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용재공◆이종준

[박동춘]냇물도 찻물로 사용…품평 식견 탁월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2. 4. 10. 23:53

[박동춘]냇물도 찻물로 사용…품평 식견 탁월

 

박동춘 (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입력 2020.12.11 10:54 수정 2020.12.11 10:57

 

24. 고려시대 찻물

이규보의 '남행일기'에 원효방 바위틈에 솟은 물로 차를 달인 기록이 전한다. 사진 위는 부안군 변사에 위치한 내소사 원효방 전경.

 

수준 높은 차문화 향유
찻물에 대한 식견 높아
우리나라 냇물 품평해
순위 매긴 자료도 존재

 

고려시대 탕법(湯法)인 점다(點茶:고려 시대 차를 다리는 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차에 적합한 물을 확보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품천(品泉)은 당나라 육우 또한 엄정한 기준을 제시하여 스무 곳에 찻물을 명명할 만큼 다사(茶事)의 핵심요소이다. 이뿐 아니라 찻물을 끓이는 일도 점다의 중요한 변수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물을 잘 선택했다 할지라도 잘 끓은 물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미묘한 차의 세계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에는 전기포트를 사용하므로 실제 센 불과 약한 불이 어우러진 탄력이 있는 탕수(湯水)를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심한 주의와 관찰을 요구하는 연유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 시대는 차와 다구, 그리고 차를 애호했던 계층의 문화 수준이 가장 높았던 시기다. 그러므로 차를 향유하는 계층의 찻물에 대한 식견이 높았다. 특히 차 문화를 주도했던 수행승과 귀족, 관료 문인들은 품천에도 일가를 이룬 부류이지만 아쉽게도 이들이 남긴 품천(品泉)에 관한 자료는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13세기 김극기의 〈박금천(薄金川)〉은 평양부 북쪽 9리 즈음에 흐르는 냇물이 찻물로 사용되었던 당시의 정황을 나타낸 자료가 있고, 그 밖에도 〈유사척록(遺事朔錄)〉에 이행(李行 1352~1432)이 찻물의 품평에 일가견이 있어 우리나라 물을 품평한 자료가 남아 있을 뿐이다.

'성곡 성석연은 기우자 이 공과 서로 사이가 좋았다. 이 공은 성 남쪽에 살았고 상곡은 산 서쪽에 살았는데, 서로의 거리가 겨우 5리 쯤 되었다. 혹은 서로 찾아다니며 노닐기도 하고 혹은 서로 시로써 창수하였다. 상곡이 동산 가운데 조그마한 집을 짓고 ‘위생당’이라 불렀는데, 매번 하인 아이들을 모아 약 만드는 일을 일삼았다.…한번은 이 공이 ‘위생당’에 이르니 상곡이 공도 공에게 창문 밖에서 차를 끓여 오게 하였는데, 찻물이 넘쳐 다른 물을 부었다. 이 공이 차를 맛보고 말하기를 “이 차에는 두 가지 물을 섞었구나.”라고 하였다. 이 공은 물맛을 잘 가려내었는데, 충주 달천의 물이 제일이고, 한강 가운데로 흐르는 우중수가 둘째이며 속리산 삼타수가 셋째라고 하였다. 달천은 대개 금강산에서 흘러온 것이다. 용재 이종준의 총화에 “평해 월송정은 승지이다. 이 공이 매번 달밤에 와서 소를 타고 송정에서 노닐었다. 유배를 갔는데, 집이 바로 백암산 아래라서 백암이라 불었다. 소요로 세상을 잊고 술과 시를 지으며 스스로 즐거워했다. 태종이 태자로 있을 때부터 좋아하여 자주 불렀지만 응하지 않았다.

