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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공(幽隱公) 이준구(李浚球) 묘지명(墓誌銘)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3. 00:35

□유은공(幽隱公) 이준구(李浚球)

○字는 중오(仲嗚). 號는 유은(幽隱) 初諱는 영탁(永鐸). 정조신해(正租辛亥) 9月8日生. 철종임자(哲宗壬子) 2月22日卒. ○墓는 예산(禮山) 신효리(新孝里)에 해좌(亥坐) 유묘지(有墓誌).
○配는 연일정씨(延日鄭氏) 선전관(宣傳官) 덕채(德采)의 女. 정조기유(正祖己酉) 5月6日生. 을해(乙亥) 5月3日卒. ○墓는 승지공조하(承旨公兆下)에 오좌(午坐). 祖 통덕(通德) 제봉(濟鳳). 曾祖 군수(郡守) 건인(建寅) 포은(圃隱) 몽주(夢周)의 后. 外祖 통덕(通德) 전주(全州) 이익진(李益珍).
○配는 기계유씨(杞溪俞氏) 석환(錫煥)의 女. 정조임자(正朝壬子) 10月14日生. 임인(壬寅) 7月27日卒. ○墓는 선구우강(先舅右岡)에 묘좌(卯坐) 쌍분(雙墳). 祖 건주(健柱). 曾祖 통덕(通德) 한규(漢奎). 外祖 록주(騼州) 이유광(李有光). *1987년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



幽隱公墓誌銘(유은공묘지명)
–姪子(질자) 泰炯(태형) 識(지)

緬惟我李有代序其著於譜見於史斑斑可紀而傳者平章事諱謁平糾合六部翊載羅祖肇基於始左僕射月城君諱之秀傳德襲休倡名光前紹業於後自新羅迄于高麗數族之顯者必以李氏爲甲入 國朝有諱檍贈兵曹參議是生諱慶昌康陵參奉 贈戶曹參判參判是生諱弘肇知中樞府事贈戶曹判書判書是生諱喜集穩城府使府使是生諱彦佑司圃署別提於公爲六世五世高曾祖也考諱應鐘娶平山申氏都事大恒女都元帥砬後生二男再娶安東金氏及第俶女上洛伯忠烈公弓慶後生一女男長卽吾先考諱浚瑞次卽公女楊州趙明淳時菴相禹後公諱浚球字仲鳴號幽隱以 正宗辛亥九月八日生四歲甲寅母歿十三癸亥父歿二十五乙亥妻鄭氏歿三十一辛巳祖母歿三十五乙酉兄歿三十六戊子繼母歿四十四甲午 邱㛮歿五十二壬寅妻俞氏歿六十二壬子逝吁竆矣噫公自幼奇偉卓犖人皆以公輔期之若將光賁我門闌矣家運零替早失怙恃隨我先考同歸德山楸鄕事母以孝敬兄以誠睦族以和與友以信也稱君子人也屢擧不中晚年有遯世之意築室於禮山新孝里先考墓下以漁樵爲送年之資邂逅園翁溪友問桑麻說秔稻量晴較雨探節數時居家安祥莊黙常曰忠孝人之本無慾則自在而至於取友必端人君子也誦莫將心內事說與故人知之句訓戒子姪簞瓢屢空樂顔氏之貧獘縕不恥確仲由之操歲乙酉我先考歿後廟主權奉于公家我先妣亦同爨凡於喪葬蒸嘗莫不盡禮盡誠而至若我先考喪葬尤有所勞神焦思者占新壙於大興墨石里他人避嫌之他以勢以價莫知塚主或作遊山客或作農夫形逗留彷徨數十日必知其無主然後始乃營宅實公之勤苦也余小子䆁褐以後嘗曰吾家屢代簪纓室于我先考我先兄早年捐世我亦命窮己老家聲幾乎不振矣汝今立身門祚興賛係汝一身愼之勉之言猶在耳余豈忘心鳴呼壬子春友人柳宜祥來戌安興鎭赴衙後以書以訊期欲面穏公暮年寄迹於林泉無意於尋訪况朱門出入是公素志耶然交契湥重難孤勤誼不獲己駕焉二月二十二日病卒于安興客館慟矣慟矣卽爲返櫬厝于家後而荏苒歲月從弟不能行擧緬之禮而己歿甘載後從姪在勳擇善地叶吉日某年某月某日葬于某郡某里某坐之原在勳可謂善繼人之志者也公元配延日鄭氏宣傳官德采女圃隱夢周後无育繼配 杞溪俞氏士人錫煥女市南棨後生一男定柱定柱娶安東金氏重根女仙源尙容後生四男二女男長在勳今出身次在田在烈在兼女長慶州金喆喜忠愍公弘翼後次女姑未筓在勳二男在田男在烈男幼余小子情無盡而才拙文短安能形容其潛德幽光以垂來許聊記世系生卒子孫錄納諸壙南以俟百世之考信焉銘曰
維公姿之天梃兮用作求于世德終貧窶而樂道兮里上仁之必擇爰一心之孝友兮旣九族之惇睦付經綸於漁樵兮蹈素履於天澤懷瑾瑜之美器兮何遭時之不淑雖未得其薦揚兮必有慶於善積詎同泯於泉壤兮矢永存於金石於乎前人不忘兮簇余胷之鬱悒省楸原而興感兮綴蕪辭而銘刻


