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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재공(湫齋公) 이형원(李馨源) 행장(行狀)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2. 23:54

□추재공(湫齋公) 이형원(李馨源)

○字는 군행(君幸)이요, 號는 추재(楸齋). 숙종경자(肅宗庚子) 12月13日生. 순조(純祖) 갑신(甲申) 6月8日卒. ○墓는 당하리(堂下里) 후산(後山)에 간좌(艮坐) 유비석(有碑石). 효행(孝行)이 탁이(卓異) 학문돌수(學問湥邃) 사림재현(士林齋顯). 철종임자(哲宗壬子)에 증동몽교관(贈童蒙敎官)하고 임술(壬戌)에 명정려(命旌閭).
○配는 고성김씨(固城金氏) 방현(邦賢)의 女. 병오(丙午) 5月24日卒. ○墓는 마동(馬洞) 동편(東便)에 병좌(丙坐).
○配는 평강제씨(平康祭氏) 중택(中澤)의 女. 갑진(甲辰) 5月20日卒. ○墓는 당하리(堂下里)에 계좌(癸坐). *1987년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



贈童蒙敎官旌閭湫齋李公行狀(증동몽교관정려추재이공행장)
–校理(교리) 鄭友鉉(정우현) 撰(찬)

公姓李諱馨源子君幸號湫齋系出雞林祖諱之秀麗朝金紫光祿大夫襲封月城君三傳有諱蔓實 本朝行吏曹判書號花軒其後簪纓不絕室 成宗朝有諱臻剛蔭府使即公之九代祖也高祖諱時興通德郞曾祖諱濈通德郞祖諱壽坤通德郞考諱錫老通德郞妣金海金氏光礪之女以 英宗癸酉十二月十一日生公于扶安一道堂北里公幼而潁秀文藝夙就甫齔嶷然如老成事親供養之道對人接應之節無不盡善製述文字無異宿儒讀書傳能解朞三百註聲譽播遠鄕中雅望之士聞風輻湊皆以琳瑯器之年及十七巍捷鄕解翼年會圍赴見多士之奔競曰汲汲乎名利君子之所不爲遂棄擧業專心經學家雖貧窶親極滋味適宜之方無不備至 英祖庚辰十一月二十九日母夫人捐世攀擗之痛守制之節一遵家禮父嘗患痢三朔沉㞃日事刀圭衣不解帶畫宵嘗糞以驗甜苦且每祈天願以身代至於急遽之時斫指注血以和藥餌至誠所感屢見差復至癸丑正月二十六日又丁外艱送終之節祭奠之禮一如前喪三年廬居日省墳墓終身不懈荀非根天之誠篤也之行能如是乎且以弱年失恃常限奉旨之不長每當喪餘七戒三齊致其如在之誠暮年築室于墓下扁其堂曰楸齋以爲終身之慕王+巛+貝節疏行不可枚擧而歲値己庚甲乙之歉荒傾盡甁罌以救其族親鄰里賴以全活者甚衆赤驗其孝心中出來者也儒稟道 啓積有年所 哲宗癸丑道內儒生齊籲於 法駕之前特蒙褒揚之典 贈童蒙敎官壬戌 命旌表里人之至誠天必黙佑而闡揚歟 純廟甲申六月初八日以天年終享年七十有二葬于堂北後岡艮坐之原配令人固城金氏邦賢女 正廟丙午五月二十四日卒葬于西道馬洞巳坐之原繼配令人平康蔡氏重澤之女無育 憲宗甲辰五月二十日卒葬于堂北後岡癸坐之原公生二男長集弘次集聖集弘又襲庭訓孝友純篤早遭內艱攀擗守制一遵禮節善事繼母蔡氏滫瀡之養菽水之供竭力備足而夫人性且嚴峻如有怒色則下氣怡聲務悅親顔以順其志如有不安節不翔不櫛嘗藥嘗糞力圭百方每見告痊至甲辰年八十三矣以天年終時府集弘年七十有一廬墓三年不墮其身思慕之誠老而不倦鄕里攢頌曰奉侍至誠不讓乎閔損王祥之行矣薦剡有年 堂宁戊辰 贈童蒙敎官一門兩孝百世模楷此可謂醴泉有源靈芝有根世集弘娶潭陽田氏得良之女生二男二女長栽榮次麟榮繼集聖后女適金錫永次適高時麟栽榮生一男一女男圭白改名冕雨令獻納女適李泰周麟榮生二男三女男長用雨次吉雨女適金周鑑次適林順煥次適金達振公之曾孫冕雨錄公之行托余成狀余辭之固而請益勤遂此忘拙扌+吳次以備後之立言君子取以考焉贊曰
扶風世家月城後昆欲求忠臣必於其門楸齋賢公終不可諼歎極菽水誠切晨昏曾若養志黔又嘗痢親候疾革斫指以食刀圭百方竟至痊可旣失怙恃廬墓三載風樹㴱感攀栢哀號爰有令胤孝思不匱閔損着蘆王祥抱柰事繼母氏終始不渝一門兩孝是父是子訓襲家庭謨詒來孫百行之首四德之完靈芝秀根醴泉溯源贈官表宅天維純佑南州冠冕仰若山斗積善餘慶永世錫類萬有千年承承繼繼


