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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묘지명(李齊賢墓誌銘)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4. 5. 14. 20:11

이제현묘지명(李齊賢墓誌銘)


*국립문화유산연구원:
https://portal.nrich.go.kr/kor/ksmUsrView.do?menuIdx=584&ksm_idx=1661

시대: 고려
연대: 1375년(우왕 1)
유형: 묘지명·묵서명
크기: 높이 168.0 너비 63.2 두께 20.5
소재지: 북한 개성고려박물관
서체: 전서(篆書), 해서(楷書)
찬자 /각자 /서자: 이색(李穡) / 훈곡(薰谷), 명호(明昊) / 전액 : 권중화(權仲和), 본문 : 설경수(偰慶壽)
지정사항: 비지정유산


개관

묘지명은 『목은문고(牧隱文藁)』 권16과 『동문선(東文選)』 권126에 실려 있으며, 1376년(우왕 2) 무렵 이색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묘지명의 주인공 이제현(李齊賢)의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이다. 경주 사람이다.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인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이다. 증조는 득견(得堅), 조부는 핵(翮), 아버지는 진(瑱)이다. 어머니는 박씨로 인육(仁育)의 딸로서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이제현은 1301년(충렬왕 27)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한 이래 공민왕대까지 활동하였다. 이제현은 충정왕 때를 제외하고 국가의 중요한 외교문서와 문장을 전담하여 작성하였으며, 특히 충선왕 때 충선왕이 원나라 수도에 설치한 만권당에서 원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고려에 성리학을 수용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충선왕을 수행하여 중국 강남지방을 여행하면서 많은 문장을 남겼다. 또한 충목왕과 공민왕 때 역사 편찬에 참여했으며, 충혜왕 때 『역옹패설(櫟翁稗說)』을 편찬하였다. 또한 여러 번 과거를 주관하여 수많은 문생을 배출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제현은 모두 세 번 장가들었다. 첫째 부인은 길창국부인(吉昌國夫人) 권씨(權氏)로 부(傅)의 딸이다.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서종(瑞種), 차남은 달존(達尊)이다. 장녀는 임덕수(任德壽)에게, 차녀는 이계손(李係孫)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3녀는 김희조(金希祖)에게 출가하여 의화택주(義和宅主)에 봉해졌다. 둘째 부인은 수춘국부인(壽春國夫人) 박씨(朴氏)로 거실(居實)의 딸이다.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창로(彰路)이다. 장녀는 박동생(朴東生)에게, 다음은 송무(宋懋)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다음은 공민왕비인 혜비(惠妃)인데,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다. 셋째 부인은 서원군부인(瑞原郡夫人) 서씨(徐氏)로 중린(仲麟)의 딸이다. 2녀를 낳았다. 장녀는 김남우(金南雨)에게, 다음은 이유방(李有芳)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측실 소생으로 2녀가 있는데, 장녀는 임부양(林富陽)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어리다.


판독문/목은문고

鷄林府院君諡文忠李公墓誌銘 (李 穡)

