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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유형문화재 제224호] 영가지 <권 1 ~ 4> (永嘉誌 <卷 一 ~ 四>)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5. 19. 19:14

[경북 유형문화재 제224호]
영가지 <권 1 ~ 4> (永嘉誌 <卷 一 ~ 四>)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유산 검색 > 영가지(永嘉誌)
*국역 출처: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 > 영가지


서지
종목: 경북 유형문화재 제224호
명칭: 영가지및책판(永嘉誌및冊板)
시대: 조선 선조 41년(1608)~대한제국(1899)
수량: 일괄(13책)
분류: 목판본/사간본
지정일: 1986.12.11
소유자: 권오기,권기백
소재지: 경북 안동시
문화재형태: 선장
형태서지: 1. 영가지 <권 1> 永嘉誌 <卷 一> - 조선 선조 41년(1608), 1책(冊).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21.8cm×18.0cm,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9자(字),주쌍행(注雙行),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32.0cm×22.0cm
~
4. 영가지 <권 4> 永嘉誌 <卷 四>
5. 영가지 <원> 永嘉誌 <元> - 조선 선조 41년(1608), 1책(冊).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3.8cm×18.2cm,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2자(字), 주쌍행(注雙行), 상하내향사판화문어미(上下內向四瓣花文魚尾); 31.7cm×24.2cm
6. 영가지 <형> 永嘉誌 <亨>
7. 영가지 <이> 永嘉誌 <利>
8. 영가지 <정> 永嘉誌 <貞>
9. 선조편집영가지 <제1책> 先祖編輯永嘉誌 <第一冊> - 대한제국(1899), 1책(冊).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0.6cm×17.6cm,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2자(字), 주쌍행(注雙行), 상하내향사판화문어미(上下內向四瓣花文魚尾); 32.2cm×22.2cm
~
12. 선조편집영가지 <제4책> 先祖編輯永嘉誌 <第四冊>
13. 간인시도 刊印時到 - 조선 선조 41년(1608), 1책(冊).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24.2cm×18.2cm,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9자(字); 30.3cm×21.7cm

해제
이 자료는 조선 중기 안동(安東) 지역의 지방지(地方誌)인 『영가지(永嘉誌)』와 이의 『책판(冊板)』이다. 영가(永嘉)는 화산(花山)과 함께 안동의 옛날 이름이다.
『영가지』의 편찬은 선조35(1602)년 권기(權紀, 1546~1624)가 스승 유성룡(柳成龍, 1542~1607)으로부터 편찬요목을 받아 동향인(同鄕人) 권행가(權行可)와 함께 편찬에 착수하였다. 이를 위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함주지(咸州誌)』의 편차를 참고하였으며, 그것을 다시 유성룡에게 질의한 다음 동향의 사우(士友)들과 함께 분담ㆍ집필케 하였으나, 유성룡이 죽자 중단되고 말았다. 그후 함안(咸安)의 읍지(邑誌)인 『함주지』를 편찬한 바 있는 정구(鄭逑, 1543~1620)가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오자, 권기ㆍ김득연ㆍ권오ㆍ이혁ㆍ배득인ㆍ이적ㆍ유우잠ㆍ이의준ㆍ권극명ㆍ김근 등을 소집하여 재편찬에 들어가 선조 41년(1608)에 완성하였다.
이때 편찬된 『영가지』의 초본(草本)이 부사(府司)에 소장된 채 지내오다가 영조 36년(1760) 서울 찬수청(纂修廳)에 바쳐졌고, 2년 후 서울에 올려진 것을 등초(謄草)하여 다시 부사(府司)에 비치하였다. 그 후 정조 8년(1784) 호장(戶長) 권창실에 의해 개장(改粧)되었는데, 당시 등초해 온 『영가지』 사본(寫本)은 18세기말부터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초고본(草稿本) 1책, 초고본 8권 3책, 정고본(定稿本) 8권 4책으로 전하였다.
내용은 권두에 권기의 서문, 본부도(本府圖)와 임하(臨河)ㆍ길안(吉安)ㆍ감천(甘泉)ㆍ내성(奈城)ㆍ일직(一直)ㆍ풍산(豊山)ㆍ개단부곡(皆丹部曲)ㆍ춘양(春陽)ㆍ소천부곡(小川部曲)ㆍ재산(才山) 등 안동부 내 각 현과 부곡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지도 다음에는 연혁(沿革)ㆍ읍호(邑號)ㆍ강역(疆域)ㆍ진관(鎭管)ㆍ호구(戶口)ㆍ산천(山川)ㆍ토품(土品)ㆍ향교(鄕校)ㆍ도로(道路)ㆍ제언(堤堰)ㆍ성씨(姓氏)ㆍ인물( 人物)ㆍ총묘(塚墓) 등의 목록을 수록하여 당시 안동부의 행정조직ㆍ사회경제ㆍ문화ㆍ풍속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영가지』는 전국 읍지 중에서도 편찬 시기가 빠른 17세기 초이며, 유성룡과 정구의 지휘하에 권기를 비롯한 당시 안동부(安東府)를 대표하는 유림들이 두루 편찬에 참여했기 때문에 체제가 정연하고 내용이 매우 충실하였다. 이들 자료는 전국 읍지의 전형(典型)이 되었으며 지방사 연구자료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柰城縣 【1선장 33쪽】
本退串部曲 高麗忠惠王時 以鄕人䆠者姜金剛 入元 有侍衛之勞 故改今名 陞爲縣


◎내성현(柰城縣)
본디 퇴관부곡(退串部曲)이다. 고려 충혜왕(忠惠王)때에 고을 사람인 환자(宦者) 강금강(姜金剛)이 원(元)나라에 들어가 시위(侍衛)한 공로가 있었으므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승격시켜 현(縣)으로 하였다.



●奉化縣 【1선장 34쪽】
顯宗 屬安東 恭讓王時 置監務


◎봉화현(奉化縣)
현종(顯宗)이 안동에 예속시켰는데 공양왕(恭讓王)때 감무(監務)를 두었다.



●義城縣 【1선장 34쪽】
顯宗屬安東 仁宗置監務


◎의성현(義城縣)
현종(顯宗)이 안동에 예속시켰는데 인종(仁宗)이 감무(監務)를 두었다.



●奈城縣 【1선장 41~42쪽】
在府北一百十里 東西十九里 南北二十里 東距奉化縣境 巨樹村 十里 南距禮安縣境 加內谷 十五里 西距榮川郡境 虎坪 九里 北距皆丹部曲境 沙縣 五里


◎내성현(柰城縣)
부(府)의 북쪽 110리에 있다. 동ㆍ서는 19리요 남ㆍ북은 20리이다.
동쪽으로는 봉화현(奉化縣)의 경계 거수촌(巨樹村)과 10리 떨어진다.
남쪽으로는 예안현(禮安縣)의 경계 가내곡(加內谷)과 15리 떨어진다.
서쪽으로는 영천군(榮川郡)의 경계 호평(虎坪)과 9리 떨어진다.
북쪽으로는 개단부곡(皆丹部曲)의 경계 사현(沙縣)과 5리 떨어진다.



●皆丹部曲 【1선장 44쪽】
屬奈城 ○在府北一百四十里 東西三十里 南北 九十五里 東距奉化縣境 下道心 二十五里 南距柰城縣 境沙峴 五里 西距榮川郡境 西里 五里 西北距寜越郡境 道力峴 二十里 北距㫌善郡境 屈里居 九十里


◎개단부곡(皆丹部曲)
내성(柰城)에 예속된다. 부(府)의 북쪽 140리에 있다.
동ㆍ서는 30리요, 남ㆍ북은 95리이다.
동쪽으로 봉화현(奉化縣)의 경계인 하도심(下道心)과 25리 떨어진다.
남쪽으로 내성현(柰城縣)이 경계인 사현(沙峴)과 5리 떨어진다.
서쪽으로 영천군(榮川郡)의 경계인 서리(西里)와 5리 떨어진다.
서북쪽으로 영월군(寧越郡)의 경계인 도력현(道力峴)과 20리 떨어진다.
북쪽으로 정선군(旌善群)의 경계인 굴리거(屈里居)와 90리 떨어진다.



●金地村 【1선장 55쪽】
俗名 今音知 又名金溪 在府西二十里 古稱千年不敗之地 司僕正 裴尚志 居之 有栢竹堂 慵齋李宗凖 判書權輗 亦生于此 鶴峯金誠一 自臨河 來居焉 閭閻撲地一溪中 貫耆老比屋居之 一鄕稱爲老人村



◎금지촌(金地村)
속명은 금음지(今音知) 또는 금계(金溪)라고 한다. 부(府)의 서쪽 20리에 있다. 옛날에 칭하기를 “천년 패하지 않는 땅” 이라고 했다. 사복정(司僕正) 배상지(裵尙志)가 여기 살았는데 백죽당(栢竹堂)이 있다. 용재(庸才) 이종준(李宗準), 판서(判書) 권예(權輗)도 또한 여기에서 태어났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이 임하(臨河)로부터 와서 살았다. 여염집이 가득하고 한 줄기 냇물이 중간을 가로질렀는데, 70을 넘은 늙은이가 집을 잇대서 사니 온 고을에서 일컬어 노인촌이라 한다.

