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금호공◇이시민

금호공가장(琴湖公家狀)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2. 11. 15:31

금호공 이시민 가장(琴湖公 李時敏 家狀)


先府君家狀(선부군가장)

-訥齋 李弘準 撰(눌재 이홍준 찬)


先君子諱時敏字子修號琴號宣德庚戌生于亰第自髫齡以才華聞人稱東部神童及長潛心經學又有個儻慷慨之節 魯山癸酉俱中司馬未展慶席遭門禍仲兄命敏被禍府君禁錮遂南歸永嘉之金池村癸巳六月終嗚呼痛哉先人美風席多大志器量沈重性亦嚴毅居家常不解冠帶奉養裵氏至孝滫瀡之物必進時新畋山擸水不廢風雨䢅昏定省跪於門外祖母設席待以賔禮入云則入中席而坐坐不欹倚有言則對有命則难出告反面不失其期歲癸未丁憂哀毁過禮凢器事一從家禮獨於薦祓之事自初七以至七七歸依佛氏傾財殫力常謂諸子曰不作佛事先儒明敎余亦抱冊豈無所見但欲報昊天之恩不知虛僞爾事雖誕妄能盡在我之誠虛亦實矣然汝等勿效焉季父靡敏先人異母兄也謫居扶餘遭裵氏器來會葬而歸贈奴婢六口卽成券慈氏進言曰吾子女亦多雖一二可世何必六也答曰吾子與兄分則雖殊義則無間兄貧而使令尙小其可忍視乎况小民懷土母子分離必相逃散舉方矣而歸則無此患矣令幹奴護率一行安接而來廬墓三年服闋之後繼日號痛哭禎亦揮涕奉慰解之哀盡乃巳蔬果忝稷凢有節物必易服薦新常聚家門子弟若干人敎養不怠處於鄕黨待人接物必其禮人皆敬重靑城君之任安東府也累到公門而候焉公往謝則必揮公事待出而後裁决處置乃謂人曰李生員在坐則愧赧未取也外人有餉遺者必問其所從得而不知則不受受則償以斗穀至於緇髠芒鞋卷紙莫不皆然曰寒乞人所贈空受不仁中年慈氏得天病三年苦劇家業零賛不顧不恤迎醫貿藥急於治療病愈然後復敎誨諸子日夜望其成入嘗以詩施責曰一飯都忘歲月輕豈知斯世樹風聲空身雖向牕前坐逸意應馳野外行時獨仲兄宗準遊學亰師每書戒勗其第一書若曰須記吾戒汝之言無效前行母結狂友母敢餙非母作無益母事慢遊勤業日孜勉旃第二書曰汝之遊學非他豪倈輩之可比勤言行戒酒色母慢遊母友狂吾之祖先生爲祖家名臣及余之身坎軻終身余則己矣積善之久豈無餘慶汝兄不學無才汝弟亦不好學吾之所望者汝也汝亦學而不誠不誠則無實吾所謂實者德行之謂也非才華也苟無其行雖有七亦之才何足取焉第三書曰一不言祖廷利害大臣黑白二不言人物長短評論酒色朋友過惡此其大者至於徵言細行亦不可不謹當刻心勿忘以就遠道噫古人云知子莫如父先人之先見其可及乎仲兄摺第榜眼書盡音律醫學卜筮無不精巧人皆仰之取友不端引而招禍余亦好學不篤未痛經傳廑占小名累擧不第吾兄弟皆爲先人之罪人也伯父都官正郎不敏有子一人而無名焉仲父成均主簿勿敏有子三人零落殆盡只有一孫彭齡補蔭今爲鎭岑縣監而亦無後焉季父靡敏有子四人而或夭或病鰥無室者數人其在吾先人子婿登第爲縣監爲縣令爲監司若崇弘公三男雖無以有子有孫森立門庭惟祖先在天之靈豈無陰隲之功耶若子若孫能爲人而復振門戶未可之也其謹言行勤學業當以先人之戒書爲監任官職操志節當以先祖之淸白是則以是爲靑氈永世不墬則無沗小生彰厥祖之名美無竆矣其名勉之皇明正德甲戌六月日男進士弘準謹書于畏影堂