至正二十七年歲在丁未秋七月▨推誠亮節同德協議贊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鷄林府院君領藝文春秋館事益齋先生李公以病卒于第年八十一大常謚文忠公十月▨有司具儀衛葬于牛峯縣桃李村先瑩丙辰冬十月▨配享玄陵廟庭公諱齊賢字仲思父姓李氏新羅始祖奕居世有佐命大臣曰李謁平其後蘇判居明生兵部令金現兵部生三韓功臣大守金書新羅王金傅旣納土入朝尙太祖女樂浪公主生女以妻金書生潤弘潤弘生承訓承訓生周復周復生儞儞生侈連侈連生寵暹寵暹生春貞春貞生玄福玄福生宣用宣用生升高升高生文林郞尙衣直長同正諱得堅尙衣生贈左僕射諱翮僕射生檢校政丞謚文定諱瑱娶戴陵直朴仁育之女辰韓國大夫人以至元丁亥十二月庚辰生公公自幼嶷然如成人旣知爲文己有作者氣大德辛丑公年十五鄭常侍僐試成均擧者負其能相頡頑聞公所作消縮莫敢爭先公果爲魁是歲菊齋權公溥悅軒趙公簡試禮闈公又中丙科權公以其子妻之公曰此小技耳不足以大畜吾德討論墳典淹貫精硏折衷以至當文定公大喜曰天其或者益大吾門乎癸卯權務奉先庫判官延慶宮錄事戊申選入藝文春秋館館中人推讓不敢論文其冬遷齊安府直講己酉擢司憲紏正庚戌遷選部散郞辛亥再轉典校寺丞三司判官所居稱職皇慶壬子選爲西海道按廉使有古持斧風陞成均樂正冬提擧豐儲倉事癸丑副令內府豐儲監斗斛內府校錙銖尺寸公爲之無難色人曰李公可謂不器君子矣忠宣王佐仁宗定內難迎立武宗故於兩朝寵遇無對遂請傳國于忠肅以大尉留京師邸構萬卷堂考究以自娛因曰京師文學之士皆天下之選吾府中未有其人是吾羞也召至都實延祐甲寅正月也姚牧菴閻子靜元復初趙子昻咸游王門公周旋其閒學益進諸公稱歎不置乙卯遷選部議郞秋拜成均祭酒仍兼議郞丙辰奉使西蜀所至題詠膾炙人口是歲判典校寺事丁巳拜選部典書己未王降香江南樓臺風物遇興遣懷每從容曰此閒不可無李生也庚申知密直司事賜端誠翊贊功臣之號知貢擧時稱得士公年蓋三十四文定辰韓外舅姑三座主皆無恙公擧觴稱壽一世歆之是年奏授高麗王府斷事官至治壬戌冬還京師未至忠宣王被譖出西蕃明年公往謁謳吟道中忠憤藹然泰定甲子加匡靖大夫密直司事乙丑改賜功臣號曰推誠亮節再轉僉議評理政堂文學丙寅移三司使天曆庚午忠惠王權國復爲政堂文學未幾罷後至元丙子以三重大匡封金海君領藝文舘事己卯春二月忠肅王薨其秋政丞曹頔脅百官屯兵永安宮宣言逐去君側惡小而陰爲瀋王地忠惠王率精騎擊殺之而其黨之在都者甚衆必欲抵王罪人心疑危禍且不測公憤不顧曰吾知吾君之子而己從之如京師代舌以筆事得辨析功在一等旣還群小益煽公屛迹不出著櫟翁稗說至正甲申冬忠穆王卽位進府院君領孝思觀事書筵以公爲師丙戌修忠烈王實錄戊子判三司事辛卯冬玄陵卽位未至國拜公右政丞權署征東省事數月國空虛公措置得宜人賴以安壬辰賜推誠亮節同德協議贊化功臣之號元從功臣趙日新忌公居其上公知之三上表固辭其冬十月日新聚群不逞夜入宮害所忌縱兵誅殺公以辭位得免日新伏誅起公爲右政丞癸巳正月辭五月以府院君知貢擧甲午十二月復爲右政丞明年又辭公年七十封金海侯十二月爲門下侍中丁酉五月乞以本職致仕從之國制封君致仕頒祿有差旣老而猶受厚祿於義不安故有是請朝論以爲本職致仕非所以敬大臣也壬寅復封鷄林府院君公自十五登科名盖一世立朝以來專奉文書歷外制於藝文春秋館由屬官至兩府封君未甞去職唯忠定三年不與焉以公甞奉表請立玄陵故也公天資厚重輔以學問高明正大故其發於議論措 諸事業者燁然可觀也初公讀史筆削大義必法春秋至則天紀曰那將周餘分續我唐日月後得朱子綱目自驗其識之正人有片善稱擧惟恐不善先輩遺事雖細以爲難及平生未甞疾言遽色有及於穢語對客置酒商確古今亹亹不倦崔拙翁歎曰士別三日刮目相待吾於益齋見之矣公務遵舊法不喜更張甞曰吾志豈不如古人但吾才不及今人耳公之孫連姻奇氏公忌其盛滿及其拜平章玄陵勑兩制賦詩以賀且命公叙其事公辭不爲自號益齋辛盹之敗玄陵曰益齋先見之明不可及也甞言盹非端人今果驗公自少儕輩不敢斥名必稱益齋及爲宰相人無貴賤皆稱益齋其見重於世如此公所著文集若干卷行于世公凡三娶吉昌國夫人權氏生二男三女長男曰瑞種奉常大夫宗簿副令次曰達尊奉常大夫典理摠郞寶文閣直提學知製敎長女適正順大夫判司僕寺事任德壽次適中正大夫典農正李係孫次適銀靑光祿大夫簽書樞密院事翰林院大學士金希祖封義和宅主壽春國夫人朴氏宣授西京等處萬戶府副萬戶中顯大夫司僕正諱居實之女生一男三女男曰彰路奉翊大夫開城尹長女適正順大夫判典農寺事朴東生次適奉順大夫判典校寺事宋懋次惠妃今爲尼瑞原郡夫人徐氏通直郞知瑞川事諱仲麟之女生二女長適中正大夫三司右尹金南雨次適奉善大夫典醫副正李有芳側室生二女長適中郞將林富陽次幼宗簿娶密直使兼監察大夫洪侑之女生一男二女男曰寶林匡靖大夫政堂文學商議會議都監事進賢館大提學上護軍長女適通憲大夫判衛尉寺事趙茂次適中顯大夫順興府使李元䙗又娶檢校中郞將金松柱之女生一男曰乃猷曹溪宗廣度寺住持摠郞娶上黨君白頤正之女生三男一女長曰德林朝奉郞驪興郡事次曰壽林奉翊大奉同知密直司事仕元朝爲翰林學士資善大夫以故贈公大常卿具勳階爵次曰學林中顯大夫小府尹女適奉翊大夫開城尹光祿大夫同知樞密院事奇仁傑開城娶重大匡淸城君謚平簡諱公義之女韓氏生一女適春秋檢閱元序繼室正順大夫判典
客寺事金昴之女生二男一女長曰蟋刪定都監判官次曰衷慶仙店錄事女幼司僕生二男四女長男曰純義奉善大夫軍器少尹次曰純禮中郞將長女適通直郞起居郞知製敎申渾次適中正大夫親禦軍大護軍朴永忠次適奉善大夫小府尹黃侃次適中郞將金錘典農正生二男一女長曰隲郞將次曰亮中郞將女適通憲大夫判繕工寺事安翊判典農生三男一女長曰經奉善大夫軍器少尹次緯別將次殊文別將女幼典校生一男幼左尹生二男長曰上佐次曰廣大女皆幼曾孫男女若干人趙衛尉生二男二女長曰從善中郞將次遷善權務女皆幼李順興生一男二女男曰有喜崇恩殿直女皆幼驪興生二男二女長男曰伸承奉郞供造署令次曰密長女適正順大夫判衛尉寺事李承源次適宣德郞通禮門祗候郭游禮密直生二男二女長曰崇義次崇道典客錄事女皆幼小府生一男二女男幼長女適司憲持平金萬具次幼奇開城生一男曰愼純義生一女幼純禮生一男曰滋一女幼申渾生一男二女男曰浩大殿指諭中郞將長女適郞將黃允奇次幼大護軍生三男三女長曰龍壽別將餘皆幼黃小府生一男二女男曰藥奴餘皆幼隲生一男一女男曰孝奴女幼亮生三男一女
長曰伯恭次伯謙餘幼銘曰
天地儲精公乃挺生奎壁耀芒公迺發揚名溢域中身居海東道德之首文章之宗北斗泰山昌黎之韓光風霽月春陵茂叔四秉國鈞年踰八旬麟鳳其瑞著龜其神功在社稷澤流生民閟宮升配哀榮無對惟爾子孫忠孝是遵勿謂無知公在九原


