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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11세손 용운공 이용우] 龍雲處士月城李公行狀(용운처사월성이공행장)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2. 14:00

□용재공(慵齋公) 11세손 용운공(龍雲公) 이용우(李龍雨)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②통정공(通政公) 엽(燁) → 4世孫 참봉공(參奉公) 재창(在昌) → 5世孫 형달(亨達) → 6世孫 명식(命植) → 7世孫 ①가선공(嘉善公) 태화(泰華) → 8世孫 ⑤석춘(碩春) → 9世孫 ④규찬(圭瓚) → 10世孫 ②종대(鍾大) → 11世孫 ②용운공(龍雲公) 용우(龍雨)


龍雲處士月城李公行狀 幷序
(용운처사월성이공행장 병서)

-檜山(회산) 黃必樂(황필락) 撰(찬)

公諱龍雨字聖範自號龍雲其先生月城人新羅佐命大臣諱謁平之後勝國有諱之秀官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入我 朝有諱宗準號慵齋官至弘文館校理師事佔畢齋金先生戊午禍作與鄭一蠹金寒暄金濯纓諸先生同時被禍後 贈副堤學享鏡光院栢麓社七傳以有諱泰華於公爲高祖曾祖諱碩春祖諱圭瓚俱有隱德考諱鍾大成均博士妣永春李氏士人象河女令儀令德有女士風辛未十月十五日生公于鳳城之明湖里第姿相耿介才智過人自髫髦時不與凡兒戱嬉暫不離於親側應對惟謹於伯康公敬之如嚴父與二弟友愛尤篤大人公嘗奇之曰吾家之漸在此兒甫七歲受學聰明頴悟能解字義不煩斆督至成童文理博治著作具格筆劃楷精文人韻士之來觀者嘖嘖嘆賞焉己丑聘于朴氏謹愼造端行儀沈黙言辭終容外舅公言於人曰吾有佳壻不讓於郤監之羲之有似眉蘇之魯直甲午中司馬試遊泮宮與同僚講論經義若決江河少無疵類衆皆推右而悅服伊時國步漸艱朝綱日弛無復有意於進就退而歸鄕不復夢京華軟塵株守林樊勵志强勁懋守先業不失儒家本色丙申謁陶山院徃拜響山李先生于下溪師事昵待質疑問難極蒙嘉獎丁酉入淸凉山玩賞吾山堂及十二諸勝而一一題詠訪雲山芝軒鄭先生避亂處遊愛月巖以寓高景之思因感賊詩有瀟灑出塵底意自庚戌屋社之後絶意山水之遊廣求當世丈席如晩修李公時佐二江柳公萬植耕山趙公昇衍諸老服習大家風範巨匠行治及乎時爻日塾喧豚滔天無有苟全之策乃欲求頣閑養靜之方晩卜于基川天浮山下泥田村山繚勢阻泉甘土肥可耕可讀宣稼宣穡允合鞱晦棲遲之所也不以太學生自居日與山翁野叟日夕談話少無慽慽底意甘窮忍苦蓬蒿沒戶志意則尙充然效靑門而優優自靖臥東岡而洋洋樂飢盖其造詣之深涵養之工有所蓄積也或因暇日登臯嘯詠臨流酣觴暢叙幽情消遺世慮苦將遯世無憫而止可勝嘆哉癸丑二月二十四日以無何之崇考終于寢享年四十二逾月而葬于孔門山之癸丑坐原配宣人潘南朴氏士人勝德女淑愼端正克配君子生后於公一年壬申歿後於公四十年癸巳無育以仲弟斗雨子相學爲嗣相學有四男四女長潤炯次宰炯文炯始炯達城徐鎭晧南陽洪明善平海黃永煥平山申東明其婿也餘不錄於戯公禀剛明之姿兼敏達之才而慥慥篤學詩文足以華國智諝足而需世而妙年登庠噪鳴一時擬有大施之望矣不幸運剝時違憚狐見拜措諸岡僕之義蟄伏巖阿黙守臲卼縱象寠空之憂竟悲伯道之天而壽又不永何其天之所以卑之厚而又何以施之薄也著有淸涼雲山諸什暨顔子不改其樂論一篇觀之則可想其志氣之超邁而文華之贍逸也不必待後之子雲而自有闡揮之汲汲者矣日公之胤相學甫使吾堂姪炳寔抄其事行囑余以狀行之文以余居甚密邇知公懿蹟莫我若也又與相學契交尤厚故也不可以不文辭累述如右以竢秉筦家採擇之資云矣