畏影先生堂各凢十間先生手書家訓刻揭二板于堂壁朝夕觀省而子孫欲其取則其平日修省之功可知也退溪先生爲先生胤察訪公之碣稱察訪公敎子弟甚嚴鄕里後生亦加勸督不以生産作業爲務常稱貸以自給察訪四子艿茹葎俱早夭而以孝旋閭其季苞銘又云季也至性誠孝無他則子孫之不忝家訓又可知也不幸後嗣絶士林營建里社移取畏影堂材爲謹堂而家訓二板依前揭壁以存古蹟後移里社于衙洞爲八間而二板依舊


*출처: 용눌재집(慵訥齋集) > 訥齋先生遺稿 > 家狀


○선부군가장(先府君家狀)
1514. 아버지 이시민(李時敏)(1430-1473)의 일생을 적은 가장(家狀). 계유정난(癸酉靖難)때 금고(禁錮)처분을 받은 뒤 영가(永嘉) 금지촌(琴池村)에 내려와 살게 되었으며‚ 부모의 상사(喪事)를 치를 때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불씨(佛氏)에 귀의하여 재산을 탕진하였는데 자식들에게는 이를 본받지 말라고 하였다고 함.
또 서울에 있는 아들 종준에게 계서(戒書)를 써 보냈는데 그 내용은 학문에 힘쓰며 언행을 삼가하고 조정(朝廷)의 이해(利害)와 대신들의 흑백(黑白)·사람의 장단(長短)·벗의 잘못 등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함.
가장(家狀)에 이어 실린 부기(附記)에 의하면 이홍준은 이 계서(戒書)를 손수 목판에 써서 새긴 다음 자신이 사는 외영당(畏影堂) 벽에 걸어 두고 매일 보며 반성하고 자손들에게도 본받게 하였는데 불행히 후사(後嗣)가 끊어지니 사림(士林)들이 외영당의 목재를 가지고 리사(里社)의 강당을 지은 뒤에 그 곳에 이 계서(戒書)를 걸어두었다고 함.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금호공가장(琴湖公家狀)

-訥齋 李弘準(눌재 이홍준) 지음


선부군(先父君 =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은 시민이요, 자는 자수며, 호는 금호다.
선덕(宣德 = 명나라 선종의 연호) 경술(庚戌 = 1430)에 서울 사저에서 출생하시니 어릴 때부터 재주로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동국신동이라고 일컬었다.
성장함에 따라서 경서(經書 =사서삼경)에 몰두하셨고 척당(倜儻 =높은 기상) 강개(慷慨 = 분개하는 뜻)하는 절의가 있었다.

노산(魯山 = 단종) 계유(癸酉 1452)에 사마시(司馬試=소과)에 합격하고, 경사의 잔치도 베풀기 전에 중형 명민이 계유정란에 화를 입으니 1문의 연좌화로 부군도 금고(禁錮 = 공민권 박탈과 같은 형)을 당하고 드디어 남쪽 안동 금계촌으로 돌아와서 계사(癸巳 = 1473) 6월에 하세하셨다.

아! 원통한 일이다.
우리 선인이 품위가 아름다웠고 뜻이 컸으며 도량이 침중하고 성질이 엄격하며 굳세었다, 평상시에 집에 계실 때도 의관을 벗지 않으셨고 모친을 봉양하는데 있어 효성을 지극히 하셨다.
음식을 부드럽게 하여 반드시 그때그때 새롭게 해서 드리며 산에 가서 산양하고 냇물에 가서 생선잡기를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게을리 하지 않었다. 밤에 잠자리를 돌봐드리는 인사와 새벽에 잠자리를 살펴보는 인사를 반드시 하되 문밖에 꿇어앉아 명령을 기다렸다.
들어오라 하시면 들어가서 자리에 앉으니 앉은 자세가 기울지 않고 ​말씀이 있어야만 대답하며 명령이 있으면 따랐다. 출타할 때는 연유를 고하고 돌아와서는 꼭 뵙고 돌아옴을 알렸으니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었다.

계미(癸未)년에 친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예에 지나쳤고 장사는 한결 같이 가례를 따랐고 오직 천불(薦祓 = 불전에 기도하는 제사)에는 ​초七부터 七七(四十九日)까지 불정에 귀의하고 재산도 많이 받쳐 힘을 다하면서 항상 모든 아들에게 일러 가로대 부처를 숭상 않은 것이 선유들 명백한 가르침이고 나도 또한 유교의 책을 배우고 있으니 어찌 생각이 없으리오 마는 다만 호천망극(昊天罔極)한 은혜(恩惠 = 부모님 은혜)를 보답코저 할 따름이다.
헛된 일인가 아닌가는 알 수 없고 비록 허망한 일이라고 하나 ​나의 정성에 있는 것이니 허망한 것도 실지가 될지라 그러니 너희는 본보지 말라 하셨다.