*사복정(司僕正) 백죽당(柏竹堂) 배상지(裵尙志): 대사헌공(大司憲公) 이승직(李繩直)의 처부(妻父)



●柰城縣 【1선장 71~72쪽】
縣內 一名衙洞 人吏居之 巨次樹介村 在縣東十里 士族 居之 冷井村 在縣東十里 加內谷村 在縣南十五里 土瘠俗朴士族居之 鋤每洞村 在縣南十五里 黃田村 在縣南六里 流橋村 在縣南七里 立石村 在縣南十里 廣坪村 在縣西 五里 進士南麒壽 始卜居 有灌漑 浦本村 在縣西二里 士族居之 有灌漑 松內村 在縣西三里 士族居之 前坪有龜巖 其狀如鱉 上可㘴百餘人 通望十里 有灌漑 波羅本村 又名海㡳 在縣西九里 士族居之 土多沙石 虎坪村 在縣西九里 有灌漑孝子才士 多出于此 隣洞村 在縣西五里 土地瘠薄 士族居之 沙峴村 在縣北五里 無村家 今有書院 形勢絶勝 土地不瘠 有灌漑 酉谷村 在縣北六里 靑巖亭 最奇絶 忠定公 權橃 始卜居 有灌漑 吐谷村 在縣北七里 有灌漑 塔坪村 在縣北十里 大司諌鄭惟一 居之 有灌漑


◎내성현(柰城縣)의 마을
현내(縣內) 일명은 아동(衙洞)이다. 아전들이 산다.
거차수개촌(巨次樹介村) 현(縣)의 동쪽 10리에 있다. 사족(士族)들이 산다.
냉정촌(冷井村) 현(縣)의 동쪽 10리에 있다.
가내곡촌(加內谷村) 현(縣)의 남쪽 15리에 있다. 토지는 메마르고 풍속은 순박하며 사족(士族)들이 산다.
서매동촌(鋤每洞村) 현(縣)의 남쪽 15리에 있다.
황전촌(黃田村) 현(縣)의 남쪽 6리에 있다.
유교촌(流橋村) 현(縣)의 남쪽 7리에 있다.
입석촌(立石村) 현(縣)의 남쪽 10리에 있다.
광평촌(廣坪村) 현(縣)의 서쪽 5리에 있다. 진사(進士) 남기수(南麒壽)가 처음 터잡아 살았다. 관개(灌漑)가 있다.
포본촌(逋本村) 현(縣)의 서쪽 2리에 있다. 사족(士族)들이 산다. 관개(灌漑)가 있다.
송내촌(松內村) 현(縣)의 서쪽 3리에 있다. 사족(士族)들이 산다. 앞들에 거북바위(龜巖)가 있는데 그 모습이 자라 같다. 백여 사람이 앉을 수 있으며 10리를 통하여 바라본다. 관개(灌漑)가 있다.
파라본촌(波羅本村) 또 해저(海底)라고도 이름한다. 현(縣)의 서쪽 9리에 있다. 사족(士族)이 산다. 흑은 모래돌이 많다.
호평촌(虎坪村) 현(縣)의 서쪽 9리에 있다. 관개(灌漑)가 있다. 효자 재사(才士)가 여기서 많이 나왔다.
인동촌(隣洞村) 현(縣)의 서쪽 5리에 있다. 토지가 척박하다. 사족(士族)들이 산다.
사현촌(沙峴村) 현(縣)의 북쪽 5리에 있다. 촌가(村家)는 없고 지금은 서원(書院)이 있다. 형세가 뛰어난 경치이다. 토지는 메마르지 않으면 관개가 있다.
유곡촌(楡谷村) 현(縣)의 북쪽 6리에 있다. 청암정(靑巖亭)이 가장 뛰어났다.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이 처음 터잡아 살았다. 관개가 있다.
토곡촌(吐谷村) 현(縣)의 북쪽 7리에 있다. 관개가 있다.
탑평촌(塔坪村) 현(縣)의 북쪽 10리에 있다. 대사간(大司諫) 정유일(鄭惟一)이 살았다. 관개가 있다.

*대사간(大司諫) 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 진사(進士) 눌재공(訥齋公) 이홍준(李弘準)의 외손(外孫)



●皆丹部曲 【1선장 72~73쪽】
部內 山氓居之 可丘村 在部曲南五里 土地不肥 只蒙灌漑 俗古民愚 西里村 在部曲西五里 土地多石 只宐菽粟 鴨丘村 在部曲北三里 水鐵店 居之 土地磽确 宜瞿麥 道心村 在部曲北十五里 白屛山 鎭其西 文殊山 峙其南 一水 發源于道力峴 一水 發源于高適峴 合流過是村 入春陽 土地嶢崅 宐菽粟 瞿麥 川坪村 在部曲北 五十里 太白 圍其東北 高適峙其南 石川出高適 而流其前 土宜瞿麥 民俗愚癡 新村 在部曲北 六十里 介於寧越 旌善之間 東峙葛方峴 北鎭九折山 巨川源發 太白流過 村前 亦爲洛水之源 民皆愚癡 土合蕎麥 屈居村 在新村北十五里 九折山 峙其北 民俗 土品 與新村 同


◎개단부곡(皆丹部曲)의 마을
부내(部內) 산사람들이 산다.
가구촌(佳丘村) 부곡(部曲) 남쪽 5리에 있다. 토지가 기름지지 못하여 다만 관개의 혜택을 입는다. 풍속은 예스럽고 백성은 어리석다.
서리촌(西里村) 부곡(部曲) 서쪽 5리에 있다. 토지는 돌이 많다. 다만 콩과 조에 적합하다.
압구촌(鴨丘村) 부곡(部曲)의 북쪽 3리에 있다. 대장간이 여기 있다. 토지는 돌이 많고 메마르며 구맥(瞿麥)에 적합하다.
도심촌(道心村) 부곡(部曲)의 북쪽 15리에 있다. 백병산(白屛山)이 그 서쪽을 누르고 문수산(文殊山)이 그 남쪽에 우뚝 솟아 있다. 한줄기 물은 도력현(道力峴)에서 발원하고 한줄기 물은 고적현(高適峴)에서 발원하는데 합류하여 이 마을을 지나 춘양(春陽)으로 들어간다. 토지는 돌이 많고 메마르며 콩 조 구맥(瞿麥)에 적합하다.
천평촌(川坪村) 부곡(部曲)의 북쪽 50리에 있다. 태백산이 그 동북쪽을 두르고 고적산(高適山)이 그 남쪽에 우뚝 솟으며 석천(石川)이 고적산에서 나와 마을 앞을 흐른다. 토지는 구맥에 적합하다. 백성들의 풍속은 어리석다.
신촌(新村) 부곡(部曲)의 북쪽 60리에 있다. 영월(寧越)과 정선(旌善)의 사이에 끼어 있다. 동북쪽으로는 갈방현(葛方峴)이 우뚝 솟고 북으로는 구절산(九折山)을 누르며 거천(巨川)이 태백(太白)에서 발원하여 마을 앞을 흘러 지나 가는데 또한 낙동강의 근원이다. 백성들은 모두 어리석다. 토지는 메밀에 적합하다.
굴거촌(屈居村) 신촌(新村)의 북쪽 15리에 있다. 구절산(九折山)이 그 북쪽에 우뚝 솟았다. 백성들은 속(俗)되다. 토산품은 신촌(新村)과 같다.



●鶴駕山 【1선장 81쪽】
在府西三十里 或云下柯山 安東醴泉 榮川 三邑環抱其下 巨刹 小庵 羅列山 腰登眺眼 力有窮諸 山如丘垤 與小白對 峙俗傳形 如飛鶴 故名焉 山之最高峯名曰國祠峯 松巖權好文改摘星峯又有遊仙峯三茅峯爛柯䑓鶴捿䑓御風 䑓亦松巖所名山之東甬有 能仁窟


◎학가산(鶴駕山)
안동부(安東府)의 서쪽 30리에 있으며 혹은 하가산(下柯山)이라고도 한다. 안동(安東), 예천(醴泉), 영천(榮川) 세 고을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아래는 거찰(巨刹)과 소암(小庵)이 산허리에 펼쳐져 있다. 이곳에 올라 조망하면 안력(眼力)이 다함이 있어 제산(諸山)이 구질(丘垤)*)과 같다. 소백산(小白山)과 대치(對峙)*)하여 속전(俗傳)에, ‘모양이 나르는 학과 같다’하여 학가산이라 한다. 산의 최고봉을 국사봉(國祠峯)이라 하는데,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이 적성봉(摘星峯)이라 고쳤다. 그 외에 유선봉(遊仙峯), 삼모봉(三茅峯), 난가대(爛柯臺), 학서대(鶴棲臺), 어풍대(御風臺)가 있는데 역시 송암(松巖)이 이름지었다. 산의 동쪽 모퉁이에 능인굴(能仁窟)이 있다.