(成桑谷石珚與騎牛子李公相善。公居城南。桑谷居山西。相距픲五里許。或杖뚒相從。或以詩相酬唱。桑谷於園中뱆小齋。名曰衛生堂。每聚家墓。曰以劑藥爲事...中略...公嘗到堂。桑谷令恭度公烹茶於젳外。茶水溢。更添他水。公嘗之曰。此茶必添二生水。公能辨水味。以忠州達川水爲第一。漢江中之牛重水爲第二。俗離山之三陀水爲第三。達川蓋自金剛山出來者也。慵齋李宗準叢話 平海越松亭。勝地也。李公行每於月夜。騎牛遊賞於松亭。及被謫。仍家白巖山下。號白巖。逍遙忘世。詩酒自娛。太宗以潛邸之好。屢召不起)'

 

위 인용문은 원래 성현의 〈용재총화〉에 수록된 내용이다. 이를 통해 이행의 우리나라 물에 대해 평가한 것이 드러난다. 특히 이행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인물이다. 그가 1371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 수찬(修撰)을 역임했고, 우왕 때 탐라를 건너가 성주였던 고신걸(高臣傑)의 아들을 데리고 돌아옴으로써 이때부터 탐라가 고려에 귀순한 것인데, 당시의 그의 벼슬은 전의부정(典醫副正)이었다. 1390년 이색과 함께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고려가 멸망한 후 예천동(醴泉洞)에 숨어 살며 원천석(元天錫, 1330~?)과 길재(吉再, 1353~1419)와 깊이 교유했다.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와 태종이 그를 여러 차례 회유하였지만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러므로 이 자료는 고려 말 문인의 물에 대한 식견을 드러낸 자료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이 글 중에 언급된 성곡 성석연(桑谷成石쳥, ?~1414)은 성현(成俔 1439~1504)의 증조부이며 공도 공은 성석연의 아들 성엄(成밨 1375~1434)이다. 공도는 성엄(成밨)의 시호다. 그러므로 성현은 자신의 증조부와 할아버지와 교유했던 기우자 이행의 차와 관련된 자료를 수습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성석연이 아들 성엄에게 차를 다려 오라 했는데, 찻물이 넘치자 다른 물을 첨가한 것. 이를 정확하게 알아차린 것은 이행이었다. 따라서 그는 차의 진면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았던 인물로, 고려 말 관료 문인의 깊이 있는 수준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한편 이행은 우리나라의 찻물을 규정하면서 “충주 달천의 물이 제일이고, 한강 가운데로 흐르는 우중수가 둘째이며 속리산 삼타수가 셋째라고 하였다. 달천은 대개 금강산에서 흘러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유일한 품천의 언급이라는 점에서 고려 전반의 차 문화 수준이 어느 정도였으며, 적어도 차의 애호층이었던 문인이 어떤 수준의 차를 즐겼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라는 셈이다. 특히 성석연이 지은 위생당은 고려 시대 다정의 규모를 드러낸 것인데, 산 중턱에 집을 지었다는 사실에서 당시 다정은 자연환경이 빼어난 곳에 소략하게 지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이행은 정치적인 혼란기를 지내며 차를 즐기며 탁세를 견딘 것이다. 그런데 그의 〈기우선생문집(騎牛先生文集)〉에는 ‘제성상곡석인위생당(題成桑谷石쳥衛生堂)’이라는 글이 눈에 띈다. 이는 성석연이 지은 위생당 분위기를 잘 나타낸 시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새로 지은 소쇄한 위생당 백판이 평안하고(蕭灑新堂白板平)
글씨와 그림, 책, 꽃, 대나무엔 깊은 정이 가누나(圖書花竹有深情)
담장머리 연록 빛 세 그루 회화나무엔(墻頭軟綠三槐樹)
한 쌍의 꾀꼬리 소리 듣기 좋아라(好箇黃?一兩聲)

 

윗글은 위생당이 소쇄한 분위기였고 도서와 꽃 그리고 대나무가 우거진 곳이었음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이행은 깊은 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었던 연유는 무엇일까. 회화나무는 조정 뜰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삼공(三公)이 이것을 향해 앉았다는 고사가 있다. 이로부터 삼괴(三槐)는 높은 벼슬을 의미한다.

