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용재공◆이종준

용재선생(慵齋先生)의 가계와 생년(生年)을 밝힘.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2. 12. 19:38

● 용재 선생(慵齋先生)의 가계와 생년(生年)을 밝힘.


『神仙太乙紫金丹(신선태을자금단』에 수록된 李宗準(이종준) 醫案(의안)에 대한 연구 논문에서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용재 선생(慵齋先生) 李宗準(이종준)의 생년(生年)을 밝힌 내용이 있어 필요한 부분을 근거로 제시하여 밝힌다.

神仙太乙紫金丹(신선태을자금단)의 저자인 李宗準(이종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다.

안병희의 해제에 간략한 전기가 부기되어 있을 뿐이고 세종대왕 기념사업회에서 펴낸 김문웅의 역주본에서도 특별한 내용이 없이 안병희의 전기를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를 검색한 결과 그에 대하여 좀더 상세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그 내용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배상지(배상지)
................................↓
................................^배씨(배씨. 후처) ┳ ^이승직(이승직) ┳ 이씨(이씨. 전처)
...........................................................↓......대사헌..........↓
..............^권탁(권탁)..........권씨(권씨) ┳ ^시민(시민)..........^①미민(미민)-^②명민(명민)
................↳-------------↴.................↓...................................................선공감부정
공준(공준)-홍준(홍준).......권씨(권씨) ┳ ^종준(종준)-숭준(숭준)
.......................................................↓
.......................................................^①덕장(덕장)-②덕연(덕연)

* ^ - 조선왕조실록에 기록

◆ 成宗 249卷, 22年(1491 辛亥 / 명 홍치(弘治) 4年) 1月 17日(甲午) 2번째 기사
간원의 서경 거부가 부당을 아뢴 성균관 전적 이종준의 상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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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館典籍李宗準上疏曰:
臣以草茅卑賤, 濫蒙聖恩, 乃於前月二十七日政, 叨受司憲府監察, 臣惶悚感激, 措身無地。
夫監察, 卽古之殿中御史, 持斧紏察之任, 職淸而選重。 所以除此職者, 必署經於司諫院,
回臺於本府然後, 乃受告身, 得齒班列, 小有瑕玷之人, 則駁之 其簡之審, 而地之尊如是,
固非如臣鄙賤者所宜授也。 然臣身無罪累, 內外祖先, 亦無釁咎, 而諫院猶不署經, 臣惶懼慙汗。 臣祖父繩直, 仕於世宗大王朝, 以淸謹著聞, 特授大司憲, 及其死也, 祖母裵氏, 携臣父,
歸居于安東, 更不來京者, 二十餘年矣。 不意祖父先妻之子命敏, 被誅於癸酉瑢之亂, 臣父時敏, 乃以異母弟, 各在南北, 不相往來。 以是不卽隨坐, 翌年甲戌, 復以無分於同、異母, 各居之間, 亦與緣坐, 定屬於禮安縣, 戊寅, 世祖大王原情恕罪, 特命臣父, 自願從便, 還于安東。 壬辰。
以仁粹王大妃七寸, 特蒙天恩, 乃得免放, 再覩天日之光。 其時, 臣生孩三月, 方在襁褓。
及其長壯, 仍赴試闈, 則有司以臣父未放之前, 故不許錄名。 以此低回跧伏, 辛勤田畝,
且讀且耕者, 已八九年矣。 逮臣父蒙宥之後, 臣亦尋蒙聖恩, 僥倖於丁酉監試, 叨竊於乙巳親試, 始免戴盆之困, 獲遂披雲之覩。 今諫院, 必以是之故, 議駁而不敢署經耳。 臣本以寒賤, 猥蒙聖明簡拔之恩, 齒列朝端, 河潤九里, 祿及偏母, 叨恩踰分。 豈敢復有希冀歟? 伏覩聖上, 包容舍垢, 視其賢否, 不係世類, 如鄭悰子眉壽, 宋玹壽子宋琚、姪子宋瑛, 皇甫仁外孫洪自阿、蔡碩卿,
柳誠源姪子桂芬, 趙藩母弟趙籬, 成三問孫壻柳輯等, 皆蒙拔擢, 或授監察、 掌令, 或授大司憲、承旨, 兼掌史局, 或至六曹郞官, 臨民治郡, 出入中外, 歷授淸要, 此與舜之罰不及嗣,
文王之罪人不孥, 同一揆轍。 臣身亦未嘗緣坐, 而又遭千一之幸, 獨累及於父異母兄之故而見駁, 臣竊痛憫。 伏望許從宋瑛等例, 均被天恩, 以雪門垢。
傳曰: “果其異母弟, 則當署經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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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249권, 22년(1491 신해 / 명 홍치(弘治) 4년) 1월 17일(갑오) 2번째 기사
간원의 서경 거부가 부당을 아뢴 성균관 전적 이종준의 상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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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이종준(李宗準)이 상소(上疏)하기를,
“신(臣)이 초야(草野)의 비천(卑賤)한 몸으로 지나치게 성은(聖恩)을 입어 지난달 27일 정사에서, 외람하게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었으니, 신은 황송(惶悚)하고 감격(感激)하여 몸 둘 바가 없었습니다.

