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양평공◇이양생

양평공(襄平公) 이양생(李陽生)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2. 10. 16:44

양평공(襄平公) 이양생(李陽生)


○1423년(세종 5, 계묘)~1488년(성종 19, 무신). 세조조(世祖朝)에 적개공신(敵愾功臣) 계성군(鷄城君)에 봉(封)하다. ○墓는 양주(楊州) 금곡(金谷)에 묘좌(卯坐). 안구보(按舊譜)컨테 기방주억(旡傍註抑) 혹후손(或後孫)이 궐비이연여금고동파(闕卑而然歟今攷同派) 가승(家乘)을 신(信)하고 적재록언(蹟載錄焉) 구보(舊譜)에 공지사적(公之事蹟)이 지유적개공신(只有敵愾功臣) 계성군(鷄城君) 등(等) 어이차역추복수록자야(語而此亦追復收錄者也)라. 금인대동보지중수(今因大同譜之重修)하야 득차자범위이십여차(得此者凡爲二十餘次)하니 난이일일수록(難以一一收錄)이요,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왈(曰) 계성군(鷄城君) 이양생(李陽生)이 卒에 賜祭禮葬(사제례장)하다.

*출처: 1987년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



이양생(李陽生) 양평(襄平)


시대: 조선
출생: 1423년(세종 5)
사망: 1488년(성종 19)
경력: 겸사복
유형: 인물
관련 사건: 이시애의 난
직업: 무신
성별: 남
분야: 역사/조선시대사
본관: 경주(慶州)



1423(세종 5)∼1488(성종 19). 조선 전기의 무신.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군수 이종직(李從直)이다.
서자로 태어나 어릴 때는 신을 삼아 저자에 내어 팔아 생활을 하였고, 비록 책은 읽지 못하였으나 무예(武藝)에 능하여 장용위(壯勇衛)의 군졸이 되었다.

1467년(세조 13)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토벌군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책록되고 계성군(鷄城君)에 봉하여졌으며, 충의교위(忠毅校尉) 행호분위중부사직(行虎賁衛中部司直)으로 겸사복(兼司僕)이 되었다.

서얼 출신이기 때문에 자급(資級)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으나 한 번도 현직(顯職)에는 등용되지 못하였고, 평생 겸사복으로 있으면서 포도장으로 도성 내외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도적 소탕에 공을 세웠다. 그 중에서도 관악산 일대에 둔취, 항거하였던 고도(古道)·김말응(金末應) 등의 소탕과 충주의 수리산(愁里山), 여주의 강금산(剛金山) 도적들을 소탕하여 큰 공을 세운 것이 유명하다.

평생을 겸사복으로 지냈으나 불평 한마디 없었고, 옛날 자신이 신장사하던 저자를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옛 친구들과 땅에 앉아서 이야기하다가 가곤 하였다 한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참고문헌]

『세조실록(世祖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45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