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안내/경주이씨◇소개

시조이후의 세계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6. 8. 10:04

시조이후의 세계


가. 인멸된 세계(世系)

시조 이후의 세계를 밝힌 자료(資料)는 선대(先代) 이래로 채택하지 않고 신라 말의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제1세로 정하고 있다. 2세 금현(金現)은 재상으로 병부령을 겸하였으며 3세 금서(金書)는 고려초에 중원태수와 호부랑중에 이르고 4세 윤홍(潤弘)은 병정(兵正)에 이르렀고 5세 승훈(承訓)은 정조시랑(7품), 6세 주복(周復)은 좌사간( 정6품), 7세 칭()은 사록(司錄), 증 보조공신 문하시중, 8세 치련(侈連)은 문하시중, 아들 총섬(寵暹)이 문하시중의 귀함으로 증직이 있을 것인데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9세 총섬(寵暹)은 문하성 문하시중 10세 춘정(春貞)은 순흥부사(순흥은 현 김해), 11세 현복(玄福)은 생원 12세 선용(宣用)은 군윤(軍尹-9품 중 8품)이고 13세 승고(升高)는 보윤(甫尹-9품 중 9품)이며 14세 득견(得堅)은 문림랑, 상의원 직장동정(종7품)으로 중조 15세 열헌공(휘핵)에 와서는 열헌공 자신의 관직이 문하평리, 증 상서좌복야이었고 3자 9손(三子九孫)인 중조 16세의 세 아들과 중조 17세인 아홉 손자가 모두 관직에 나가 현달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열헌공(휘핵)을 중흥조로 모시고 이때부터 경주이씨가 크게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던 것입니다.

15세(翮)
중흥조, 문하평리(門下評理), 증 상서좌복야(贈尙書左僕射) 호 열헌(號悅軒).

16세
○ 장자 인정(仁廷) - 문하평리(門下評理)
○ 차자 진(瑱) - 검교정승(檢校政丞), 임해군(臨海君), 호 동암(號東菴), 시 문정(諡文定)
○ 3자 세기(世基) -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대제학(大提學), 검교정승(檢校政丞), 호 송암(號松巖), 시 문희(諡文僖)

17세
○ 성암공(평리공 휘 인정) 계대.
△ 장자 부(榑) - 내서사인(內書舍人)
△ 차자 규(樛) - 우헌납(右獻納).
○ 동암공(휘 진) 계대
△ 장차 관(琯)-가락군(駕洛君), 호 이암(號怡庵).
△ 차자 제현(齊賢) - 추성양절 동덕협의 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 벽상삼중대광(壁上三重大匡), 우정승(右政丞),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 문하시중(門下侍中), 호 익재(號益齋), 시문충(諡文忠)
△ 3자 지정(之正) - 대호군(大護軍)
○ 송암공(휘 세기) 계대
△ 장자 천(蒨) -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정승(僉議政丞),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호 국당(號菊堂), 시 문효(諡文孝)
△ 차자 과(邁) - 부정(副正)
△ 3자 매(邁) - 상서(尙書)
△ 4자 조(蓨) - 사인(舍人)

소판 이거명(蘇判 李居明)

○ 중시조 소판공(휘 거명)의 최초 기록
소판공(蘇判公)은 고려(高麗)말 익재 문충공 이제현(李齊賢)의 묘지문(墓地文)에 그 선대(先代)가 신라(新羅) 말 진골(眞骨) 출신으로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이거명(李居明)이라는 기록을 남김으로서 시조 이후(始祖以後) 기록이 전하는 최초의 선조(先祖)가 되었기에 후손들이 중시조로 받들고 기세(起世)하여 1세로 하여 아랫대 후손을 헤아린다.