*) 구질(丘垤): 작은 언덕
*) 대치(對峙): 서로 맞서서 버팀



●三龜亭 【2선장 47~50쪽】
在豊山縣西 金山里 洞口 縣監金永銓所構 額慵齋 李宗準 壬辰倭賊 焚蕩 二間頹毀 調度使 金尚寯 重修 成俔記上舍金世卿氏 以其鄕縣三龜亭之狀 求記扵余 謹按豐山 爲安東府屬 縣西五里許 有村 曰金山村 東二十步許 有峯 曰東吳 其高 僅六七丈 亭跨峯頭東西南 皆鉅野 厥勢敞豁 眺望無際 亭南 有大川 曰曲江 即洛水也 有潭曰馬螺 潭上絶壁 贔屭 高可萬丈 江上 長林連亘十里餘 亭北 又有山 曰鶴駕 有雙溪出自山間来 入于洛 其會水處 爲屏潭 或穪花川 其上 又有石壁 千餘丈 曰屏壁 雙溪北有竒巖 曰鵬巖溪两傍 有栗樹 千餘株 層翠紛敷 亭下 有稻塍 麥隴 春則緑髮手茸 秋則黃雲䆉稏 眞竒勝之地也 花山爲金氏本貫 金爲朝中巨閥 而其外祖權相國齊平 公 有盛名扵朝 權氏 即其女也 年八十有八 永銓永錘 永銖等 皆爲近邑守令 極其奉養 又構此亭 以爲晨夕逰憇之所 亭基 有三石 形如㐲黿 故以三龜名之 每當良辰吉日 扶輿升亭 菜衣彩服 輝映前後 滿庭蘭玉 森森列侍 萱闈含飴 而悅豫 其爲樂 可勝既㢤 大抵世人 有其居不得其勝 有其勝 不得其樂 而今則地得其勝 人得其贒 親又得其壽 衆羙俱備 豈非積善毓慶之所致 夫生之壽者 莫如龜 物之固者 莫如石 人子之欲親之壽如龜之永 如石之固 人人之所願 自兹以後 至于曾玄 自曽玄 至于雲仍之遠 使各奉其親 如今之所為 世世而勿替 則鄊爲壽鄊人爲壽民 而當流羙扵靑史矣 若余者 雖有桑榟㣲區 而縳扵名韁 無由退老 而且靈根已邈 具爾多器雖有五鼎之榮 而欲爲子路之負米 終不可得 則尤羙 夫金氏之諸贒 能奉其親而娛楽之也 李思鈞詩 晚生於世 未同時 不見菜衣事戱嬉 非古非今唯四序 無成無壊是三龜 亭中明月長留燭 湖上清風自舞漪 羡子肯堂完舊業 羞将貢喜待噓吹 金瑛四時詞 挾春萬象未芳時 人倚江亭與物嬉 花霧輕薰籠鳥雀 菰滿互長䕃魚龜 烟開遠浦靑浮水 雨滿前溪緑漲漪 無頼逰絲随落絮 不禁輕賜晚風吹槐樹隂隂疊影時 孤䳌啼罷亂鸎嬉 緑敷岸柳深蔵翼 葉大庭荷穏上龜 江閣晚烟披墨畫 麥郊輕浪作風漪 酒尊最好消長夏 無限微凉滿衣吹 百蟲迎暮各因時 萬語千聲自得嬉 明月一天飛玉鏡 謫仙何䖏換金龜 江凮裊裊摇華髮 木葉蕭蕭落殘漪 㘴久夜䦨 披鶴氅 倚歌誰和洞簫吹 雪意漫漫吹嵗時 剡溪寒夜興堪嬉 千山冷漾倚天劒 萬戶無聲縮殻龜 壠首風高生氣勢 磯頭水落凍灣漪 短籬爲訪梅消息 玉笛何人月下吹


◎삼귀정(三龜亭)
풍산현(豊山縣) 서쪽, 금산리(金山里) 동네 앞에 있다. 현감 김영전(金永詮)이 지은 것이다. 현액(縣額)은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의 글씨이다. 임진년 난리에 불타서 두 칸이 허물어지니 조도사(調度使) 김상준(金尙寯)이 다시 수리하였다.

성현(成俔)의 기(記)
상사(上舍) 김세경(金世卿)씨가 그 고을 삼귀정의 형상으로써 나에게 기(記)를 구하였다. 삼가 살펴보니 풍산은 안동부의 속현(屬縣)이다. 서쪽 5리 쯤에 마을이 있는데 금산촌(金山村)이라 하고 동쪽 스무보(步) 쯤에 봉우리가 있어 동오(東吳)라고 하며 그 높이가 겨우 예닐곱길(丈)밖에 안되는데 정자는 그 봉우리의 꼭대기에 걸터앉았다. 동쪽과 서쪽, 남쪽이 다 큰 평야로 그 형세가 확 트이어서 바라봄에 끝이 없다. 정자 남쪽에는 큰 시내가 있어 곡강(曲江)이라 부르며 곧 낙동강이다. 못이 있는데 마라(馬螺)라 하고 못 위에는 절벽이 힘차게 솟아 높이가 가히 만 길(丈)이나 된다. 강 위에는 긴 수풀이 잇따라 십리가 넘는다. 정자 북쪽에 또 산이 있으니 학가(鶴駕)라 한다. 두 시내(쌍계)가 이 산 사이에서 나와 낙동강으로 들어가는데 그 물이 모이는 곳은 병담(屛潭)이 되며 혹은 화천(花川)이라고도 부른다.
그 위에 또 석벽(石壁)이 있어 천여길(丈)이나 되며 병벽(屛壁)이라고 한다. 두 시내(雙溪)의 북쪽에 기묘한 바위가 있어 붕암(鵬巖)이라고 한다. 시내 양쪽 가에는 밤나무 천여 그루가 있어 층층이 푸르름이 어지럽게 퍼진다. 정자 아래에는 벼논과 보리밭이 있어 봄이면 푸른 싹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누른 구름 같은 벼가 물결친다. 진실로 기이하게 경치 좋은 곳이다. 화산(花山)은 김씨의 본관(本貫)이 된다. 김씨는 우리나라 가운데 큰 벌족(閥族)이다. 그의 외할아버지 권상국(權相國) 제평공(齊平公)은 조정에서 높은 이름이 있었는데 권씨는 곧 그의 따님으로 나이 여든여덟살이다. 영전(永銓), 영추(永錘), 영수(永銖)등이 다 가까운 고을의 수령(守令)이 되어서 그 봉양을 지극히 하며 또 이 정자를 지어서 아침 저녁으로 놀고 쉬는 곳으로 하였다. 정자의 터에 세 돌이 있는데 형상이 마치 엎드린 거북 같아서 그대로 삼귀(三龜)라고 이름지었다. 매양 좋은 때와 길(吉)한 날을 당하면 어머니의 가마를 부축하여 정자에 올라가니 노래자(老萊子)같은 채색 옷이 앞 뒤에 빛나게 비치고 뜰에 가득한 귀여운 자손들이 빽빽하게 늘어서서 모시면 어머니는 엿을 머금고 기뻐하신다. 그 즐거움을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대저 세상 사람들은 그 거처는 있으나 그 경치는 얻지 못하고 그 경치는 얻으나 그 즐거움은 얻지 못하는데 지금에 있어서는 땅은 그 경치를 얻었으며 사람은 그 어짊을 얻었고 어버이는 또 그 수(壽)를 얻었으니 뭇 아름다움이 다 갖추어졌다. 어찌 착함을 쌓고 경사스러움을 기른 소치가 아니겠는가. 대저 산 짐승의 수(壽)하는 것은 거북만한 것이 없고 물건의 굳은 것은 돌만한 것이 없다. 남의 자식된 사람 그 어버이의 장수하기를 거북처럼 길게 하고 돌처럼 굳게 하고자 하니 이는 사람마다 원하는 바이다. 이제로부터 이후로 증손 현손에 이르기까지 또 증손 현손으로부터 잉손(仍孫)*) 운손(雲孫)*)의 먼 후손에 이르기까지 그들로 하여금 각각 그 어버이 섬기기를 오늘날 하는 것처럼 하게 하여 세세토록 바꾸지 않는다면 고을은 장수하는 고을이 되고 사람은 장수하는 백성이 되어 마땅히 청사(靑史)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것이다. 나같은 사람은 비록 고향이 있었으나 조그마한 곳이요 또 명리(名利)의 굴레에 매여져 물러날 수가 없으며 또한 신령스러운 뿌리가 이미 멀어져 부모 모두 상사가 많았다.
“비록 오정(五鼎)의 영화를 가졌더라도, 자로(子路)와 같이 쌀을 지고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하여도 끝내 할 수가 없으니 더욱 김씨의 여러 어진이들이 능히 그 어버이를 봉양하고 즐겁게 해 드림을 아름답게 여긴다.” 고 하였다.

이사균(李思勻)의 시

세상에 늦게 태어나
때를 같이하지 못하여
일흔살 노래자(老萊子) 채색옷 입고
어버이 앞에 장난함을 보지 못했네.

옛날도 아니요 지금도 아닌
오직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서(四序)
이름도 없고 허물어짐도 없이
이 거북 세 마리.

정자 가운데 밝은 달은
길이 촛불로 남고
호수 위의 맑은 바람
스스로 잔물결에 춤춘다.

좋은 정자에서 옛 일을 다했으니
내 그대를 부러워하며
부끄러이 기쁨을 드리고자
기다려 탄식한다.

김영(金瑛)의 사시사(四時詞)

봄(春)

봄이 와도 아직
만상은 꽃다운 때가 아닌데
사람은 강가 정자에 기대어
만물과 더불어 노닌다.

