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一)/계천군◆이종직

서파(西坡) 안리(安理) 묘갈명병서(墓碣銘幷序)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0. 9. 1. 19:16

西坡 安理 墓碣銘幷序

晦軒夫子 倡道東方 嘉惠後昆 仁深而德厚 源遠而流長 子孫至六七世 而金玉滿朝 卿相布列 先生獨以盛滿之戒 脫屣名利 歸臥梓鄕 聿修大祖之遺緖 永奠儒家之基業 蔚爲一代之矜式 百世之模範 時則端廟遜位矣 獨抱幽貞 而超然自靖於深山草樹之間 其義與六忠之成仁 錦城之殺身 不甚相遠矣 其後孫僻在嶺外 克軆迺祖之訓 世世業儒 不求聞達 貽爵之典 不及於泉壤 俎豆之儀 亦毁於一時 則今於四百年之後 何能想象其潛光隱德之萬一哉 後孫宗熙敎煥敎悳等 方營改碣 以其先祖大君師傅順原君之狀 訪余於曉山樵舍 屬以顯刻詩 自顧廢蟄絶筆 久矣 而均是爲先 竊有所感於心者 謹按狀而叙之 先生諱理 西坡其號也 安氏系出順興 文成公晦軒夫子爲六世祖 五世祖諱于器 順平君文順公 號竹屋子 高祖諱牧 順興君文淑公 號謙齋 曾祖諱元崇順成君文惠公 祖諱瑗刑曹典書 恭愍壬申 言事忤旨而流 外入我朝 屢徵不起 諡景質 考諱從約 海州牧使 贈吏曹判書 俱載杜門誌 妣貞夫人 東萊鄭氏 蓬原府院君良度公良生女 正統癸酉 先生生于瑞原舊第 風儀俊偉 宇量宏深 文章學業 得於家庭 而一代名流 推而宗之 伯仲兩兄 以貳相判尹 俱登貴顯 獨不樂仕進 杜門讀書 以探賾蘊奧爲務 嘗曰 五家自先正以後 歷顯于朝 昆季子姪 充滿臺府 闔族無一人服褐者 此正斂藏之時也 不樂仕進 天順癸酉 外補宜寧 黽勉赴任 歲値凶荒 民多散亡 割俸設賑 恩信普洽 流逋四歸 道伯以治績 褒聞于朝 翌年甲戌 移拜醴泉郡事 未幾 莊陵遜位 投紱歸鄕 卜居樓巖山下 命其里 曰大龍山 改山名 曰龍巖 盖取諸葛公臥龍之意 改軒號 曰樂園 取司馬公獨樂之趣也 景泰丁丑 六臣禍起 時事猝變 錦城大君與本府使李甫欽 謀復 事覺 同被誅戳 府中冠帶之族 七十餘家 一時殄滅 當此之時 先生杜門謝客 深自韜晦 名公巨卿 多折簡而不答 方伯守宰 每來訪而弗見 瞻望寧越 一嶺間隔 恒自悲傷 逍遙終老 嘗以一馬一僮 往來于廢府宿水寺 及坪里 卽先正讀書之古址 有洗硯池 每感慕 咏以爲常 其詩曰 竹水淵源泗水涓 讀書吾祖長於斯 徘徊感慕油然意 月照庭梧洗硯池 常以水月盛滿之戒 命子孫勿仕 定省之暇 使讀朱書 以軆先祖慕晦菴之意 絶不語及榮達事 京居姪孫輩 在貴顯之列者 閔其鄕曲淡泊 每以嘉味供之 則皆却之 曰小白藜藿 於分足矣 焉用官下物膏梁也 歿後數世 己卯禍作 京中諸族及大宗之家 俱被慘酷 惟先生之家 獨免 時人服其前知之鑑 事載莊陵誌 墓在順興府南大龍山桂谷子坐原 純廟壬午 以士林公議 腏享于龍淵祠 配淑人慶州李氏 鷄川君從直女 月城郡之秀五世孫 墓祔先生兆後 育五男 伯文叔文 俱無後 季文蔭副司直 贈兵判 興文佐郞 益文司果 判書三男 瑛明經進士 號五之堂 玎忠順衛 瑠 佐郞二男 熙別坐 燾 司果二男 烋同樞 有學行 信判官 進士六男 公擇敎官 公祐忠順衛 公弼生員 公信文校理 公健部將 公直 忠順衛四男 公俊 公輔部將 公獻 公翼 瑠一男公綽 別坐一男 長孫武兼 燾一男 延孫武科 同樞一男 進業承直郞 判官一男 慶南 餘不盡錄 於乎 先生生於詩禮之庭 簪纓之族 初不以富貴利達 貳其心 閉門守靜 沈潛性理 以至於當時名流之推重 則其操守之堅 學問之深 有不可窺測 而暫試外補 遺愛兩邑 又豈足以展其所蘊哉 枳棘之林 已非鸞鳳所棲 山梁之雉 又從色斯擧矣 不俟終日 棲山韜晦 終使人不知 而泯其迹焉 則其出處之正 志節之高 足以凜百世質神明矣 如非操守學問之根 基於素定 則烏能一朝能就之如是其介潔哉 巾衍舊藏 中經鬱攸 後生末學 無攸攷徵 幸有順原君狀德之文 亦足以代太常之記述而傳於後 無疑矣 黃石公有言曰 後人苟不公 百世無賢人 不佞雖筆萎言輕 竊自附於百歲之公言 繼之以銘 曰 知滿而退 明哲之卓 炳幾而先 自靖之篤 獨樂有園 臥龍有岡 婆姿初服 脫略名韁 行藏允合 心跡俱潔 朱書大訓 傳家旨訣 光先遺後 永世裘葛 桂谷之陽 有鑱其石 千載起敬 過者必式
外裔孫將仕郞前惠陵參奉 眞城 李中轍謹撰 崇祿大夫 前判敦寧院事 海平 尹用求謹書
聖誕二千四百八十四年癸酉四月日 十五代孫 敎煥改立