○ 중시조 소판공 휘 거명(蘇判公 諱居明)
蘇判이니 新羅官制에 蘇判秩은 有眞骨이 受之라 (소판이니 신라관제에 소판질은 유진골이 수지라) 벼슬은 소판이니 신라관제에 소판의 차례 즉 품계는 오직 진골만이 갖는다. 唐令狐澄의 新羅記에 新羅 貴族을 謂之骨이라하다(당 령호징의 신라기에 신라 귀족을 위지골이라 하다) 당나라 영호징의 신라기에 신라 귀족을 이르되 골이라 하였다. 始祖以下는 失系 故로 李牧隱 穡이 撰益齋墓誌에 只載蘇判以下하고 (시조이하는 실계 고로 이목은 색이 찬익재묘지에 지재소판이하하고) 시조 이하는 계보를 잃어버렸으므로 목은 이색이 익재 묘지에 글을 지을 때 다만 소판공 이하만 실었다. 大譜에 以公으로 爲遠代孫 而起 一世焉하다(대보에 이공으로 위원대손 이기 일세언하다) 족보에 이로써 소판공을 원대손으로 하고 1세로 하였다.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소판공(蘇判公)을 중시조(中始祖)로 문중사(門中事) 중흥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신라 때 소판(蘇判)의 벼슬은 진골(眞骨)만이 오를 수 있는 직(職)이었다. 따라서 시조 이후 실전(失傳)된 1000年 동안에도 다른 기록에 의하여 경주 이씨(慶州李氏)들이 대대로 왕족(王族)다음 가는 지위를 누려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판공(蘇判公)은 신라 말엽 때 활동하셨다. 손자인 호부랑중공(戶部郞中公) 휘(諱) 금서(金書)께서 고려조에 중원태수(中原太守) 벼슬을 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후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천자만손(天子萬孫)으로 번성하여 고려조(高麗朝)와 조선조(朝鮮朝)를 통하여 과거급제자가 182분, 재상(宰相)이 8분, 정공신(正功臣)이 12분, 청백리(淸白吏)가 10분 등 이 땅의 대표적인 명문거족(明門巨族)으로 성장했든 것이다. 옛말에 이씨(李氏)는 모두 경주 이씨(慶州李氏)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다.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이씨 성(李氏姓)중에서 사성(賜姓)의 으뜸 종문(宗門)으로서 진주, 원주, 재령, 아산, 우계. 차성, 합천. 장수 등의 이씨(李氏)는 모두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분적 종파다.

소판(蘇判) 관직

소판은 관직명(官職名)으로 신라시대 골품제도(骨品制度)인 성골과 진골품(聖­眞骨品)으로 소판은 성골이나 진골 출신들만이 오를 수 있는 17관위 중 3관등 지방 수령직(地方首領職)이다.

나. 중흥조(中興祖) 열헌공(悅軒公)과 두 편의 하시(賀詩)

1) 중흥조 열헌공과 3자 9손
중시조 휘 거명(居明)의 15세 후손인 문하평리 열헌공(悅軒公) 휘 핵의 3자 9손이 모두 이름을 떨쳤으므로 공을 이문(李門)의 ‘중흥조(中興祖)’로 받들게 된 것이다. 공은 3자를 두었는데 인정(仁挺)·진·세기(世基)인 바, 어머니 김해김씨가 서사(書史)를 친히 가르쳐 모두 세상에 크게 쓰이게 하였다. 장자 인정은 문과를 거쳐 고려 제1의 사간(司諫)에 이르고 차자 진과 계자 세기는 충렬왕 6년(서기 1280)의 친시(親試)에서 제2, 제3 위에 올라 임금이 황패(黃牌)를 내려 세인(世人)이 이를 “천장급제(天場及第)(하늘의 과장(科場)에서 급제한 것)”라 하였고 그 뒤에 인정의 아들 부와 규, 진의 아들 관(琯)과 제현(齊賢), 세기의 아들 천 등 5명이 모두 성균시에 장원을 하였다. 세상사람들이 [갑과손(甲科孫)]이라는 별명을 지어 불렀고 인정의 두 아들과 진의 세 아들 세기의 네 아들 등 열헌공의 아홉 손자가 모두 문과에 등제하니 당대의 명유(名儒)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이 “세과(世科. 대대로 과거에 급제한다는 뜻)” 라고 극찬을 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경주이씨 가문이 고려의 현족(顯族)으로 우뚝선 것이다.

2) 두 편의 하시(賀詩)
묵헌(墨軒) 민지(閔漬)가 동암공(東庵公)에게 바친 하시(賀詩)는 다음과 같다.

