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용재공◆이종준

[한국사 12 조선 - 양반사회의 모순과 대외항쟁] (2) 燕山君代의 二大士禍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2. 12. 13:52

한국사 12 조선 - 양반사회의 모순과 대외항쟁

Ⅱ. 兩班官僚間의 對立과 分裂 > 3. 官僚間의 對立


(2) 燕山君代의 二大士禍

成宗代까지의 기성세력인 勳舊派와 신진세력인 士林派 사이의 대립은 成宗의 뒤를 이어 즉위한 燕山君代에 표면화되었다. 燕山君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간언하는 신하나 학자들을 미워하여 멀리하였다. 이러한 暗君의 治世에 兩派의 대립은 政爭으로 진전되어 그 결과 成宗代 대거 중앙정계에 진출했던 士林派 관료들이 勳舊派에 의해 두차례에 걸쳐 박해를 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戊午士禍와 甲子士禍이다.

1) 戊午士禍

戊午士禍 註 006는 燕山君 4년(1498) 7월에 史草問題를 직접적인 계기로 勳舊派가 士林派를 공격함으로써 일어난 政爭이다. 이를 戊午士禍라 한 것은 그 해가 戊午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史草問題가 발단이 되어 일어났기 때문에 흔히 戊午史禍라고도 한다. 이 士禍가 史草問題를 직접적 계기로 일어날 수 있었던 근본적 원인은 이미 전항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成宗朝에 新進 士林들이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하나의 정치세력 즉 士林派를 형성하면서 기성세력 인 勳舊派와 학문적·현실적 자세의 차이에서 대립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兩派의 대립은 다음에 언명할 바와 같이 개인적인 私嫌 내지는 反目으로 발전되었고, 이것이 마침내는 史草問題를 계기로 출발하여 士禍를초래하였던 것이다.

戊午士禍를 일으킨 勳舊派 주동인물의 한 사람인 柳子光은 府尹 柳規의 庶子이나 勇力이 남보다 뛰어나 世祖의 총애를 받았던 자이다. 그는 世祖의 즉위에 공을 세운 공신은 아니다. 그러나 1468년에 睿宗이 즉위하자 그는 南怡·康純 등이 모반을 꾀한다고 誣吿하여 이들을 숙청하는 동시에 그 공으로 翊戴功臣 1등에 武靈君으로 封하여졌다.

柳子光은 勳舊派 계열이었지만, 한 때 金宗直의 門에도 출입하였다. 그러나 金宗直은 그가 南怡 등을 모함하여 숙청한 이후 마음 속으로 그를 비겁한 자라고 여겨 왔었다. 그러던 중 金宗直이 咸陽郡守로 부임하여 그 곳에 柳子光의 詩가 懸板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이를 철거 소각케 하였다. 이것은 앞서 柳子光이 咸陽에 놀러가서 詩를 짓고 군수를 불러 이를 懸板에 써서 걸어 놓게 하였던 것이다.

이 소식이 柳子光에게 전해지자, 그는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하였으나 분한 마음이 더욱 앞서게 되었다. 이리하여 柳子光은 金宗直에 대해서 私怨을 품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마음 속으로 언젠가는 이를 보복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金宗直은 士林派의 거두인 데다 成宗의 신임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 名望과 威勢가 대단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柳子光은 오히려 金宗直과 통교하게 되었다. 그래서 金宗直이 사망했을 때에는 글을 지어 이를 哭하고 金宗直을 唐의 韓愈에 비교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앞서의 宿怨이 풀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戊午士禍를 일으킨 또 한 사람의 勳舊派 주동 인물은 李克墩이다. 그도 世祖의 즉위에 공을 세운 功臣은 아니었으나, 成宗 初에 佐理功臣 4등에 光原君으로 封해진 뒤 高官大爵에까지 오른 자이다.