이규보의 '남행일기'

 

한편 찻물에 대한 기록으론 〈삼국유사〉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에도 나온다. 바로 신라의 정신태자가 보질도가 그 아우 효명태자와 오대산에 들어가 숨었는데, 매일 이른 아침에 우통수를 길어다 일만 진신 문수보살에 공양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찻물에 대해 언급으로는 가장 오래된 자료이다. 그리고 다촌(茶村)에 찻물이 있었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는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道寺舍利袈裟事跡略錄)〉이 있다. 물론 이규보(1168~1241)의 〈남행일기(南行日記)〉에도 찻물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 일기는 그가 1200년 전주목 사록겸장서기로 임명되어 1201년경까지를 기록한 일기 형식의 글이다. 그가 부안군 변산에 위치한 내소사를 방문하여 원효방을 찾았던 정황을 썼는데, 원효 스님이 원효방에서 수행할 때 사포가 시봉하면서 차를 올렸다는 고사를 인용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음날 부령 현령(扶寧縣令) 이군(李君) 및 다른 손님 6~7인과 더불어 원효방(元曉房)에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는 나무 사다리가 있어서 발을 후들후들 떨며 찬찬히 올라갔는데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속어에 이른바 ‘사포성인(蛇包聖人)’이란 이가 옛날 머물던 곳이다. 원효(元曉)가 와서 살자 사포(蛇包)가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효공(曉公)에게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던 중, 이 물이 바위틈에서 갑자기 솟아났는데 맛이 매우 달아 젖과 같으므로 늘 차를 달였다 한다. 원효방은 겨우 8척쯤 되는데, 한 늙은 중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는 삽살개 눈썹과 다 해어진 누비옷에 도모(道貌)가 고고(高古)하였다.(明日。與扶寧縣宰李君及餘客六七人至元曉房...中略...傍有一庵。俗語所云蛇包聖人所昔住也。以元曉來居故。蛇包亦來侍。欲試茶進曉公。病無泉水。此水從巖竄忽湧出。味極甘如乳。因嘗點茶也。元曉房才八尺。有一老?梨居之。롰眉破衲。道貌高古)

윗글은 〈동국이상국전집〉권23에 수록된 내용이다. 그가 1201년 8월 19일 소래사를 갔다가 다음날인 8월 20일 원효방에 올랐다가 원효의 고사를 인용한 내용이다. 다만 이 글에서는 찻물은 맛이 달아야 한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며, 이는 사포의 성심으로 물이 솟은 것이지만 찻물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찻물이 달고 시원하며 잡맛이 없어야 한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찻물의 기준이라는 점이다. 〈끝〉 <(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출처: 현대불교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5097 

 

[박동춘]냇물도 찻물로 사용…품평 식견 탁월 - 현대불교신문

수준 높은 차문화 향유찻물에 대한 식견 높아우리나라 냇물 품평해순위 매긴 자료도 존재고려시대 탕법(湯法)인 점다(點茶:고려 시대 차를 다리는 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차에 적합한 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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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騎牛集] 遺事摭錄

이행(李行) : 1352년(고려 공민왕 1)~1432년(조선 세종 14)

 

成桑谷石珚與騎牛子李公相善。公居城南。桑谷居山西。相距纔五里許。或杖屨相從。或以詩相酬唱。桑谷於園中搆小齋。名曰衛生堂。每聚家僮。曰以劑藥爲事。公嘗作詩云云。詩見上 公嘗到堂。桑谷令恭度公烹茶於牕外。茶水溢。更添他水。公嘗之曰。此茶必添二生水。公能辨水味。以忠州達川水爲第一。漢江中之牛重水爲第二。俗離山之三陀水爲第三。達川蓋自金剛山出來者也。慵齋李宗準叢話 平海越松亭。勝地也。李公行每於月夜。騎牛遊賞於松亭。及被謫。仍家白巖山下。號白巖。逍遙忘世。詩酒自娛。太宗以潛邸之好。屢召不起。卒諡文節。朝野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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