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용재공◆이종준

[영가지(永嘉誌)] 金地村, 三龜亭, 鏡光書堂, 李宗準, 高䴡太師權幸墓, 縣監贈參判權啓經墓, 校理李宗準墓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5. 7. 00:37

경북 유형문화재 제224호 영가지(永嘉誌)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유산 검색 > 영가지(永嘉誌)
*국역 출처: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 > 영가지


서지
종목: 경북 유형문화재 제224호
명칭: 영가지및책판(永嘉誌및冊板)
시대: 조선 선조 41년(1608)~대한제국(1899)
수량: 일괄(13책)
분류: 목판본/사간본
지정일: 1986.12.11
소유자: 권오기,권기백
소재지: 경북 안동시
문화재형태: 선장
형태서지: 1. 영가지 <권 1> 永嘉誌 <卷 一> - 조선 선조 41년(1608), 1책(冊).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21.8cm×18.0cm,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9자(字),주쌍행(注雙行),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32.0cm×22.0cm
~
4. 영가지 <권 4> 永嘉誌 <卷 四>
5. 영가지 <원> 永嘉誌 <元> - 조선 선조 41년(1608), 1책(冊).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3.8cm×18.2cm,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2자(字), 주쌍행(注雙行), 상하내향사판화문어미(上下內向四瓣花文魚尾); 31.7cm×24.2cm
6. 영가지 <형> 永嘉誌 <亨>
7. 영가지 <이> 永嘉誌 <利>
8. 영가지 <정> 永嘉誌 <貞>
9. 선조편집영가지 <제1책> 先祖編輯永嘉誌 <第一冊> - 대한제국(1899), 1책(冊).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0.6cm×17.6cm,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2자(字), 주쌍행(注雙行), 상하내향사판화문어미(上下內向四瓣花文魚尾); 32.2cm×22.2cm
~
12. 선조편집영가지 <제4책> 先祖編輯永嘉誌 <第四冊>
13. 간인시도 刊印時到 - 조선 선조 41년(1608), 1책(冊).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24.2cm×18.2cm,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9자(字); 30.3cm×21.7cm

해제
이 자료는 조선 중기 안동(安東) 지역의 지방지(地方誌)인 『영가지(永嘉誌)』와 이의 『책판(冊板)』이다. 영가(永嘉)는 화산(花山)과 함께 안동의 옛날 이름이다.
『영가지』의 편찬은 선조35(1602)년 권기(權紀, 1546~1624)가 스승 유성룡(柳成龍, 1542~1607)으로부터 편찬요목을 받아 동향인(同鄕人) 권행가(權行可)와 함께 편찬에 착수하였다. 이를 위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함주지(咸州誌)』의 편차를 참고하였으며, 그것을 다시 유성룡에게 질의한 다음 동향의 사우(士友)들과 함께 분담ㆍ집필케 하였으나, 유성룡이 죽자 중단되고 말았다. 그후 함안(咸安)의 읍지(邑誌)인 『함주지』를 편찬한 바 있는 정구(鄭逑, 1543~1620)가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오자, 권기ㆍ김득연ㆍ권오ㆍ이혁ㆍ배득인ㆍ이적ㆍ유우잠ㆍ이의준ㆍ권극명ㆍ김근 등을 소집하여 재편찬에 들어가 선조 41년(1608)에 완성하였다.
이때 편찬된 『영가지』의 초본(草本)이 부사(府司)에 소장된 채 지내오다가 영조 36년(1760) 서울 찬수청(纂修廳)에 바쳐졌고, 2년 후 서울에 올려진 것을 등초(謄草)하여 다시 부사(府司)에 비치하였다. 그 후 정조 8년(1784) 호장(戶長) 권창실에 의해 개장(改粧)되었는데, 당시 등초해 온 『영가지』 사본(寫本)은 18세기말부터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초고본(草稿本) 1책, 초고본 8권 3책, 정고본(定稿本) 8권 4책으로 전하였다.
내용은 권두에 권기의 서문, 본부도(本府圖)와 임하(臨河)ㆍ길안(吉安)ㆍ감천(甘泉)ㆍ내성(奈城)ㆍ일직(一直)ㆍ풍산(豊山)ㆍ개단부곡(皆丹部曲)ㆍ춘양(春陽)ㆍ소천부곡(小川部曲)ㆍ재산(才山) 등 안동부 내 각 현과 부곡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지도 다음에는 연혁(沿革)ㆍ읍호(邑號)ㆍ강역(疆域)ㆍ진관(鎭管)ㆍ호구(戶口)ㆍ산천(山川)ㆍ토품(土品)ㆍ향교(鄕校)ㆍ도로(道路)ㆍ제언(堤堰)ㆍ성씨(姓氏)ㆍ인물( 人物)ㆍ총묘(塚墓) 등의 목록을 수록하여 당시 안동부의 행정조직ㆍ사회경제ㆍ문화ㆍ풍속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영가지』는 전국 읍지 중에서도 편찬 시기가 빠른 17세기 초이며, 유성룡과 정구의 지휘하에 권기를 비롯한 당시 안동부(安東府)를 대표하는 유림들이 두루 편찬에 참여했기 때문에 체제가 정연하고 내용이 매우 충실하였다. 이들 자료는 전국 읍지의 전형(典型)이 되었으며 지방사 연구자료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金地村 【1선장 55쪽】
俗名 今音知 又名金溪 在府西二十里 古稱千年不敗之地 司僕正 裴尚志 居之 有栢竹堂 慵齋李宗凖 判書權輗 亦生于此 鶴峯金誠一 自臨河 來居焉 閭閻撲地一溪中 貫耆老比屋居之 一鄕稱爲老人村