 서파 안리 묘갈명

(西坡 安理 墓碣銘)서문을 병기함

회헌(晦軒) 선생은 우리나라에 도학(道學)을 제창하여 아름다운 은택을 후손에게 내리니 몹시 어질고 후덕하며 근원이 멀기에 그 흐름도 길었다. 자손이 6, 7세에 이르러서는 높은 벼슬아치들이 조정에 가득했고 공경(公卿)과 재상이 줄을 섰을 정도였지만 선생은 홀로 성대하고 가득참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에서 명리(名利)의 자리에는 신을 벗어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선조가 남긴 가통을 닦아 영구히 유가(儒家)의 기초적인 사업을 지켜 나가니 무성하게 한시대의 존경하는 본보기가 되고 백세의 모범이 되었다. 때는 단종(端宗)이 왕위를 세조에게 사양하던 시기인지라 홀로 몰래 곧은 지조로서 초연하게 깊은 산중의 초목은 사이에서 자신을 삼가 다스렸으니 그 의리는 사육신(死六臣)과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살신성인한 일과 더불어 간격이 심히 먼 것은 아닐 것이다.
그 후손이 영남지방에 궁벽하게 있으면서 그 조상의 가르침을 훌륭히 체득하고 대대로 유업을 이어가며 입신출세를 꾀하지 않으니, 증직의 은전이 지하에 미치지 못했고 제향의 의식도 또한 한때 훼철되었으니, 지금 400년이 지난 뒤에 어찌 능히 숨겨진 빛과 덕행의 만분의 일이라도 상상할 수 있겠는가!
후손인 종희(宗熙)와 교환(敎煥)과 교덕(敎悳) 등이 이제 개갈(改碣)을 준비하고 그의 선조인 대군사부(大君師傅)를 지낸 순원군(順原君)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효산초사(曉山樵舍)로 나를 찾아와 비문을 부탁하니 스로 돌아봄에 칩거하여 절필한 지가 와래되긴 하나 모두 조상을 위하는 일인지라 마음 속에 느끼는 바가 있어 삼가 행장을 상고하여 술하노라.
선생의 이름은 리(理)요, 서파(西坡)는 그 호이다. 안씨는 순흥에서 세계(世系)가 나왔으며 문성공(文成公)이신 회헌부자(晦軒夫子)는 6세조가 되고, 5세조의 이름은 우기(于器)이니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지고 문순공(文順公)의 시호를 받았으며 호는 죽옥자(竹屋子)이다. 고조의 이름은 목(牧)이니 순흥군에 봉해지고 문숙공(文淑公)의 시호를 받았으며 호는 겸재(謙齋)였고, 증조의 이름은 원숭(元崇)이니 순성군(順城君)에 봉해지고 문혜공(文惠公)의 시호를 받았으며, 조부의 이름은 원(瑗)이니 벼슬은 형조전서(刑曹典書)를 지냈는데 공민왕의 임신년에 말과 일이 왕의 뜻을 거슬렸다 하여 외지로 유배되었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 나라에서 여러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했고 시호는 경질(景質)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종약(從約)이니 해주목사를 지냈으며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모두 두문지(杜門誌)에 기재되어 있으며 어머니인 정부인(貞夫人)은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니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에 봉해지고 양도공(良度公)의 시호를 받은 양생(良生)의 따님이다.
정통(正統) 계유에 선생이 서원(瑞原)의 옛 집에서 출생했는데 풍채가 훌륭하고 도량이 크고 깊었으며 문장과 학업을 가정에서 얻었지마는 한 시대의 명사(名士)들이 추중하여 숭앙하였다. 백씨와 중씨 두 형이 찬성(贊成)과 판윤(判尹)에 올랐는데 공은 홀로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즐기지 않고 문을 닫고 독서하면서 심오한 깊은 도리를 더듬고 깊은 학문을 쌓아가는 것에 힘썼다.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가문이 회헌 선조 이후 역대로 조정에 현달하여 형제와 자질들이 사헌부에 가득하고 온 종족이 한 사람도 천한 옷을 입은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자신을 거두어 숨길 때이다” 하고 벼슬에 나아가기를 즐기지 아니했다. 천순(天順) 계유에 외직으로 의령현(宜寧縣)에 보직되어서 잠시 부임하였는데 흉년을 만나서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이 많으니 자신의 녹봉을 나누어서 백성에게 구휼을 베풀어 은혜와 신의가 두루 넘치자 달아나 유랑하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돌아왔다.