꽃에 안겨 가벼운 향기
작은 새를 가두고
줄과 부들 서로 길어
물고기와 거북을 가리운다.

안개 걷히니 먼 포구
푸름이 물에 뜨고
비가 많으니 앞 시내
푸름이 잔 물결에 불어난다.

의지없이 하늘거리는 실버들
버들꽃을 떨어뜨리고
쉼 없은 가벼운 바람
저녁 때에 불어 오네.

여름(夏)

회나무 온통 덮어
첩첩이 그늘질 때
외로운 두견새 울음 그치니
꾀꼬리 어지러이 노닌다.

푸르게 펼쳐진 언덕의 버들은
깊이 나래를 감추고
잎 큰 뜰의 연꽃은
온전히 거북을 떠올린다.

강 정자 저녁 연기
묵화(墨畫)를 펼치고
보리 익은 들판에 가벼운 물결
강에 잔물결 일으키네.

술잔은 긴 여름날을 보내기에
가장 좋은데
잔잔히 서늘한 바람
끝없이 옷에 가득 불어오네.

가을(秋)

일백 곤충들 저녁을 맞아
제 각기 때맞춰 우니
만가지 말 천가지 소리
스스로 기쁨을 얻구나.

밝은 달은 하늘에서
옥같은 거울로 날리는데
이태백은 어느곳에서
술을 사러 금거북을 바꾸나.

강 바람 하늘하늘
흰 머리칼을 흔들고
나뭇 잎 우수수
잔물결에 떨어지네.

밤 난간에 오래 앉아
학창의를 펼치는데
노래 따라 그 누가
퉁소 부는 데 화답하나.

겨울(冬)

눈(雪)은 느릿 느릿
섣달에 불어오고
시냇가 차가운 밤
흥취는 기쁘다.

일천 산 차가이 넘실거려
북두칠성 의지하고
일만 집 소리 없어
거북껍질에 움추린다.

언덕가에 바람 높아
기세를 내고
물가에 물 떨어져
물굽이 잔 물결 얼었네.

낮은 울타리 집 방문하여
매화 소식 전하는데
옥피리 어떤 사람
달 아래서 부는가.

*) 잉손(仍孫): 일곱째 대의 자손
*) 운손(雲孫): 구름과 같이 멀어진 자손이라는 뜻으로, 잉손의 아들인 팔대손을 이르는 말



●畏影堂 【2선장 54~55쪽】
在乃城縣西 虎坪 進士李弘凖所構 李堣詩 有我卽有形 影分形爲两 隂陽遆隠見 動靜不相放 日用百爲多 一一輒效倣 臨之在左右 黶然難可罔 所慎豈止獨 屋漏 猶晃朗 顧爾心惕若 内省而存養 我語爾默識 我身爾虛像 周旋一堂中 終日吾所仰


◎외영당(畏影堂)
내성현(柰城縣) 서쪽 호평(虎坪)에 있다. 진사 이홍준(李弘準)이 지은 것이다.

이우(李堣)의 시

내가 있으면
곧 형체가 있고
그림자 나뉘어지니
형체도 둘이 된다.

음과 양은 바뀌어
은은히 나타나고
움직임과 고요함은
서로 놓지 못하구나.

날마다 씀에
백 가지로 많은데
하나 하나
문득 본받는다.

다다르면
좌 우에 있어
가만히도
망녕되기 어려워라.

조심하는 바
어찌 홀로에 그치겠나
물시계 물방울
오히려 밝도다.

너를 돌아보니
마음은 두려워하여 삼가고
안으로 살펴서
본심의 착함을 기르라.

나는 말하노니
너는 묵묵히 알고
내 몸은
네겐 허상(虛像)이라.

한 집을
두루 돌아서
하루 종일
우리들이 우러르는 바이구나.

*참판(參判) 송재(松齋) 이우(李堣): 생원(生員) 금호공(琴湖公) 이시민(李時敏)의 사위[壻]



●鏡光書堂 【2선장 107~108쪽】
在府西金池村 東沙川上 古有定光寺 隆慶戊辰 創立書堂 松巖權好文詩 蒼壁山阿古寺基 改營書舎好相期 鳩材可是千家補 築力休令一簣虧 嶽麓冠襟懐俊士 武夷絃誦講賢師 臨溪共闘蔵修地 永使兒孫勉學知


◎경광서당(鏡光書堂)
안동부의 서쪽의 금지촌(金池村) 동편 사천(沙川)에 있다. 상고(上古)에는 정광사(定光寺)가 있었고, 융경(隆慶) 무진(戊辰)에 서당을 창립했다.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의 시에,

푸른 절벽 산언덕 고사(古寺) 자리에,
다시 서당(書堂)을 고쳐 지어 좋은 기대한다.
재목을 모음에 여러 집 보태었고,
힘을 쌓음에 한 산태미도 어그러지게 하지 말아야 한다.
악록(嶽麓)의 사람들은 준걸(俊傑)한 선비를 생각하고,
무이곡(武夷曲)의 현송(絃誦)을 어진 스승이 강(講)한다.
시내에 임해서 함께 장수하는 땅을 다투어,
영구히 아손(兒孫)으로 하여금 학문 힘쓸 줄 알게 한다.

라고 하였다.

*경광서당(鏡光書堂): 금계리(金溪里) 동편 유정사(有定寺)자리에 경광서당(鏡光書堂)을 지었다. 경광서당은 후에 경광서원(鏡光書院)이 되었다.



●李宗凖 【4선장 16쪽】
字仲均 慵齋 大司憲 䋲直孫 佔畢齋門人 能文章 善書畵 倜儻有大節 成廟乙巳 中司馬 同年登第 甞以書狀官 赴京 見館驛畵 屛不佳 以筆塗抹 殆盡 驛官 招通使 恠詰之 通使曰書狀能書畵 必以不滿其意而然也 驛官 悟而首官之囘程 至其處 張新粧 素屛二㘴 公一書一畵 俱臻其妙 觀者嘆賞 戊午謫北界 路經高山驛 書李師中 孤忠自許 衆不與一律 于壁 上監司以聞 燕山以爲有怨意 逮鞠殺之 洪貴逹 救觧不得出戊午黨籍傳


◎이종준(李宗準)
자(字)는 중균(仲均)이요, 호는 용재(慵齋)이다. 대사헌(大司憲) 승직(繩直)의 손자이다. 점필재(佔畢齋)*)의 문인으로 문장에 능했으며 서화(書畵)도 잘 했다. 척당(倜儻)*)하여 큰 절조가 있었다. 성종(成宗) 을사(乙巳, 1485)년에 사마(司馬)에 합격하였고, 같은 해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北京)에 갔다가 역(驛)의 관사(館舍)에 그림 병풍이 아름답지 못한 것을 보고, 붓으로 거의 다 보이지 않도록 뭉게 버렸다. 역의 관리가 통사(通使)를 불러 괴이(怪異)하다고 여겨 따져 물었다. 통사가 가로되, “서장관은 서화에 능하니 반드시 그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함이 있어 그렇게 한 것이오.”하니, 역의 관리가 이를 깨닫고 수긍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 곳에 이르렀는데, 새롭게 단장한 흰 병풍 두 개가 펼쳐져 있었다. 공이 하나에는 글씨를 쓰고, 다른 하나에는 그림을 그렸다. 모두가 그 공묘(工妙)함을 이루었으니, 보는 사람들이 탄상(嘆賞)하였다. 무오(戊午)년에 북계(北界)로 귀양을 갔다. 도중에 고산역(高山驛)을 지나갔는데, “이사중(李師中)은 외로운 충성으로 자허(自許)했건만, 무리들은 이를 허여(許與)하지 않았다네.”라는 율시 한 수(首)를 벽 위에 썼다. 감사(監司)가 이 사실을 연산군(燕山君)에게 알리니, 연산이 자기를 원망하는 뜻이 있다 하고 국문(鞠問)하다가 그를 죽였다. 홍귀달(洪貴達)*)이 그를 구원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무오당적전(戊午黨籍傳)에 나온다.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호.
*) 척당(倜儻): 뜻이 크고 기개(氣槪)가 있다.
*) 서장관(書狀官): 정사(正使), 부사(副使)와 아울러 삼사의 하나가 되며 정사, 부사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행대어사(行臺御史, 움직이는 사헌부)를 겸하고 있음. [만기요람,재용편].
*) 홍귀달(洪貴達): 조선 연산군 때의 문신(1438~1504).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ㆍ함허정(涵虛亭). 1498년 무오사화 때에 왕의 실책을 10여 조목에 걸쳐 간(諫)하다가 미움을 사서 좌천되었으며, 갑자사화 때에 모함을 입어 처형되었다. 저서에 ≪허백정문집≫이 있다.



●琴椅 【4선장 18쪽】
居柰城縣 虎坪里 字仲材 癸酉 中司馬 己卯 登文科 官至府使 退陶先生 撰碣 銘曰禀性開警 爲治得其要 而務簡


◎금의(琴椅)
내성현(柰城縣) 호평리(虎坪里)에 살았다. 자(字)는 중재(仲材)이다. 계유(癸酉)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기묘(己卯)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퇴도선생(退陶先生)이 지은 갈명(碣銘)에 가로되,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였고, 정치를 함에 그 요령을 터득하여 간요(簡要)함에 힘썼다.”고 했다.