◎금지촌(金地村)
속명은 금음지(今音知) 또는 금계(金溪)라고 한다. 부(府)의 서쪽 20리에 있다. 옛날에 칭하기를 “천년 패하지 않는 땅” 이라고 했다. 사복정(司僕正) 배상지(裵尙志)가 여기 살았는데 백죽당(栢竹堂)이 있다. 용재(庸才) 이종준(李宗準), 판서(判書) 권예(權輗)도 또한 여기에서 태어났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이 임하(臨河)로부터 와서 살았다. 여염집이 가득하고 한 줄기 냇물이 중간을 가로질렀는데, 70을 넘은 늙은이가 집을 잇대서 사니 온 고을에서 일컬어 노인촌이라 한다.

*사복정(司僕正) 백죽당(柏竹堂) 배상지(裵尙志): 대사헌공(大司憲公) 이승직(李繩直)의 처부(妻父)



●三龜亭 【2선장 47~50쪽】
在豊山縣西 金山里 洞口 縣監金永銓所構 額慵齋 李宗準 壬辰倭賊 焚蕩 二間頹毀 調度使 金尚寯 重修 成俔記上舍金世卿氏 以其鄕縣三龜亭之狀 求記扵余 謹按豐山 爲安東府屬 縣西五里許 有村 曰金山村 東二十步許 有峯 曰東吳 其高 僅六七丈 亭跨峯頭東西南 皆鉅野 厥勢敞豁 眺望無際 亭南 有大川 曰曲江 即洛水也 有潭曰馬螺 潭上絶壁 贔屭 高可萬丈 江上 長林連亘十里餘 亭北 又有山 曰鶴駕 有雙溪出自山間来 入于洛 其會水處 爲屏潭 或穪花川 其上 又有石壁 千餘丈 曰屏壁 雙溪北有竒巖 曰鵬巖溪两傍 有栗樹 千餘株 層翠紛敷 亭下 有稻塍 麥隴 春則緑髮手茸 秋則黃雲䆉稏 眞竒勝之地也 花山爲金氏本貫 金爲朝中巨閥 而其外祖權相國齊平 公 有盛名扵朝 權氏 即其女也 年八十有八 永銓永錘 永銖等 皆爲近邑守令 極其奉養 又構此亭 以爲晨夕逰憇之所 亭基 有三石 形如㐲黿 故以三龜名之 每當良辰吉日 扶輿升亭 菜衣彩服 輝映前後 滿庭蘭玉 森森列侍 萱闈含飴 而悅豫 其爲樂 可勝既㢤 大抵世人 有其居不得其勝 有其勝 不得其樂 而今則地得其勝 人得其贒 親又得其壽 衆羙俱備 豈非積善毓慶之所致 夫生之壽者 莫如龜 物之固者 莫如石 人子之欲親之壽如龜之永 如石之固 人人之所願 自兹以後 至于曾玄 自曽玄 至于雲仍之遠 使各奉其親 如今之所為 世世而勿替 則鄊爲壽鄊人爲壽民 而當流羙扵靑史矣 若余者 雖有桑榟㣲區 而縳扵名韁 無由退老 而且靈根已邈 具爾多器雖有五鼎之榮 而欲爲子路之負米 終不可得 則尤羙 夫金氏之諸贒 能奉其親而娛楽之也 李思鈞詩 晚生於世 未同時 不見菜衣事戱嬉 非古非今唯四序 無成無壊是三龜 亭中明月長留燭 湖上清風自舞漪 羡子肯堂完舊業 羞将貢喜待噓吹 金瑛四時詞 挾春萬象未芳時 人倚江亭與物嬉 花霧輕薰籠鳥雀 菰滿互長䕃魚龜 烟開遠浦靑浮水 雨滿前溪緑漲漪 無頼逰絲随落絮 不禁輕賜晚風吹槐樹隂隂疊影時 孤䳌啼罷亂鸎嬉 緑敷岸柳深蔵翼 葉大庭荷穏上龜 江閣晚烟披墨畫 麥郊輕浪作風漪 酒尊最好消長夏 無限微凉滿衣吹 百蟲迎暮各因時 萬語千聲自得嬉 明月一天飛玉鏡 謫仙何䖏換金龜 江凮裊裊摇華髮 木葉蕭蕭落殘漪 㘴久夜䦨 披鶴氅 倚歌誰和洞簫吹 雪意漫漫吹嵗時 剡溪寒夜興堪嬉 千山冷漾倚天劒 萬戶無聲縮殻龜 壠首風高生氣勢 磯頭水落凍灣漪 短籬爲訪梅消息 玉笛何人月下吹


◎삼귀정(三龜亭)
풍산현(豊山縣) 서쪽, 금산리(金山里) 동네 앞에 있다. 현감 김영전(金永詮)이 지은 것이다. 현액(縣額)은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의 글씨이다. 임진년 난리에 불타서 두 칸이 허물어지니 조도사(調度使) 김상준(金尙寯)이 다시 수리하였다.

