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용재공◆이종준

[한국사 12 조선 - 양반사회의 모순과 대외항쟁] (1) 成宗朝 新·舊政治勢力의 對立 形勢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2. 12. 13:51

한국사 12 조선 - 양반사회의 모순과 대외항쟁

Ⅱ. 兩班官僚間의 對立과 分裂 > 3. 官僚間의 對立


(1) 成宗朝 新·舊政治勢力의 對立 形勢

朝鲜 成宗代는 開國 이래 추진되어 온 儒敎的 文物制度가 일단 정비 되어 朝鮮王朝의 기반이 확립된 시기였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成宗은 학문을 좋아하고 숭상한 왕으로서 儒敎政治를 한층 더 발전시키기 위해 그 진흥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儒敎的 학식과 덕행을 겸비한 참신한 인재가 成宗代에 많이 발탁되어 등용되고 있다. 이 때 性理學이 당시로서는 다른 지역보다 빨리 정착되어 성하였던 嶺南 지방의 儒學者 즉 士林들이 대거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기성정치세력인 勳舊派 대신들이 지배하고 있던 成宗代의 중앙정계에 신진정치세력인 士林派가 형성되어 兩派에 은근한 대립의 형세가 나타나게 되었다.

勳舊派는 世祖의 王位簒奪을 도와 權臣이 되어 朝廷의 실권을 장악한 자들, 즉 世祖의 功臣들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世祖·睿宗代를 거쳐 成宗朝에 들어와서도 元老勳臣으로서 朝廷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정치적으로 정치권력에 밀착된 집권세력으로서 高官大爵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울러 경제적으로도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부유층이었다. 이와 같이 이들은 정치·경제적으로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던 老成한 인물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현상 유지에 급급하는 보수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훈구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鄭麟趾·魚孝膽·申叔舟·崔恒·李石亨·梁誠之·權擥·鄭昌孫·徐居正·韓明澮·韓繼禧·李克墩·盧思愼·姜希孟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勳舊派는 대체로 麗末鮮初의 大性理學者이며 新王朝에 적극 협력한 權近의 學統을 이어 받은 자들로서 權近의 門人을 중심으로 하는 士類였다. 註 001그런데 이들이 節義를 굽혀 儒家에서 중히 여기는 名分에 어긋나는 王을 섬겼다는 점에서 儒學者로서는 떳떳한 입장이 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世祖-成宗年間에 정치에 직접 참여하여 新王朝의 文物制度를 정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 큰 업적을 남겼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실용적인 학문에 능통하여 官撰의 편찬사업에 종사함으로써 많은 서적을 편찬하는 등의 업적도 남겼다. 그런데 이러한 勳舊派는 학문상으로 詞章(文藝)에 치중하여 性理學 本然의 철학적인 면은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성격의 勳舊派는 일명 官學派라고도 불리웠다. 한편 이들은 畿內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近畿派라고도 할 수 있다.

士林派는 勳舊派 權臣들이 朝廷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成宗代에 嶺南地方의 士林들이 대거 중앙정계에 진출함으로써 형성된 하나의 정치 세력이다. 이러한 士林派의 주체세력은 麗末 혼란기에 添設職을 통하여 대규모로 品官으로 신분이 상승된 지방의 中小地主인 土豪層이었다. 이들은 朝鮮王朝에서도 鄕村에서의 자신들의 영도력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그 방법을 性理學的 鄕村自治制에서 발견, 性理學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士林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中小地主的 기반이 강했던 慶尚道에서 性理學이 쉽게 받아들여져 士林層이 다른 지방보다 두텁게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 嶺南地方 士林의 중앙정계 진출은 成宗朝에 대규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이전인 世宗代에 儒敎政治의 진전에 따라 소규모적이나마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金叔滋·李甫欽·李孟專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이들은 世祖의 王位簒奪을 不義로 여겼기 때문에 世祖의 즉위를 계기로 중앙정계에서 일단 몰락하였다. 註 002