*청송부사(靑松府使) 금의(琴椅): 진사(進士) 눌재공(訥齋公) 이홍준(李弘準)의 사위[壻]



●鄭惟一 【4선장 21쪽】
字子中 號文峯 居柰城縣 塔坪里 遊退陶門下嘉靖壬子 中司馬 戊午 登第歴敭䑓閣 李樑子庭 薲 登第唱榜之日 舉朝 奔走 後 拜 猶恐不及 公以 正言 獨在 榻前 毅然不動觀者莫不愕然 官至大司諌


◎정유일(鄭惟一)
자는 자중(子中)이요, 호는 문봉(文峯)이다. 내성현 탑평리(塔坪里)에 살았으며 퇴도의 문하에서 유학했다. 가정 임자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무오년에 급제하여 대각(臺閣)*)을 두루 거쳤다. 이량(李樑)의 아들 정빈(庭薲)이 급제하였는데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온조정의 벼슬아치들이 인사함이 남보다 늦을까 걱정하여 분주하였는데, 공(公)은 정언(正言)으로서 탑전(榻前)에 홀로 앉아 의연(毅然)하게 동요하지 않았으니 이를 보고서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 대각(臺閣):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통틀어 이르는 말.
*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 진사(進士) 눌재공(訥齋公) 이홍준(李弘準)의 외손(外孫)



●裴尚志 【4선장 24~25쪽】
尚恭弟 寓居于府西金溪村 高麗末䕃仕爲判司僕寺事 中書郎 以故事屈公于庭 卽脫帽奮袂 棄官退屛終無仕 進之意種栢竹中 其堂而處焉 號栢竹堂 以詩酒自老 入本朝終不渝 以卒 有詩集千首 失不傳 後以子桓貴 贈兵曺參判


*배상지(裵尙志)는 배상공(裵尙恭)의 동생[弟]이 아니라 형(兄)이다. 따라서 ‘尚恭弟’ → ‘興海人 興海君詮之子’로 해야한다.

◎배상지(裴尙志)
흥해(興海) 사람이다. 흥해군(興海君) 전(詮)의 아들로 부의 서쪽 금계촌(金溪村)에 우거(寓居)하였다. 고려 말기에 음사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중서랑(中書郞)이 되었다. 굴공(屈公)의 고사(故事)에 따라서 조정에서 모자를 벗고 옷소매를 떨쳐서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숨었다. 끝내 벼슬에 나가려는 마음이 없었다. 백죽(柏竹)을 심고 그 가운데에 집을 지어서 거처했으므로 호를 백죽당(柏竹堂)이라고 했다. 시주(詩酒)로써 스스로 늙어갔다. 본조(本朝)에 들어와 끝내 지조를 더럽히지 않고 죽었다. 시집이 남아 있으나 천수(千首)가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뒤에 아들 환(桓)이 귀하게 되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백죽당(柏竹堂) 배상지(裴尚志): 대사헌공(大司憲公) 이승직(李繩直)의 처부(妻父)



●李繩直 【4선장 26쪽】
月城人 従夫人 所自 廣州来居 于府西 金溪村中司馬薦 仕官至司憲府大司憲 清白吏 墓在廣州


◎이승직(李繩直)
월성(月城) 사람이다. 부인(夫人)이 있는 곳을 따라 광주(廣州)로부터 부의 서쪽 금계촌(金溪村)으로 와서 살았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천사(薦仕)로 벼슬이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고, 청백리(淸白吏)에 뽑히었다. 묘(墓)가 광주에 있다.



●李苞 【4선장 28~29쪽】
字仲容 弘凖 孫 居奈城縣 虎坪里 中嘉靖司馬性讜直憤 守令之苛政 明廟朝 進剥民圖 上極加褒奨 除集慶參奉 遂以其圖 造屛 設 御座甞於母病 割股食火 母病卽愈


◎이포(李苞)
자는 중용(仲容)이고 홍준(弘準)의 손자이다. 내성현 호평리에 살았다. 가정년간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성품이 곧아, 수령의 가혹한 정사에 분개하여 명종조(明宗朝)*)에 ‘박민도(剝民圖)’를 올렸다. 임금이 극도로 표창하여 집경참봉(集慶參奉)을 내려 주었다. 마침내 그의 그림으로 병풍을 만들어 어좌(御座)에 세웠다. 일찍이 어머니가 병이 들었을 때 다리를 베어 먹이자 어머니의 병이 곧 나았다.

*) 명종조(明宗朝): 조선 제13대 임금(1534~1567, 재위 1545~1567). 이름은 환(峘)이고 자는 대양(對陽)이다. 중종(中宗)의 둘째 아들이자 인종(仁宗)의 아우이다.



●李弘凖 【4선장 33쪽】
字君式 慵齋宗凖弟 居奈城縣 虎坪里 中司馬 弘治戊午士 林禍作 仍及仲兄 自是 無意世路 監司 以才行 薦 稱疾不出 因時弊上便冝封事 减任縣進 封之苦 嘗著家訓教子弟


◎이홍준(李弘準)
자는 군식(君式)인데 용재(慵齋) 종준(宗準)의 아우이다. 내성현 호평리에서 살았다.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홍치(弘治) 무오년에 사화*)가 일어나 그로 인해 화가 중형(仲兄)에까지 미쳤다. 이로부터 세로(世路)에 뜻이 없었다. 감사(監司)가 재행(才行)으로 천거했으나, 질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시폐(時弊)에 따라 편의봉사(便宜封事)를 올리어, 자기가 사는 고을에 부과된 곡물 바치는 고통을 덜어주도록 하였다. 가훈(家訓)을 지어 자제들을 가르쳤다.

*)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



●高䴡太師權幸墓 【4선장 40~41쪽】
永嘉志卷之八 塚墓
在府西本破谷里 自太師葬後 號其洞曰陵洞 嘉靖丁巳 府使權紹 令陵下居姓孫權 審行 夢斗外孫 柳公季 易土改莎 每寒食上塚行事 祝文 天燈南麓 壽封斯崇 功巍德洽 裕裔隆宗 每歲寒食 精禋是恭 陟降如在 於昭盛容 萬暦戊子 監司權克智 改立石 西厓柳成龍 撰墓表 曰安東府西十里而遠 有山 曰天燈 其中 坎㘴离向之原 實高䴡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 權公 冠履所蔵也 公 諱 幸本 新羅宗姓 羅末守古昌郡 以地 迎麗祖 有功 得賜姓權 金之爲權 自公始 其後 子孫 益大以蕃 歷䴡以及我 朝 冠冕不絶 世之數名宗巨閥 必以權氏爲首 其亦盛矣 始公旣葬 墓道闕顯刻 世代愈遠 兆域堙廢 莫有知其處者 成化間 公十八代孫 平昌郡守 雍 乃極意尋求於墓旁獲誌石 就加封樹 臨殁 遺命 自祔葬其原 爲守護計 即墓南 苐二塚 是也 而雍之子 裕綽等 承雍之志立石以標之 慵齋李公 宗凖 識其陰 萬暦戊子 公遠孫 今觀察使君 克智 以旌節 鎮南服 廵到于此 展省松檟 合宗人之在一境者 以祭之 旣卒事役 隷誤觸石 仆地而壊 觀察使 卽與宗人 謀買石 鐫治將㳙吉改樹 以成龍 亦係公 外泒 屬記其事 余竊惟公之勲業 載史策 嗣息具譜牒 恵澤在一邦 無容更贅 謹畧具立石 顛末 俾來者 有考焉 按譜 稱公爲太師而舊刻 不載 故 疑不敢加云勝覧