●용운처사월성이공행장 병서 역문
(龍雲處士月城李公行狀 幷序 譯文)

-회산(檜山) 황필락(黃必樂) 찬(撰)

공의 휘 용우(龍雨), 자는 성범(聖範)이고, 호는 용운(龍雲)이라 부른다. 그 선조는 월성(月城) 사람이니, 신라(新羅) 좌명대신(佐命大臣) 휘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휘 지수(之秀)는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고, ​아조(我朝, 조선朝鮮)에 들어와 휘 종준(宗準) 호는 용재(慵齋)니 벼슬이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이르렀다. 점필재(佔畢齋) 김선생(金先生, 김종직金宗直)을 스승으로 섬기다가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가 일어나자, 정일두(鄭一蠹)·김한훤(金寒暄)·김탁영(金濯纓) 등 여러 선생과 함께 화(禍)를 입은 뒤 부제학(副堤學)을 증직(贈職) 받았고 경광서원(鏡光書院)·백록사(栢麓社)에 입향(入享)하다.
​七대를 내려와서 휘 태화(泰華)는 공의 고조요, 증조의 위는 석춘(碩春)이요, 조의 휘는 규찬(圭瓚)이니, 다 은덕(隱德)이 있었고 고위의 휘는 종대(鍾大)니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다. 비위(妣位)는 영춘이씨(永春李氏) 사인(士人) 상하(象河)의 따님이니 아름다운 용모며 아름다운 덕성이 있었다.
신미(辛未) 10월 15일에 봉성(鳳城) 땅 명호리(明湖里) 집에서 태어났다. ​용모가 깨끗하고 재주가 보통에 지나서, 어릴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 장난치고 놀지 않으며, 부모 곁을 떠나지 않고 부모님 시중을 독실(篤實)히 하며, 백강공(伯康公)에게 공경하기를 부모와 같이하고, 두 동생에게 우애함이 더욱 돈독하니, 대인공(大人公, 공의 부친)이 기이하게 여겨 가로대 ‘우리 집 희망이 이 아이에게 있다’ 하더니, 공의 나이 겨우 일곱 살에 입학하니, 총명영오(聰明穎悟)해서 능히 글을 뜻을 깨달아 가르치는데 번거롭지 않았고, 성동(成童, 열다섯 살 된 소년)이 됨에 문리(文理)가 넓고 짓는 글도 격식에 맞으며 필획(筆劃)도 해정(楷精)하니, 문사와 식객이 와서 보는 자는 칭찬이 자자했다.
기축(己丑)에 박씨(朴氏)에게 장가드니 행동이 근신하고 품위가 침묵하여 언사가 조용하니, 외구공(外舅公, 장인丈人)이 남에게 말하기를 내 아름다운 사위가 있으니, 극감(郤監)의 희지(羲之)에 양보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미소(眉蘇)의 노직(魯直)과 같음이었다. ​갑오(甲午, 1774)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반궁(泮宮, 학교)에서 동료들과 경서대의(經書大義)를 강론(講論)할 때, 강물이 흘러듯 하면서도 조그마한 하자도 없으니 여러 사람이 윗자리에 추대하고 열복(悅服)했다. 그 당시 나라 국정이 문란하고 국정이 해이해짐을 보고 다시 벼슬길에 나가기 싫어 물러나 고향에 돌아온 뒤로 서울의 번화한 모양은 꿈에도 보지 않고 산림을 지키며 뜻을 더욱 가다듬어 선대유적(先代遺迹)을 착실하게 수호하며 유가(儒家)의 본색(本色)을 잃지 않고 ​병신년(丙申年)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찾아 알묘(謁廟)하고 향산(響山) 이선생(李先生)을 하계(下溪)에서 찾아뵙고 ​스승으로 섬기며 가까이 모시면서 의심나고 어려운 것을 물어서 칭찬을 많이 받았다.
