾功臣) 이양생(李陽生)의 적장손인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신 이숙(李橚).
정사 공신(靖社功臣) 이후원(李厚源)의 적장손인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신 이현록(李顯禄).
정사 공신(靖社功臣) 신경유(申景裕)의 적장손인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여산도호부사(行礪山都護府使) 신 신덕하(申徳夏).

<14쪽>
정사 공신(靖社功臣) 박유명(朴惟明)의 적장손인 통정대부(通政大夫) 전 행 하동도호부사(前行河東都護府使) 신 박도상(朴道常).
진무 공신(振武功臣) 남이흥(南以興)의 적장손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수 경기수군방어사(守京畿水軍防禦使) 겸 영종진첨절제사(兼永宗鎭僉節制使) 신 남익화(南益華).
정난 공신(靖難功臣) 권준(權蹲)의 적장손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 행 첨지중추부사(前行僉知中樞府事) 신 권우(權㝢).
좌리 공신(佐理功臣) 이석형(李石亨)의 적장손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신 이신로(李莘老).
선무 공신(宣武功臣) 김시민(金時敏)의 적장손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mem/selectTextDetail.do?s_code1=00&s_code2=&s_code3=00&query=%EF%BF%BD%CC%BE%EF%BF%BD%EF%BF%BD&query2=&s_mnm=&s_kdcd=12&s_asno=13800000&s_cnum=0009&s_ctcd=00&s_dcd=00&s_pcd=00&s_page=13&s_hgsv=1&s_from_asno=&s_to_asno=&searchGubun=&searchCond=&searchPage=13&pageIndex=1&searchPageSize=5&searchDisp=1&listGubun=text&pageNo=5_3_6_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