華萼三家五榜魁 한 꽃받침 세 집에서 다섯 손자가 으뜸을 하니
人言皆是謫仙才 사람들이 모두 이백(李白)의 재주라 하네
知公積善眞無敵 공(公)의 적선(積善)은 진실로 대적할 사람이 없구려
獨見年年慶席開 해마다 경사스런 잔치를 홀자서만 보게 되시니

문량(文良) 조간(趙簡)이 역시 동암공(東庵公)에게 드린 하시(賀詩)에

具慶提衡罕見聞 형제가 과거에 들어 집안 잔치를 연이어 엶은 드믄 일인데
得賢還勝舊龍門 어진이를 얻는 것은 (이 친시(親試)가) 옛 제도보다도 도리혀 낫구려
觴中酒可重重見 잔 속에 술은 거듭 거듭 채워지는데
堂上親皆兩兩存 당상에는 친부모님들이 모두 쌍쌍히 계시는 구려
幾歲蘭蓀相襲馥 난손(蘭蓀. 난초의 싹)같은 자손들의 향기 잇기 몇 해이던가
一番桃李恰開繁 도리화(桃李花) 한 번 피니 가문이 활짝 열리는 구려
悅軒喜氣那容說 열헌공(悅軒公)의 기뻐하는 모습을 어찌 (임금께) 아첨한다 하는가
人道新添甲科孫 사람들이 '갑과(甲科)의 자손' 이라는 별명을 새로 붙여 주었는데

묵헌은 첨의정승을 지낸 학자이고 문량은 첨의시랑평장사를 지낸 문호(文豪)였다. 두 분이 함께 거듭하는 과거 급제의 자축 잔치에 참석하고서 느낀 바를 시로 읊어서 동암공에게 드린 것인데, 이 두 편의 시는 경주이씨 문중에서 가장 아끼는 보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3) 장자 인정(仁挺)과 그의 아들
인정(仁挺)은 호를 성암(誠菴)이라 했는데 일찍이 문과에 장원하고 광주판관(廣州判官)을 거쳐 충렬왕 2년에 우정언으로 있을 때 임금이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벼슬을 주려하므로 서명을 하지 않아서 임금의 노여움을 샀다. 뒤에 누진하여 사간원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에 공(功)이 없이 벼슬을 받는 자는 모두 서명을 하지 않으니 임금의 미움을 받아 파직이 되었다가 참지정사 이지저의 변호로 복직되었다. 사관(史官)이 기록하기를 “공(公)은 굴강하야 모든 사람들이 벼슬을 받을 때에 반드시 그 공과(功過)를 따져서 처결할 뿐 (왕명이라 하여도) 구차하게 서명하지 않았다”고 있다. 불서고신(不署告身. 임명장에 서명을 하지 않는 일)으로 누차 왕의 미움을 샀으나 굽히지 않으므로 그 곧은 성품을 세상사람들이 칭송하였다. 공의 차자 규는 덕원부사(德原府使)를 거쳐 우헌납에 이르렀는데, 충숙왕 원년에 임금이 “상왕(上王. 충선왕)이 평소 총애하는 승려 경린(景麟)과 경총(景聰)에게 벼슬을 내리려 할 때에 우헌납 이조은(李朝隱. 공의 이름)이 서명을 해주지 않아서 조홀도(祖忽島)로 유배되었으나 이제 조은을 불러서 다시 벼슬을 주라.”고 하였다. 공은 간원(諫院)에 있는 동안 위로는 임금의 잘못은 반드시 깨우쳐드리고 아래로는 신하들의 간사한 작태를 억눌러서 아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였다. 부자가 모두 강직한 충신들로서 왕의 위엄에도 굽히지 않았다.

4) 차자 진과 아들 익재공파의 [팔별(八鼈)집]과 [화곡(華谷)집]
열헌공의 차자 동암공(東庵公) 진은 검교정승에 이르렀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는데 시문(詩文)으로 일세에 이름을 떨쳤다. 그의 둘째 아들 익재공(益齋公. 齊賢)는 고려말에 네 번이나 재상의 자리에 오른 대정치가이고 학자이며 또한 시인이었다.