무릇 감찰이란 곧 옛날 전중(殿中)의 어사(御史)가 부(斧- 옛날 형벌에 쓰이던 도끼) 를 가지고 규찰(糾察)하는 소임이라 청환(淸宦- 조선 시대에,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 시키던 규장각, 홍문관 따위의 벼슬)의 직임으로 신중하게 선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직책에 제수된 자는 반드시 사간원(司諫院)에서 *서경(署經)하고 본부(本府)에 회대(回臺- 감찰監察이 새로 나면 그의 이력履歷을 가지고 모든 감찰이 그 상관上官에게 그의 행공行公에 대한 가부可否를 묻는 일) 된 연후에 고신(告身- 직첩. 임명장)을 받고 반열(班列)에 끼이게 되는 것인데, 조금이라도 하점(瑕玷- 결점)이 있는 사람이면, 논박을 당하였으니, 그 분별함이 상세하고 지위의 존귀함이 이와 같은지라, 실로 신과 같은 비천한 자에게는 제수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신이 죄를 지은 것이 없고 내외(內外)의 조선(祖先)도 허물이 없는데 간원(諫院)에서는 아직도 서경을 하지 않고 있어 신은 황송(惶悚)하고 부끄러워 땀이 납니다.

신의 조부(祖父) 이승직(李繩直)은 세종조(世宗朝)에 벼슬하여, 청백 근신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서 특별히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으며, 죽음에 이르러서는 조모(祖母) 배씨(裵氏)가 신의 아비를 데리고 안동(安東)으로 돌아가 살고 다시 서울에 오지 않은 지가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뜻밖에 조부의 전처(前妻)의 아들 이명민(李命敏)이 계유년 이용(李瑢)의 난(亂)에 피주(被誅) 되고, 신의 아비 이시민(李時敏)은 이모제(異母弟) 이기는 하였으나 각각 남북(南北)에 있으면서 서로 왕래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 즉시 연좌(連坐)되지는 않았으나, 그 다음에 갑술년에 다시 동모(同母)· 이모(異母)거나, 각거(各居)의 구별없이 역시 함께 연좌(緣坐)되어 예안현(禮安縣)에 정속(定屬)되었다가 무인년에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실정을 살피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특별히 신의 아비에게 ‘자원(自願)하여 편리한 대로 따르라.’고 명하시어 안동으로 돌아갔습니다.

임진년에는 인수 왕대비(仁粹王大妃)의 칠촌(七寸)이라는 것으로써 특별히 천은(天恩)을 입어 드디어 방면(放免)을 얻게 되어, 다시 천일(天日)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신은 태어난 지 3개월의 어린아이로, 바야흐로 강보(襁褓) 속에 싸여 있었습니다.
장성함에 이르러 이내 과장[試闈시위]에 나아갔으나, 유사(有司)가 신의 아비가 아직 면방(免放)되기 전이라는 연유로 녹명(錄名)을 허락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실의(失意)에 빠져 밭두둑 사이에서 신고(辛苦)를 다하면서 글 일고 밭갈기를 거의 8, 9년이나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신의 아비가 용서를 입게 됨에 미쳐서, 신도 또한 바로 성은(聖恩)을 입게 되었고, 정유년 감시(監試)에서 요행(僥倖)을 얻었으며, 을사년 친시(親試)에 외람되게 입격되어 비로소 대분(戴盆)의 곤란함을 면하고, 드디어 피운(披雲)의 엿봄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 간원(諫院)에서 필시 이러한 연유를 가지고 논박할 일을 의논하며, 아직도 서경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이 본래 한미하고 비천한 자로 외람되게도 성명(聖明)의 간발(簡拔)해 주신 은혜를 입어 조정 말단에 반열(班列)함을 얻으니 하수[河]의 윤기가 9리(九里)나 뻗치고, 녹봉이 편모(偏母)에게 미치어, 이람한 은혜가 분수를 넘었습니다.
어찌 감히 다시 바랄 바가 있겠습니까?