李克墩이 士林派를 증오하게 된 것은 金宗直의 門人인 金馹孫이 史官으로 있으면서 그의 非行을 史草에 直筆한 데서 비롯된다. 즉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인 金馹孫은 李克墩이 全羅監司로 있을 때 世祖妃 貞熹王后 尹氏의 國喪을 당하여 進香하지 않고 기생과 놀았다는 사실과, 그의 부정축재 사실 등을 史草에 그대로 써 넣었다. 이에 李克墩이 金馹孫에게 은밀히 그 글을 고쳐줄 것을 요청 하였으나 거절당하여 兩者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더우기 뒤에 金馹孫이 獻納에 임명되어 李克墩이 成俊과 서로 알력이 있어서 朋黨의 분쟁을 일으키려 한다고 상소하여 규탄함에 이르러서는 李克墩의 金馹孫에 대한 증오심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도 金馹孫 등의 金宗直 일파 즉 士林派에 대하여 언젠가는 보복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柳子光·李克墩의 위와 같은 金宗直·金馹孫 등 士林派에 대한 嫌惡는 같은 勳舊派인 兩者를 쉽게 결탁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權臣으로서 士林派에 대한 보복의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회는 燕山君 4년(1498)에 成宗實錄 편찬이 결정되어 實錄廳이 개설되고 그 편찬이 시작되었을 때 왔다.

그 해 7월에 마침 李克墩이 成宗實錄 편찬을 위한 堂上官에 임명되었다. 이 때 李克墩은 金馹孫의 史草 중에 世祖에 관한 사실이 많이 쓰여 있고, 또 金宗直의 世祖簒位를 비방하는 뜻의 「弔義帝文」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를 寄貨로 金馹孫 등에게 보복하려고 하여 바로 이 사실을 總裁官 魚世謙에게 보고하였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으므로 이를 다시 柳子光에게 전하였다. 사실 金宗直의「弔義帝文」은 유희적인 풍자의 글로서「꿈에 義帝(楚의 懷王)룰 만나 놀라 깨어 弔文을 짓노라」하고, 그 稠文 가운데 몇 구절에 義帝를 죽인 項羽에 빙자하여 端宗을 죽인 世祖를 은근히 비난한 것이었다. 더우기 史官 金馹孫은 이러한 뜻의「弔義帝文」을 世祖가 왕위를 찬탈한 데 관한 사실을 史草에 자세히 기록한 곳에다 함께 수록하였던 것이다. 柳子光도 李克墩으로부터 그 사실을 전해 들은 뒤 金宗直의 「弔義帝文」이 世祖의 王位찬탈을 몰래 헐뜯어서 비유한 것으로 여겼다. 이에 柳子光은 金宗直이 이미 故人이 되었지만, 그에 대한 宿怨을 갚을 좋은 기회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世祖의 寵臣이었던 宣城府院君 盧思愼, 坡平府院君 尹弼商 등과 함께 謀議하여 燕山君에게 金宗直이 世祖를 비방한 죄는 마땅히 大逆無道한 것으로서 논하여 그의 文集 같은 것은 모두 불태워 없애버려 후세에 전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燕山君은 원래 학문을 좋아 하지 않아서 世子로 있을 때부터 학문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며, 즉위한 뒤부터는 더욱 放恣해져서 宴樂만을 일삼고 政事를 돌보지 아니 하였다. 더우기 그는 자신의 放恣를 추종하는 자를 좋아하여 가까이 했고 이를 諫하여 말리는 자는 싫어하고 멀리하였다. 즉 그는 항상「내가 자유의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것은 이들 學士輩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는데, 그가 지적한 바 學士輩는 물론 士林派의 문신과 학자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분의 燕山君에게 있어서 士林派 관료를 탄핵하는 柳子光 등의 勳舊派 大臣들의 上疏는 크게 그의 뜻에 맞았던 것이다. 그래서 燕山君은 즉시 柳子光 등으로 하여금 金馹孫 등을 推鞠케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士林派 관료들에 대한 박해가 가해졌다, 우선 士林派의 죄악은 모두 金宗直이 敎唆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金宗直에 대해서는 剖棺斬屍(棺을 열어 그 시체의 목을 베는 極刑)의 형벌을 내렸다. 그리고 金馹孫·權五福·權景裕·李穆·許磐 등은 奸惡으로 派黨을 만들어 先王(世祖)을 誣錄하였다는 죄명으로 凌遲處斬 또는 斬刑을 받았다. 또한 姜謙·表沿沫·洪澣·鄭汝昌·茂豊都正(總)·姜景叙 李守恭·鄭希良·鄭承祖 등은 亂言을 범 하고 亂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杖流에 처해졌고, 李宗準·崔溥·李黿·李胄·金宏弼·朴漢柱·任熙載·康伯珍·李繼孟·姜渾은 金宗直의 門徒로서 朋黨을 맺어 國政을 헐뜯어 비난하였다는 죄로 역시 杖流에 처해졌다. 한편 이들 士林派 관료들 외에 魚世謙·李克墩·柳洵·尹孝孫·金銓 등은 修史官으로서 문제의 史草를 보고도 吿하지 않았다 하여 罷職당하였다.