성현(成俔)의 기(記)
상사(上舍) 김세경(金世卿)씨가 그 고을 삼귀정의 형상으로써 나에게 기(記)를 구하였다. 삼가 살펴보니 풍산은 안동부의 속현(屬縣)이다. 서쪽 5리 쯤에 마을이 있는데 금산촌(金山村)이라 하고 동쪽 스무보(步) 쯤에 봉우리가 있어 동오(東吳)라고 하며 그 높이가 겨우 예닐곱길(丈)밖에 안되는데 정자는 그 봉우리의 꼭대기에 걸터앉았다. 동쪽과 서쪽, 남쪽이 다 큰 평야로 그 형세가 확 트이어서 바라봄에 끝이 없다. 정자 남쪽에는 큰 시내가 있어 곡강(曲江)이라 부르며 곧 낙동강이다. 못이 있는데 마라(馬螺)라 하고 못 위에는 절벽이 힘차게 솟아 높이가 가히 만 길(丈)이나 된다. 강 위에는 긴 수풀이 잇따라 십리가 넘는다. 정자 북쪽에 또 산이 있으니 학가(鶴駕)라 한다. 두 시내(쌍계)가 이 산 사이에서 나와 낙동강으로 들어가는데 그 물이 모이는 곳은 병담(屛潭)이 되며 혹은 화천(花川)이라고도 부른다.
그 위에 또 석벽(石壁)이 있어 천여길(丈)이나 되며 병벽(屛壁)이라고 한다. 두 시내(雙溪)의 북쪽에 기묘한 바위가 있어 붕암(鵬巖)이라고 한다. 시내 양쪽 가에는 밤나무 천여 그루가 있어 층층이 푸르름이 어지럽게 퍼진다. 정자 아래에는 벼논과 보리밭이 있어 봄이면 푸른 싹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누른 구름 같은 벼가 물결친다. 진실로 기이하게 경치 좋은 곳이다. 화산(花山)은 김씨의 본관(本貫)이 된다. 김씨는 우리나라 가운데 큰 벌족(閥族)이다. 그의 외할아버지 권상국(權相國) 제평공(齊平公)은 조정에서 높은 이름이 있었는데 권씨는 곧 그의 따님으로 나이 여든여덟살이다. 영전(永銓), 영추(永錘), 영수(永銖)등이 다 가까운 고을의 수령(守令)이 되어서 그 봉양을 지극히 하며 또 이 정자를 지어서 아침 저녁으로 놀고 쉬는 곳으로 하였다. 정자의 터에 세 돌이 있는데 형상이 마치 엎드린 거북 같아서 그대로 삼귀(三龜)라고 이름지었다. 매양 좋은 때와 길(吉)한 날을 당하면 어머니의 가마를 부축하여 정자에 올라가니 노래자(老萊子)같은 채색 옷이 앞 뒤에 빛나게 비치고 뜰에 가득한 귀여운 자손들이 빽빽하게 늘어서서 모시면 어머니는 엿을 머금고 기뻐하신다. 그 즐거움을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대저 세상 사람들은 그 거처는 있으나 그 경치는 얻지 못하고 그 경치는 얻으나 그 즐거움은 얻지 못하는데 지금에 있어서는 땅은 그 경치를 얻었으며 사람은 그 어짊을 얻었고 어버이는 또 그 수(壽)를 얻었으니 뭇 아름다움이 다 갖추어졌다. 어찌 착함을 쌓고 경사스러움을 기른 소치가 아니겠는가. 대저 산 짐승의 수(壽)하는 것은 거북만한 것이 없고 물건의 굳은 것은 돌만한 것이 없다. 남의 자식된 사람 그 어버이의 장수하기를 거북처럼 길게 하고 돌처럼 굳게 하고자 하니 이는 사람마다 원하는 바이다. 이제로부터 이후로 증손 현손에 이르기까지 또 증손 현손으로부터 잉손(仍孫)*) 운손(雲孫)*)의 먼 후손에 이르기까지 그들로 하여금 각각 그 어버이 섬기기를 오늘날 하는 것처럼 하게 하여 세세토록 바꾸지 않는다면 고을은 장수하는 고을이 되고 사람은 장수하는 백성이 되어 마땅히 청사(靑史)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것이다. 나같은 사람은 비록 고향이 있었으나 조그마한 곳이요 또 명리(名利)의 굴레에 매여져 물러날 수가 없으며 또한 신령스러운 뿌리가 이미 멀어져 부모 모두 상사가 많았다.
“비록 오정(五鼎)의 영화를 가졌더라도, 자로(子路)와 같이 쌀을 지고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하여도 끝내 할 수가 없으니 더욱 김씨의 여러 어진이들이 능히 그 어버이를 봉양하고 즐겁게 해 드림을 아름답게 여긴다.” 고 하였다.

이사균(李思勻)의 시

세상에 늦게 태어나
때를 같이하지 못하여
일흔살 노래자(老萊子) 채색옷 입고
어버이 앞에 장난함을 보지 못했네.

옛날도 아니요 지금도 아닌
오직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서(四序)
이름도 없고 허물어짐도 없이
이 거북 세 마리.