가. [팔별집]
[팔별집]은 익재공의 6대손인 공린(公麟)의 현몽(現夢)에서 시작된다. 공린은 사육신(死六臣)의 한 분인 박팽년(朴彭年)의 취객(娶客 - 사위)이 되었는데 혼례를 치룬 첫날 밤의 꿈에 용왕(龍王)이 나타나서 “내 여덟 아들이 지금 사경(死境)에 이르렀으니 어서 구해달라. 그대가 내 여덟 아들을 구해준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으리라.”라고 하므로 꿈을 깨어 일어나보니 한밤중이었다. 잠든 신부를 흔들어 깨서 물어보니 신부의 말이 “어머니께서 며칠전에 사위에게 먹이려고 자라 8마리를 사다가 항아리에 넣어두었다”고 하므로 둘이서 8마리의 자라를 꺼내서 10여리 밖에 있는 호수에 방생(放生)하였는데 가는 도중에 한 마리가 죽었다고 한다. 얼마후에 공린은 박씨부인과의 사이에 8형제를 두었는데 3남 원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죽으니 자라 8마리를 방생하러 가는 도중에 죽은 한 마리가 그였음이 확인된 셈이다. 8형제를 둔 것은 용왕의 보은(報恩) 때문이라 여겨서 이름을 모두 자라, 거북, 고래, 곤(鯤) 등 물고기의 이름을 붙여서 오(熬)·구(龜)·원(黿)·타(鼉)·별(鼈)·벽(鼊)·경(鯨)·곤(鯤) 이라 했는데 한결같이 글을 잘 지어 <8문장>이라고 불렀다. 이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아직도 자라를 먹지 않는다고 하니 8별을 자라의 환생(還生)으로 숭봉하는 가통(家統) 때문이다. 공린은 박팽년의 서랑(壻郞 - 사위)이라는 이유로 벼슬 길이 막혔었다가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가 절부(節婦)로 표창되면서 30여년만에 길이 터져서 무과(武科)를 거쳐 현령(縣令)에 이르렀으나 3자 원이 사화(士禍)로 인하여 죽자 청주에 유배되었는데 반정(反正) 후에 신원(伸寃 - 신분,재산 등을 본디대로 되돌려 놓음)되었다.
구(龜)는 문과에 급제, 좌랑에 이르렀을 때에 아우 원의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충주목사에 이르렀다. 원은 문과를 거쳐 호조좌랑에 이르렀는데 김종직(金宗直)에게 ‘문충(文忠)’의 시호를 주자고 건의한 일로 곽산(郭山)에 유배되었다가 나주로 옮기고 갑자사화 때에 처형되었는데, 반정후에 신원이 되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서되었다.

나. [화곡집]
화곡(華谷)은 좌의정 경억(慶億)의 호이다. 익재공(益齋公) 제현(齊賢)의 6대손인 공린(公麟)의 6대손이다. 공은 선조조의 명신 시발(時發)의 아들로 염결(廉潔).미렴의 명상(名相)이었다. 그의 자손은 대대로 현달(顯達)하여 대제학.이조판서를 지낸 인엽(寅燁), 숙종 때의 대표적인 화가이며 이론가였던 손자 하곤(夏坤), 순조조의 예조판서, 판돈녕부사 였으며 공의 5대손인 집두(集斗) 등의 인맥을 이루었다.

5) 계자(季子 - 막내 아들) 세기와 국당공파의 [팔정(八廷)집]과 [매죽헌(梅竹軒)집]
열헌공의 계자(季子)·세기(世基)는 호가 송암(松巖)이었고 대제학을 거쳐 검교정승에 이르렀고, 그의 장자 국당(菊堂) 천(蒨)은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고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손 달충(達衷)은 감찰대부를 거쳐 호부상서로 동북면병마사가 되었다. 팔관회(八關會) 때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밀직제학이 되고 신돈(辛旽)이 주살된 후에 계림부윤이 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가. 매죽헌집
국당공파(菊堂公派)에서는 효종을 도와 북벌(北伐)을 추진하던 세칭 [이완대장(李浣大將)]이 가장 걸출하다. 그는 무과를 거쳐 경기도수군절도사, 삼도수군절도사에 이르고 송시열(宋時烈) 등과 함께 효종의 명을 받들어 ‘북벌계획’ 을 추진하였다. 어영대장을 거쳐 훈련대장에 이르러 신무기의 제조와 성곽(城郭)의 보수를 하면서 청(淸)과의 일전(一戰)에 만전을 기했으나 효종의 급서(急逝)로 물거품이 되었다. 그후 포도대장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이며 함경도병마절도사였고 형조판서에 이른 충무공 수일(守一)이다.