이러한 嶺南地方의 士林은 麗末鮮初의 大性理學者인 吉再의 學統을 이은 자들이었다. 吉再는 朝鮮王朝가 개창되자 高麗의 遺臣으로서 高麗王室에 대한 節義를 지켜서 朝鮮王朝의 出仕懇請을 끝내 거부하고 고향인 慶尚道 善山에 隱居하며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學統은 金叔滋 등 여러 제자에 의해 이어졌으며, 孫弟子인 金宗直(金叔滋의 아들)에 이르러서는 그 門下에서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기에 이르렀다. 더우기 金宗直이 수많은 제자들을 기반으로 師宗이 되면서 부터는 嶺南地方에서 하나의 학파와 같은 세력을 형성하여 당시의 士林勢力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이 전술한 바와 같이 成宗의 儒敎政治 振興試圖에 따라 당시 性理學者로서 명망이 높았던 金宗直이 重用되면서 대거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그러나 그 裏面에는 成宗이 당시 비대해져 가는 훈구파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이리하여 金宗直과 그의 門人들을 중심으로 하는 嶺南出身의 士林들이 成宗朝에 정치적인 신세력으로서 하나의 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士林派의 대두인 것이다. 이러한 士林派의 중심인물은 金宗直을 위시 하여 그 門人인 金宏弼·鄭汝昌·曹偉·金馹孫·兪好仁·表沿沫·李宗準 등과 金宏弼의 門人인 金安國·金正國·李長坤·趙光祖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士林派는 朝鮮開國初 不事二君의 節義를 지킨 吉再의 學統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節義를 숭상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世祖의 王位簒奪을 내심으로는 義롭지 못한 일로 여겨왔다. 그리고 이들은 학문적으로 性理學의 理氣哲學 즉 人間心性의 연구를 학문의 주류로 하는 道學者들이었다. 또한 그 대부분이 지방의 中小地主 출신으로서 신진의 年少氣銳한 선비들이었다. 더욱이 이들은 주로 三司에 진출하여 言論文筆을 담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老成하여 보수적이었던 勳舊派와 달리 진보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이 勳舊派와 士林派는 學統과 출신지방이 서로 달랐고 학문적·정치적 입장도 서로 달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成宗朝에 기성세력으로서 朝廷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勳舊派에게 있어서 이질적인 성격의 士林派가 중앙정계에 진출한다는 것은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勳舊派는 士林派에 대해 배타적이었다. 반면에 節義를 숭상하며 性理學의 정통적 계승자로 자부했던 士林派는 勳舊派가 不義의 世祖를 옹립하여 권세를 장악하고 그 권세를 이용하여 私利私慾만을 일삼는다 하여 그들을 은연중에 비판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相異했던 兩派의 입장은 신진의 士林派가 臺諫과 弘文館의 言官으로 많이 봉직하게 되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고 勳舊大臣들의 權貴化를 비난하면서 兩派는 대립·적대관계로 변하게 된다. 즉 신진의 士林派는 儒敎的 理想政治를 표방하면서 自派에 맞지 않는 勳舊派를 탐욕하고 무능한 小人輩라 규탄하여 배척하였고, 이에 대하여 기성의 勳舊派는 自派와 交遊하지 않고 오히려 비난하는 士林派를 孤高自尊하는 경박한 野心輩라 指彈하였던 것이다. 註 003

그런데 士林派가 勳舊派를 공격하게 되는 裏面에는 그들이 중앙에 진출하자마자 政綱으로 내세워 실현된 留鄕所復立運動이 헛수고가 되어 버린 점이 크게 작용되고 있는 것 같다. 註 004 즉 士林派의 留鄕所復運動은 그들 중심의 鄕村自治體制를 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그러나 復立된 留鄕所는 그들의 세력이 우세했던 嶺南地方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그들의 의도와 달리 勳舊宰相들에 의해 장악되어 버렸다. 이에 復設을 추진했던 士林派側에서 도리어 留鄕所를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을 할 정도였다. 이와 같이 留鄕所復立運動이 결과적으로 헛수고가 되어 버리자 士林派는 중앙에서의 정치 활동의 방향을 바꾸어 言官의 입장에서 勳舊派의 權貴的인 정치 자세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붓게 된 것이다.

士林派의 勳舊派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은 물론 勳舊派 지배 하에서 현실사회의 모순이 많이 드러났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즉 정치·경제적으로 이미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던 勳舊派는 姻戚·情實 등에 의하여 權貴化하여 정권을 농단하고, 그러한 권세를 이용하여 農莊을 더욱 확대하는 한편 간접적으로는 貢納 請負의 이득을 꾀하여 정치·경제·사회적인 문란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成宗이 前述했듯이 儒敎政治를 표방하고 신진의 儒學者群인 士林을 대거 등용한 것은 勳舊派의 농단을 억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위와 같은 당시의 사회적 불합리성을 개혁하지 않으면 안될 시대적 요청의 반영이었다고 보는 것 註 005도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위와 같은 상황 하에서 나타난 士林派와 勳舊派의 대립은 불가피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아가서 兩派의 대립은 결과야 어찌 되었건 당시 朝鮮王朝社會에 있어서 일단은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政爭으로 진전되어 成宗 다음의 燕山君 暴政下에서 士林派가 일방적으로 禍를 당하는 士禍를 유발시켜이후 4차례에 걸친 士禍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것이 黨爭을 발생시키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註 001 : 洪淳昶 士禍와 黨爭과의 關係, 大丘史學 7.8合輯 (1973) pp. 185—186참조
註 002 : 李泰鎭 士林派의 留鄕所復立運動 震檀學報 34 (1972) 및 35號(1973) 참조
註 003 : 申奭鎬 朝鮮成宗朝에 있어서와 新舊對立, 近代朝鮮史研究(1944), 本節 작성에 이 論稿가 많이 參考되었다.
註 004 : 李泰鎭 前揭論文 참조
註 005 : 洪淳昶 前揭論文 p. 189



*국사편찬위원회: http://db.history.go.kr/id/oh_012_002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