엎드려 보건대, 성상(聖上)께서 모든 허물을 포용(包容)하시고 허물을 버리시어 그 현부(賢否)만을 보시고, 세속의 유(類)에 얽매이지 아니하시어, 저 정종(鄭悰)의 아들 정미수(鄭眉壽)와 송현수(宋玹壽)의 아들 송거(宋琚)와 그 조카 송영(宋瑛), 그리고 황보인(皇甫仁)의 외손(外孫) 홍자아(洪自阿)· 채석경(蔡碩卿)과, 유성원(柳誠源)의 조카 유계분(柳桂芬)과, 조번(趙藩)의 모제(母弟) 조이(趙蘺)와 성삼문(成三問)의 손자 사위[孫壻] 유집(柳輯) 등이 모두 발탁(拔擢)함을 입어, 혹은 감찰(監察)· 장령(掌令)에 제수되고 혹은 대사헌(大司憲)과 승지(承旨)에 제수되어, 사국(史局)을 겸하여 관장하며, 혹은 육조(六曹)의 낭관(郞官)에 이르러 백성에 임(臨)하는 관원이 되어 고을을 다스리는 등 중외(中外)에 출입(出入)하면서 청요(淸要- 청환과 요직)의 직책을 두루 경력하게 하시니, 이는 순(舜) 임금의 형벌이 후사[嗣]에게 미치지 않게 하심과 문왕(文王)이 죄인(罪人)을 처벌함에 당사자에게 국한하고 처자에게 미치지 않은 그것과 동일한 규철(揆轍)인 것입니다.

신은 자신이 또한 일찍이 연좌(緣坐)되지 않았고, 또 천(千)에 하나쯤 있는 행운(幸運)을 만났는데, 유독 그 누(累)가 아비의 이모형(異母兄)의 연고에 미쳐 논박(論駁)을 당하게 된다면, 신은 그윽이 통민(痛憫)할 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송영(宋瑛) 등의 예(例)에 따라 골고루 천은(天恩)을 입게 하시어 한 가문의 허물을 씻게 하여 주소서.”하니, 전교하기를,
“과연 그 이모제(異母弟)라면, 응당 서경(署經)할 것이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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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署經) : 임금이 관원(官員)을 서임(敍任)한 뒤에, 그 사람의 성명(姓名)· 문벌(門閥)· 이력(履歷)을 갖추어서 대간(臺諫)에게 그 가부(可否)를 구하던 일.

즉 임금이 새로 관리를 임명하면 이조(吏曹)나 병조(兵曹)에서 신임관의 내외 사조(內外四祖), 이력, 문벌과 아내의 사조(四祖)를 기록하여 대간에 회부하면, 대간은 이를 세밀히 심사하여 신임관의 본인에게나 내외 사조 등에 결점이 있으면 서명을 거부하였음. 50일 이내에 서경하지 않으면 관원은 취임할 수 없었음.

* 계유년 이용(李瑢)의 난(亂) : 계유정난(癸酉靖亂)을 말함.

계유정난은 조선조 6대 단종(端宗) 원년(1453) 계유년(癸酉年)에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반대파를 없앤 사건을 말하는데, 이때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은 피살되고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은 사사(賜死)되었음.

* 갑술년 : 1454 단종 2년.
* 무인년 : 1458 세조4년.
* 임진년 : 1472 성종 3년.
* 정유년 : 1477 성종8년.
* 을사년 : 1485 성종 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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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의 기사 중에서 李宗準(이종준)의 가계에 대해서 나타난 내용 중 특히 2번 기사에는 요즘의 공무원 임용 신원조회에 해당하는 署經(서경)을 司諫院(사간원)이 거부하는 사태에 대하여 스스로를 변호하는 상소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李宗準(이종준)의 선대 가계의 내력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李宗準(이종준)의 祖父(조부)는 세종 때 大司憲(대사헌)을 지낸 李繩直(이승직)이었는데 伯父(백부)인 李命敏(이명민)이 계유정란에 연루되어 誅殺(주살- 죄를 물어 죽임)되고 姨母弟(이모제)였던 李宗準(이종준)의 부친 李時敏(이시민)도 연좌되어 禮安縣(예안현)에 定屬(정속- 죄인을 종으로 삼아 관아에 배속함)되었다가 세조 4년 戊寅(무인. 1458)에 풀려나 안동으로 돌아갔고 성종3년 壬申(임신. 1472)에는 仁粹大妃(인수대비)의 七寸(칠촌)이라는 이유로 放免(방면)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왕조실록 내용에서 仁粹大妃(인수대비)와의 구체적인 인척관계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50일 이내에 署經(서경- 임금이 새 관원을 임명한 뒤에 그 성명, 문벌, 이력 따위를 써서 사헌부와 사간원의 臺諫대간에게 그 可否가부를 묻던 일)을 하지 않으면 관원으로 취임할 수 없었기 때문에 李宗準(이종준)으로서는 出仕(출사- 벼슬길에 나섬)의 초반부터 만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부친인 李時敏(이시민)이 放免(방면)을 얻을 때에 자신이 태어난 지 3개월의 어린아이였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생년이 정확하지 않다고 본 안병희의 기록은 부정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상소문의 내용 중에서 “戊寅, 世祖大王原情恕罪, 特命臣父, 自願從便, 還于安東。 壬辰。以仁粹王大妃七寸, 特蒙天恩, 乃得免放, 再覩天日之光。 其時, 臣生孩三月, 方在襁褓。