해석문/박종기

계림부원군 시문충 이공묘지명(鷄林府院君 謚文忠 李公墓誌銘)

지정(至正) 27년 정미년(공민왕 16, 1367) 가을 7월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계림부원군 영예문춘추관사(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鷄林府院君 領藝文春秋館事) 익재(益齋)선생 이공(李公)이 자택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81세이다. 태상(太常)에서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추증하였다. 10월에 관리가 의전을 갖춰 우봉현(牛峯縣) 도리촌(桃李村)의 선영에 장사 지냈다. 병진년(우왕 2, 1376) 겨울 10월 현릉(玄陵 : 공민왕)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공의 이름은 제현(齊賢), 자는 중사(仲思), 성은 이씨(李氏)이다. 신라 시조인 혁거세(赫居世)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인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인 소판(蘇判 : 신라 17관등 중 제3관등) 거명(居明)이 병부령(兵部令) 금현(金現)을 낳고, 병부가 삼한공신(三韓功臣)인 태수(太守) 금서(金書)를 낳았다. 신라왕 김부(金溥 : 敬順王)가 국토를 바치고 고려 조정으로 귀순한 뒤 태조(太祖)의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다. 그 딸이 금서에게 출가하여 윤홍(潤弘)을 낳았다. 윤홍이 승훈(承訓)을 낳고, 승훈이 주복(周復)을 낳고, 주복이 칭(偁)을 낳고, 칭이 치련(侈連)을 낳고, 치련이 총섬(寵暹)을 낳고, 총섬이 춘정(春貞)을 낳고, 춘정이 현복(玄福)을 낳고, 현복이 선용(宣用)을 낳고, 선용이 승고(升高)를 낳았다.