정유년(丁酉年)에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서 오산당(吾山堂)과 12승경(勝景)을 구경하고 일일이 글을 쓰고 읊었고, 운산(雲山) 지헌정선생(芝軒鄭先生) 피난처를 찾아 애월암(愛月巖)에 놀 때, 고경(高景)의 생각을 따라서 시(詩)를 지으니 맑은 기운이 티끌 세상을 떠난 것 같았다. 경술년(庚戌年, 1910년) 국치(國恥) 후로는 산수(山水)에 노는 일을 끊고 당세(當世) 명망 높은 장석(丈席)을 찾으니, 만수이공(晩修李公) 시좌(時佐)와 이강유공(二江柳公) 만식(萬植)과 경산조공(耕山趙公) 승연(昇衍)과 같은 분으로 더불어 대가(大家) 규모와 행동 치적을 익히며 그 사회에 미치는 바 있었으나, ​혼란이 하늘에 닿으니 온전한 계책이 없어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구하고서, 만년에 기천천부산(基川天浮山) 아래 이전촌(泥田村)에 터를 잡으니 산이 둘러싸이고 외세가 막혔으니, 물 좋고 토지는 비옥하여 농사하기에 적합하고 글도 읽을 수 있으니 숨어 살 곳은 가장 적합한지라 태학생(太學生)으로 자처하지 않고 농촌 늙은이와 밤낮으로 상종하면서 조금도 답답해하지 않고 궁한 것을 달게 여기고 괴로운 것을 참으니, 쑥대가 집을 덮어도 뜻은 항상 충만하니 청문(靑門)을 모방하여 넉넉히 동강(東岡)에 편히 누어서 배꼽은 것도 즐겨 하니 이것도 다 공의 견문이 깊고 수양을 쌓은 덕택이라. 혹 여가를 타서 언덕에 올라 휘파람 불며 냇가에 임해서는 술잔을 기울여 답답한 심정을 펴고 세상 근심을 살라버리고 세상을 도망해서도 걱정이 없는 것 같으니 장하도다. 계축년(癸丑年, 1913년) 2월 24일에 세상을 뜨니 향년(享年) 42세라, 달을 넘겨서 공문산(孔門山) 계좌(癸坐)의 자리에 안장(安葬)하다.
배(配)는 의인(宣人) 반남박씨(潘南朴氏) 사인(士人) 승덕(勝德)의 따님이니, 숙신(淑愼)하고 단정(端正)하여 능히 군자(君子)의 짝이 되었다. 공보다 한해 뒤인 임신년(壬申年)에 출생하고, 공보다 40년 뒤인 계사년(癸巳年)에 죽으니 아들이 없어 중간동생 두우(斗雨)의 아들 상학(相學)을 양자(養子)하다. 상학(相學)이 4남 4녀를 낳으니 장남에 윤형(潤炯)이요, 다음이 재형(宰炯)이요, 문형(文炯)·시형(始炯)이고 따님은 달성(達城) 서진호(徐鎭晧)·남양(南陽) 홍명선(洪明善)·평해(平海) 황영환(黃永煥)·평산(平山) 신동명(申東明)에 출가했다. 나머지는 다 기록지 않는다.
공은 밝고 강직한 자질을 타고났으며 민첩하고 활달한 재주를 겸했는데 독실(篤實)하게 배우니 시와 글이 나라를 빛낼만하고 지혜는 족히 나라에 쓰일만하다. 젊은 나이로 태학(太學)에 들어가 한때를 울리니 크게 쓰일 희망이 있으니 불행하게도 운수가 없고 때를 못 만나서 여우에게 절을 하게 되니 의리를 집고 바위 아래서 위태로움을 묵묵히 지켰으나 밥그릇이 자주 비고 후사(後嗣)마저도 없었으며 수(壽) 또한 길지 못하니 하늘은 어찌하여 두텁게 주고 야박하게 베푸는 것인고. 청량산(淸涼山)과 윤산(雲山)의 일들을 안자(顔子)의 불개기락론(不改其樂論)과 한가지로 본즉 가히 공의 뜻이 뛰어나고 문장의 넉넉함을 생각할 수 있다. 뒤에 반드시 자운(子雲)을 기다리지 않고도 세상에 밝히고자 하는 자 있으랴. 어느 날 공의 아들 상학(相學)이 나의 종질(從姪) 병식(炳寔)이 공의 사적(事蹟)을 빼서 나에게 행장(行狀)을 지으라 위촉하니 나는 가깝게 살아 공을 아는 자도 나만 한 이가 없을 것이고 또 상학(相學)과 더불어 사귐이 깊으니 글을 못 한다고 사양할 수 없어 위와 같이 대략(大略) 쓰고 후일 못 잡는 사람의 채택(採擇)을 기다리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