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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종보 역사탐구] “부도(不道) 은폐 모함, 충신 이종준(忠臣 李宗準)을 처형하다” / 이상우 편집위원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5. 1. 3. 19:09

경주이씨종보 제398호 2025년 1월 1일 수요일 6면, 7면
[역사탐구] “부도(不道) 은폐 모함, 충신 이종준(忠臣 李宗準)을 처형하다”

의정부 사인, 이종준(李宗準-월성군파, 중조22世)은 무오사화의 귀양길에서 일어난 종실 이총(李摠)의 부도(不道) 사건을 은폐하고 외면한 세력들에 의해 처형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른바 조작된 벽서의 詩, 무고(誣告) 사건이다. 사초(史草) 사건도 붕당이 아니라, 실제로는 주모자 김일손과 공동정범(共同正犯)의 관계였던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의해 밝혀졌다. 그것의 사실 관계는 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실체를 살펴, 바로 잡고자 한다. 실록을 바탕으로, 이종준이 공부했던 성리학의 관점에서 벽서-부도-사초사건 순으로 재구성하였다. 등장인물의 존칭은 생략한다. 〈편집자註〉


무오사화는 훈구파 도당이 조의제문을 비롯해, 정치적으로 예민한 각종의 사초를 모사하고 악용하여 청렴 정치를 추구하는 성리학의 사림파 인재를 숙청한 정치적인 사건이다.

무오사화, 이종준 등 25명 처벌로 매듭된다
옥사(獄事)의 사령(赦令) 반포를 보면, 김종직은 대역(大逆)으로 부관참시, 그 도당 김일손-권오복-권경유 능지처사, 이목-허반 참형, 강겸 곤장 1백 대에 종으로, 표연말-홍한-정여창-이총 난언(亂言)의 죄, 강경서-이수공-정희량-정승조 난언임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은 죄로 장 1백 대에 3천 리 밖으로, 이종준-최부-이원-이주-김굉필-박한주-임희재-강백진-이계맹-강혼은 붕당죄로 장 80〜100대에 먼 지방에 부처 하였다. 참형과 귀양에 처한 사람은 모두 25명(파면-좌천 제외)이다. 이로써 이른바 ‘사초 사건’은 15일 만에 매듭된다. (연산 4,1498.7.27./1)

■ 벽서사건과 부도 사건의 시작
이종준, 종실(宗室) 이총과 함께 귀양 길에 오른다
이종준은 붕당죄로 함경도 귀양길에 오른다. 하지만 귀양길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부도의 늪’으로 빠진다. 실록에 따르면 이종준은 녹양역에서 역시 함경도로 귀양 가는 왕의 친척인 종실(宗室) 이총을 만나 마곡역까지 천 리 길을 동행한다. 이종준은 마곡역에서 이사중(李師中)의 시(詩) 가운데 여섯 번째 구절인 ‘미사간유골이한(未死奸諛骨已寒)’ 한 구절을 벽상에 써 붙이고 떠났다.
함경도 관찰사 이승건(李承健)은 이를 발견하고 무오사화를 기획한 훈구파의 앞잡이 유자광을 통해 옥사의 풍문(風聞)과 시세(時世)에 민감한 연산군에게 고 한다. “신이 역리를 불러 물은즉 바로 이종준이 쓴 것이라 하옵니다. 종준은 김종직의 문도로서 이미 중죄를 입었는데도 오히려 징계를 아니 하고, 옛 시에 가탁(假託)하여 자기 뜻을 나타냈으니, 묻지 아니할 수 없사옵기로 신은 이미 가두고 국문하게 하였사온데, 만약 승복하지 아니하면 형장 심문을 하여 내심을 알아내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하니, 정승에게 수의 하도록 전교하였다. 추관 윤필상 등은 “이종준이 시를 벽상에다 쓴 것은 반드시 내용이 있을 것이 온 즉, 의금부로 잡아 오게 하여 추국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하니 가하다 전교하였다. (연산군일기 31권. 연산 4,1498.11.11./1.)