승고가 문림랑(文林郞) 상의직장동정(尙衣直長同正)인 득견(得堅)을 낳았다. 상의가 좌복야(左僕射)로 추증된 핵(翮)을 낳고, 복야가 검교정승(檢校政丞)으로 시호가 문정(文定)인 진(瑱)을 낳았다. 문정이 대릉직(戴陵直) 박인육(朴仁育)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분이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이다. 지원(至元) 정해년(충렬왕 13, 1287) 12월 경진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숙성하여 마치 성인(成人)과 같았다. 글을 지을 줄 알면서 이미 작자(作者)의 기상을 보였다. 15세 되던 대덕(大德) 신축년(충렬왕 27, 1301) 상시(常侍) 정선(鄭僐)이 성균관(成均館)에서 시험을 주관했는데, 응시자 모두가 각기 재능을 자부하면서 서로 기염을 토하였다. 그러다 공이 지은 글을 듣고서 기운을 잃고 움츠러들면서 감히 앞을 다투지 못했다. 공이 그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

이해 국재(菊齋) 권부(權溥)와 열헌(悅軒) 조간(趙簡)이 예위(禮闈 : 禮部가 주관한 최종 시험)의 시관(試官)을 맡았다. 공이 병과(丙科)에 급제하자, 권공이 자기의 딸을 공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공은 “과거에 급제한 것은 자그마한 기예를 시험해 본 것에 지나지 않아, 나의 덕을 크게 쌓기에는 아직도 부족하다” 하고는, 고전(古典)을 토론하여 널리 관통하고 정밀하게 연구하는 한편, 이를 다시 절충해서 정당한 결론에 이르려고 노력하였다. 문정공(文定公 : 부친 이진)이 크게 기뻐하면서 “하늘이 어쩌면 우리 가문을 더욱 성대하게 해 주시려는 모양이다” 라고 하였다.

계묘년(충렬왕 29, 1303)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가 되었다. 무신년(충렬왕 34, 1308)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뽑혀 들어오니, 관중(館中)의 사람들이 모두 공에게 미루고 양보만 할 뿐 감히 글을 논하지 못하였다. 그 해 겨울 제안부직강(齊安府直講)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유년(충선왕 1, 1309)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되었다. 경술년(충선왕 2, 1310) 선부산랑(選部散郞)으로 옮겨진 뒤, 신해년(충선왕 3, 1311) 다시 전교시 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으로 옮겼다. 가는 곳마다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황경(皇慶) 임자년(충선왕 4, 1312)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로 선발되어 부월(斧鉞)을 쥐었던 옛사람의 풍도를 드날렸다. 성균악정(成均樂正)으로 승진했다가, 겨울 제거풍저창사(提擧豊儲倉事)가 되었다. 계축년(충선왕 5, 1313) 내부부령(內府副令)이 되었다. 풍저창은 두곡(斗斛)의 일을 감독하고, 내부(內府)는 치수(錙銖)와 척촌(尺寸)을 따지는 곳이었다. 공이 전혀 난색(難色)을 표하지 않자, 사람들이 “이공은 어떤 일도 잘 해낼 수 있는 불기(不器)의 군자라고 할 만하다”고 일컬었다.

충선왕이 원나라 인종(仁宗)을 도와 내란을 평정하고 무종(武宗)을 맞아들여 황제로 옹립하여, 무종과 인종 두 조정에 걸쳐서 비할 데 없는 은총과 예우를 받았다. 충선왕은 마침내 원나라에 청하여 충숙왕(忠肅王)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자신은 태위(太尉)로 원나라 수도의 저택에 머물면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학문 연구로 낙을 삼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문학하는 인사들은 모두가 천하에서 뽑혀 온 명사(名士)들인데, 우리 부중(府中)에 그만한 인물이 없다니 이것은 우리의 수치이다”하고서 공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이때가 바로 연우(延祐) 갑인년(충숙왕 1, 1314) 정월이었다. 당시 원나라 요목암(姚牧菴 : 요수(姚燧)), 염자정(閻子靜 : 염복(閻復)), 원복초(元復初 : 원명선(元明善)), 조자앙(趙子昻 : 조맹부(趙孟頫)) 등이 모두 충선왕의 집에 와서 노닐었다. 공이 그 사이에서 주선하면서 날이 갈수록 학문이 진보하여, 제공(諸公)이 칭찬하고 탄복해 마지않았다.

을묘년(충숙왕 2, 1315) 선부의랑(選部議郞)으로 옮겼고, 가을에 성균제주(成均祭酒)에 임명되었는데, 의랑은 그대로 겸임하였다. 병진년(충숙왕 3, 1316) 황제의 명령을 받아 서촉(西蜀)지방에 갔다. 가는 곳마다 읊은 시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널리 전해졌다. 이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정사년(충숙왕 4, 1317) 선부전서(選部典書)에 임명되었다. 기미년(충숙왕 6, 1319) 충선왕은 황제의 명으로 향(香)을 내려주기 위해 강남(江南)지방에 갔을 때, 누대(樓臺)와 풍물(風物)을 보고 흥치가 우러나면 시를 읊어 회포를 풀곤 하였다. 그때마다 조용히 말하기를 “이런 곳에는 우리 이생(李生)이 없으면 안 된다” 하였다. 경신년(충숙왕 7, 1320)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지공거(知貢擧)로 과거를 주관하여 인재를 많이 뽑았다는 칭송을 받았다. 이때 공의 나이 34세였다. 친어버이와 처부모와 좌주(座主) 세 분 등 모두가 건강한 가운데 공이 술잔을 올려 축수(祝壽)하자,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였다.