한편이 士禍의 단서를 만든 장본인인 李克墩은 비록 金馹孫에 대한 개인적인 宿怨은 같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罷職당하고 말았다. 반면에 柳子光은 金宗直에 대한 개인적 宿怨을 갚았을 뿐 만 아니라 이 士禍를 처리한 담당자로서 그 지위가 더욱 확고해져 강력한 실권자가 되었다.

이상의 大獄事가 바로 戊午士禍이다. 이 士禍에서는 앞에 열거한 士林派 관료 외에도 수백명에 달하는 士休들이 禍를 입었다. 이로써 成宗朝에 중앙정계에 등장한 嶺南 출신의 士林派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권에서 배제되었다. 이리하여 모처럼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려던 신진 士林派는 제 1차로 기성 세력인 勳舊派 大臣들에 의하여 그 기세를 꺽이게 되었다. 그리고 禍를 면한 士林들도 일단은 그 意氣를 잃게 되었다.

2) 甲子士禍

戊午士禍가 일어난지 6년이 지난 燕山君 10년(1504) 4월에 또 한 차례의 大獄事가 일어 났는데, 이 해가 甲子年이어서 이를 甲子士禍라 한다 註 007. 이 士禍는 燕山君의 生母인 尹妃가 廢位·賜死된 사실이 燕山君에게 전해진 것을 직접적 동기로 하여 일어났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요인은 宮中과 결탁한 朝臣과 府中의 朝臣이 서로 마찰을 일으켜 反目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燕山君은 戊午士禍로 자신의 放恣를 말리던 士林派를 제거시킨 후 그 사치와 향락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리하여 국가의 재정이 곤란하게 되자, 燕山君은 백성들에게 貢物의 수량을 늘려 부과시키는 한편 功臣들에게 주어졌던 賜田과 奴婢 등을 몰수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대부분이 功臣인 勳舊派 朝臣들이 반대하는 동시에 宮中의 支用을 절약할 것을 請하고, 나아가서는 王의 무절제한 생활에 제한을 가하려고 하였다. 사실상 燕山君 자신도 간혹 朝臣이 朋黨을 이루어 君上을 고립에 빠뜨리려 한다고 비난하기조차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燕山君 側近의 일부 朝臣들은 宮中과 결탁하여 王의 방종을 충동하였다. 이로 인해 朝臣들은 宮中派와 府中派로 나뉘어져 서로 마찰과 반목이 생겨 대립하게 되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궁중과 인연이 있는 任士洪(任士洪은 成宗에 의하여 亂政之人으로 지목받아 重用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子인 任光載는 睿宗의 駙馬였으며, 任宗載는 成宗의 駙馬였다)은 愼守勤(燕山君妃 愼氏의 오빠)과 결탁하여 朝廷의 勳舊派 세력은 물론 戊午士禍時 세력이 꺾인 신진 士林派의 잔존세력까지도 모두 일소하려고 하였다. 이를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任士洪은 멀리 燕山君 生母의 廢妃·賜死事件을 燕山君에게 몰래 吿하였던 것이다. 燕山君의 生母 尹妃의 廢位·賜死事件은 成宗 11년(1480)에 尹妃가 질투한 죄로 인하여 廢妃 되었다가 얼마 뒤에 賜死된 사건을 말한다. 그 당시 燕山君은 4세의 幼年時節이었기 때문에 뒤에 커서도 그러한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즉위 후 10년 4월에 上述한 바와 같이 任士洪이 燕山君에게 몰래 고하였기 때문에 燕山君은 자기 생모가 廢位된 것은 成宗의 後宮 嚴·鄭 兩 淑義의 참소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대노한 燕山君은 兩淑義를 內廷에서 撲殺하고 그들이 낳은 王子인 安陽君(衍)과 鳳安君(熢)을 죽였다. 나아가서는 자신의 이러한 폭행을 仁粹大妃(德宗의 妃로서 燕山君의 祖母)가 책망하였다 하여 병상에 누워 있는 大妃를 머리로 받아 얼마 후에 別世케 하는 등의 悖倫行爲도 서슴치 않고 저질렀던 것이다. 한편 燕山君은 생모 尹氏를 王后로 追崇하고 成宗廟에 配祀코자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대부분의 朝臣들은 감히 異議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다만 應敎 權達手와 李荇만이 이에 반대 하였다가 權達手는 사형 당하고 李符은 유배당하였다.

