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유물/봉화지역◇유적

백록상향축문(柏麓常享祝文), 백록상량문(柏麓上樑文)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1. 20. 19:17

柏麓常享祝文

天分之高。筆翰之逸。道消名流。遺芳益烈。


柏麓上樑文

慵齋李先生。薄雲豪氣。瑞世奇姿。早歲得師而提撕。三絶餘事。畢竟齊名於李,杜。一死猶光。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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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유고(慵齋遺稿, 附 訥齋遺稿)는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 눌재(訥齋) 이홍준(李弘準)의 文集이다.


이종준(李宗準)


조선 전기 의성 현령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균(仲勻), 호는 용재(慵齋)·용헌(慵軒)·부휴자(浮休子)·상우당(尙友堂)·태정일씨(太庭逸氏)·장육거사(藏六居士). 이만실(李蔓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大司憲) 이승직(李繩直)이고, 아버지는 생원 이시민(李時敏)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 權氏)로 권계경(權啓經)의 딸이다. 부인은 안동 권씨권탁의 딸이다.

이종준(李宗準)[1458~1499]은 젊어서 우뚝한 기개가 있고 시문은 청건(淸建)하였으며, 서화(書畵)에 능통했다고 전해진다. 일찍이 사림파의 종장(宗匠)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77년(성종 8)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으며, 1485년 문과 알성시(謁聖試)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 1487년 일본 사신의 호송관으로 차출되었는데, 이때 동래부에서 일본 사신이 그의 서화를 얻고 보물을 갖게 되었다며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1493년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이 되고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의성 현령(義城 縣令),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 의정부 사인(議政府 舍人)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사림파들을 비호하고, 또한 스승인 김종직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반대하며, 유자광(柳子光)의 극형을 주장하다 오히려 함경도 부령(富寧)으로 유배되었다. 유배 도중 단천(端川) 마곡역에 이사중(李師中)의 시를 써서 붙였는데, 그 시 내용 가운데 연산군에 대해 원망하는 내용이 있다 하여 다시 서울로 압송되고, 이듬해 장살 당하였다.

이종준이 의성 현령으로 부임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494년으로 추정된다. 현령 재직 시 두드러진 업적은 의성 향교(義城 鄕校)를 현재의 위치로 이건한 것이다. 산세를 등지고 있고 또한 앞산 기슭이 가로 놓여 시계가 좋지 않아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모두들 시야가 환하게 트여 감탄했다고 한다. 또한 공해(公廨)를 새롭게 고치고, 거기에다가 손수 매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 東國輿地 勝覽)』에는 그가 객관(客館) 남쪽에 죽루(竹樓)를 세웠다고 한다. 또한 현령 재임 시절 여러 사람과 더불어 「경상도 지도(慶尙道 地圖)」를 제작했다고 한다.

유고로 『용재유고(慵齋遺稿)』가 전해지고 있으며, 『신선태을자금단(神仙太乙紫金丹)』이라는 의서도 있다. 시, 서, 화에 능했다고 하는데, 장식화풍으로 그려진 전칭작품(傳稱作品) 「송학도(松鶴圖)」[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 1점이 남아 있다.

묘는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있었다고 한다.

1648년(인조 26) 안동의 유림들이 사당을 세웠고, 1689년(숙종 15)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으로 증직(贈職)되었다.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경광 서원(鏡光書院)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의성군 가음면 장리에 경의재(景義齋)가 건립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uiseong/toc/GC05200869
http://aks.ai/GC05200869



이홍준(李弘準)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유생.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군식(君式), 호는 눌재(訥齋). 할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이승직(李繩直), 아버지는 이시민(李時敏),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현감을 지낸 권계경(權啓經)의 딸이다. 형이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이다.

이홍준은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났으며, 1486년(성종 17) 진사시에 합격했다. 연산군의 정사가 위태로움을 보고 지은 시에서 “삶이 없으면 죽음도 없는데, 삶이 있으니 죽음도 있는 게지. 생사는 모두 아득한데, 조물주는 시작과 끝이 없구나.”라고 읊었다. 그 뒤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형 이종준이 참변을 당하자 세상사에 뜻을 버리고 가족을 이끌고 안동부 내성현(奈城縣, 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일대)으로 내려와 자취를 숨겼다.

향리에서 가례(家禮)를 준수하고 남전여씨(藍田呂氏)의 유규(遺規)를 바탕으로 내성동약(奈城洞約)를 행하면서 후진을 깨우쳐 내성현의 기풍을 크게 바꾸었다. 내성동약의 좌목(座目)에는 서로 준수할 것을 맹세한 사람들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어서 당시 내성현을 주도하고 있던 양반 사족들의 향안으로 볼 수도 있다. 이홍준은 은덕(隱德)으로 문장을 만들어 질박함을 감추고 있는 데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술에 취한 듯 몽롱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고 했다.

문집 『눌재선생유고(訥齋先生遺稿)』가 『용눌재양선생유고(慵訥齋兩先生遺稿)』에 수록되어 전한다.

묘소는 내성현(奈城縣) 북쪽 문수산(文殊山) 아래 은봉(銀峯) 동쪽 서향의 언덕에 있다.

김한동(金翰東)이 묘갈음기(墓碣陰記)를, 김형모(金瀅模)가 행장을 지었다. 향리의 사림들이 형 이종준과 함께 백록리사(柏麓里社)에 배향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1476
http://aks.ai/GC024014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