◎고려태사(高慮太師) 권행(權幸)의 묘
부의 서쪽에 있다. 본디 파곡리(波谷里)였는데 태사를 장사지내고 난 뒤에 그 동의 이름을 능동(陵洞)이라고 불렀다. 가정 정사년에 부사(府使) 권소(權紹)가 능 아래에 살고 있던 후손 권심행(權審行) 몽두(夢斗)와 외손인 류공계(柳公季)로 하여금 흙을 바꾸어 사성(莎城)을 고치도록 하였다. 매양 한식(寒食)이 되면, 무덤에 올라가서 제사를 행하였다. 축문(祝文)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천등산(天燈山) 남쪽 기슭에 봉분이 솟았으니, 공덕이 높고 흡족하도다. 후예들은 많고 종가는 융성하여 매년 한식이 오면, 정결한 제사를 공손히 받드니, 생전과 같이 강림하시어 그 훌륭한 모습 보이오소서.”
만력(萬曆) 무자년(1588, 선조 21)에 감사(監司) 권극지(權克智)가 비석을 고쳐 세웠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묘표(墓表)를 지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동부의 서쪽 십리 떨어진 곳에 멀리 산이 있으니 ‘천등(天燈)’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있는 감좌(坎坐) 리향(离向)의 언덕이 고려의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인 권공이 묻히신 곳이다. 공은 휘(諱)가 행(幸)으로 본래는 신라의 종성(宗姓)이었다. 신라 말기에 고창군수(古昌郡守)로 나갔다가 그 지역을 가지고 고려 태조를 맞이하였다. 공이 있었기에 권씨 성을 하사받은 것이다. 김(金)씨가 권(權)씨로 된 것은 공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후에 자손들이 더욱 커지고 번성해저 고려에서 우리 왕조에 걸쳐서 벼슬이 끊이지 않아, 세상에 여러 명종거별(明宗巨閥) 중에서 권씨를 으뜸으로 여기니, 그 또한 훌륭하다 할 것이다. 처음 공을 장사지내고 나서는 묘도(墓道)에 비석이 없었다. 세대가 더욱 멀어지자, 무덤의 경계가 없어져 그 있던 곳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성화(成化) 년간(1465~1487)에 공의 18대손인 평창군수(平倉郡守) 옹이 이에 뜻을 다해 묘터를 찾다가 묘 옆에서 지석(誌石)을 얻었다. 그리고 나서 봉분을 세웠다. 죽음에 다달아 유명(遺命)하기를, ‘그 언덕에 나를 부장(祔葬)하여 수호(守護)하도록 하라.’고 했으니 곧 묘의 남쪽 두번째 무덤이 바로 이것이다. 옹의 아들 유작(裕綽)등이 공의 뜻에 따라 비석을 세워 표(標)하였다. 이공(李公) 종준(宗準)이 돌의 뒷면에 기록했다. 만력 무자년(1588, 선조 21)에 공의 먼 자손인 오늘날의 관찰사인 극지가 정절(旌節)을 가지고서 남쪽 지대를 순찰하다가 여기에 이르렀다. 무덤을 둘러보고 종인(宗人)으로 한 고을에 사는 사람들을 모아 제사를 올렸다. 마치고 나서 역예(役隸)가 잘못하여 비석을 건드려 땅에 엎어져 깨지고 말았다. 관찰사가 바로 종인들과 의논하여 돌을 사서 새기고 다듬어 장차 길일(吉日)을 골라 고쳐 세우려고 하였다. 성룡도 공의 외파(外派)에 관계되어 그 사적을 기록해 줄 것을 부탁 받았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공의 훈업(勳業)은 역사에 실려 있고 자손들은 족보에 자세하며, 혜택은 한 나라에 남아 있으니 다시 군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삼가 비석을 세우게 된 전말(顚末)을 대략 서술하여 뒷사람들로 하여금 참고가 되게 한다. 족보를 살펴보니, 공을 태사라고 칭했으나 옛 비석에는 실려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감히 덧붙이지 못할 것 같다.”



●判司僕正 贈參判 裴尚志墓 【4선장 49쪽】
在府北嘉水川(洞口)北山


◎판사복정(判司僕正) 증참판(贈參判) 배상지(裵尙志)의 묘
부의 북쪽 가수천(嘉水川) 북산(北山)에 있다.

*판사복정(判司僕正) 백죽당(柏竹堂) 배상지(裴尚志): 대사헌공(大司憲公) 이승직(李繩直)의 처부(妻父)



●大司憲李繩直 夫人 裴氏墓 【4선장 49~50쪽】
在府西沙亡山 碣陰裴氏 考追 贈嘉善大夫 吏曺參判 可僕寺事 尚志 妣永嘉郡貞夫人權氏 李諱繩直 字繩平 月城世家 考中顯大夫 興威尉 大護軍 蔓實妣 鐡城郡夫人李氏 李君 生於宣徳戊午 卒於弘治庚戌十一月初五日 年五十三 以大司憲 卒葬於楊州東村池洞 先娶監正李亮女 生四男一女 曰不敏 勿敏 靡敏 女適上將金巖 後娶裴氏 生一男 曰時敏 吁李君 前後室 子孫盛矣 (有明天順七年十一月立石)


◎대사헌(大司憲) 이승직부인(李繩直夫人) 배씨(裵氏)의 묘
부의 북쪽 사망산(沙亡山)에 있다. 갈음(碣陰)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배씨의 고(考)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사복사사(司僕寺事)로 추증된 상지(尙志)이다. 비(妣)는 영가군(永嘉郡) 정부인(貞夫人) 권씨이다. 이승직(李繩直)의 자는 승평(繩平)이다. 월성세가(月城世家)로 고(考)는 중현대부(中顯大夫) 흥위위(興威尉) 대호군(大護軍)인 만실(蔓實)이고, 비(妣)는 철성군부인(鐵城郡夫人) 이씨(李氏)이다. 이군(李君)은 선덕(宣德) 무오년에 태어나 홍치(弘治) 경술년*) 11월 초닷새 날 죽었다. 나이 쉰셋에 대사헌(大司憲)으로 죽어 양주(陽州) 동쪽 촌지동(村池洞)에 장사지냈다. 먼저 감정(監正) 이량(李亮)의 딸에게 장가들어 네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불민(不敏) · 물민(勿敏) · 미민(靡敏)은 아들이고, 딸은 상장(上將) 김암(金巖)에게 시집보냈다. 뒤에 배씨(裵氏)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시민(時敏)이다. 아! 이군의 전 · 후실(前後室) 자손들이 훌륭하구나.”

*) 홍치(弘治) 경술년: 1490년



●縣監 贈參判 權啓經墓 【4선장 51쪽】
在府西所夜村 鄕校洞 卯向 祖考 判書墓下 貞夫人 仁川郡李氏墓 在九獜獐洞 丙向


◎현감(縣監) 증참판(證參判) 권계경(權啓經)의 묘
부의 서쪽 소야촌(所夜村) 향교동(鄕校洞)에 있다. 묘향(卯向)이다. 조고(祖考) 판서(判書) 묘 아래에 있다. 정부인(貞夫人) 인천군(仁川郡) 이씨의 묘는 구린장동(九隣獐洞)에 있는데 병향이다.

*현감(縣監) 권계경(權啓經): 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의 처부(妻父)



●生貟 李時敏墓 【4선장 52쪽】
在府西沙亡山 大司憲 繩直之子


◎생원(生員) 이시민(李時敏)의 묘
부의 서쪽 사망산(沙亡山)에 있다. 대사헌(大司憲) 승직(繩直)의 아들이다.



●郡守南義元墓 【4선장 54~55쪽】
郡守南義元墓 在府北 燕飛院 東洞酉向 李弘凖 撰碣 公諱義元 字可冝 英陽世家 南君甫十代孫也 君甫 生公若 公若 生備 備生星老星老 生典書 有孫 有孫生典書輝珠 輝珠 生參判敏生 敏生 生壯元佑良 位至嘉靖 會寧府事 佑良 生致恭 致恭 娶司醞直長金坤之女 生公 公將種也 自少 多壯志 馳馬試劒 射穿柳葉 旣長 初職内禁衛 丙午 科爲郡守 任纘榜下 授昌洲僉使 尋拜三水郡 後以宣傳官 兼內乗 又出爲理山 入而以長興庫令 遷繕工僉正 丙寅秋 靖國有功 原從一等 授通政 朝廷 例 啓 還收出治礪山 未㡬 島夷 有變 移任樂安 公 爲人剛毅正直 筮仕以後 國耳忘家西北有績 中外有聲 遂靡監成疾 辭職歸家 藥餌無力 嗚呼痛㢤 公 娶參判李拱之女 生五男三女 男曰漢 淮 渭 溟 汴 女曰裴綸 權耆 一未笄 銘曰 樂安公 毅然衷 真英雄行已直處事實 身無失 仕盡心 不廢任 人共欽 天奪忙 壽不長 時所傷燕院東 震起峯 鬱葱籠 地不仁 埋善人 短碣新


◎군수(郡守) 남의원(南義元)의 묘
부의 북쪽, 연비원(燕飛院) 동쪽 골에 있으니 유향(酉向)이다. 이홍준(李弘準)이 갈문(碣文)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의원(義元)이요, 자는 가의(可宜)이다. 영양세가(英陽世家)로 남군보(南君甫)의 10대손이다. 군보가 공약(公若)을 낳았고 공약이 비(備)를 낳았으며, 비는 성로(星老)를 낳았다. 성로는 전서(典書) 유손(有孫) 비를 낳았으며, 비는 성로를 낳았다. 성로는 전서(典書) 유손(有孫)을 낳았고, 유손은 전서(典書) 휘주(輝珠)를 낳았다. 희주는 참판(參判) 민생(敏生)을 낳았고 민생은 장원(莊元) 우량(佑良)을 낳았다. 벼슬이 가정(嘉靖)년간에 회령부사(會寧府事)에 이르렀다. 우량이 치공(致恭)을 낳았는데, 치공은 사온직장(司瑥直長)인 김곤(金坤)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은 장수 집안의 자손이다. 젊어서부터 씩씩한 뜻이 많아 말을 달리며 검술을 익혀 활을 쏘아 버들잎을 뚫기도 하였다. 성장하고 나서 처음으로 내금위(內禁衛)*)에서 일하다가 병오년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군수(郡守) 임찬(任纘)의 밑에 있었다. 창주첨사(昌洲僉使)에 임명되었다. 얼마 안 되어 삼수군(三水郡)으로 옮겼다가 뒤에 선전관(宣傳官)으로 내승(內乘)*)을 겸임하였다. 또한 외직으로 이산(理山) 군수가 되어 나갔다가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장흥고령(長興庫令)으로서 선공첨정(繕工僉正)으로 자리를 옮겼다. 병인년 가을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공을 세워 원종일등(原從一等)*)으로 공신록에 올라 통정(通政)을 제수 받았다. 조정에 규례대로 환수(還收)할 것을 여쭈고 외직으로 나아가 여산(礪山) 고을을 다스렸다. 얼마 되지 않아서 섬나라 오랑케들이 변(變)을 일으키자 낙안(樂安)으로 전근되었다. 공은 사람됨이 강직하였으며 벼슬길에 오른 뒤부터는 오직 나라만을 생각할 뿐, 집안일은 잊어 버렸다. 서북(西北)으로 다니면서 공적을 세워 그 명성이 중외(中外)에 까지 났었다. 마침내 국가 일을 쉬지 않고 열심히 하다가 병을 얻어 사직(辭職)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약을 달여서 먹어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아아! 원통하구나. 공은 참판(參判) 이공(李拱)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한(漢) · 회(淮) · 위(渭) · 명(溟) · 변(卞)이고 딸은 배륜(裵綸) · 권기(權奇)에게 시집보냈으며 하나는 아직 혼인하지 못했다. 명(銘)에 다음과 같이 적는다. ‘낙안공(樂安公)의 의연한 충정, 참다운 영웅이로세. 자신의 행동 곧게 하였고 일에 처해서는 진실로 했도다. 몸에는 실책이 없었고 벼슬엔 마음을 다했다네, 맡은 일 그만두지 않았으니 모두가 공경하였네, 하늘은 왜 이리도 바삐 앗아 가는지, 길지 않은 생애를 누렸구나. 그 때에 슬퍼했던 곳, 바로 연원(燕院) 동편이라네, 놀라 솟구친 봉우리 울창도 하구나. 땅은 어질지 못해, 이런 착한 사람을 묻어버리다니. 짧은 묘길 만이 새롭기만 하도다.”