이승건이 왕을 기롱했다고 고한 이사중 시의 전문
이사중의 詩다.
孤忠自許衆不與(고충을 자부한들 대중이 허여 않고) / 獨立敢言人所難(홀로 서서 감언하긴 사람치고 어려워라) /去國一身輕似葉(나라 떠난 이 한 몸이 잎처럼 가볍지만) / 高名千古重於山(고명은 천만고에 산보다 무거우리) / 竝遊英俊顔何厚(함께 놀던 영준들아 낯이 어찌 두터우냐) / 未死奸諛骨已寒(죽지 않은 간유들도 뼈가 이미 싸늘하리) / 天爲吾皇扶社稷(하늘이 우리 임 위해 사직을 붙잡을진대) / 肯敎吾子不生還(어쩌다 그대를 살려 보내지 않으리라). (연산4,1498.11.11./1)


이종준, 이총의 부도 고변하고 역사와 충돌하다
이종준과 이총은 7일 만에 함경도에서 의금부로 끌려왔다. 이총의 부도(不道)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이승건이 이들을 한양으로 끌어오기 전에 함경도 감영에서 종준을 문초할 때 그가 옷깃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속에 작은 서간(書簡)이 들었는데 기록된 것이 바로 중대사이니, 위에 아뢰도록 하고 함부로 뜯어 봐서는 아니 된다.” 하므로, 승건이 그 옷을 가져다가 함봉하여 아뢰었으나, 왕은 궁중에 유치 내려보내지 않고 명하여 종준과 총을 끌어오게 하였다. (중략…) 종준이 당도하여 품속에서 한 서장(書狀)을 꺼내어 올리는데, 거의 만자(萬字)에 달하였다. 이는 다 총이 유배당했을 때(귀양 길) 不道 한 말들인데, 밀 먹인 종이에 쓴 것을 부연한 것이었다.”라고 고한다.
연산군은 부도를 보고, “이와 같은 추국의 사실을 바깥사람이 듣고 서로 전하여 이야기하다가 마침내 큰 죄에 빠지곤 하므로, 나는 국문에 참예한 낭청(郞廳)들이 누설시키는 것을 염려하노니, 경 등도 경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라고 추관들에게 경고하였다. (연산 4,1498. 윤 11.17./1)


연산군일기 31권, 연산 4년 윤 11월17일
무인 1번째 기사 1498년 명 弘治11년
벽에 시를 쓴 일로 이종준과 무풍정 이총이 함경도에서 끌려오다.
이종준(李宗準)·무풍정(成豊正) 이총(李摠)이 함경도로부터 끌려왔다. 이에 앞서 함경도 관찰사 이승건이 종준을 국문할 적에 종준이 그 옷깃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속에 작은 서간(書簡)이 들었는데 기록된 것이 바로 중대사이니, 위에 아뢰도록 하고 함부로 뜯어 봐서는 아니 된다.’ 하므로, 승건이 그 옷을 가져다가 함봉하여 아뢰었으나, 왕은 궁중에 유치 내려보내지 않고 명하여 종준과 총(摠)을 끌어오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왕은 곧 그 서간을 내어 필상 등에게 보였는데, 그 서간은 사방 1치쯤 되는 밀 먹인 종이[蠟紙]에 겨우 수십 자밖에 안 되었는데, 모두가 은어(隱語)라 풀 수가 없었다. 종준이 당도하여 품속에서 한 서장(書狀)을 꺼내어 올리는데, 거의 만자(萬字)에 달하였다. 이는 다 총(摠)이 유배당했을 때의 부도(不道)한 말들인데 밀 먹인 종이에 쓴 것을 부연한 것이었다. 전교하기를,
“이와 같은 추국(推鞫)의 사실을 바깥사람이 듣고 서로 전하여 이야기하다가 마침내 큰 죄에 빠지곤 하므로, 나는 국문에 참예한 낭청(郞廳)들이 누설시키는 것을 염려하노니, 경(卿) 등도 아무쪼록 경계하도록 하라.”
『태백산사고본』 9책 31권 16장 A면 「국편영인본」 13책 335면


함경도 관찰사 이승건이 연산군 앞에서 이총이 유배를 가면서 말한 不道한 말을 이종준이 만든 一萬字자 짜리 부도라고 말하며 종준의 품속에서 不道를 내놓게 하는 장면이다.
출처 조선왕조실록 1498년 윤11월17일자 연산군일기(31권).


