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문집/용재유고이종준

[慵齋遺稿] 문집해설 (문집개요, 저자소개, 내용개요)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6. 16:19

[용재유고(慵齋遺稿)] 문집해설


문집개요

문집명

용재유고 (慵齋遺稿)(15-16c)

간략서지

奎 4282慵齋 李宗準의 문집. 1책.

간략해제

1824년(순조 24)에 이종준(李宗準)의 후손 창욱(昌郁)이 편집하고 권사협(權思浹)과 이순빈(李淳賓)의 교정을 거쳐 간행한 문집이다. ≪용재유고≫에 이어서 이종준의 아우 이홍준(李弘準)의 ≪눌재유고(訥齋遺稿)≫가 함께 수록되어 있어 실제로는 두 사람의 문집이다. <무오당적(戊午黨籍)>‚ <사화수말(史禍首末)>등 무오사화에 대한 글들이 실려 있으며‚ ≪눌재유고≫에는 당시 동약(洞約)[향약(鄕約)]의 내용을 알 수 있는 <동약서(洞約書)>가 수록되어 있다.


저자소개

편저자

저자개요 · 내용

이종준
(李宗準)

○?-1499 (연산군5) 字: 중균(仲勻)‚ 號: 용재(慵齋)·용헌(慵軒)·부휴자(浮休子)·상우당(尙友堂)·태정일민(太庭逸民)·장육거사(藏六居士)‚ 本貫: 월성(月城)‚ 父: 시민(時敏)‚ 母: 영가 권씨(永嘉 權氏).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문인으로 1485년(성종 10)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고‚ 의성현령으로 있으면서 <경상도지도>를 만들었다. 1493년(성종 24)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글을 잘 짓는다고 하여 일본호송관‚ 북평사(北評事) 등에 임명되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때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문인이라고 하여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을 떠났는데‚ 단천군 마곡역을 지나다가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의 시를 써 놓았다. 시의 내용이 바른말을 하다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 도중에 죽었다. 부제학으로 추증되었으며‚ 안동의 경광서원(鏡光書院)에 제향되었다. 시서화(詩書畵)에 능하였으며 특히 매화와 대나무를 잘 그렸다고 한다.

이홍준
(李弘準)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 자(字): 군식(君式)‚ 호(號): 눌재(訥齋).

이종준의 동생이며 연산군 때의 은사(隱士). 진사(進士)로서 저술을 남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함.


내용개요

내용제목

齋遺稿 내용개요

청구기호

奎 4282


권수: 권제목

제목 없음.

1824. 김희주(金熙周)(정조때의 문신)가 지음. 이종준 형제의 사우(師友)관계와 본 문집의 간행경위를 기록하였으며‚ 정계에 나설 뜻을 버리고 후진양성에 힘써 그 문하에 심성(心性)의 근본과 문채를 함께 갖춘 문학지사(文學之士)가 많이 나왔다고 함.

용재선생세보도(慵齋先生世譜圖) (세보世譜1)

시조(始祖) 알평(謁平)에서 32世까지의 족보가 실려 있다. 號·生年·관직·배우자 등의 개인기록은 21世에서 28世까지만 기록되어 있고 나머지 세대는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이종준 형제는 21世이다.

시(詩)

제삼소도(題三笑圖)‚ 차운(次韻)‚ 제우인선(題友人扇)‚ 여권향지차계운영설배율(與權嚮之次季雲咏雪排律)‚ 적강계영소무굴(謫江界詠蘇武窟)‚ 송추강남효온유내성군(送秋江南孝溫遊柰城郡)‚ 화수헌등루운(和睡軒登樓韻)‚ 우(又)‚ 차수헌(次睡軒)‚ 제침류정(題枕流亭)

사대직(辭臺職) (2)

언관직(言官職)을 사양하는 소(疏). 사헌부의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본래 재주가 부족하여 그 직책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지 석달이 넘어 억지로 일어나려고 해도 다시 쓰러져 버리니 관직제수의 명령을 거두어 달라고 하였다.

금군위묘갈(琴軍威墓碣) (3)

1497. 군위현감(軍威縣監) 금계(琴啓)의 묘갈(墓碣). 가족관계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던 일을 적었다. 금계는 이종준의 매부이며‚ 어린 딸만 데리고 사는 누이의 부탁으로 씀.

유산락부사발(遺山樂府詩跋) (4)

1492. 유산(遺山)이 지은 낙부(樂府)를 진주목사에게 부탁하여 문집으로 간행할 때 쓴 발문.

