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一)/대사헌공이승직

[영가지(永嘉誌)] 金地村, 裵尙志, 李繩直, 判司僕正贈參判裴尚志墓, 大司憲李繩直夫人裴氏墓, 生員李時敏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5. 7. 21:06

경북 유형문화재 제224호 영가지(永嘉誌)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유산 검색 > 영가지(永嘉誌)
*국역 출처: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 > 영가지


서지
종목: 경북 유형문화재 제224호
명칭: 영가지및책판(永嘉誌및冊板)
시대: 조선 선조 41년(1608)~대한제국(1899)
수량: 일괄(13책)
분류: 목판본/사간본
지정일: 1986.12.11
소유자: 권오기,권기백
소재지: 경북 안동시
문화재형태: 선장
형태서지: 1. 영가지 <권 1> 永嘉誌 <卷 一> - 조선 선조 41년(1608), 1책(冊).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21.8cm×18.0cm,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9자(字),주쌍행(注雙行),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32.0cm×22.0cm
~
4. 영가지 <권 4> 永嘉誌 <卷 四>
5. 영가지 <원> 永嘉誌 <元> - 조선 선조 41년(1608), 1책(冊).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3.8cm×18.2cm,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2자(字), 주쌍행(注雙行), 상하내향사판화문어미(上下內向四瓣花文魚尾); 31.7cm×24.2cm
6. 영가지 <형> 永嘉誌 <亨>
7. 영가지 <이> 永嘉誌 <利>
8. 영가지 <정> 永嘉誌 <貞>
9. 선조편집영가지 <제1책> 先祖編輯永嘉誌 <第一冊> - 대한제국(1899), 1책(冊).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0.6cm×17.6cm,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2자(字), 주쌍행(注雙行), 상하내향사판화문어미(上下內向四瓣花文魚尾); 32.2cm×22.2cm
~
12. 선조편집영가지 <제4책> 先祖編輯永嘉誌 <第四冊>
13. 간인시도 刊印時到 - 조선 선조 41년(1608), 1책(冊).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24.2cm×18.2cm,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9자(字); 30.3cm×21.7cm

해제
이 자료는 조선 중기 안동(安東) 지역의 지방지(地方誌)인 『영가지(永嘉誌)』와 이의 『책판(冊板)』이다. 영가(永嘉)는 화산(花山)과 함께 안동의 옛날 이름이다.
『영가지』의 편찬은 선조35(1602)년 권기(權紀, 1546~1624)가 스승 유성룡(柳成龍, 1542~1607)으로부터 편찬요목을 받아 동향인(同鄕人) 권행가(權行可)와 함께 편찬에 착수하였다. 이를 위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함주지(咸州誌)』의 편차를 참고하였으며, 그것을 다시 유성룡에게 질의한 다음 동향의 사우(士友)들과 함께 분담ㆍ집필케 하였으나, 유성룡이 죽자 중단되고 말았다. 그후 함안(咸安)의 읍지(邑誌)인 『함주지』를 편찬한 바 있는 정구(鄭逑, 1543~1620)가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오자, 권기ㆍ김득연ㆍ권오ㆍ이혁ㆍ배득인ㆍ이적ㆍ유우잠ㆍ이의준ㆍ권극명ㆍ김근 등을 소집하여 재편찬에 들어가 선조 41년(1608)에 완성하였다.
이때 편찬된 『영가지』의 초본(草本)이 부사(府司)에 소장된 채 지내오다가 영조 36년(1760) 서울 찬수청(纂修廳)에 바쳐졌고, 2년 후 서울에 올려진 것을 등초(謄草)하여 다시 부사(府司)에 비치하였다. 그 후 정조 8년(1784) 호장(戶長) 권창실에 의해 개장(改粧)되었는데, 당시 등초해 온 『영가지』 사본(寫本)은 18세기말부터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초고본(草稿本) 1책, 초고본 8권 3책, 정고본(定稿本) 8권 4책으로 전하였다.
내용은 권두에 권기의 서문, 본부도(本府圖)와 임하(臨河)ㆍ길안(吉安)ㆍ감천(甘泉)ㆍ내성(奈城)ㆍ일직(一直)ㆍ풍산(豊山)ㆍ개단부곡(皆丹部曲)ㆍ춘양(春陽)ㆍ소천부곡(小川部曲)ㆍ재산(才山) 등 안동부 내 각 현과 부곡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지도 다음에는 연혁(沿革)ㆍ읍호(邑號)ㆍ강역(疆域)ㆍ진관(鎭管)ㆍ호구(戶口)ㆍ산천(山川)ㆍ토품(土品)ㆍ향교(鄕校)ㆍ도로(道路)ㆍ제언(堤堰)ㆍ성씨(姓氏)ㆍ인물( 人物)ㆍ총묘(塚墓) 등의 목록을 수록하여 당시 안동부의 행정조직ㆍ사회경제ㆍ문화ㆍ풍속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영가지』는 전국 읍지 중에서도 편찬 시기가 빠른 17세기 초이며, 유성룡과 정구의 지휘하에 권기를 비롯한 당시 안동부(安東府)를 대표하는 유림들이 두루 편찬에 참여했기 때문에 체제가 정연하고 내용이 매우 충실하였다. 이들 자료는 전국 읍지의 전형(典型)이 되었으며 지방사 연구자료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金地村 【1선장 55쪽】
俗名 今音知 又名金溪 在府西二十里 古稱千年不敗之地 司僕正 裴尚志 居之 有栢竹堂 慵齋李宗凖 判書權輗 亦生于此 鶴峯金誠一 自臨河 來居焉 閭閻撲地一溪中 貫耆老比屋居之 一鄕稱爲老人村