*) 내금위(內禁衛): 조선 시대, 임금을 호위하는 일을 맡은 부대
*) 내승(內乘): 고려 시대, 임금이 타는 수레나 가마를 맡아 관리하던 관청
*) 원종공신(原從功臣): 조선시대에 정공신이 되지 못한 유공자들을 포상하기 위하여 책봉된 준공신. 원종공신의 등급도 정공신의 예에 따라 1등 원종공신, 2등 원종공신, 3등 원종공신으로 구별하였다.



●校理李宗凖墓 【4선장 55쪽】
在府西 金池沙亡山


◎교리(校理) 이종준(李宗準)의 묘
부의 서쪽 금지(金池) 사망산(沙亡山)에 있다.



●進士 贈左承㫖 裴巘墓 【4선장 65~66쪽】
在乃城縣西南 虎崖山外麓 曾孫 忠清都事 龍吉撰碣 公諱巘 字巘之 世爲慶之興海郡人 公年十有五 通禮公 殁 公 外除 懼不克世家業 負笈尋師 厲志篤行 中正德丙午司馬 遂絶意 進取惟訓 子弟 不倦 春及則必晨出㘴大門外 閱赴南畝者 闕者必罰 里無惰農 即古者 距冬至四十五日 始出學傳農事之義也 人勸之廣文 笑曰廣文 亦官耶 公天性慷慨剛直 不屈而撗逆之來 亦不與之較 公 生於成化壬寅 殁於嘉靖甲申 後 用孫觀察使貴 追 贈承政院左承㫖 兼 經筵參䝺官 妣 錦城朴氏 忠義衛磁之女 左議政 錦川府院君 平度公訔之曾孫 生於成化丙午 殁於嘉靖戊申 生三男三女 男天錫 贈兵曺參判 天佑 學生天柱 定虜衛 女適士人琴應釣 權頔 部將 琴友仁 參判 生二男一女 長先府君 三益 即觀察使 次三近 女士人李應祚 學生一男六女 男三省 女適士人安惕 朱敬 孫汝覺 通政 李苓 士人 金麟祥 通政權得經 定虜生二女 適忠義衛 李百春 士人黃悅 側生子 三老琴士人 生一男 仰聖權士人 生三男三女 男慎言 謹行 謹身 女適士人 南應吕 曺憲 鄭維 廉部將 生一男 奉先 曾祖 錄事 諱孝長 祖昭威 將軍 諱袵 考 贈左通禮 諱以純 高䴡 興海君 諱詮 六代孫也 始葬公乃城縣西虎崖山外麓逮夫人之殁移窆于中岡而以夫人祔焉


◎진사(進士) 증좌승지(贈左承旨) 배헌(裵巘)의 묘
내성현(柰城縣) 서남쪽 호애산(虎崖山) 바깥 기슭에 있다. 증손인 충청도사(忠淸都事) 용길(龍吉)이 갈문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헌(巘)이요, 자는 헌지(巘之)이다. 경상도 홍해군 사람이다. 공의 나이 열 다섯에 통례공(通禮公)이 죽었다. 공이 외직에 제수되자 가업을 능히 이을 수가 없다고 두렵게 여겨 보따리를 싸 질머지고 스승을 찾아 나섰다. 매서운 의지력으로 독실히 실천하여 정덕(正德) 병오년(1486, 성종1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벼슬에 나아가려는 생각을 끊고 오직 자제들을 훈도하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봄이 오면 반드시 새벽에 나아가 대문밖에 앉아서 남쪽 이랑으로 농사하려 가는 사람들을 살펴서 빠진 사람이 반드시 벌을 주었다. 그래서 마을에서 농사를 게을리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는 바로 옛날에 동지(冬至)로부터 45일이 지나면 비로서 나아가 농삿일을 배운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문학을 넓혀야 한다고 권유하면, 웃으며 가로되, “문학을 넓히는 것 또한 벼슬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였다. 공은 천성이 강개(慷慨)하고 강직(剛直)하여 남에게 굽히지 않았으나, 횡역(橫逆)이 닥치면 또한 그들과 겨루려고 하지도 않았다. 공은 성화(成化) 임인년(1482, 성종13)에 태어나 가정 갑신년(1524, 중종19)에 죽었다. 뒤에 손자가 관찰로서 귀해지자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금성박씨(錦城朴氏)인데, 충의위(忠義衛) 자(磁)의 딸로 좌의정 금천부원군(金川府院君)인 평도공(平度公) 언(언)의 증손이다. 성화(成化) 병오년에 태어나 가정 무신년에 죽었다. 3남 3녀를 낳았다. 맏아들 천석(天錫)은 증병조참판(贈兵曺參判)이었고, 둘째 천우(天佑)는 학생(學生)이었으며, 셋째 천주(天柱)는 정로위(定虜衛)이었다. 딸은 사인(士人) 금응균(琴應均), 권적(權적), 부장(部將) 금우인(琴友仁)에게 시집갔다. 참판(參判)은 2남 1녀를 낳았다. 맏아들은 선부군(先府君) 삼익(三益)이니 곧 관찰사(觀察使)였고, 둘째는 삼근(三近)이다. 딸은 사인(士人) 이응조(李應祚)에게 시집갔다. 학생(學生)은 1남 6녀를 낳았다. 아들은 삼성(三省)이고, 딸은 사인인 송척(宋惕) · 주경(朱敬) · 손여각(孫汝覺), 그리고 통정(通政) 이령(李笭), 사인 김린상(金麟祥), 통정 권득경(權得經)등에게 시집갔다. 정로(正虜)는 2녀를 낳아 충의위(忠義衛) 이백춘(李百春)과 사인 황열(黃悅)에게 시집보냈다. 첩으로부터 아들 하나를 얻었으니 삼로(三老)이다. 금사인(琴士人)은 1남을 낳으니 앙성(仰聖)이고, 권사인(權士人)은 3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신언(愼言) · 근행(勤行) · 근신(謹身)이고 딸은 사인 남응려(南應呂) · 조헌(曺憲) · 정류렴(鄭維廉)에게 시집보냈다. 부장(部長)은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봉선(奉先)이다. 증조는 녹사(錄事) 효량(孝良)이고, 조(祖)는 소위장군(昭威將軍) 임(秹)이며 고(考)는 증좌통례(贈左通禮) 이순(以純)이다. 고려 흥해군(興海君) 전(詮)의 6대손이다.”