이해에 상주(上奏)하여 고려왕부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에 임명되었다. 지치(至治) 임술년(충숙왕 9, 1322) 겨울 경사(京師 : 원나라 수도)로 돌아갔다. 도착하기 전에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서번(西蕃)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듬해 공이 왕을 찾아뵈었는데, 가는 도중에 읊은 시마다 충분(忠憤)의 감정이 애연히 서려 있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충숙왕 11, 1324) 광정대부(匡靖大夫)의 품계와 밀직사사(密直司事)의 관직이 가해졌다. 을축년(충숙왕 12, 1325) 공신(功臣)의 호가 추성양절(推誠亮節)로 바뀌어 내려지고, 첨의평리(僉議評理)와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재차 옮겼다. 병인년(충숙왕 13, 1326) 삼사사(三司使)로 옮겨졌다.

천력(天曆) 경오년(충혜왕 즉위, 1330) 충혜왕(忠惠王)이 나라를 대리(代理)로 다스릴 때 다시 정당문학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파직되었다. 그 뒤 지원(至元) 병자년(충숙왕 복위5, 1336)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지고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가 되었다.

기묘년(충숙왕 복위8, 1339) 봄 2월 충숙왕(忠肅王)이 돌아갔다. 그 해 가을 정승 조적(曺頔)이 백관을 협박하면서 군대를 영안궁(永安宮)에 주둔시키고, “임금의 곁에 있는 간악한 소인들을 쫓아내겠다”라고 선언하였다. 사실은 심양왕(瀋陽王) 고(暠)를 암암리에 즉위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에 충혜왕이 정예 기병(騎兵)을 이끌고 공격해서 그를 죽였으나, 연경(燕京)에 있는 그의 도당(徒黨)이 매우 많아 기필코 충혜왕에게 죄를 덮어씌우려 하였다. 인심이 흉흉해지면서 장차 화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이 분연히 일어나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고 “나는 우리 임금님의 아들만을 알 뿐이다.”1)라고 하였다. 충혜왕을 따라 경사(京師 : 원나라 수도)에 들어가 말 대신 글로 적어 올려 일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게 하였다. 그 공(功)이 1등(等)에 해당되었다. 그런데 귀국한 뒤 뭇 소인들이 더욱 날뛰었다. 공은 물러나 자취를 숨기고 벼슬을 하지 않은 채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저술하였다.

지정(至正) 갑신년(1344) 겨울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공을 부원군(府院君)으로 올리고 영효사관사(領孝思觀事)에 임명하고, 서연(書筵)에서 공을 사부(師傅)로 삼았다. 병술년(충목왕 2, 1346)에 『충렬왕실록(忠烈王實錄)』을 편수하였다. 무자년(충목왕 4, 1348)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신묘년(1351) 겨울 현릉(玄陵 : 공민왕)이 즉위하였으나 아직 원나라에서 귀국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을 우정승(右政丞)에 임명하여 정동성(征東省)의 직무를 대리로 처리하게 하였다. 몇 개월 동안 왕이 나라를 비워 두고 있었으나, 공이 적절하게 조치한 덕분에 사람들이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임진년(공민왕 1, 1352)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원종공신(元從功臣) 조일신(趙日新)이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공이 있는 것을 시기하자, 공이 이를 알아채고는 세 번이나 표문(表文)을 올려 정승 자리를 고사(固辭)하였다. 그해 겨울 10월 조일신이 여러 불평분자들을 끌어모아 한밤중에 궁궐로 침입한 뒤에 자기가 꺼리던 사람들을 해치고 군사들을 풀어 주살(誅殺)을 자행하였다. 공은 이때 자리를 사퇴하여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조일신을 복주(伏誅)하고 나서 공을 다시 우정승으로 기용하였다. 계사년(공민왕 3, 1353) 정월에 그만두었다. 그해 5월 부원군(府院君)으로 지공거(知貢擧)를 맡았다. 갑오년(공민왕 4, 1354) 12월 다시 우정승이 되었다가, 이듬해 또 사직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 70세로 김해후(金海侯)에 봉해졌다. 12월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정유년(공민왕 6, 1357) 5월 본직(本職)으로 은퇴할 것을 청하자, 이를 따랐다. 국가의 제도에 의하면 군(君)에 봉해진 상태로 벼슬에서 은퇴할 경우에는 봉록(俸祿)을 더 많이 받게 되어 있었는데, 공은 이미 노쇠한 몸인데도 후한 봉록을 받는 것이 의리상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요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직으로 은퇴하는 것은 대신(大臣)을 공경히 예우하는 도리가 못 된다는 조정의 공론이 있어, 임인년(공민왕 11, 1362) 다시 공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하였다.