*慶州李氏鼎珉錄 v2 (泰炯 編輯)


●증동몽교관정려추재이공행장(贈童蒙敎官旌閭湫齋李公行狀) 역문(譯文)
   -교리(校理) 정우현(鄭友鉉) 찬(撰)

공의 성은 이씨(李氏)요, 휘는 형원(馨源)이며 자는 군행(君幸)이며 호는 추재(湫齋)이며 계림(雞林, 鷄林)에서 난 자손이라. 휘 지수(之秀)는 고려(高麗)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월성군(月城君)에 3대를 전(傳)하여 휘 만실(蔓實)은 본조(本朝, 조선朝鮮)에 이조판서(吏曹判書) 호는 화원(花軒)이요, 그 뒤 사환(仕宦, 벼슬)이 연속 부절(不絕)했고 성종(成宗) 때 이르러 휘 진강(臻剛)이 음직(陰職) 부사(府使)니 공의 9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시흥(時興)이니 통덕랑(通德郞)이요, 증조의 휘는 즙(濈)이니 통덕랑(通德郞)이요, 조의 휘는 수곤(壽坤)이니 통덕랑(通德郞)이며 고의 휘는 석로(錫老)니 통덕랑(通德郞)이며 비(妣)는 김해김씨(金海金氏) 광여(光礪)의 따님이니 영종(英宗) 계유(癸酉) 12월 11일 부안일도(扶安一道) 당북리(堂北里)에서 공이 출생하다.
공이 어릴 때부터 기상이 준수하여 문필(文筆)이 숙성하고 이를 갈 어린 나이에 점잖은 노성인(老成人) 같고 어버이 섬기는 도리와 대인 접응(接應) 하는 절차가 어긋나는 일이 없고 글을 짓는대도 늙은 선비와 같으며 서전(書傳)을 읽을 때도 능히 삼백주(三百註)를 해석하여 명성이 널리 들리니 향중(鄕中) 선비들이 많이 찾아와서 모두 아름다운 선비로 칭찬하다. 나이 17에 향시(鄕試)에 으뜸하고 다음 해에 도시(都試)에 응시코자 하다가 많은 선비가 경쟁하는 것을 보고 명리(名利)에 급급해하는 것은 군자(君子)의 도(道)가 아니라 생각하고 벼슬길을 버리고 경학(經學)에 전심하였고 집이 비록 가난하나 어버이 구미에 맞는 음식은 극력구비(極力具備) 하더니 영묘(英廟) 경진(庚辰) 11월 29일에 모친이 별세하니 반벽지통(攀擗之痛)과 장례지절(葬禮之節)을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준수하였다.
부친이 설사 병으로 앓아누우니 정성껏 약을 달이고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밤낮으로 똥을 맛보고 달고 쓴 것을 증험하며 하늘에 기도하여 자기 목숨을 대신하기를 빌었고 병환이 위중하여서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 병의 차도를 받고 계축년(癸丑年) 정월(正月) 26일에 또 외간상(外艱喪, 아버지의 상사)을 당하니 초종장례(初終葬禮)와 제전지절(祭奠之節)을 전상(前喪)과 같이하고 삼년시묘(三年侍墓)에 날마다 분묘를 살피고 쓸기를 게을리 아니하였으니 하늘이 낸 효성이 아니면 이같이 하리오, 젊어서 어버이를 여윈 관계로 오래 받들지 못한 것을 한(恨)을 하여 모년(某年)에 묘 아래 집을 한 칸 짓고 이름을 추재(楸齋)라 하고 종신토록 부모를 추모하다. 떳떳하고 아름다운 행장(行狀)은 일일이 기록할 수 없으나 3, 4년간 흉년이 심할 때 집에 저축한 양식을 흩어 족친과 이웃을 구제하여 목숨을 구한 자도 심히 많았으니 이 역시 효심에 우러나온 것이지요, 유림(儒林)에서 이 사실을 상부에 누차 추천하였으나 말이 없으므로 철종(哲宗) 계축(癸丑)에 도내 유생(儒生)들이 법가(法駕)의 앞에서 상신(喪神)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이란 벼슬과 정려(旌閭)를 받으니 마을 사람의 자성을 하늘이 감동하사 포양(褒揚)의 은전(恩典)을 받음일진대 순묘(純廟) 갑신(甲申) 6월 초 8일에 졸하니 향년(享年)이 72세라. 당북후강(堂北後岡) 간좌(艮坐)의 산에 안장하다.