*慶州李氏鼎珉錄 v2 (泰炯 編輯)


●유은공묘지명(幽隱公墓誌銘) 역문(譯文)
   -질자(姪子) 태형(泰炯) 지(識)

우리 이씨(李氏)는 대수의 차례가 족보(族譜)에 기록돼있고 역사에 나타나 있어 반반(斑斑)이 기록돼있는 이는 평장사(平章事) 휘 알평(謁平)이 6촌을 규합(糾合)하여 신라(新羅) 시조(始祖)를 도와 개국했고 좌복야(左僕射) 월성군(月城君) 휘 지수(之秀)는 위로부터 전해오는 덕(德)을 계승하여 앞뒤로 이름을 밝히고 업(業)을 이어 신라(新羅)로부터 고려(高麗)에 이르는 동안 씨족 중에 가장 드러난 집을 수룰 놓아보면 반드시 이씨(李氏)로 제일로 꼽더니 국조(國朝, 조선朝鮮)에 들어와 휘 억(檍)은 증직(贈職) 병조참의(兵曹參議)요, 참의(參議)가 휘 경창(慶昌)을 생하니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증직(贈職) 호조참판(戶曹參判)이요, 참판(參判)이 휘 홍조(弘肇)를 생하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증직(贈職) 호조판서(戶曹判書)요, 판서(判書)가 휘 희집(喜集)을 생하니 온성부사(穩城府使)요, 부사(府使)가 휘 언우(彦佑)를 생하니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니 공에 6대·5대·고조·증조·조부가 되고 고의 휘는 응종(應鐘)이니 평산신씨(平山申氏) 도사(都事) 대항(大恒)의 따님에 장가드니 도원수(都元帥) 립(砬)의 후손이다. 2남을 생하고 안동김씨(安東金氏) 급제(及第) 숙(俶)의 따님에 재취하니 상락백(上洛伯) 충렬공(忠烈公) 궁졍(弓慶)의 후손이다. 생 1녀하다. 남장에 우리 선고 휘 준서(浚瑞)요, 다음이 공(公)이고 여는 양주(楊州) 조명준(趙明淳)에 출가하니 시암(時菴) 상우(相禹)의 후손이다.
공의 휘는 준구(浚球)요, 자는 중명(仲鳴)이며 호는 유은(幽隱)이니 정종(正宗) 신해(辛亥) 9월 8일에 공이 출생하고 생후 4세에 모친이 별세하고 13세 계해년(癸亥年)에 부친이 졸하고 25세 을해(乙亥)에 처 정씨(鄭氏)가 졸하고 31세 신사(辛巳)에 조모 별세하고 35세 을유(乙酉)에 형이 졸하고 38세 무자(戊子)에 계모(繼母) 졸하고 44세 갑오(甲午)에 형수가 죽고 52 임인(壬寅)에 처 유씨(俞氏) 졸하고 62세 임자(壬子)에 공이 졸하니 슬프다, 팔자도 궁하도다. 공이 어릴 때부터 인격이 기위탁락(奇偉卓犖)하여 사람마다 나라에 큰 일꾼이 되어 우리 집 문호(門戶)를 빛내리라 믿었으니 가운(家運)이 비색하여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나의 선고(先考)를 따라 덕산(德山) 고향으로 내려가서 모친을 효로 섬기며 형을 정성껏 공경하고 족친(族親) 간은 화목으로 대하고 벗과는 믿음으로 사귀니 세상 사람들이 군자(君子)라 하더라.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여도 합격을 못 하고 만년(晩年)에 세상을 숨어 살 생각이 있어 예산(禮山) 신호리(新孝里) 선고(先考) 산소 아래 집을 한 칸 짓고 고기 잡고 나무하는 것으로 일과로 삼고 어부와 농부와도 가끔 만나 농사일을 묻고 의논하여 집에 있을 때는 씩씩하고 묵묵하고 항상 이르되 충효(忠孝)는 사람 근본이니 욕심이 없은즉 충효가 스스로 있고 벗을 사귀되 단정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군자(君子)라 하고 심중(心中) 있는 일을 속이지 말고 표주박이 여러 번 비어도 안자(顔子)*)의 가난함을 즐겨하고 떨어진 옷도 부끄러움이 없어 자로의 지조를 확실히 하다.