공은 15세에 과거에 급제할 때부터 명성이 한세상을 뒤덮었다. 그리고 조정에 몸담은 이후로는 오로지 문서에 관한 일을 받들어 행하였으며, 예문관(藝文館)과 춘추관(春秋館)에서 외지제고(外知制誥)를 역임하였다. 그리하여 속관(屬官)을 거쳐 양부(兩府)와 봉군(封君)의 시절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그 직책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오직 충정왕(忠定王)이 재위(在位)했던 3년 동안만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공이 일찍이 중국에 표문을 올려 현릉의 즉위를 청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은 타고난 중후한 자질을 학문으로 잘 인도해서 고명(高明)하고 정대(正大)한 경지를 이루었기 때문에, 의논을 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 모두가 찬란하게 빛나 볼 만한 점이 있었다. 처음에 공이 사서(史書)를 읽을 적에도 반드시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본받아서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엄하게 포폄(褒貶)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본기(本紀)에 이르러서는 “어찌하여 정통이 못 되는 주나라를 가져다가, 일월과 같은 당나라에 이어 붙였는가(那將周餘分 續我唐日月)” 하였다. 뒤에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보고 자신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확인하였다.2)

공은 남이 조금이라도 착한 일을 하면 이를 칭찬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을까 염려하였고, 선배들이 후세에 남긴 일에 대해서는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은 따라가기 어렵다면서 겸손한 자세를 취하였다. 공은 평소에 다급하게 말을 하거나 당황한 기색을 짓는 일이 없었으며, 속된 화제는 아예 언급을 하지 않았다. 손님을 대하여 술자리를 벌일 때에도 고금(古今)의 역사를 토론하는 데에 온 정신을 쏟으면서 피곤한 줄을 몰랐다. 그래서 최졸옹(崔拙翁 : 최해(崔瀣))이 공을 보고 탄식하면서 “선비가 사흘만 헤어져 있어도 눈을 씻고 다시 보게 된다는3) 말이 있는데, 내가 익재로부터 이를 확인하였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공은 가능한 한 예전부터 내려오는 법도를 준수하려 하였고, 새로 바꿔서 개혁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서 공은 일찍이 “나의 뜻이야 어찌 옛사람보다 못하다고 하겠는가마는, 나의 재주는 오늘날의 사람에게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공의 자손이 잇따라 기씨(奇氏)의 가문과 인척(姻戚) 관계를 맺자, 공은 가득 차서 넘쳐흐르는 걱정이 있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기씨가 평장사(平章事)에 임명되자, 현릉이 내외의 지제고(知制誥)에게 시를 지어서 축하하도록 명하는 한편, 공에게도 그 일을 서술하도록 명하였는데, 공은 사양하고 글을 짓지 않았다.

공은 자신의 호를 익재(益齋)라고 하였다. 신돈(辛旽)이 패망하고 난 뒤에 현릉이 “익재의 선견지명은 따라갈 수가 없다. 익재가 일찍이 신돈은 올바른 사람이 못 된다고 하였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그대로 들어맞았다”고 하였다. 공은 나이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동료들이 감히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익재라고 일컬었으며, 재상(宰相)의 지위에 오른 뒤에는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익재라고 호칭하였으니, 공이 세상에서 존중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이 저술한 문집 몇 권이 지금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공은 모두 세 번 장가들었다. 첫째 부인인 길창국부인(吉昌國夫人) 권씨(權氏)는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서종(瑞種)은 봉상대부 종부부령(奉常大夫 宗簿副令)이고, 달존(達尊)은 봉상대부 전리총랑 보문각직제학 지제교(典理摠郞 寶文閣直提學 知製敎)이다. 장녀는 정순대부 판사복시사(正順大夫 判司僕寺事) 임덕수(任德壽)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중정대부 전농정(中正大夫 典農正) 이계손(李係孫)에게 시집갔으며, 3녀는 은청광록대부 첨서추밀원사 한림원태학사(銀靑光祿大夫 簽書樞密院事 翰林院太學士) 김희조(金希祖)에게 출가하여 의화택주(義和宅主)에 봉해졌다.

둘째 부인인 수춘국부인(壽春國夫人) 박씨(朴氏)는 선수서경등처만호부 부만호 중현대부 사복정(宣授西京等處萬戶府 副萬戶 中顯大夫 司僕正)인 거실(居實)의 딸인데,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 창로(彰路)는 봉익대부 개성윤(奉翊大夫 開城尹)이다. 장녀는 정순대부 판전농시사(正順大夫 判典農寺事) 박동생(朴東生)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봉순대부 판전교시사(奉順大夫 判典校寺事) 송무(宋懋)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혜비(惠妃 : 공민왕의 왕비)인데 지금은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다.