정자 가운데 밝은 달은
길이 촛불로 남고
호수 위의 맑은 바람
스스로 잔물결에 춤춘다.

좋은 정자에서 옛 일을 다했으니
내 그대를 부러워하며
부끄러이 기쁨을 드리고자
기다려 탄식한다.

김영(金瑛)의 사시사(四時詞)

봄(春)

봄이 와도 아직
만상은 꽃다운 때가 아닌데
사람은 강가 정자에 기대어
만물과 더불어 노닌다.

꽃에 안겨 가벼운 향기
작은 새를 가두고
줄과 부들 서로 길어
물고기와 거북을 가리운다.

안개 걷히니 먼 포구
푸름이 물에 뜨고
비가 많으니 앞 시내
푸름이 잔 물결에 불어난다.

의지없이 하늘거리는 실버들
버들꽃을 떨어뜨리고
쉼 없은 가벼운 바람
저녁 때에 불어 오네.

여름(夏)

회나무 온통 덮어
첩첩이 그늘질 때
외로운 두견새 울음 그치니
꾀꼬리 어지러이 노닌다.

푸르게 펼쳐진 언덕의 버들은
깊이 나래를 감추고
잎 큰 뜰의 연꽃은
온전히 거북을 떠올린다.

강 정자 저녁 연기
묵화(墨畫)를 펼치고
보리 익은 들판에 가벼운 물결
강에 잔물결 일으키네.

술잔은 긴 여름날을 보내기에
가장 좋은데
잔잔히 서늘한 바람
끝없이 옷에 가득 불어오네.

가을(秋)

일백 곤충들 저녁을 맞아
제 각기 때맞춰 우니
만가지 말 천가지 소리
스스로 기쁨을 얻구나.

밝은 달은 하늘에서
옥같은 거울로 날리는데
이태백은 어느곳에서
술을 사러 금거북을 바꾸나.

강 바람 하늘하늘
흰 머리칼을 흔들고
나뭇 잎 우수수
잔물결에 떨어지네.

밤 난간에 오래 앉아
학창의를 펼치는데
노래 따라 그 누가
퉁소 부는 데 화답하나.

겨울(冬)

눈(雪)은 느릿 느릿
섣달에 불어오고
시냇가 차가운 밤
흥취는 기쁘다.

일천 산 차가이 넘실거려
북두칠성 의지하고
일만 집 소리 없어
거북껍질에 움추린다.

언덕가에 바람 높아
기세를 내고
물가에 물 떨어져
물굽이 잔 물결 얼었네.

낮은 울타리 집 방문하여
매화 소식 전하는데
옥피리 어떤 사람
달 아래서 부는가.

*) 잉손(仍孫): 일곱째 대의 자손
*) 운손(雲孫): 구름과 같이 멀어진 자손이라는 뜻으로, 잉손의 아들인 팔대손을 이르는 말



●鏡光書堂 【2선장 107~108쪽】
在府西金池村 東沙川上 古有定光寺 隆慶戊辰 創立書堂 松巖權好文詩 蒼壁山阿古寺基 改營書舎好相期 鳩材可是千家補 築力休令一簣虧 嶽麓冠襟懐俊士 武夷絃誦講賢師 臨溪共闘蔵修地 永使兒孫勉學知


◎경광서당(鏡光書堂)
안동부의 서쪽의 금지촌(金池村) 동편 사천(沙川)에 있다. 상고(上古)에는 정광사(定光寺)가 있었고, 융경(隆慶) 무진(戊辰)에 서당을 창립했다.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의 시에,

푸른 절벽 산언덕 고사(古寺) 자리에,
다시 서당(書堂)을 고쳐 지어 좋은 기대한다.
재목을 모음에 여러 집 보태었고,
힘을 쌓음에 한 산태미도 어그러지게 하지 말아야 한다.
악록(嶽麓)의 사람들은 준걸(俊傑)한 선비를 생각하고,
무이곡(武夷曲)의 현송(絃誦)을 어진 스승이 강(講)한다.
시내에 임해서 함께 장수하는 땅을 다투어,
영구히 아손(兒孫)으로 하여금 학문 힘쓸 줄 알게 한다.