◎금지촌(金地村)
속명은 금음지(今音知) 또는 금계(金溪)라고 한다. 부(府)의 서쪽 20리에 있다. 옛날에 칭하기를 “천년 패하지 않는 땅” 이라고 했다. 사복정(司僕正) 배상지(裵尙志)가 여기 살았는데 백죽당(栢竹堂)이 있다. 용재(庸才) 이종준(李宗準), 판서(判書) 권예(權輗)도 또한 여기에서 태어났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이 임하(臨河)로부터 와서 살았다. 여염집이 가득하고 한 줄기 냇물이 중간을 가로질렀는데, 70을 넘은 늙은이가 집을 잇대서 사니 온 고을에서 일컬어 노인촌이라 한다.

*사복정(司僕正) 백죽당(柏竹堂) 배상지(裵尙志): 대사헌공(大司憲公) 이승직(李繩直)의 처부(妻父)



●裴尚志 【4선장 24~25쪽】
尚恭弟 寓居于府西金溪村 高麗末䕃仕爲判司僕寺事 中書郎 以故事屈公于庭 卽脫帽奮袂 棄官退屛終無仕 進之意種栢竹中 其堂而處焉 號栢竹堂 以詩酒自老 入本朝終不渝 以卒 有詩集千首 失不傳 後以子桓貴 贈兵曺參判


*배상지(裵尙志)는 배상공(裵尙恭)의 동생[弟]이 아니라 형(兄)이다. 따라서 ‘尚恭弟’ → ‘興海人 興海君詮之子’로 해야한다. ☞ ●裴尚志 【12선장 22쪽】

◎배상지(裴尙志)
흥해(興海) 사람이다. 흥해군(興海君) 전(詮)의 아들로 부의 서쪽 금계촌(金溪村)에 우거(寓居)하였다. 고려 말기에 음사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중서랑(中書郞)이 되었다. 굴공(屈公)의 고사(故事)에 따라서 조정에서 모자를 벗고 옷소매를 떨쳐서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숨었다. 끝내 벼슬에 나가려는 마음이 없었다. 백죽(柏竹)을 심고 그 가운데에 집을 지어서 거처했으므로 호를 백죽당(柏竹堂)이라고 했다. 시주(詩酒)로써 스스로 늙어갔다. 본조(本朝)에 들어와 끝내 지조를 더럽히지 않고 죽었다. 시집이 남아 있으나 천수(千首)가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뒤에 아들 환(桓)이 귀하게 되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백죽당(柏竹堂) 배상지(裴尚志): 대사헌공(大司憲公) 이승직(李繩直)의 처부(妻父)



●李繩直 【4선장 26쪽】
月城人 従夫人 所自 廣州来居 于府西 金溪村中司馬薦 仕官至司憲府大司憲 清白吏 墓在廣州


◎이승직(李繩直)
월성(月城) 사람이다. 부인(夫人)이 있는 곳을 따라 광주(廣州)로부터 부의 서쪽 금계촌(金溪村)으로 와서 살았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천사(薦仕)로 벼슬이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고, 청백리(淸白吏)에 뽑히었다. 묘(墓)가 광주에 있다.