그러나 燕山君은 이것으로도 분노가 풀리지 않아서 生母 尹妃의 廢黜·賜死 당시의 관련 朝臣들을 모두 追罪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前述한 바와 같이 宮中派와 府中派가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서 府中派인 任士洪 등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燕山君을 책동시킨 데 있었던 것이다. 한편 任士洪은이 기회에 戊午士禍時 禍를 면한 신진 士林派의 잔존 세력까지도 일소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任士洪이 전에 金宗直에 대하여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그들이 앞으로 자신들의 弄權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었을 것으로도 생각된다. 그래서 任士洪 일파는 士林들이 國事를 비방한다고 誣吿하여 尹妃廢黜賜死事件의 연루자 들과 함께 함정에 몰아 넣었던 것이다.

그 결과 尹弼商·成俊·李世佐·權柱·金宏弼·李冑 등 수십 명의 朝臣이 사형을 당하였다. 그리고 이미 사망한 韓致亨·韓明澮·鄭昌孫·魚世謙·沈澮·李坡·鄭汝昌·南孝温 등이 剖棺斬屍의 刑을 받았고 아울러 그들의 자제와 동족까지도 죄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의 大獄事가 바로 甲子士禍이다. 戊午士禍가 기성세력인 勳舊派와 신진세력인 士林派의 대립 충돌이었다고 한다면, 이 士禍는 宮廷 중심의 관료 세력과 신진 士林을 포함한 정부 중심의 관료 세력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士禍로 인하여 士林勢力은 적어도 燕山君이 廢位되기까지는 중앙정계에서 발을 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



註 006: 戊午士禍에 대해서는 다음의 論文 및 著書를 綜合하여 정리하였다.申奭鎬 前揭論文瀬野馬熊 燕山朝の 二大禍獄, 靑丘學叢 第3號 (1931) 洪淳昶 前揭論文朴亨杓 李朝 黨爭의 初期的 形態――土禍를 中心으로, 常虛 劉錫昶博士古稀紀念論文集 (1970)車相瓚 士禍와 黨爭, 開闢 1926년 7월호姜周鎭 李朝黨爭史硏究(1971)李相佰 韓國史近世前期簾(1962)
註 007: 甲子士禍에 대해서는 다음의 論文 및 著書를 綜合하여 정리하였다.瀬野馬熊 前揭論文洪淳昶 前揭論文朴亨杓 前揭論文車相瓚 前揭論文姜周鎭 前揭書李相佰 前揭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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