라고 하였다.

*경광서당(鏡光書堂): 금계리(金溪里) 동편 유정사(有定寺)자리에 경광서당(鏡光書堂)을 지었다. 경광서당은 후에 경광서원(鏡光書院)이 되었다.



●李宗凖 【4선장 16쪽】
字仲均 號慵齋 大司憲 䋲直孫 佔畢齋門人 能文章 善書畵 倜儻有大節 成廟乙巳 中司馬 同年登第 甞以書狀官 赴京 見館驛畵 屛不佳 以筆塗抹 殆盡 驛官 招通使 恠詰之 通使曰書狀能書畵 必以不滿其意而然也 驛官 悟而首官之囘程 至其處 張新粧 素屛二㘴 公一書一畵 俱臻其妙 觀者嘆賞 戊午謫北界 路經高山驛 書李師中 孤忠自許 衆不與一律 于壁 上監司以聞 燕山以爲有怨意 逮鞠殺之 洪貴逹 救觧不得出戊午黨籍傳


◎이종준(李宗準)
자(字)는 중균(仲均)이요, 호는 용재(慵齋)이다. 대사헌(大司憲) 승직(繩直)의 손자이다. 점필재(佔畢齋)*)의 문인으로 문장에 능했으며 서화(書畵)도 잘 했다. 척당(倜儻)*)하여 큰 절조가 있었다. 성종(成宗) 을사(乙巳, 1485)년에 사마(司馬)에 합격하였고, 같은 해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北京)에 갔다가 역(驛)의 관사(館舍)에 그림 병풍이 아름답지 못한 것을 보고, 붓으로 거의 다 보이지 않도록 뭉게 버렸다. 역의 관리가 통사(通使)를 불러 괴이(怪異)하다고 여겨 따져 물었다. 통사가 가로되, “서장관은 서화에 능하니 반드시 그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함이 있어 그렇게 한 것이오.”하니, 역의 관리가 이를 깨닫고 수긍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 곳에 이르렀는데, 새롭게 단장한 흰 병풍 두 개가 펼쳐져 있었다. 공이 하나에는 글씨를 쓰고, 다른 하나에는 그림을 그렸다. 모두가 그 공묘(工妙)함을 이루었으니, 보는 사람들이 탄상(嘆賞)하였다. 무오(戊午)년에 북계(北界)로 귀양을 갔다. 도중에 고산역(高山驛)을 지나갔는데, “이사중(李師中)은 외로운 충성으로 자허(自許)했건만, 무리들은 이를 허여(許與)하지 않았다네.”라는 율시 한 수(首)를 벽 위에 썼다. 감사(監司)가 이 사실을 연산군(燕山君)에게 알리니, 연산이 자기를 원망하는 뜻이 있다 하고 국문(鞠問)하다가 그를 죽였다. 홍귀달(洪貴達)*)이 그를 구원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무오당적전(戊午黨籍傳)에 나온다.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호.
*) 척당(倜儻): 뜻이 크고 기개(氣槪)가 있다.
*) 서장관(書狀官): 정사(正使), 부사(副使)와 아울러 삼사의 하나가 되며 정사, 부사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행대어사(行臺御史, 움직이는 사헌부)를 겸하고 있음. [만기요람,재용편].
홍귀달(洪貴達): 조선 연산군 때의 문신(1438~1504).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ㆍ함허정(涵虛亭). 1498년 무오사화 때에 왕의 실책을 10여 조목에 걸쳐 간(諫)하다가 미움을 사서 좌천되었으며, 갑자사화 때에 모함을 입어 처형되었다. 저서에 ≪허백정문집≫이 있다.



