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금호공◇이시민

성균생원금호선생이공묘갈명 병서(成均生員琴湖先生李公墓碣銘 幷序)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2. 11. 15:32

成均生員琴湖先生李公墓碣銘 幷序
(성균생원금호선생이공묘갈명 병서)

-永嘉 權相圭 撰(영가 권상규 찬)


余嘗慕慵齋訥齋二先生文章德學之盛而竊意其家學承受之有自來矣及讀訥齋所撰琴湖公家狀益信是父之宜有是子也公姓李諱時敏字子修琴湖其號也 宣德庚戌生二歲而孤甫齔才華己著人稱神童及長潛心經學又有倜儻慷慨之志 端宗癸酉俱中生進未幾仲兄命敏死安平獄公亦坐此禁錮南下居安東之琴溪養母孝躬漁獵供甘旨晨昏定省跪於門外人云則入坐云則坐應對惟謹癸未丁憂哀毁逾禮喪事一尊家禮旣葬廬墓終制每讀詩至蓼莪篇痛哭哀盡而止異母兄靡敏謫夫餘分送奴婢六口曰不忍兄窮而乏使役次子宗準甞遊學京師公貽書戒之畧曰母結狂友母敢餙非母作無益母事慢遊又曰學不誠則無實所謂實者德行也非才華也苟無德行雖七步詩之才奚取焉又曰一不言朝廷利害大臣黑白二不言人物長短評論女色其敎誨之切如此素性沈重嚴毅平居不脫冠帶待人接物必以其禮人有餽遺必問其所從得不知則不受受必償二斗穀曰徒受不仁也此雖細事亦可以見辭受之節也於乎嚴於律己篤於孝悌敦德行而薄才華愼言語而謹辭受道在是矣雖行於國亦是道也而遭世非常以忠義之家而反遭門禍不得以行於家者推之於國雖爲慨恨然而義方之敎能成致二先生之學而卓然爲國朝名賢嗇窮裕後其理儘不爽矣癸巳六月終葬琴溪後子坐原月城之李肇新羅佐命功臣謁平歷麗及鮮代有達官贊成貞烈公揆判司僕寺事元林吏判蔓實大憲繩直公高曾祖禰妣延安李氏興海裵氏配永嘉權氏縣監啓經女方慵齋被逮戒之曰汝得其死我何悲焉勿以我爲念善死善死亦可謂是母而有是子也有四男崇準忠順衛宗準舍人贈副提學弘準公準訓導四女適監司朴緇縣監琴啓司果權碩衡參判李堣忠順男德林參奉提學嗣男德淵參奉進士男德璋察訪訓導男德全僉樞德成僉樞德淵出餘不錄舊碣刓破雲仍諸氏惕焉謀改竪責相圭以銘詩誼不敢辭謹爲之銘曰
忠義而被錮無愧恨也孝悌以爲行有至樂也阨窮不憫掎寬綽也爰有賢子光世烈也敢取其大銘兹石也



성균생원금호선생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成均生員琴湖先生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영가 권상규 찬(永嘉 權相圭 撰)


내 일찍부터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 눌재(訥齋, 이홍준李弘準) 두 선생의 문장과 덕행의 높음을 사모했더니 눌재선생(訥齋先生)이 지은 금호공(琴湖公) 가장(家狀)을 읽고 이 아버지에 이 아들이 있음이 더욱 믿어진다. 공의 성은 이씨(李氏)요, 휘는 시민(時敏)이며 자는 자수(子修)요, 금호(琴湖)는 그 호다.
선덕경술(宣德庚戌, 세종12 1430)에 출생하여 두 살 때 부친을 여의고 어린 나이에 총명이 뛰어나서 세상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 부르더니 장성하면서 학문에 골몰하고 행동이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불의를 보면 분개하더니 단종(端宗) 1년 계유년(癸酉年, 1453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얼마 안 되어서 중형(仲兄) 명민(命敏)이 안평(安平, 李瑢)과 함께 죽으니 공도 이 사건으로 금고(禁錮)에 형(刑)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안동(安東) 땅 금계(琴溪)마을에 살면서 어머님 봉양을 극진히 하되 짐승과 고기를 잡아서 어머님 반찬을 이으며 아침과 저녁에 문밖에서 문안하되 방에 들라 하시면 들어오고 앉으라 하시면 앉고 응하고 대답함을 삼가더니 계미년(癸未年, 세조9 1463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애통함이 지나치고 초종장례(初終葬禮)를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랐고 장사 후에는 산소에서 시묘(侍墓) 3년을 할새. 매양(每樣) 시전(詩傳) 육아장(蓼莪章)을 읽을 때는 애통망극(哀痛罔極) 후 그치다.
이모형(異母兄) 미민(靡敏)이 부여(夫餘)에 귀양 살 때 남자 종과 여자 종 여섯 명을 보내면서 형님의 곤란함을 차마 볼 수 없으니 이 종을 부리라 했고 둘째 아들 종준(宗準)이 서울에 유학(遊學)할 때 공이 글을 보내 경계(警戒)하여 가로대, 나쁜 벗을 사귀지 말고, 그른 일을 하지 말며, 무익한 말은 하지 말고, 게을리 놀지 말라 하였고, 또 배움에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실(實)이 없을지니 실(實)이란 덕행(德行)이요, 화려한 재주가 아니니 사람이 덕행이 없으면 칠보시(七步詩)를 짓는 재주가 있은들 소용이 없다 하였고, 또 첫째는 조정에 옳고 그른 일과 대신들의 잘하고 못하는 일을 말하지 말며, 둘째는 인물의 장단점과 여색의 잘나고 못남을 말하지 말라 했으니 그 깨우치고 가르침이 이같이 엄하고 간절하였다.