나. 팔정집
국당의 맏아들 판병부사 경중(敬中)의 후손 가운데 세종조에 청백리(淸白吏)에 책록된 정보가 있고 정보의 후손 중에 증 영의정 탕(宕)이 있는데, 여덟 아들을 둔데다가 모두 현달하여 [팔정(八廷)집]이라고 불리웠다. 이 8형제 가운데 정암(廷馣)·정형(廷馨)·정혐(廷馦)의 세 형제가 유명하였다. 이 중 정암(廷馣)·정형(廷馨) 형제가 모두 대사간을 지냈고 명신으로 꼽히었는데 형 정암(廷馣)은 임진왜란에 의병장이 되어 여러 곳에서 왜군을 격파했고 아우 정형(廷馨)은 성리학의 대가였으나 형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나아가서 공을 세웠으며 이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 『동각잡기(東閣雜記)』·『지퇴당집(知退堂集)』등이 전한다.

6) 계자(季子-막내아들) 세기(世基)의 후손 3자 상서공파의 [오신(五臣)집]과 [백사(白沙)집]

가. 오신집
송암공(松巖公)의 3자 과()는 고려말에 상서(尙書)에 이르렀으나 이태조에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공훈에 관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과()의 5대손 성무(成茂)는 안동판관, 증 이조판서였고 5자를 두었는데, 인신(仁臣)·의신(義臣)·예신(禮臣)·지신(智臣)·신신(信臣)이었으며 모두 이름을 떨쳤으므로 세인들이 [오신(五臣)집]이라고 불렀다. 인신(仁臣)은 지의금부사에 이르고 증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역시 다섯 아들을 두었다. 장자 몽린(夢麟)은 수군절도사·병마절도사를 거쳐서 포도대장. 지돈녕부사에 이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인종~명종대의 ‘명장(名將)’으로 이름을 떨쳤다. 몽린이 지돈녕부사로 있을 때 명종(明宗)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친히 관람하시는데 매가 장전(帳殿. 임시로 꾸민 임금의 거처)의 위를 맴돌아 날면서 차려놓은 어선(御膳. 임금이 드시는 음식)을 노리므로 임금이 매우 싫어하여 “매를 쏘아 떨어뜨리라” 하니 한 대신(大臣)이 아뢰기를 “이몽린(李夢麟)만이 쏠 수 있아옵니다.”하였다. 몽린(夢麟)이 명에 따라 임금 앞에 나와서 여쭙기를 “매의 어디를 쏘리까?”하므로 임금이 괴이쩍게 여기고 “매의 등을 쏘아보라.”하였다. 그러자 공이 화살 두 대를 시위에 먹이어 연거푸 쏘았다. 한 대가 매의 오른쪽 날개를 맞히는 순간에 놀래어 몸을 뒤집으니 다음 화살이 등에 꽂히었다. 매가 땅에 떨어지므로 주어다가 살펴보니 과연 화살이 등에 꽂히었다. 임금을 위시하여 이 광경을 본 신료(臣僚)들이 모두 혀를 내둘렀다. 몽린의 큰 아우 몽기(夢麒)는 통정대부였고 둘째 아우 몽원은 병마절도사·어모장군이었으며 셋째 아우 몽서(夢犀)는 청도군수(淸道郡守)였고 넷째 아우 천휴당(天休堂) 몽규(夢奎)는 반궁(泮宮. 국학(國學) 곧 성균관)에서 수학(修學)할 때 어린 유생들이 핏대를 올리며 논쟁하는 것을 보고 환로(宦路)의 꿈을 접고 보령(保寧)으로 낙향하였는데 얼마 뒤에 인종(仁宗)이 승하하므로 애통하였고 고고한 선비로 수석(水石)을 벗삼고 지냈다. 사후에 율곡(栗谷)이 시장(諡狀)을 지었다. 경종(景宗) 1년에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하고 사액(賜額)했으며 성균관좨주·사헌부대사헌에 추증되었다. 몽린의 손 용근(庸謹)은 군자감정이었고 현손 문재(文在)는 문과에 들어 안악군수(安岳郡守)에 이르고 문빈(文彬)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였으며 5대손 세현(世賢)은 문과에 든 뒤에 예조좌랑에 이르렀을 때에 기주(記注)에 뽑히었으나 당시의 재상의 미움을 사서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내쳐져 임지에서 죽었다. 세현은 일찍이 유생으로 율곡(栗谷)·우계(牛溪)의 문묘출향(文廟黜享)을 공박하는 봉장(封章)을 올렸고 기사화(己巳禍)에는 숙종의 왕비 폐출(廢黜)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린 강의(剛毅)·충절(忠節)의 인물로 옥구(沃溝) 삼현사(三賢祠)에 배향되었다. 5신 가운데 둘째인 의신(義臣)은 진사로 불사(不仕)하였으나 5대손 수종(秀宗)은 병자호란 때에 3학사와 함께 호지(胡地)에 끌려가서 매운 위국단충(爲國丹忠)을 보이었고 그의 손 천복(天福)은 원종공신으로 어모장군에 이르렀다. 5臣 가운데 가장 현달한 집안은 셋째 예신(禮臣)의 문중이었다. 장자 몽윤(夢尹)은 장단부사(長湍府使)에 이르고 증직제학이었으며 차자 몽량(夢亮)은 우참찬에 이르렀으며 저 유명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바로 몽량의 네째 아들이다. 4신 지신(智臣)은 선무랑에 그쳤으나 율곡과 도교(道交)를 맺었었고 5신 신신(信臣)의 아들 희관(熙寬)은 가선대부였고 증손 무춘(茂春)은 어모장군이었으며 현손 덕수(德壽)는 공조참의였고 5대손 세훈(世薰)은 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이었다.