●高䴡太師權幸墓 【4선장 40~41쪽】
永嘉志卷之八 塚墓
在府西本破谷里 自太師葬後 號其洞曰陵洞 嘉靖丁巳 府使權紹 令陵下居姓孫權 審行 夢斗外孫 柳公季 易土改莎 每寒食上塚行事 祝文 天燈南麓 壽封斯崇 功巍德洽 裕裔隆宗 每歲寒食 精禋是恭 陟降如在 於昭盛容 萬暦戊子 監司權克智 改立石 西厓柳成龍 撰墓表 曰安東府西十里而遠 有山 曰天燈 其中 坎㘴离向之原 實高䴡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 權公 冠履所蔵也 公 諱 幸本 新羅宗姓 羅末守古昌郡 以地 迎麗祖 有功 得賜姓權 金之爲權 自公始 其後 子孫 益大以蕃 歷䴡以及我 朝 冠冕不絶 世之數名宗巨閥 必以權氏爲首 其亦盛矣 始公旣葬 墓道闕顯刻 世代愈遠 兆域堙廢 莫有知其處者 成化間 公十八代孫 平昌郡守 雍 乃極意尋求於墓旁獲誌石 就加封樹 臨殁 遺命 自祔葬其原 爲守護計 即墓南 苐二塚 是也 而雍之子 裕綽等 承雍之志立石以標之 慵齋李公 宗凖 識其陰 萬暦戊子 公遠孫 今觀察使君 克智 以旌節 鎮南服 廵到于此 展省松檟 合宗人之在一境者 以祭之 旣卒事役 隷誤觸石 仆地而壊 觀察使 卽與宗人 謀買石 鐫治將㳙吉改樹 以成龍 亦係公 外泒 屬記其事 余竊惟公之勲業 載史策 嗣息具譜牒 恵澤在一邦 無容更贅 謹畧具立石 顛末 俾來者 有考焉 按譜 稱公爲太師而舊刻 不載 故 疑不敢加云勝覧


◎고려태사(高慮太師) 권행(權幸)의 묘
부의 서쪽에 있다. 본디 파곡리(波谷里)였는데 태사를 장사지내고 난 뒤에 그 동의 이름을 능동(陵洞)이라고 불렀다. 가정 정사년에 부사(府使) 권소(權紹)가 능 아래에 살고 있던 후손 권심행(權審行) 몽두(夢斗)와 외손인 류공계(柳公季)로 하여금 흙을 바꾸어 사성(莎城)을 고치도록 하였다. 매양 한식(寒食)이 되면, 무덤에 올라가서 제사를 행하였다. 축문(祝文)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천등산(天燈山) 남쪽 기슭에 봉분이 솟았으니, 공덕이 높고 흡족하도다. 후예들은 많고 종가는 융성하여 매년 한식이 오면, 정결한 제사를 공손히 받드니, 생전과 같이 강림하시어 그 훌륭한 모습 보이오소서.”
만력(萬曆) 무자년(1588, 선조 21)에 감사(監司) 권극지(權克智)가 비석을 고쳐 세웠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묘표(墓表)를 지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동부의 서쪽 십리 떨어진 곳에 멀리 산이 있으니 ‘천등(天燈)’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있는 감좌(坎坐) 리향(离向)의 언덕이 고려의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인 권공이 묻히신 곳이다. 