을유년(乙酉年)에 선고(先考)께서 별세하신 후 사당(祠堂)에 신주를 임시 권도로 공의 댁에서 받들고 우리 모친도 함께 불 때도 밥 지으며 초상장사(初喪葬事) 때 예(禮)와 성(誠)을 다하지 않음이 없고 우리 선고 장사 때는 공의 노심초사(勞心焦思)한 일을 말할 수 없이 크니 다름 아니라 대흥(大興) 묵석리(墨石里) 남의 묵는 묘 옆에 터를 심정(審定)했으나 과연 묵는 묘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어 공이 유산객(遊山客) 모양도 하고 혹은 농부 탈도 쓰고 그곳에서 수십일 조사한 끝에 주인 없는 묘인 줄 확인한 뒤에 안장했으니 이것이 다 공의 수고하신 덕택이다. 내가 복(服)을 벗은 뒤에 가라사대 우리 집이 여러 대 벼슬 집으로 오다가 나의 선형께서 일찍 세상을 뜨시고 나도 운명이 궁박(窮迫)하여 이미 늙어서 집안이 말이 아니더니 내가 이제 출세하였으니 집이 흥하고 쇠하는 것이 나 한몸에 달렸으니 삼가고 또 힘쓰라 하시는 말씀이 아직 귀에 쟁쟁하니 내 어찌 잊으리오.
슬프다, 임자년 몸에 친구 류의상(柳宜祥)이 안흥(安興)에게 와서 수 자리 살게 관아에 부임한 뒤에 편지를 주어 한번 만나기를 청하니 공의 연세가 모년(暮年)이라 산림(山林)에 숨어서 사람을 찾고 만나는데 뜻이 없을 뿐 하물며 관문(官門)에 출입하는 것이 본뜻이랴마는 교분이 깊은 처지에 남의 호의를 저버릴 수 없다 하여 부득이 가셨다가 2월 22일에 안흥진(安興津) 객사(客館)에서 병으로 운명하시니 통재통재(慟哉慟哉)라. 곧 반구(返柩)해서 집 뒷산에 임시로 모셨으니 얼마 세월이 흘렀으나 종제(從弟)가 면례(緬禮)를 못하고 죽었으니 20년 후 종질(從姪) 재훈(在勳)이 길지(吉地)를 가리고 길일(吉日)을 택하여 모월 모일에 모처에 안장하니 재훈(在勳)은 부형의 뜻을 잘 이었도다.
공의 원배(元配)는 연일정씨(延日鄭氏) 선전관(宣傳官) 덕채(德采)의 따님이요, 포은(圃隱) 몽주(夢周)의 후손이라 무후(无後)하고 계배(繼配)는 기계유씨(杞溪俞氏)니 사인(士人) 석환(錫煥)의 따님이니 1남 정주(定柱)를 생하고 정주(定柱)는 안동김씨(安東金氏) 중근(重根)의 따님에 장가드니 선원(仙源) 상용(尙容)의 후손이라. 4남 2녀를 생하니 장남에 제훈(在勳)이요, 다음은 재전(在田)·재열(在烈)·재겸(在兼)이요, 장녀는 경주(慶州) 김철희(金喆喜)니 충민공(忠愍公) 홍익(弘翼)의 후손이요, 차녀는 아직 어리고 재훈(在勳)은 생 2남이요, 재전(在田)돠 재열(在烈)은 어리다. 나 소자(小子) 정(情)은 무궁하나 재주가 졸(拙)하고 문장(文章)이 짧아 공의 숨은 덕(德)과 빛을 만분의 일로 형용을 못 하고 선대(先代)의 세계(世系)와 생졸록(生卒錄)과 자손록(子孫錄)을 기록하며 광내(壙內)에 넣어서 백 년 후 상고하는 믿음을 하더라. 명왈(銘曰)
하늘이 내신 공의 자질이여. 세덕편(世德編)에 지었도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면서 도를 즐겨 함이여, 마을 어진 곳을 택했도다. 한마음으로 효도함이여, 구족(九族)이 화목하도다. 경륜(經綸)을 어초(漁樵)에 비침이여. 타고난 천성을 그대로 따랐네. 아름다운 포부는 품었으나 시댁의 불리함을 만났도다. 비록 공의 행적(行蹟)이 천양(薦揚)은 안됐으나 반드시 후손에 경사가 있으리라. 천대(泉臺)에서 없어질지라도 금석(金石)에 새긴 것은 길이 보전하리. 지나가신 분을 잊을 수 없음이요. 나의 가슴만 답답하구나. 산소에 참배하고 느낀 감정이여 두서없는 글을 지어 돌에 새기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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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자(顔子) : ‘안회(顔回)’를 높여 이르는 말.안회(顔回) :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이다. 자는 자연(子淵)이다. 자(字)를 따서 안연(顔淵)·안자연(顔子淵)이라고도 부른다. 학덕이 높고 재질이 뛰어나 공자의 가장 촉망받는 제자였다. 그러나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빈곤하고 불우하였으나 개의치 않고 성내거나 잘못한 일이 없으므로, 공자 다음가는 성인으로 받들어졌다. 그래서 안자(顔子)라고 높여 부르기도 한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