관찰사가 공의 치적을 조정에 보고하니 다음해인 갑술년에 예천군수로 임명 받았는데 얼마 안되어서 단종이 왕위를 사양하니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누암산(樓巖山) 밑에 집터를 잡아 살면서 마을 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하고, 산 이름을 용암산(龍巖山)이라고 고쳐 불렀으니 대체로 제갈량(諸葛亮)이 와룡(臥龍)에 은거한 뜻을 취한 것이며, 헌호(軒號)를 낙원(樂園)이라고 개칭한 것은 송나라 사마광(司馬光) 독락원(獨樂園)의 취향을 취한 것이다.
경태(景泰) 정축에 사육신(死六臣)의 참화가 일어나니 시대의 사정이 갑자기 변하여 금성대군과 순흥부사이던 이보흠(李甫欽)이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사실이 발각되어 함께 처형을 당하였고, 순흥부 내의 판복을 입은 70여 가문이 일시에 전멸을 당했는데 이러한 때를 당하여 선생께서는 문을 막고 손님을 사절하면서 스스로 깊이 몸을 숨겼다.
명공과 거경(巨卿)들이 서신을 많이 보냈지만 답서를 하지 않았고 방백과 수령들이 항상 찾아 왔으나 만나주지 않았으며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영월을 우러러 바라보며 항상 스스로 슬피 상심하면서 만년을 보내었다. 일찍이 말 한필과 동자 하나를 데리고 폐부(廢府)가 된 순흥의 숙수사(宿水寺)를 왕래했는데 평리(坪里)에 이르면 회헌 선생이 독서하던 옛 터로서 세연지(洗硯池)가 있는데 거기를 지날 때마다 감모(感慕)의 시를 읊는 것을 예사로 했다. 그 시에 이르기를
“죽계수(竹溪水)의 연원이여 사수(泗水)의 물가에는, 우리 조상님 독서하면서 여기서 자라나셨네. 이리저리 거닐어 보니 감모의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는데, 달은 뜨락의 오동과 세연지를 비추네” 하고 읊었다.
항상 물과 달은 가득하면 넘치고 줄어든다는 경계로서 자손들에게 벼슬을 하지 말라고 명하고 조석으로 부모를 봉양하는 여가에는 주자서를 읽게 하였음은 선조께서 주자를 존모하시던 뜻을 체득케 함이었으며 절대로 영달(榮達)의 길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서울에 사는 조카와 종손(從孫)들로 현달한 벼슬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 선생께서 시골에서 담백하게 사시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좋은 음식물을 보내어 드리면 모두 그것을 물리치고 말씀하시기를 “소백산의 명아주와 콩잎국이 내 분수에 만족한대, 관청에서 내려진 고량진미(膏梁珍味)가 무슨 필요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별세한 후 서너 세대 만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서울에 있던 여러 종족과 대종가가 모두 참혹한 화를 당했으나 오직 선생의 집만 홀로 화를 면했으니 그 시대 사람들이 앞 일을 아는 안식에 감복했으며 그 사실이 장능지(莊陵誌)에 기재되어 있다. 묘소는 순흥부의 남쪽 대룡산의 계곡(桂谷)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있으며 순조 임오년에 사림들의 공의로서 영연사(龍淵祠)에 제향토록 했으며 배위는 숙인(淑人)인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니 계천군(鷄川君)에 봉해진 종직의 따님이며 월성군(月城郡)에 봉해진 지수(之秀)의 5세 손녀이다. 묘는 선생의 묘 뒤에 부장(祔葬)했다.