전적벽부서첩발(前赤壁賦書帖跋) (6)

1497. 명나라 연도(燕都)에서 구한 서첩을 돌에 새기면서 쓴 발문. 백기(伯幾)와 더불어 글씨를 배워 힘을 다하였으나 그에게만은 미치지 못하였는데‚ 세상에서는 자신이 글씨를 잘 쓴다고 하니 이것은 글씨를 가지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며‚ 이제 서첩을 돌에 새겨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함께 받들고자 한다고 함.



권말 권제목: 附錄

시(詩)

화용재갱점필재근체운(和慵齋賡佔畢齋近體韻)(권오복權五福)‚ 송이중백지임의성사수(送李仲白之任義城四首)‚ 기용재거사(寄慵齋居士)(정희량鄭希良)‚ 제용재화(題慵齋畫)(최숙생崔叔生)

모오당적(戊午黨籍) (7)

무오사화의 전말과 서화(書畵)에 능했던 이종준의 행적‚ 권경유(權景裕)(字는 군요君饒‚ ?-1498)와의 기이한 만남 등에 대해 수록하였으며 이종준이 1487년(성종 18)에 평안평사(平安評事)가 되어 갈 때 ‘기자전(箕子殿)’이란 글귀를 가지고 4句의 시를 지어 놓았는데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 관서지방을 유람하다가 이것을 보고 그 詩才에 감탄하였다는 ≪추강냉화(秋江冷話)≫의 글을 실어 놓았다. ≪추강냉화≫는 남효온이 시문(詩文)과 일사(逸事)에 대해 전해 들은 이야기와 단편적인 체험을 적어 놓은 글이다.

서중균화(書仲勻畵) (9)

이종준(李宗準)의 그림과 강사호(姜士浩)의 시가 적힌 병풍에 대해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쓴 글. 강사호가 이종준을 매화와 대나무에 비유하여 시를 짓자 이종준이 매화·대나무·눈·달·바람·연기 등을 소재로 8폭의 그림을 그려 강사호에게 보여줄 것을 김일손에게 부탁하였는데‚ 강사호는 그림을 보자 예정되어 있던 여행을 취소하고 그 자리에서 8폭의 병풍을 만들었으며 앞머리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적어 넣으니 그림에 아주 알맞는 시였다. 병풍 앞에 앉아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이종준의 마음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듯 앞에 이종준이 곁에 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함께 있지 못함을 아쉬워 한다고 적었다.

용재이선생묘석음기(慵齋李先生墓石陰記) (10)

1671. 홍여하(洪汝河)(1621-1678)가 지은 음기(陰記). 시서화(詩書畵)에 대한 재주와 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1467-1498)과 매우 친하게 지낸 일‚ 김일손·권오복의 史事(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국문당할 때 자신의 선조 문광공(文匡公) 홍귀달(洪貴達)(1438-1504)이 구하려 했다는 일을 적었으며‚ 풍기군수(豊基郡守) 김계광(金啓光)이 묘도墓道)를 만들면서 명(銘)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여 쓴다고 함.

묘갈명서(墓碣銘序) (11)

1689. 이현일(李玄逸)(1627-1704)이 쓴 이종준의 묘갈명(墓碣銘).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나 중국인들도 칭찬하였다는 일화를 적고 있으며 지금 부제학(副提學)에 증직(贈職)되어 석표(石表)를 세우면서 쓴다고 함.

행장(行狀) (11)

1806. 유규(柳)(1730-1806)가 지은 이종준의 행장. 이종준의 8대손(八代孫) 학경(學慶)이 이홍준이 초(草)한 것을 참고하여 쓴 것이 있으나 완편(完編)을 이루지 못하여 류규가 다시 보충하고 윤색하여 썼다. 아버지 시민(時敏)이 김종서(金宗瑞)(1390-1453)의 화를 입고 금계(金溪)에 내려와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던 일과 어려서부터 문장과 서예에 재주가 출중하여 부친이 그 재승(才勝)을 염려하고 경계하였다는 것‚ 관직생활을 하면서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바른 말을 하여 조정에 이름을 떨쳤던 일‚ 뒷날 국문을 받을 때 땅에 손으로 글씨를 쓰며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며 죽는 날도 평소와 다름 없는 안색이었다는 것 등을 적어 놓았다.

사화수말(史禍首末) (18)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발단 배경과 이종준에게 강계(江界)유배 처분이 내릴 때까지의 경과를 적음.