*증병조참의(贈兵曹參議) 사인공(士人公) 이응조(李應祚): 충순위공(忠順衛公) 이숭준(李崇準)의 증손(曾孫). 생부(生父)는 장사랑공(將仕郎公) 창(菖). 숙부(叔父) 이(苡)에게 출계(出系)



●進士李弘凖墓 【4선장 72쪽】
在皆丹部曲 雲峰山 自製碣銘云 噫恱生惡死 人之常情 以死爲諱 口不敢言 惑之甚矣 有如㓒園叟之忘骸 王楊孫之裸葬 世無人矣 其知生死之說 而不爲之懷者 有㡬人哉 予甞有詩曰 無生卽無死 有生即有死 生死两悠悠 造物無終始 雖不及達觀之徒 所見 如斯而已 凢人觀化之後 爲子孫者 倩人碣辭 虛張逸筆 以沒其實 尤可笑也 此老平生 以懶拙自任 恒力農以給妻孥 七舉不中 優游溪山 以是終焉 銘曰 既無才 又無德 人而已 生無爵 死無名 魂而已 憂樂空毁譽 息土而已


◎진사(進士) 이홍준(李弘準)의 묘
개단부곡(皆丹部曲) 운봉산(雲峯山)에 있다. 스스로 갈명을 지어 이르기를 다음과 같이 했다. “아!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함은 인간의 상정(常情)이라, 죽음을 꺼려 입으로 감히 말하지 못함 또한 미혹됨이 심하다. 저 장자(莊子)가 형해를 잊는다는 것과 왕양손(王楊孫)이 벌거벗은 몸으로 장사를 지낸다는 말과 같은 것은 지금 세상엔 다시없구나. 그는 생사(生死)를 잘 알면서도 이를 마음속에 두지 않는 자라 하겠다. 이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 일찍이 시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생(生)이 없으면 곧 사(死)도 없고
생이 있으면 곧 사가 있게 되나니
생과 사는 모두 덧없는 것이요
조물(造物)도 끝과 시작이 없는 것을

비록 달관(達觀)에 이르지 못한 무리라 하더라도, 본 바가 이와 같을 뿐이다. 대개 사람이 관화(觀化)한 뒤에 자손 된 자가 남에게 갈사(碣辭)를 청하여 헛된 이야기를 늘어놓고 붓을 제멋대로 놀리어 그 실상을 없게 만드니 더욱 가소롭구나, 이 늙은이는 평생토록 게으르고 졸렬한 것으로 자임(自任)하여 항상 농사에 힘씀으로써 처자식을 먹여 살렸고 일곱 번이나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했지만 계산(溪山)에서 우유(優游)*)하면서 평생을 마쳤다. 이에 명(銘)하여 말하노라,
‘이미 재주도 없고 또 덕도 없으니 사람일 뿐이요, 살아서 작록도 없고 죽어서 명성도 없으니 혼일 뿐이며, 근심과 즐거움이 없어지고 헐뜯음과 칭찬이 사라졌으니 흙일 뿐이로다.”

*) 우유(優游): 1.유유자적하다 2.우물쭈물하다 3.망설이다



●察訪 李德璋墓 【4선장 73~74쪽】
在皆丹部曲 雲峯山 退陶先生 撰碣 公諱德璋 慶州人 新羅始祖 赫居世 佐命大臣 謁平之後 曽祖某 大司憲 祖某 生貟 考某 進士 公 生於成化壬寅 少習舉業 嘗舉於鄕試 禮圍不中 䕃補黃山道察訪 嘉靖 癸未 丁外艱 服闋 爲家貧親老 求再遂禄仕計 勉赴京師 明年 四月 遇病不起 享年四十二 癸未 葬于皆丹縣 雲峯山 艮㘴之原 公 自少 軒輊尚氣 不肎齷齪 庸流中 其在京師 日嘗草疏 欲陳時事而已戒 出位而止 教子弟 甚嚴 鄕里後生 亦加勧督 不以生産 作業 爲務 嘗稱貸以自給 公配曰 豊山柳氏 進士子温之女 工曺典書 従惠之後 成化癸卯 生禀性 閒静 平居無疾言遽色 公没家益貧 猶不聼家人之嘆 貧曰 吾分止是 何恨焉 其訓子以爲 寧受凍餒 不可取不義之物 睦族交隣 盡心無慊 或援貧以周急 又未嘗虛受人饋 族人 有以祀事見推 柳氏無辨而行其祀惟謹曰 彼之用心 如此 雖強令行之 祖考肎享之乎 數歲 其人 感愧而止 其宅心精且善 皆此類也 生四男 一女 後公十餘年 相繼死 其季曰 己酉生貟齊陵參奉 女適生貟李薰 嘉靖丙辰 柳氏 没 祔葬于公 銘曰月城之李 遙遙厥緖 公則是承 其儀 舉舉以充觀國 胡命之阻 試于郵官 思馬斯臧 中替求復 爲親在堂 齋志永已 旅櫬悲傷 公有贒婦 豊山茂族 淑愼其身 閨門雍穆 亦旣長育 粲粲蘭玉 喪禍仍荐 克持其家季也 至性 誠孝靡他 天之報隲 於是匪差 有崇其原 白楊號風 同其翳然 永保幽宮


◎찰방(察訪) 이덕장(李德璋)의 묘
개단부곡(皆丹部曲) 운봉산(雲峯山)에 있다. 퇴도선생*)이 갈문(碣文)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덕장(德璋)인데 경주(慶州) 사람이다.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赫居世)의 좌명대신(佐命大臣), 알평(謁平)의 후예이다. 증조 모(某)*)는 대사헌이었고, 조(祖)모*)는 생원이었으며, 고(考)모*)는 진사(進士)였다. 공은 성화 임인년에 태어났다. 젊어서 과거업(科擧業)을 익혀, 일찍이 향시(鄕試)에는 합격하였으나 예위시(禮圍試)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음사로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에 임명되었다. 가정 계미년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다. 복(服)을 마치고 나서, 집이 가난하고, 부친이 노쇠하였기 때문에 두번이나 벼슬을 얻을 생각으로 힘써 서울에 올라갔으나 이듬해 4월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였다. 향년(享年)이 마흔 둘이었다. 계미년에 개단현(皆丹縣) 운봉산,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지내었다. 공은 젊어서 뜻이 높고 기백을 숭상하여 악착같고 어리석은 무리 속에 끼이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서울에 있을 때 하루는 일찍이 소(疏)를 초(草)하여 시사(時事)를 진언하고자 하였는데 얼마뒤에 나의 분수에 넘는 일이라 경계하고 그만두었다. 자제를 가르침에 매우 엄격하였고 향리의 후생들에게도 배우기를 권면하였다. 산업에 힘쓰지 않아 일찍이 칭대(稱貸)하여 자급(自給)하였다. 공의 처는 풍산 류씨인데, 진사 자온(子溫)의 딸로 공조전서(工曹典書) 종혜(從惠)의 후예이다. 성화 계묘년*)에 태어났으니, 품성(稟性)이 조용하여 평상시에도 성내는 말이나 성급한 기색이 없었다. 공이 죽을 때 집안이 더욱 가난해졌는데도 오히려 집안 사람들이 가난을 탄식하는 소리를 듣지 않고 가로대, ‘나의 분수가 여기에서 그치는데 무엇을 한탄하리오’하고 했다. 그 아들에게 훈계하기를, ‘차라리 얼어 굶어 죽을지언정, 의가 아닌 물건은 취하지 말라!’고 했다. 친척이나 이웃들과 화목하고 친했으며, 마음을 다해 혐섭함을 두지 않았다. 어떤 때는 가난한 살림속에서도 급한 사람을 도왔으며, 또 일찍이 남이 주는 선물을 속없이 받지 않았다. 족인(族人) 중에서 제사를 핑계대면서 지내지 않은 이가 있었다. 아무 말도 안하고 제사를 대신 지내 주었다. 삼가 가로대 ‘저 사람의 마음 씀이 이와 같거늘 아무리 억지로 행하게 만든다 해도, 조고(祖考)께서 그것을 흠향할 마음이 있겠는가?’ 하였다. 몇 년 뒤에 그 사람은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그 댁(宅)의 마음이 곱고 선하기가 모두 이와 같았다. 4남 1녀*)를 낳았으니, 맏이는 내(내). 둘째는 여(여). 셋째는 진(진)이었는데 공이 죽고 나서 10여년동안 잇달아 죽었다. 그 막내인 포(苞)는 기유년에 생원으로 제릉참봉(齊陵參奉)이 되었다. 딸은 생원 이훈(李薰)에게 시집갔다. 가정 병진년에 류씨가 죽었는데 공의 묘에 부장(袝葬)하였다. 명(銘)하여 말하노라. ‘월성 이씨는 그 유서(遺緖)가 멀고도 먼데, 공께서 이를 이었으니 그 모습이 단정도 하구나, 능히 나랏 일을 살필 수 있었거늘, 어찌하여 벼슬이 그리도 막혔던가. 우관(郵官)에 임명된 것이 그만이었으니 천리마 같은 인재가 이에 숨어 버렸도다. 중년에 다시 벼슬을 구하려 하였으니 이는 부친께서 살아 계셨기 때문이라. 뜻을 품고 영원히 돌아갔으니 나그네로 죽은 것이 비상(悲傷)하기만 하다. 현부(賢婦)가 있었으니 풍산의 훌륭한 씨족이라. 그 몸을 맑고 신중히하여 규문(閨門)이 화목하였다네. 또한 자손도 잘 길러 빛나는 난옥(蘭玉)과 같았다네. 상화(喪禍)가 거듭되었지만 능히 집안을 지탱시켰도다. 막내 아들은 성품으로 정성껏 효도하였으니, 그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었다. 하늘이 보답해 상을 내리심은 이에 조금도 틀림이 없기 때문이라. 그 언덕에 우뚝한 무덤, 백양목이 바람에 울부짖는다. 그 가려짐을 같이하면서 이 무덤을 영원히 보전하리라?”

*) 퇴도선생(退陶先生):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 증조 모(某): 대사헌(大司憲) 이승직(李繩直, 1378~1431)
*) 조(祖)모: 생원(生員) 금호(琴湖) 이시민(李時敏, 1430~1473)
*) 고(考)모: 진사(進士) 눌재(訥齋) 이홍준(李弘準, ?~1523)
*) 성화 계묘년: 1483년 성종 14년
*) 4남 1녀: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에는 맏이 잉(芿), 둘째 여(茹), 셋째 률(葎), 막내 포(苞), 사위 이훈(李薰).

 

[경북 유형문화재 제224호] 영가지 <권1_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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