아들 5형제를 길렀는데 백문(伯文)과 숙문(叔文)은 모두 후사가 없고, 계문(季文)은 음사로 부사직을 지냈고 병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흥문(興文)은 좌랑(佐郞) 벼슬을 했고, 익문(益文)은 사과(司果) 벼슬을 했다.
판서인 계문에는 3남이 있으니 영(瑛)은 명경진사(明經進士)요, 호는 오지당(五之堂)이며, 정(玎)은 충순위(忠順衛) 벼슬이었고 다음은 류(瑠)이다. 좌랑인 흥문은 2남이 있으니 희(熙)는 별좌였고 다음은 도(燾)였으며, 사과인 익문도 2남이 있으니 휴(烋)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고 학행이 있었으며 다음 신(信)은 판관이었다.
진사인 영은 6남이 있으니 공택(公擇)은 교관(敎官)이었고, 공우(公祐)는 충순위(忠順衛) 벼슬을 했고 공필(公弼)은 생원(生員)이며, 공신(公信)은 문과급제하여 교리(敎理)를 지냈고 공건(公健)은 부장(部將)을 지냈으며 다음은 공직(公直)이다. 충순위인 정은 4남이 있으니 맏이는 공준(公俊)이고 다음 공보(公輔)는 부장을 지냈으며 다음은 공헌(公獻)과 공익(公翼)이다. 류는 1남이 있으니 공작(公綽)이며 별좌인 희도 1남이 있으니 이름은 장손(長孫)인데 무관 선전관을 지냈고, 도도 1남이 있으니 연손(延孫)인데 무과에 급제했고, 동추인 휴도 1남 있으니 진업(進業)인데 승직랑(承直郞)이었으며, 판관인 신도 1남이 있으니 경남(慶南)이며, 나머지는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아! 선생은 시례(詩禮)의 가정에서 나고 고관대작의 문벌이었으나 처음부터 부귀와 영달에 그 마음을 둘로 갖지 않았으며 문을 닫고 고요하게 지내며 성리학에 몰두하여 그 당시의 명사들이 추중함에 이르렀으니 선생의 굳은 지조와 깊은 학문에 대해서는 엿보고 헤아릴 수 없는 경지인데 잠시 외직에 보직되어 두 고을의 백성들에게 사랑을 남겼을 뿐이니 어찌 충분히 쌓은 학문을 펼칠 수 있었다 하겠는가!
탱자나무 가시 숲에는 이미 난새와 봉황이 깃들 곳이 아니며 산의 꿩도 또한 기색을 살피고 멀리 날으는 법이니 하루 해가 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산림에 살 곳을 찾아 숨어 살면서 마침내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도록 자취를 없게 했으니 그 출처가 정당했음과 절개가 높았음은 백세토록 늠늠할 것이며 신명에게 물어도 진실했으리라. 만일 지조와 학문을 근본으로 한결같은 뜻이 본래 정해져 있지 않았다면 어찌 하루아침에 거취가 이와 같이 굳고 깨끗하겠는가!
책 상자에 옛날부터 소장해오던 시문들은 중세에 화재를 겪어서 후학들이 고증할 수가 없었는데 다행스럽게 순원군(順原君)이 덕행을 나타낸 글이 있으니 또한 태상(太常)의 기술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어서 후세에 전하여도 의심이 없으리라. 황석공(黃石公)이 말하기를 “후세 사람이 진실로 공언(公言)하지 않으면 백세토록 현인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으니 내가 비록 글 솜씨도 시들하고 말도 가벼우나 스스로 남몰래 백세의 공언에 관련시켜 그 서문을 쓰고 이어서 명을 짓는다.
가득함을 알아서 스스로 물러남은 탁월한 현명함이요,
난세의 기미를 먼저 알았음은 스스로 삼가는 독실한 뜻이다.
사마광과 같은 독락원(獨樂園)이 있었고 제갈량(諸葛亮)과 같은 와룡강(臥龍崗)이 있었다.
벼슬하기 전의 의복으로 유유히 배회하여 명예의 속박에서 쉽게 벗어났다.
세상에 나가고 몸을 숨김이 진실로 합당하니 마음과 행적이 모두 깨끗하였다.
주자서(朱子書)에 있는 큰 가르침이 가문에 전해오는 아름다운 비결이다.
선조를 빛내고 후손에게 남긴 것은 영세토록 검소한 의복을 강조하였다.
계곡(桂谷)의 남향진 곳에 선생의 묘갈을 새긴 것이 있다.
천재가 지나도록 공경의 마음 일어날 것이니 지나가는 사람들아 반드시 본받아라.

외예손인 장사랑(將仕郞)의 품계로 전에 혜릉참봉(惠陵參奉)을 지낸 진성 이중철(李中轍) 삼가 짓고, 숭록대부(崇祿大夫)의 품계로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를 지낸 해평 윤용구(尹用求) 삼가 쓰다. 공자 탄생 2484년 계유(1933) 4월 일 15대손인 교환(敎煥)이 고쳐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