[무인년(1458)에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실정을 살피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특별히 신의 아비에게 ‘自願(자원)하여 편리한 대로 따르라.’고 명하시어 안동으로 돌아갔습니다. 임진년(1472)에는 仁粹王大妃(인수왕대비)의 칠촌(七寸)이라는 것으로써 특별히 天恩(천은)을 입어 드디어 放免(방면)을 얻게 되어, 다시 天日(천일- 하늘과 해)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신은 태어난 지 3개월의 어린아이로, 바야흐로 강보(襁褓) 속에 싸여 있었습니다.]

라고 하여 생년이 성종3년 임진(1472)년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 “逮臣父蒙宥之後, 臣亦尋蒙聖恩, 僥倖於丁酉監試, 叨竊於乙巳親試, 始免戴盆之困, 獲遂披雲之覩。[그러다가 신의 아비가 용서를 입게 됨에 미쳐서, 신도 또한 바로 聖恩(성은)을 입게 되었고, 정유년(1477) 監試(감시= 국자감 시험)에서 僥倖(요행)을 얻었으며, 을사년(1485) 親試(친시- 임금이 몸소 과장(科場)에 나와 시험 성적을 살피고 급제자를 정하던 일. 또는 그 시험)에 외람되게 입격되어 비로소 戴盆(대분- 대분망천(戴盆望天)의 준말로, 두 가지 일을 겸하기가 어렵다는 뜻)의 곤란함을 면하고, 드디어 披雲(피운- 피운견월(披雲見月)의 준말로, 구름을 헤치고 달을 본다는 뜻)의 엿봄을 얻게 되었습니다.]”이라고 한 것과 비교하면 겨우 5세에 불과한 나이에 監試(감시)에 합격하고 19세인 乙巳(을사. 1491)년에 親試(친시)에 합격한 것이 된다.

연령이 지나치게 어리다는 문제뿐 아니라 본인이 “及其長壯, 仍赴試闈, 則有司以臣父未放之前, 故不許錄名。以此低回跧伏, 辛勤田畝, 且讀且耕者, 已八九年矣。[장성함에 이르러 이내 과장(試闈시위)에 나아갔으나, 有司(유사- 단체의 사무를 맡아보는 직무)가 신의 아비가 아직 免放(면방)되기 전이라는 연유로 錄名(녹명- 이름을 적음. 이름을 올림)을 허락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리하여 失意(실의)에 빠져 밭두둑 사이에서 辛苦(신고- 어려운 일을 당하여 몹시 애씀. 또는 그런 고생)를 다하면서 글 일고 밭 갈기를 거의 8, 9년이나 하였습니다.]“ 라고 한 것과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李宗準(이종준)의 생년은 1472년 임진년이 아닌 부친인 李時敏(이시민)이 풀려나 안동으로 돌아간 1458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아야 하며 14세에 이전에 과거장에서 錄名(녹명)을 하지 못하여 8-9년을 실의에 빠져 살다가 1477년 정유년 19세에 監試(감시), 1485년 을사년 27세에 親試(친시)에 합격하여 1486년 병오 내자시 직장(內資寺直長)으로 관직이 시작되고 6년 후인 33세인 1491년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정6품)에 오른 것이다.

그러니까 생몰년은 1458(세조4년 무인) ~ 1499(연산군 5. 신유)이다.


*출처: 녹천 이이록
http://blog.daum.net/lrrock5050/1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