나. 백사집
앞서 잠시 언급한 [백사(白沙)집]은 예신(禮臣)의 차손인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항복(恒福)의 가계(家系)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은 임란 중에는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를 맡아 왜노(倭奴)의 침략을 승리로 이끌었고 난후에는 호성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니 "때에 정인홍(鄭仁弘) 등이 성혼(成渾)을 무고하므로 그의 무죄를 변호하다가 '정철(鄭澈) 의 당(黨)' 이라는 혐의를 받으니 자진하여 영의정을 그만두었는데, 선조가 허락하지 않고 거듭 불렀으나 '성만(盛滿 - 벼슬과 명예가 가득함)이 되었으니 물러나는 것이 군자의 도리' 라 하며" 선조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양하여 ‘대신(大臣)의 풍도(風度)’를 보였다. 공의 현손 광좌(光佐)와 태좌(台佐)는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에 이르렀고 태좌의 아들 종성(宗城)은 영의정이었으며 6대손 경일(敬一)도 좌의정이었고 9대손 유원(裕元)은 영의정이었다. 광좌(光佐)는 숙종∼영조 때 소론(少論)의 중진으로 40여년 벼슬길에서 영의정을 세 번, 대제학을 세 번이나 역임했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문집 『운곡실기(雲谷實記)』가 전한다. 광좌의 8촌형인 태좌(台佐) 또한 소론인데, 영조 때 좌의정에 올라 3종 형제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노론(老論)과 맞섰다. 그의 아들 종성(宗城)이 뒤를 이어 좌의정을 지내고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는데, 이무렵에 조선조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가 가장 성시(盛時)를 누렸다. 오천(梧川) 종성(宗城)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장조(莊祖, 莊獻世子) 묘정에 배향되었다. 오천은 영조 3년 증광문과에 급제, 영조 4년 경상도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가 되어 민폐를 일소하였다. 영조 12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탕평책(蕩平策)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도승지(都承旨)·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지내고, 영조 20년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영조 29년 좌의정(左議政)에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가 사직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죽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문장에 뛰어났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유원(裕元)은 대원군(大院君)에 맞선 보수정치가로 대원군의 개혁정치에 반대하고 파직당했다가 대원군 실각 후 영의정이 되어 대원군 공격의 선봉이 되었다. 1882년 운양호(雲揚號)사건으로 일본세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문호를 열게 될 때 전권대신으로 제물포(濟物捕)조약에 조인했다.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는데 특히 예서(隸書)를 잘 썼고, 『임하필기(林下筆記)』, 『귤산문고(橘山文稿)』등 저술을 남겼다. 역시 9대손 유승(裕承)은 좌찬성이었는데 6형제를 두었던바 건영(建榮)·석영(石榮. 유원의 아들로 출계)·철영(哲榮)·회영(會榮)·시영(始榮)·소영(韶榮)이었는데, 한일합방이 되던 해에 6형제가 함께 솔가 망명하여 만주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고 3,500여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여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와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특히 회영과 시영은 3·1운동을 주도하였고 시영은 임시정부의 법무총장·재무총장·의정원장을 맡아 일본의 박해 속에서 임정을 지켰으며 광복 후에 5형제를 이국(異國)의 땅에 묻고 참담한 심경으로 홀로 환국한 시영은 국명(國名)을 ‘대한(大韓)’으로 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하는 등 정부수립을 주도하고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임기 1년을 남기고 이승만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에 맞서 사퇴하고 이듬해에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의 성원에 못이겨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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