성품이 무겁고 엄하여 굳세어서 평상시에도 의관(衣冠)을 벗지 않고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할 때 반드시 예법에 맞게 하며 남에게 선물을 받았을 때는 반드시 그 원인을 확인하고 원인을 모를 때는 선물을 받지 않으며 받았을 때는 반드시 곡식으로 대가를 치르고 항상 이르되 받기만 하고 갚지 않는 것은 어진 일이 아니라 하니 이것이 비록 적은 일이나 주고받는 일에 분명히 하였으니 내 몸가짐을 엄하게 하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어른에 공경하며 덕행을 앞세우고 화려한 재주는 뒤로하며 언행을 조심하고 주고받는 것을 삼가니 이것이 정당한 도리라.
비록 국정을 행하더라도 이 정도면 만족하건만 비상한 세상을 만나 충의 있는 가문에서 도로 화를 당하니 집에서 행하든 정도(正道)를 정국에 반영치 못하니 비록 한탄스러운 일이나 이 교화로 두 선생(慵齋, 訥齋)을 배출하여 고금에 명현이 되었으니 내 몸을 희생시켜 자손에 도움이 되었음은 보복의 어긋남이 없도다. 계사년(癸巳年, 성종4 1473년) 6월에 세상을 뜨니 금계동(琴溪洞) 뒷산 자좌(子坐)의 언덕에 안장하다.

월성이씨(月城李氏)는 신라좌명공신(新羅佐命功臣) 알평(謁平)에 시작되어 고려(高麗)를 거쳐 조선에 이르는 동안 대대로 높은 벼슬이 계속되니 찬성(贊成) 정렬공(貞烈公) 규(揆)와 사복판사(司僕判事) 원림(元林)과 이조판서(吏曹判書) 만실(蔓實)과 대사헌(大司憲) 승직(繩直)이 공의 고조·증조·조부·부친이 되고 모친은 연안이씨(延安李氏)와 흥해배씨(興海裵氏)요, 배는 안동권씨(安東權氏) 현감(縣監) 계경(啓經)의 따님이다.
용재(慵齋) 선생이 잡혀갈 때 모친(母親, 安東權氏)이 경계해 가로되, 네가 죽을 당을 얻었으니 내가 어찌 슬퍼하랴. 내 생각은 조금도 말고 죽음이나 잘하라 하였으니 또한 이 모친에 이 아들이 있음이 당연하다 하리로다. 아들 넷이 있으니 숭준(崇準) 충순위(忠順衛)요, 종준(宗準)은 사인(舍人)에 증부제학(贈副提學)이며 홍준(弘準)은 진사(進士)요, 공준(公準)은 훈도(訓導)고, 네 따님은 감사(監司) 박치(朴緇)와 현감(縣監) 금계(琴啓)와 사과(司果) 권석형(權碩衡)과 참판(參判) 이우(李堣)에게 출가하였다.
충순위(忠順衛) 아들에 덕림(德林)이니 참봉(參奉)이요, 부제학(副提學) 양자(養子)에 덕연(德淵)이니 참봉(參奉)이며 진사(進士) 아들에 덕장(德璋)이니 찰방(察訪)이고 훈도(訓導) 아들에 덕전(德全)이니 첨추(僉樞)고 덕성(德成)도 첨추(僉樞)다. 나머지 자손은 다 수록하지 못한다. 옛날 비석이 낡고 해어져서 자손들이 근심하여 다시 세울 세나 상규(相圭)에게 비명(碑銘)을 부탁하니 정의상 사양치 못하고 삼가 명(銘)을 지느니 명(銘)에 가로대

충(忠)하고 의(義)하면서 금고(禁錮)를 당했으니 부끄럼이 없고 효(孝)하고 경(敬)함으로 행동의 지표로 삼았으니 즐거움이 있도다. 곤궁하면서 답답하게 생각지 않으니 너그러운 도량이요, 어진 아들을 두었으니 세상에 빛나도다. 그 큰 것을 추려서 이 돌에 새기노라.


*출처: 慶州李氏月城君派世譜(경주이씨월성군파세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