이종준, 이총의 부도 작성 경위를 설명하다
마침내 이종준의 국문이 시작되었다. 종준이 말하기를, “신이 당초 죄를 받을 적에 걸음이 녹양역(綠楊驛)을 당도하니, 이총이 신에게 동행할 것을 요청하므로 드디어 말을 얻어 타게 하였습니다. 마곡역에 당도하여 생선을 얻어 삶으려 하니, 생각인즉 어머니께 드리고 싶었으나 되지 않으므로, 드디어 종직을, 꾸짖기를 ‘간유(姦諛)한 놈이 어찌 사람을 더럽히되 이렇게도 극단에 이르게 하는가.’하고, ‘죽지 않은 간유들도 뼈가 이미 싸늘하리(未死姦諛骨已寒)’라는 글 구가 생각나 벽상에 썼습니다. 이총이 신의 고한 바와 같이 부도한 발언을 하므로 즉시, 진계(陳啓) 하려고 했사오나 주달(奏達)할 길이 없었습니다. 벽서 사건이 발각되자, 이로 인하여 고할 수가 있다고 생각되어 마음속에 기쁨이 용솟음쳤습니다.” (연산 4,1498. 윤 11.17./2)
부도를 작성하고 고변(告變)한 경위를 설명하였다. 처음 부도 공개 때와 달리 연산군은 별다른 반응 보이지 않았다. 추관 윤필상, 유자광 등 훈구파 세력들도 마찬가지다.

이총의 부도 一萬字, 조선조 10대 대악의 범죄다
이 부도(不道)는 이종준이 양주군 녹양역에서 이총을 만나 함경도 마곡역까지 천 리 길을 동행하면서 총이 쏟아낸 부도한 말을 부도로 만든 것으로, 그 양이 무려 일만자(一萬字)에 달하였다. 11포인트로 A4용지 6장 분량이다. 이종준이 왕에게 내놓은 부도는 대역부도(大逆不道)의 그 부도를 말한다. 부도 죄는 남을 저주하는 말을 하거나, 말을 전하여 도리에 어긋나는 부도한 말을 하는 것이다. 왕실과 종실, 조정에 부도한 말을 하면 참형이다. 부도 죄는 조선조 10대 대악(大惡) 중의 하나다.

이총의 부도 문초 형식적으로 시늉만 내다
의금부에 끌려온 지 이틀 만에 부도의 당사자인 이총의 국문도 시작되었다. 첫날의 공초를 보면 제목이 ‘역모(逆謀)에 관련된 무풍정 이총을 고문하다’라고 적혀 있다. 총을 고문하니, “종준이 죄를 모면하려고, 거짓을 꾸며 신을 모함한 것이읍고, 실로 신이 말한 것은 아니옵니다.” 하였다.
(연산 4,1498.윤 11.19./3)
이총은 오히려 이종준이 자기를 모함하려고 부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귀양길에 만자씩의 부도를 거짓으로 창작했다는 것인가. 연산군이 부도를 본 후, 추관들에게 ‘누설 경고’한 것을 보면 그것에 얼마나 심각한 내용이 쓰여있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이총의 공초는 (연산 4,1498. 윤 11.22./1), (연산 4,1498. 윤 11.22./2), (연산 4,1498. 윤 11.25./2) 등 3회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별 내용도 없이 공초의 제목만 “역모 관련, 이총을 고문하다”라고만 적혀 있었고, 모두 “불복하였다”라는 기록뿐이다.