●判司僕正 贈參判 裴尚志墓 【4선장 49쪽】
在府北嘉水川(洞口)北山


◎판사복정(判司僕正) 증참판(贈參判) 배상지(裵尙志)의 묘
부의 북쪽 가수천(嘉水川) 북산(北山)에 있다.

*판사복정(判司僕正) 백죽당(柏竹堂) 배상지(裴尚志): 대사헌공(大司憲公) 이승직(李繩直)의 처부(妻父)



●大司憲李繩直 夫人 裴氏墓 【4선장 49~50쪽】
在府西沙亡山 碣陰裴氏 考追 贈嘉善大夫 吏曺參判 可僕寺事 尚志 妣永嘉郡貞夫人權氏 李諱繩直 字繩平 月城世家 考中顯大夫 興威尉 大護軍 蔓實妣 鐡城郡夫人李氏 李君 生於宣徳戊午 卒於弘治庚戌十一月初五日 年五十三 以大司憲 卒葬於楊州東村池洞 先娶監正李亮女 生四男一女 曰不敏 勿敏 靡敏 女適上將金巖 後娶裴氏 生一男 曰時敏 吁李君 前後室 子孫盛矣 (有明天順七年十一月立石)


◎대사헌(大司憲) 이승직부인(李繩直夫人) 배씨(裵氏)의 묘
부의 북쪽 사망산(沙亡山)에 있다. 갈음(碣陰)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배씨의 고(考)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사복사사(司僕寺事)로 추증된 상지(尙志)이다. 비(妣)는 영가군(永嘉郡) 정부인(貞夫人) 권씨이다. 이승직(李繩直)의 자는 승평(繩平)이다. 월성세가(月城世家)로 고(考)는 중현대부(中顯大夫) 흥위위(興威尉) 대호군(大護軍)인 만실(蔓實)이고, 비(妣)는 철성군부인(鐵城郡夫人) 이씨(李氏)이다. 이군(李君)은 선덕(宣德) 무오년에 태어나 홍치(弘治) 경술년*) 11월 초닷새 날 죽었다. 나이 쉰셋에 대사헌(大司憲)으로 죽어 양주(陽州) 동쪽 촌지동(村池洞)에 장사지냈다. 먼저 감정(監正) 이량(李亮)의 딸에게 장가들어 네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불민(不敏) · 물민(勿敏) · 미민(靡敏)은 아들이고, 딸은 상장(上將) 김암(金巖)에게 시집보냈다. 뒤에 배씨(裵氏)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시민(時敏)이다. 아! 이군의 전 · 후실(前後室) 자손들이 훌륭하구나.”

*) 홍치(弘治) 경술년: 1490년



●生貟 李時敏墓 【4선장 52쪽】
在府西沙亡山 大司憲 繩直之子


◎생원(生員) 이시민(李時敏)의 묘
부의 서쪽 사망산(沙亡山)에 있다. 대사헌(大司憲) 승직(繩直)의 아들이다.



●金地村 【5선장 61쪽】
●裴尚志 【8선장 24~25쪽】
●李繩直 【8선장 26쪽】
●判司僕正 贈參判 裴尚志墓 【8선장 49~50쪽】
●大司憲李䋲直 夫人 裴氏墓 【8선장 50쪽】
●生貟 李時敏墓 【8선장 53쪽】

●金地村 【9선장 55쪽】
●裴尚志 【12선장 22쪽】
●李繩直 【12선장 24쪽】
●判司僕正 贈參判 裴尚志墓 【12선장 47쪽】
●大司憲李繩直 夫人 裴氏墓 【12선장 47~48쪽】
●生員 李時敏墓 【12선장 50쪽】


[대사헌공 이승직, 금호공 이시민] 영가지(永嘉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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