공은 휘(諱)가 행(幸)으로 본래는 신라의 종성(宗姓)이었다. 신라 말기에 고창군수(古昌郡守)로 나갔다가 그 지역을 가지고 고려 태조를 맞이하였다. 공이 있었기에 권씨 성을 하사받은 것이다. 김(金)씨가 권(權)씨로 된 것은 공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후에 자손들이 더욱 커지고 번성해저 고려에서 우리 왕조에 걸쳐서 벼슬이 끊이지 않아, 세상에 여러 명종거별(明宗巨閥) 중에서 권씨를 으뜸으로 여기니, 그 또한 훌륭하다 할 것이다. 처음 공을 장사지내고 나서는 묘도(墓道)에 비석이 없었다. 세대가 더욱 멀어지자, 무덤의 경계가 없어져 그 있던 곳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성화(成化) 년간(1465~1487)에 공의 18대손인 평창군수(平倉郡守) 옹이 이에 뜻을 다해 묘터를 찾다가 묘 옆에서 지석(誌石)을 얻었다. 그리고 나서 봉분을 세웠다. 죽음에 다달아 유명(遺命)하기를, ‘그 언덕에 나를 부장(祔葬)하여 수호(守護)하도록 하라.’고 했으니 곧 묘의 남쪽 두번째 무덤이 바로 이것이다. 옹의 아들 유작(裕綽)등이 공의 뜻에 따라 비석을 세워 표(標)하였다. 이공(李公) 종준(宗準)이 돌의 뒷면에 기록했다. 만력 무자년(1588, 선조 21)에 공의 먼 자손인 오늘날의 관찰사인 극지가 정절(旌節)을 가지고서 남쪽 지대를 순찰하다가 여기에 이르렀다. 무덤을 둘러보고 종인(宗人)으로 한 고을에 사는 사람들을 모아 제사를 올렸다. 마치고 나서 역예(役隸)가 잘못하여 비석을 건드려 땅에 엎어져 깨지고 말았다. 관찰사가 바로 종인들과 의논하여 돌을 사서 새기고 다듬어 장차 길일(吉日)을 골라 고쳐 세우려고 하였다. 성룡도 공의 외파(外派)에 관계되어 그 사적을 기록해 줄 것을 부탁 받았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공의 훈업(勳業)은 역사에 실려 있고 자손들은 족보에 자세하며, 혜택은 한 나라에 남아 있으니 다시 군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삼가 비석을 세우게 된 전말(顚末)을 대략 서술하여 뒷사람들로 하여금 참고가 되게 한다. 족보를 살펴보니, 공을 태사라고 칭했으나 옛 비석에는 실려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감히 덧붙이지 못할 것 같다.”