셋째 부인인 서원군부인(瑞原郡夫人) 서씨(徐氏)는 통직랑 지서주사(通直郞 知瑞州事)인 중린(仲麟)의 딸인데, 2녀를 낳았다. 장녀는 중정대부 삼사우윤(中正大夫 三司右尹) 김남우(金南雨)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봉선대부 전의부정(奉善大夫 典醫副正) 이유방(李有芳)에게 출가하였다. 측실 소생으로 2녀가 있는데, 장녀는 중랑장(中郞將) 임부양(林富陽)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어리다.

종부(宗簿 : 서종)는 밀직사 겸 가찰대부(密直使 兼 監察大夫) 홍유(洪侑)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 보림(寶林)은 광정대부 정당문학 상의회의도감사 진현관대제학 상호군(匡靖大夫 政堂文學 商議會議都監事 進賢館大提學 上護軍)이다. 장녀는 통헌대부 판위위시사(通憲大夫 判衛尉寺事) 조무(趙茂)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중현대부 순흥부사(中顯大夫 順興府使) 이원적(李元䙗)에게 출가하였다. 또 (서종은)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 김송주(金松柱)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이름은 내유(乃猷)로 조계종(曹溪宗) 광도사(廣度寺)의 주지(住持)이다.

총랑(摠郞 : 달존)은 상당군(上黨君) 백이정(白頤正)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덕림(德林)은 조봉랑 여흥군사(朝奉郞 驪興郡事)이다. 다음 수림(壽林)은 봉익대부 동지밀직사사(奉翊大夫 同知密直司事)인데, 원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한림학사 자선대부(翰林學士 資善大夫)가 되었으므로, 공에게 태상경(太常卿)이 추증되고, 훈호(勳號)와 품계(品階)와 작위(爵位)가 갖추어 내려졌다. 다음 학림(學林)은 중현대부 소부윤(中顯大夫 小府尹)이다. 딸은 봉익대부 개성윤 광록대부 동지추밀원사(奉翊大夫 開城尹 光祿大夫 同知樞密院事) 기인걸(奇仁傑)에게 출가하였다.

개성(開城 : 창로)은 중대광 청성군(重大匡 淸城君)으로 시호가 평간(平簡)인 공의(公義)의 딸 한씨(韓氏)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춘추검열(春秋檢閱) 원서(元序)에게 출가하였다. 창로의 계실(繼室)은 정순대부 판전객시사(正順大夫 判典客寺事) 김묘(金昴)의 딸로,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반(蟠)은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이고, 다음 곤(袞)은 경선점녹사(慶仙店錄事)이며, 딸은 어리다.

사복(司僕 : 사위 임덕수)은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순의(純義)는 봉선대부 군기소윤(奉善大夫 軍器少尹)이고, 다음 순례(純禮)는 중랑장(中郞將)이며, 장녀는 통직랑 기거랑 지제교(通直郞 起居郞 知製敎) 신혼(申渾)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중정대부 친어군 대호군(中正大夫 親御軍 大護軍) 박영충(朴永忠)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봉선대부 소부윤(奉善大夫 少府尹) 황간(黃侃)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중랑장 김추(金錘)에게 출가하였다.

전농정(典農正 : 사위 이계손)은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즐(騭)은 낭장(郎將)이고, 다음 양(亮)은 중랑장(中郞將)이며, 딸은 통헌대부 판선공시사(通憲大夫 判繕工寺事) 안익(安翊)에게 출가하였다.

판전농(判典農 : 사위 박동생)은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경(經)은 봉선대부 군기소윤(奉善大夫 軍器少尹)이고, 다음 위(緯)는 별장(別將)이고, 다음 수문(殊文)도 별장이며, 딸은 어리다.

전교(典校 : 사위 송무)는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좌윤(左尹 : 김남우)은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상좌(上佐)이고, 다음은 광대(廣大)이며, 딸은 모두 어리다.

증손(曾孫)은 남녀 약간 명이 있다.

조위위(趙衛尉 : 조무, 서종의 사위)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종선(從善)은 중랑장(中郞將)이고, 다음 천선(遷善)은 권무(權務)이며, 딸은 모두 어리다.

이순흥(李順興 : 이원적, 서종의 사위)은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 유희(有喜)는 숭은전직(崇恩殿直)이고, 딸은 모두 어리다.

여흥(驪興 : 이덕림, 달존의 장남)은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신(伸)은 승봉랑 공조서영(承奉郞 供造署令)이고, 다음은 밀(密)이다. 장녀는 정순대부 판위위시사(正順大夫 判衛尉司事) 이승원(李承源)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선덕랑 통례문지후(宣德郞 通禮門祗侯) 곽유례(郭游禮)에게 출가하였다.

