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용재공◆이종준

단천역 벽서사건과 무풍정 이총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1. 20. 00:25

단천역 벽서사건과 무풍정 이총

김성철 관장의 유배로 읽는 한국사 82

남해타임즈 | 승인2014.03.06 13:33|(392호)


"외로운 충절 자부한들 대중이 허여 않고, 홀로 서서 감히 말하긴 사람치곤 어려워라. 나라 떠나는 이 한 몸 낙엽처럼 가볍지만, 높은 이름 천년토록 산보다 무거우리. 같이 놀던 영웅준걸들아 낯이 어찌 두터우냐, 죽지 않은 간신배들 모골이 서늘하리라. 하늘이 우리 황제 위해 사직을 부지케 할진대, 어찌 그대를 살려 보내지 않으리"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 말을 한 죄로 귀양 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하면서 지은 칠언율시이다. 용재 이종준(李宗準)은 함경도 부령(富寧) 봉수노우역(烽燧爐于驛)으로 귀양가던 중 단천군(端川郡) 마곡역(麻谷驛)에 이 시를 써 붙이고 떠났다. 중죄인으로 근신하지 않고 옛시를 빌어 연산군과 간신들을 원망하는 자신의 뜻을 밝힌 이종준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1498년 7월 26일 김종직의 문도로 무오사화 때 사형을 당한 무오5현(김일손, 권오복, 이 목, 권경유, 허반)의 치죄를 반대하고 류자광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곤장 80대를 맞고 유배된 이종준은 11월 17일 무풍정 이총(李摠)과 함께 함경도에서 끌려왔다.

태종의 증손자였던 이 총 역시 김종직의 제자로 종친이 사류(士類)와 어울려 정치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함경도 온성에 귀양가 있던 처지였다.

이종준은 단천 마곡역 벽에 써 붙인 이사중의 시가 문제되자 의정부 녹양역부터 동행했던 무풍정 이 총이 부도한 말을 했다고 무고했다.

결국 이종준은 무고죄로 100여 일에 걸친 재판을 거쳐 1499년 3월 2일 처형되고 말았다. 이종준의 문집인 《용재유고》에 「謫江界詠蘇武窟」이라는 오언율시가 있다.

"만고에 욕된 우수 아니길 바랐는데, 누가 소자경과 더불어 매섭다 하였나. 갈 때도 한 때 한나라 시절이더니, 올 때도 한 때 한나라 시절이구나. 한 시절이 십구 년이니, 천추에 그 이름 없어지지 않구나"

이종준이 부령으로 유배가는 도중에 강계에서 한나라의 충신인 소무에 대해 읊은 시로 보인다. 이처럼 충신의 충절에 대한 칭송을 거듭하던 이종준이 왜 같은 문도였던 이총을 무고한 것일까.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종준이 벽서한 싯구 중 "죽지 않은 간신배들 모골이 서늘하리라"는 내용에 대해 부도한 발언을 한 것이 계기가 된 듯하다. 어찌 되었든 단천역 벽서사건으로 인해 이종준은 장살 당했고, 무풍정 이 총은 1499년 2월 25일 곤장 100대를 맞고 거제도로 다시 유배되었다.

이총은 시문과 글씨를 잘 써 안평대군과 곧잘 비교되었다. 청담파의 중심인물로 시와 거문고, 낚시와 술을 즐겼다. 남효온의 시에 `왕송해자주(王孫解刺舟)`라는 말이 있다. `왕손이 손수 배를 풀어 노를 젓는다`는 이 문구는 무풍정 이 총을 이르는 말이다.

한 시절의 풍류객은 6년의 유배생활 끝에 갑자사화를 맞아 1504년 6월 3일 머리, 몸, 팔, 다리가 잘리는 죽임을 당하고 6월 11일 저자거리에 효수되고 말았다.

무풍정 이 총이 능지처참되기 이틀 전인 6월 1일, 연산군은 "이 총의 아비 우산군 이종 및 형제는 결장하여 원방으로 유배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이 총의 아버지 이 종은 아들 5형제와 함께 남해의 어느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506년 6월 24일 함께 사약을 받아 생을 마감했다.

우산군 이 종과 아들 6형제를 7공자라 부른다. 비운에 세상을 떠난 7부자는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이 성공한 후 신원되었다. 아버지 우산군과 아들 6형제는 모두 비명에 갔지만 많은 후손을 남겨 오늘날까지 맥을 잇고 있다. 무풍정 이총이 남긴 시조 한 수를 음미해 본다.

"이 몸이 쓸 데 없어 세상이 버리오매, 서호에 옛집을 다시 쓰고 누웠으니, 일신이 한가할지나 님 못 뵈와 하노라" 자신을 버린 세상을 탓하지 않고 한가로이 살면서 마지막 종장은 임금을 그리워하는 듯하지만 성군에 대한 열망은 아니었을까?

출처: 남해시대. 오피니언 김성철의 유배로 읽는 한국사
http://www.nh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532



【참고】
이종준(李宗準)의 단천군(端川郡) 마곡역(麻谷驛) 벽시(壁詩)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의 칠언율시(七言律詩)


孤忠自許衆不與, 獨立敢言人所難。
고충을 자부한들 대중이 허여 않고,
홀로 서서 감언하긴 사람치고 어려워라.

去國一身輕似葉, 高名千古重於山。
나라 떠난 이 한 몸이 잎처럼 가볍지만
고명은 천만고에 산보다 무거우리.

竝遊英俊顔何厚, 未死奸諛骨已寒。
함께 놀던 영준들아 낯이 어찌 두터우냐.
죽지 않은 간유들도 뼈가 이미 써늘하리.

天爲吾皇扶社稷, 肯敎吾子不生還
하늘이 우리님 위해 사직을 붙잡을진대
어쩌다 그대를 살려 보내지 않으리.


*연산군일기 31권, 연산 4년 11월 11일 癸卯 1번째기사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
함경도 관찰사 이승건의 논의에 따라 벽에 시를 써붙인 김종직의 문도 이종준을 국문하게 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WJA_10411011_001



謫江界詠蘇武窟

萬古不辱命。誰與子卿烈。去時一漢節。來時一漢節。一節十九年。千秋名不滅。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8
출처: 한국문집총간 > 용재유고 > 慵齋先生遺稿 附訥齋遺稿 > 詩 > 謫江界。詠蘇武窟。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087A_0030_010_0040_2003_A016_XML



【번역문】
다음의 ≪謫江界詠蘇武窟≫ 역시 당시의 심정을 읊은 것으로 이종준의 기자인식의 방향이 절의정신에서 유출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萬古不辱命   오랜 세월 동안 욕되지 않는 명이니
誰與子卿烈   그 누가 소부의 지조와 함께 하리오
去時一漢節   지난 시절도 한결같은 한나라와 절개요
來時一漢節   다음에도 한결같은 한나라의 절개로다
一節十九年   한결같은 절개를 19년 동안 지켰으니
千秋名不滅   그 이름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으리라


*출처: 『慵齋 李宗準의 文學思想』 -15세기 사림파 문학 연구의 일환으로-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원 강사 (한문학 전공) 趙麒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