“훈구 세력, 부도 사건을 벽서의 무고로 바꾸다”
■ 윤필상, 부도 외면하고 벽서 조작으로 돌변하다
이총의 다섯 번째 공초를 앞두고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총의 부도 사건’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이, 느닷없이 죄도 안되는 이종준의 벽서사건으로 문초가 바뀐 것이다. 1498년 윤 11월17일 1번째 기사에서 보았듯이, 중대사의 일만자 짜리 부도가 갑자기 사라지고 난데없이 ‘풍문 이야기’가 등장한 것이다. 윤필상은 대간에서 “풍문에 의하면 이종준이 벽서의 일이 발각되자 도망해 달아나려 했다고 하는데, 만약 실지라면 왜 도망가려 하였겠습니까.” 하였다. (연산 4,1498.윤 11.28./2)
윤필상 등이 또 나직(羅織)과 부회(傅會)로 사람을 죽이려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들게 하는 장면이다. 실록에 나직은 죄를 꾸며 법망이 집어넣는 것이고, 부회는 억지로 이치에 맞추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요즘 말로 하면 ‘사건 조작’이다.
연산군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심복 유자광을 풍문 조사관으로 마곡역으로 보냈다. 27일 만에 돌아온 유자광은 ‘이종준이 도피하려는 상황’을 아뢰고 종준을 고문하였다. 그런데 불복하다가 전부다. (연산 4,1498. 윤 12.19./1) 원문을 보면 ‘庚戌/柳子光等還自咸鏡道, 啓宗準欲逃之狀, 拷訊宗準, 不服.’이다. 단지, ‘도피하려 했다는 상황’이라는 글자만 쓰여있을 뿐이다.
윤필상 등은 자기가 말한 풍문(風聞) 즉, 유자광이 고한 ‘이종준이 도피하려 했다는 상황’을 보태어 증거도 없이 이총을 무고했다며 종준을 무고죄(誣告罪)로 결론해 버린다. 실록을 다 살펴도 도망에 대한 증좌는 단 한 줄도 없다.
이 때문에 윤필상이 또 나직과 부회를 하려 한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좌참찬 홍귀달의 ‘이종준 구명 상소’ 끝머리에, 익명(匿名)의 사관이 “(중략…) 율(律)로 보아 죽일 수 없다. 윤필상 등은 이미 폐비 윤 씨 사옥 때 나직과 부회 하여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더니, 또 이종준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중략…)”라고 사초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원문: (중략…) 然律不當死。弼商等旣於史獄, 羅織傅會, 濫殺不辜, 文於宗準必殺不貸(중략…) (연산 5,1499.3.2./5) 사관이 윤필상의 나직과 부회 행위를 역사적 증거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사건 조작의 증좌다.

이종준 시 자신이 썼다고 진술했는데, 무슨 무고죄인가.
이종준은 이미 이총과 함께 마곡역에서 끌려와 연산군 앞에서 시(詩) 한 구절을 자기가 썼다고 진술했다. (1498년 윤 11월17일 2번째 기사) 이미 벽서의 시는 자기가 썼다고 했는데 이총을 무고했다니….
설사 무고죄로 나직과 부회를 하여도 처형할 수 없지만 아래 사안 정도의 석명(釋明)은 있어야 한다. △이종준은 시구(詩句) 하나를, 이승건은 시 한 편(8구절)을 내놓았다. 필체 감정은 하였는가. △유자광은 마곡역 현장 조사를 하고서도 육하원칙의 증거가 왜 없는지 △진정 시(詩)에 가탁하여 왕(王)을 기롱 할 수 있는 시(詩)인가 등이다.
추관들은 이런 기본 사안조차 배척하였다. 이 때문에 훈구파 세력이 이총의 부도를 감추려고 거짓으로 이종준에게 총을 무고했다고 씌워 사건을 조작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연산군은 “이종준은 장시간 신장(訊杖)을 가할 수 없으니 조속히 처결하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32권. 연산 5,1499.1.24./1번째 기사)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이상우 편집위원
전 문화일보 사회부장
전 문화일보 논설실장
전 가천대학교 부총장
전 중앙화수회 부회장
현 종보편집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