계부(季父 삼촌) 미민은 선인과는 이모(異母 배다른 모친)의 형이다.
부여로 귀양살이 갔다가 배씨상을 당하여 달려와서 잔사를 치르고 돌아갈 때
노비(奴婢 남자종과 여자종) 여섯 명을 주고 문서까지 넘겨주시니 어머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도 아들딸이 많은데 한두 명 주면 되지 어찌 6명이리오 하시니 대답해 가로되 내가 형으로 더불어 어머니는 다르나 의리로는 아무 간격이 없소. 형이 가난하고 부리는 것이 적으니 그 고생을 참아보지 못한 탓이 아니겠소. 소민(小民 어린이 또는 천한 사람)은 향토를 생각하나니 모자가 서로 헤어져있으면 흩어지기 쉬우니 차라리 온 식구를 다 데리고 오면 이런 근심이 없을 것 아니오 하고 건장한 종을 보내 일행을 편히 데려오다.

3년을 산소 곁에서 시묘를 하고 복이 끝난 뒤에도 낮과 밤으로 통곡을 하니
한 동리에 사는 종질되는 진사 배정(裵楨 외종질)과 글을 읽을 때 시전육아장(詩傳寥莪章 부모를 생각하며 지은 시)을 읽으면 부군께서 통곡을 하시니 정(楨)도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나 슬픔이 다해야 그치시다.
또 채소 과일 곡식이 철을 따라 새로 나면 반드시 옷을 갈아입고 천신(薦新 새음식을 조상에 드리는 제사)을 하다.

항상 집안 자제들을 약간 모아놓고 가르침을 게을리 하시지 않았다. 향당에 처하여 남에 대할 때도 반드시 예절을 지켰다.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추종하였다.

청성군이 안동부사로 있을 때 누차 공의 댁에 가서 문후(問候 같은 재배간에 안부를 물음)하면 공이 또 회사(回謝 상대에서 베푼 인사에 대하여 인사를 갚다)하려 가면 반드시 공사를 제쳐놓고 나가기를 기다려서 결재하고 처리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생원이 자리에 있으면 부끄러워서 감히 일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외인이 혹 물품을 보내주면 반드시 그 물건이 어떻게 하여 생겼나를 물어보고 알지 못하면 받지 않았다. 또 받으면 반드시 한 말 곡식을 가지고라도 갚았다 친곤과 짚신과 두루마리 하나에 대해서라도 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려운 사람이 보내주는 것을 그대로 받고 마는 것이 불인하다는 취지에서였다.

중년에 우리 자당(慈堂)이 큰 병을 얻어서 3년 동안을 막심한 고생을 하였다. 살림은 기울었고 그러나 그런 문제는 돌아보지 않고 개념도 하지 않았다. 의원을 맞이하여 백약을 다 써서 치료만을 서둘렀으니 급기야 병이 낳았다.
그런 뒤에는 자제들을 가르쳐서 밤낮으로 성취하기를 바랐다. 항상 시로써 독려하였다.


한 그릇의 밥에 세월 빠른 것을 잊었으니 / 一飯都忘歲月輕
어찌 이 세상에 풍성(風聲 세상을 바로잡는 교화나 성명)을 세울 수 있을까. / 豈知斯世樹風聲
빈 몸으로 비록 창 앞을 향해 앉았으나 / 空身雖向窓前坐
호탕한 뜻은 들 밖을 달리고 싶구나. / 逸意應馳野外行


​ 중형 종준이 서울에 유학하고 있었다. 선부군이 매양 서신으로 경계하고 면려하였으니

첫 번째 서신에 [모름지기 내가 너를 경계하는 말을 기록해 두라.
전에 하든 행동을 그대로 하지 말고, 단정치 못한 미치광이 같은 사람들과 상종하지 말고 감히 잘못을 꾸미려하지 마라 몸에 도움이 되지 않은 일은 하지 말고 부질없이 놀기를 힘쓰지 말며 열심히 공부하여 매일 노력하여 부디 힘쓰고 또 힘쓰라]고 하였다.