●縣監 贈參判 權啓經墓 【4선장 51쪽】
在府西所夜村 鄕校洞 卯向 祖考 判書墓下 貞夫人 仁川郡李氏墓 在九獜獐洞 丙向


◎현감(縣監) 증참판(證參判) 권계경(權啓經)의 묘
부의 서쪽 소야촌(所夜村) 향교동(鄕校洞)에 있다. 묘향(卯向)이다. 조고(祖考) 판서(判書) 묘 아래에 있다. 정부인(貞夫人) 인천군(仁川郡) 이씨의 묘는 구린장동(九隣獐洞)에 있는데 병향이다.

*현감(縣監) 권계경(權啓經): 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의 처부(妻父)



●校理李宗凖墓 【4선장 55쪽】
在府西 金池沙亡山


◎교리(校理) 이종준(李宗準)의 묘
부의 서쪽 금지(金池) 사망산(沙亡山)에 있다.



●金地村 【5선장 61쪽】

●三龜亭 【6선장 52~54쪽】
●鏡光書堂 【6선장 113쪽】

●李宗準 【8선장 15~16쪽】
●髙麗大師 權幸墓 【8선장 40~41쪽】
●縣監 贈參判 權啓經墓 【8선장 51쪽】
●校理李宗凖墓 【8선장 56쪽】
●李宗準 【8선장 15~16쪽】
●髙麗大師 權幸墓 【8선장 40~41쪽】
●縣監 贈參判 權啓經墓 【8선장 51쪽】
●校理李宗凖墓 【8선장 56쪽】

●金地村 【9선장 55쪽】

●三龜亭 【10선장 47~50쪽】
●鏡光書堂 【10선장 107~108쪽】

●李宗準 【12선장 14쪽】
●高麗太師權幸墓 【12선장 38~39쪽】
●縣監 贈參判 權啓經墓 【12선장 49쪽】
●校理李宗凖墓 【12선장 53쪽】



[용재공 이종준] 영가지(永嘉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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