경광서원상량문(鏡光書院上樑文) (19)

신열도(申悅道)(1589-1647)가 지은 상량문(上樑文). 이종준이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을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으면서도 상서롭지 못한 세상을 만나 죽임 당한 일을 사림(士林)이 분격해한다고 적음.

봉안문(奉安文) (19)

김응조(金應祖)(1587-1667)가 지은 봉안문(奉安文). 이종준의 일생을 간략히 적어 놓았으며 그 재주와 추상(秋霜)같은 뜻을 잊지 못한다고 함.

상향축문(常享祝文) (19)

이종준을 제사지낼 때 쓴 축문(祝文). 이종준의 추상(秋霜)같은 뜻을 기림.

백록상향푹문(栢麓常享祝文) (19)

백록사(栢麓社)에서 이종준을 제사지낼 때 쓴 축문(祝文). 이종준의 재주를 기림.

개제시제문(改題時祭文) (19)

이보(李簠) (1629-1710)가 지은 제문(祭文). 이종준이 홍문관직에 증직되었을 때 씀.

조야회통략(朝野會通畧) (19)

무오사화때 이종준이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가다가 시(詩)를 지어 놓은 일을 조정에 보고한 이승건(李承健)(1452-1502)의 관작이 1516년(중종 11)에 추탈된 일과 단천마곡역(端川磨谷驛) 벽서사건‚ 1509년(중종 4)에 이종준의 적몰재산(籍沒財産)이 환수된 일 등을 적었다.

의성읍지(義城邑誌) (20)

이종준이 의성현감으로 있을 때 산세(山勢)와 서로 배치되어 있던 학교 자리를 옮기게 하여 보는 이들을 기쁘게 했던 일과 1648년(인조 26) 금계촌(金溪村)에 경광정사(鏡光精舍)를 지어 이종준 등을 제향한 일을 기록하였으며 유적(遺蹟)은 이종준의 후손 이규령(李奎齡)이 모아 가지고 갔다고 하였다.

기사인유생소추증시예조회계(己巳因儒生疏追贈時禮曹回啓) (21)

예조에서 이종준의 사우(祠宇)에 사액(賜額)을 요청하는 이유오(李兪吾) 등의 상소를 왕께 보고하면서 그 허락 여부를 물은 글.

백록상량문(栢麓上樑文) (21)

이종준의 삼절(三絶)은 이백(李白)·두보(杜甫)의 명성과 나란히 할 만하다고 칭송하였다. <용재선생세보도(慵齋先生世譜圖)>의 기록에 의하면 백록사(栢麓社)는 이종준 형제가 제향된 곳이다.

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 (21)

무슨 건물의 상량문인지는 알 수 없으며 도(道)를 강구했던 이종준을 칭송함.


눌재유고(訥齋遺稿) 내용개요

월성이씨가훈(月城李氏家訓) (1)

자기 집안의 내력을 기록한 글. 이홍준의 집안은 원래 도성에 살았는데 계유정난(癸酉靖難)(1453)때 자손들이 사방에 흩어지게 되었으며‚ 부친과 백부와 숙부가 일찍 돌아가시어 선대(先代) 6대조(六代祖)까지의 일만을 알 뿐이라 이를 부끄럽게 여겨 그동안 전해 들은 것만이라도 기록하여 본받을 만한 것은 길이 가훈(家訓)이 되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선조고가선대부대사헌부군가장(先祖考嘉善大夫大司憲府君家狀) (1)

할아버지 이승직(李繩直)(1378-1431)의 일생을 적은 가장(家狀). 세종 때 청백리(淸白吏)로 2품의 지위에 올랐으며 평소에 어디서나 희로(喜怒)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함. 또 양주의 목민관이 되었을 때는 그 처가 실행(失行)을 하였다고 하여 소박하려는 사람이 소장(訴狀)을 내자 그 부부를 한 감옥에 가두어 대화로 화해하게 하였으며‚ 경상도에 안찰사로 있을 때는 목면으로 만든 옷만을 입었고 대사헌에 임명되었을 때에는 등에 종기가 났는데도 힘써 일하다 돌아가시니 왕도 슬퍼하셨다고 함.