두 번째 서신에는 [너희 유학은 다른 호협한 사람들과 비할 수 없다.
말과 행동을 삼가고 술과 여색을 경계 하여라. 부질없이 놀지 말고 미치광이 같은 사람과 상종하지 마라.
우리 선조가 대대로 조정의 명신(名臣 이름 있는 신하)이 되었는데 나의 대에 이르러 때를 만나지 못하고 감가(坎軻 초야에 있는 현달치 못함)에서 몸을 마치게 되었으니 나는 이것으로 그만이다.
오랫동안 착한 일을 쌓으면 어찌 자손에게 끼쳐지는 경사가 없겠느냐 네 형은 공부도 하지 못했고 또 재주도 없다.
네 아우도 또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직 내가 기대하는 것은 너뿐이다. 그런데 너는 학문을 배웠는데도 성실하지 못하다. 성실하지 못하면 실(實)이 없는 것이니 실이라고 하는 것은 덕행(德行 덕이 있는 행실)을 말하는 것이며 재주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덕행이 없으면 비록 칠보의 재주(七步之才 위나라 조식(曺植)이 그의 형 문제(文帝)에게 칠보 안에 글을 짓지 못하면 대법(大法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다. 조식이 응구접대하여

-콩을 삶는데 콩대를 때니 콩이 솥에서 울고 있구나. 본시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인데 삶는 것이 어이하여 이리급한고?- 라 하였다. 문제가 부끄럽게 생각하고 후회하였다.
(굉장한 재주에 비유함)가 있더라도 어디에 소용이 닿겠느냐?]고 하였다.

세 번째 서신에는 [첫째는 조정의 이해와 대신들의 흑백을 말하지 말 것이며
둘째는 인물의 장단(長短 누가 낫고 누가 못하다)과 주색의 평론과 친구의 과오(過惡 과실고 나쁜 점)를 말하지 말라.
이것은 그 대표적인 큰 사항만 들어서 말한 것이다.
미세한 언사나 세밀한 행동에 이르러서도 다 근신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마땅히 마음에 새겨서 잊지 말고 원대한 도를 성취하도록 하여라]고 하였다.

아! 옛사람이 말하기를 [자식을 아는 것은 그 아비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으니 우리 선인의 선견지명(先見之明 미리 미래에 대한 그 사람을 판단하는 밝음)은 아무나 따를 수 있겠는가?

과연 중형이 대과에 방안(榜眼 갑과에 둘째로 합격한 사람.
첫째로 합격자는 장원랑(壯元郞)이라하고
셋째로 합격한 사람을 탐화랑(探花郞)이라고 한다)으로 합격을 하였다.
서화와 음악과 의학과 점(占)으로부터 잡된 기술에 이르도록 정밀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벗을 사귀되 단인(端人 단정한 사람)이 아니면 같은 유에 끌려서 도로 화가 되는 것이다.
내가 또 학문을 좋아하였으나 득실하지 못하여 경서의 깊은 뜻에 통하지 못하고 겨우 조그만 명성인 소과에는 급제하였으나 여러 번 대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 형제가 선인에 대하여 죄인이 되었다.

백부 도관(都官 중앙관리)정랑 불민(정랑은 正五品벼슬 불민은 이름)의 자제가 하나 있는데 명망이 없었고 중부는 성균으로 주부를 지낸 물민이 세 아들들을 두었으나 영체하였으며 다만 한 손자 팽령이 있어 음으로 이제 진잠 현감이 되었으나 아들은 없다.
계부 미민은 자제가 4형제를 두었으나 혹은 요사하고 혹은 병들고 홀아비로 된 사람이 두어 사람이나 된다.
그 우리 선인의 자서(子壻 아들과 사위)에는 급제하여 현감도 되며 현령도 되고 감사도 되었다.
숭홍공 3아들도 보잘 것 없으나 아들도 있고 손자도 있어 문안에 우쭐하게 있으니 오직 조상이 하늘에 계신 영혼의 음덕으로 도운 공이 아니겠는가?
우리 선인의 아들과 자손된 사람은 사람노릇을 잘하여 문호를 다시 일으킬 런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각각 언행을 삼가며 학업을 부지런히 하여 당연히 선인의 경계한 글로 거울을 삼고 관직에 소임을 다하고 뜻과 절조를 잡어서 조상의 청백을 법으로 삼고 이로서 청전(靑氈)을 삼어 대대로 추락함이 없은즉 부모에게도 욕이 없을 것이요.
조상의 이름도 드러내어 아름다운 일을 다하지 안할 것인가 각각 힘쓸 지어다



[출처] 성균진사 금호공 가장(成均進士 琴湖公 家狀) | 작성자 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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