배(配)는 영인(令人) 고성김씨(固城金氏) 방현(邦賢)의 따님으로 정묘(正廟) 병오(丙午) 5월 24일에 졸하여 서도마동(西道馬洞) 사좌(巳坐)의 언덕에 장사했고 계배(繼配)는 영인(令人) 평강채씨(平康蔡氏) 중택(重澤)의 따님이나 생산이 없고 헌종(憲宗) 갑진(甲辰) 5월 20일에 졸하여 당북후강(堂北後岡) 계좌(癸坐)로 안장하다. 공이 2남을 생하니 장남에 집홍(集弘)이요, 차남이 집성(集聖)이라. 집홍(集弘)이 가정교훈(家庭敎訓)을 잘 지켜 효도하고 우애함이 독실하더니 일찍 내간상(內艱喪, 어머니의 상사)을 당하여 초종장례(初終葬禮)를 일준가례(一遵家禮)하고 계묘(繼母)를 효로 섬겨 모든 음식을 식성에 따라 준비하고 모부인이 엄준하여 성내는 기색이 있으면 유순하고 화평한 안색을 하고 모친을 즐거워하도록 노력하며 편찮을 때는 세수도 아니 하고 머리도 빗지 않고 사탕을 게을리 않더니 갑진년(辰年年)에 83세로 세상을 뜨니 이때 집홍(集弘)이 71세라.
삼년여막(三年廬幕)에 부모를 생각하는 정성이 늙는다고 쇠하지 않으니 향중(鄕中)이 모두 찬양하기를 ‘생전 사후 부모에 대해 효성이 민자건(閔子騫)1) 왕상(王祥)2)에 못지않다’ 하더라. 이 사실을 나라에 천거한 지 몇 년이 지난 무진년(戊辰年)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이란 직을 받아 한집에 두 효자(孝子)는 백세(百世)에 모범이라 예천(醴泉)도 근원이 있고 영지(靈芝)도 뿌리가 있다고 하리로다. 집홍(集弘)은 담양전씨(潭陽田氏) 득양(得良)의 따님에 장가들어 2남 2녀를 생하니 장남에 재영(栽榮)이요, 차남에 인영(麟榮)이 집성(集聖)에게 출계했고 맏딸은 김석영(金錫永)에 출가했고 다음은 고시인(高時麟)에 출가하다. 재영(栽榮)이 생 1남 1녀하니 남에 면우(名冕)니 관(官)은 현납(獻納)이요, 딸은 이태주(李泰周)에 출가했고 인영(麟榮)은 생 2남 3녀하니 장에 용우(用雨)요, 다음은 길우(吉雨)요, 맏딸은 김주감(金周鑑)에 출가, 둘째 딸은 임순환(林順煥)에 출가, 셋째는 김달진(金達振)에 출가하다. 공의 증손 면우(冕雨)가 공의 행장(行狀)을 지어달라고 나에게 부탁하여 내가 자격이 없다고 사양하니 그 청이 더욱 간절함으로 오졸함을 잊고 위와 같이 쓰고 후일 군자(君子)의 상고하기를 기다린다.
찬왈(贊曰) 부풍(扶風) 땅에 대로 사는 집안이요, 월성이씨(月城李氏) 후손이라 충신(忠臣)을 구할진대 이 집에서 구하라. 추재(楸齋) 같은 어진 이는 끝끝내 잊을 수 없네. 즐거이 봉친(奉親)할 음식을 만들고 정성은 아침저녁 부모 침소 살피는 데 바쳤도다. 뜻을 기르는 대는 증자(曾子)와 같고 대변을 맛보는 것은 금씨와 같네. 어버이 병환이 위급하니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였고 백방(百方)으로 약을 써서 병환이 나았네. 부모 상중에는 시묘삼년(侍墓三年) 하는 동안 나무를 잡고 애통했네. 어진 아들이 있으니 효심이 못지않네. 민씨(閔氏, 민자건閔子騫)의 효와 왕상(王祥)의 정성으로 계모(繼母)를 선양하되 시종(始終)이 여일하도다. 이 집안에 두 효자는 이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네. 훈계는 가정에서 이었고 후손에까지 전했도다. 백행(百行)에 으뜸이요, 사덕(四德, 인仁·의義·예禮·지智)에 제일이라. 영지(靈芝)에도 뿌리가 내리고 단 샘도 근원이 있도다. 벼슬을 주고 집에 정려(旌閭)하니 하늘이 도움이라. 남쪽 지방에서 으뜸이니 북두(北斗)같이 우러른다. 착한 집에 경사(慶事)는 길이 전하리라. 천년만년(千年萬年) 길이 이을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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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자건(閔子騫) : 중국 노나라 때의 현인(賢人). 이름은 손(損)이며 자건(子騫)은 자이다. 효행이 뛰어났으며 공자(孔子)의 뛰어난 열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2) 왕상(王祥) : 진(晉) 나라 때 효자(孝子). 자기에게 모질게 대하는 계모(繼母)에게 극진히 효도하였는데 추운 겨울날 그 어머니가 물고기를 먹고 싶어하자 왕상이 냇물에 나가 고기를 잡기 위해 얼음을 깨려 하니, 얼음이 갑자기 저절로 깨지면서 잉어 두 마리가 뛰어나오므로 그것을 가져다가 어머니를 봉양했다 한다. 『진서(晉書)』 卷三十三 「왕상전(王祥傳)」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