선부군가장(先府君家狀) (4)

1514. 아버지 이시민(李時敏)(1430-1473)의 일생을 적은 가장(家狀). 계유정난(癸酉靖難)때 금고(禁錮)처분을 받은 뒤 영가(永嘉) 금지촌(琴池村)에 내려와 살게 되었으며‚ 부모의 상사(喪事)를 치를 때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불씨(佛氏)에 귀의하여 재산을 탕진하였는데 자식들에게는 이를 본받지 말라고 하였다고 함. 또 서울에 있는 아들 종준에게 계서(戒書)를 써 보냈는데 그 내용은 학문에 힘쓰며 언행을 삼가하고 조정(朝廷)의 이해(利害)와 대신들의 흑백(黑白)·사람의 장단(長短)·벗의 잘못 등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함. 가장(家狀)에 이어 실린 부기(附記)에 의하면 이홍준은 이 계서(戒書)를 손수 목판에 써서 새긴 다음 자신이 사는 외영당(畏影堂) 벽에 걸어 두고 매일 보며 반성하고 자손들에게도 본받게 하였는데 불행히 후사(後嗣)가 끊어지니 사림(士林)들이 외영당의 목재를 가지고 리사(里社)의 강당을 지은 뒤에 그 곳에 이 계서(戒書)를 걸어두었다고 함.

중형장육당가장(仲兄莊六堂家狀) (7)

이종준의 일생을 적은 가장(家狀)으로서 이홍준이 씀.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났는데 이를 보고 부친이 공자께서 은행나무 아래서 학문을 강(講)하셨다는 고사에 따라 대청 앞에 은행나무를 심어 주며 훗날 성덕군자(盛德君子)와 함께 이 나무 아래서 강습할 것을 당부하였다는 일화와 관직생활을 하며 문명(文名)을 떨친 일 등이 적혀 있다.

묘지문(墓誌文) (12)

1505. 이홍준이 찬(撰)하고 이홍준(李公準)이 쓴 이종준의 묘지문(墓誌文).

자제비문(自製碑文) (12)

이홍준이 쓴 자신의 비문(碑文). 사람이 죽은 뒤에 허세를 부려 그 실제를 고쳐서 비문을 쓰니 우스운 일이라고 하며‚ 자신은 스스로 비문을 작성하되 재주도 덕(德)도 관직도 없으며 죽어서 드러날 혼(魂)도 없는 사람이라고 적었다.

통훈대부안락군수남공묘갈문(通訓大夫安樂郡守南公墓碣文) (12)

1513. 남의원(南義元)(1452-1511)의 묘갈문(墓碣文).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창주첨사(昌州僉使)와 삼수군수(三水郡守) 등을 지냈으며 성품이 강직하였다고 함. 집안 일도 잊고 나라 일만 하였는데 서북지방에 명을 받고 나갔다가 병이 나서 집에 돌아와 죽었다고 적고 있다.

동약서(洞約書) (13)

내지현(柰之縣)에서 동약(洞約)을 만들게 된 이유와 동약의 내용을 적은 글. 내지현은 본래 궁벽한 곳으로 인심이 완악(頑惡)한 것이 짐승과 같고 고기잡이 밖에 할 줄 모르는 곳으로 책을 끼고 있으면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고 효제(孝悌)하는 사람이 있으면 명예를 구하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부모의 장례도 멋대로 치르고 서로 속이며 이익만을 다투었는데 근래에 두세 분의 장로(長老)가 풍속이 아름답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나 습속이 이미 오래 되어 잘 고쳐지지 않으니 서로 권하고 힘쓸 일을 약속하되 따르지 않는 사람은 쫓아내어 본보기로 삼도록 하겠다는 동약의 취지를 밝혔다. 약속의 내용은 친족들과 화목하지 못하거나 전세(田稅) 등을 불법으로 포탈하는 사람‚ 공사(公事)를 함부로 하거나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정도에 따라 5등급의 벌을 정하였고‚ 질병·상사(喪事)·혼인(婚姻)·부화(付火)·경사(慶事) 등의 일이 일어나면 서로 돕는 법을 적어 놓았다.

백록상향축문(栢麓常享祝文) (14)

이홍준을 제사 지내며 쓴 축문(祝文). 뛰어난 행실로 마을 풍속을 변화시킨 일을 칭송하였다.

백록상량문(栢麓上樑文) (15)

이상언(李尙彦)이 쓴 백록사의 상량문. 이홍준의 효우(孝友)를 칭송하였다.

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 (15)

무슨 건물의 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인지는 알 수 없다. 이홍준 형제의 모습을 그리며 명문(名門)에서 명사(名士)가 나온다고 함. (김세은)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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