밀직(密直 : 이수림, 달존의 차남)은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숭의(崇義)이고, 다음 숭도(崇道)는 전객녹사(典客錄事)이며, 딸은 모두 어리다.

소부(小府 : 이학림, 달존의 3남)는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어리고, 장녀는 사헌지평(司憲持平) 김만구(金萬具)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어리다.

기개성(奇開城 : 기인걸, 달존의 사위)은 1남을 낳았다. 이름은 신(愼)이다.

순의(純義 : 임덕수의 장남)는 1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순례(純禮 : 임덕수의 차남)는 1남을 낳았는데, 이름은 자(滋)이고, 딸 하나는 어리다.

신혼(申渾 : 임덕수의 사위)은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 호(浩)는 대전지유중랑장(大殿指諭中郞將)이고, 장녀는 낭장(郎將) 황윤기(黃允奇)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어리다.

대호군(大護軍 : 박영충, 임덕수의 사위)은 3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용수(龍壽)는 별장(別將)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황소부(黃小府 : 황간, 임덕수의 사위)는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약노(藥奴)이고, 딸은 어리다.

양(亮 : 이계손의 아들)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백공(伯恭)이고, 다음은 백겸(伯謙)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천지의 정기가 한데 모여 걸출한 우리 공 태어났고
규벽(奎璧)4)이 밝게 비치면서 우리 공 문장을 일으켰네.
천하에 이름 떨치면서 몸은 해동에 거했나니
도덕의 우두머리시오 문장의 종장이셨어라.
태산북두로 일컬어진 창려 땅의 한자(韓子)5)요.
광풍제월로 존경받은 용릉의 무숙이었다고 할까.6)
국정을 네 차례나 책임지면서 어느새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
상서로움은 기린과 봉황이요. 신령스러움은 시귀(蓍龜)7)였다오.
기우는 사직을 붙들어 일으키고 백성에게 은택을 끼쳐 주신 분.
이제는 종묘에 배향이 되셨나니 애영(哀榮)8)아! 그대 자손들이여.
충효의 정신을 본받아 따를지니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공께서 무덤에서 살피고 계시리니.


1) 충숙왕의 맏아들인 충혜왕에게 충성을 다 바치겠다는 뜻이다. 옛날 우(禹)임금이 죽자 백성들이 ‘우리 임금님의 아들(吾君之子)’이라고 하면서 계(啓)에게 귀의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孟子 萬章上》
2) 측천무후가 정권을 찬탈하고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주(周)나라로 고친 뒤에 16년 동안 통치하였는데,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짓고 구양수(歐陽脩)가 『당서(唐書)』를 편찬할 적에는 측천무후를 정식 황제로 인정해서 본기(本紀)에 기록하였으나, 주희(朱熹)는 『자치통감강목』에서 이를 비난하며 역적으로 지목하였다.
3) 삼국시대 오(吳)나라 노숙(魯肅)이 여몽(呂蒙)의 등을 두드리면서 학식이 몰라보게 진보했다고 칭찬하자, 여몽이 “선비는 사흘만 헤어져 있어도 눈을 씻고 다시 보게 되는 법이다(士別三日 卽更刮目相對)”라고 대답한 고사를 가리킨다.《三國志 卷54 吳書 呂蒙傳》
4) 28수(宿)에 속하는 규수(奎宿)와 벽수(璧宿)의 합칭으로, 옛날에 문운(文運)을 주관한다고 믿었다.
5) 당(唐)나라의 한유(韓愈)처럼 익재(益齋)의 문장이 세상의 숭앙을 받았다는 말이다.《신당서(新唐書)》 권176, 한유열전(韓愈列傳) 찬(贊)에 “한유가 죽은 뒤로 학자들이 그를 태산북두처럼 우러러보았다(自韓愈沒 學者仰之如泰山北斗)”라는 말이 나온다.
6) 송유(宋儒) 주렴계(周濂溪)처럼 인품이 고결했다는 말이다. 송(宋)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염계시(濂溪詩)’ 서문에 “용릉 땅의 주무숙은 인품이 매우 고결해서, 가슴속이 쇄락한 것이 마치 비 갠 뒤의 바람과 달 같았다(舂陵周茂叔 人品甚高 胸中灑落如光風霽月)”는 말이 나온다. 무숙은 주렴계의 자(字)이다.
7) 점칠 때에 쓰는 시초(蓍草)와 거북을 말한다.
8) 생전(生前)과 사후(死後) 모두 영광스럽게 된 것을 말한다.《논어(論語)》 자장(子張)의 “살아 계실 때에는 모두가 영광스럽게 여겼고, 돌아가셨을 때에는 모두가 애통해 하였다(其生也榮 其死也哀)”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에 짝할 자가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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