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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마을탐방<17> 봉(鳳)이 숨어있다는 물야면 은봉(隱鳳)마을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3. 9. 11:25

오지마을탐방<17> 봉(鳳)이 숨어있다는 물야면 은봉(隱鳳)마을


봉화문화연구회 이 기 락
2018년 09월 16일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은봉 마을 전경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마을 쉼터인 느티나무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눌재 이홍준의 묘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기록적인 지난 여름의 폭염과 연이어 지속된 장마는 우리들 마음을 지치게 하였다. 9월 들어 첫 날 아직 장마 비가 부슬거리는 가운데 가을로 접어드는 산하의 풍요로움을 느끼면서 봉황이 은신한다는 물야의 오지 은봉마을을 찾았다.

이 마을 노인 회장 이재복(80)씨는 증조부 때 들어 왔으며, “예전에는 은봉(銀峰)으로 불리었는데 근세에 와서 권오봉(權五鳳)씨란 분이 은봉(隱鳳)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최초 이 마을의 개척은 임진왜란 때 청송 심씨가 다래넝쿨을 헤치고 들어와 정착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4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있다”고 설명하신다.

임진왜란은 1592년 일어났으니 426년 전이다. ‘봉화의 촌락과 지명’에는 청송심씨 심학계(沈學啓)선생이 임진왜란 때 개척했으며, 풍수설에서 은이 나오는 산이다 하여 은봉(銀峰)이라 했다고 한다. 또 여기를 銀峰, 남쪽에 있는 봉성 금봉을 金峰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또한 산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피난처로 적지이고, 지형이 봉황이 숨은 형세라 한데서 유래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랫마을 느티나무 자리에 당집이 있었는데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때에 허물었고 윗마을 느티나무는 정자와 함께 마을 휴식처를 제공해 주고 있네”

계속된 노인회장의 설명에 의하면 은봉은 아랫마을, 윗마을 건너마을, 이렇게 예전에 많이 살 때는 3개 반으로 60가구가 넘었고(한참 집집을 헤아리더니) “지금은 27집이 살고 있네. 가장 많은 성씨는 안동 권씨로 일곱 집이고 경주김씨, 경주이씨 등 여러 성씨가 살며, 새로 귀농, 귀촌 농가가 10집은 된다”고 알려준다.

은봉은 개단 3리로 문수산 줄기의 옛날 의병들이 신호로 깃대를 꼽아 사용한데서 이름이 붙여진 깃대봉 아래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으로, 동쪽 산 너머는 마장, 북쪽은 눈돌, 서쪽 재 넘어는 개단 4리 문양, 남쪽으로는 북지4리 숫골 마을이 있다.
주로 하는 농사는 벼, 고추, 사과, 한우, 단일 작목으로 매년 단호박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권 영각이가 있지, 절골 밑에 일제 때 조성한 은봉 저수지가 있다고 하기에 찾아 나섰다.
가던 길에 단호박을 생산한다는 권영각(60)씨를 만났다. 창고에는 수확해서 저장 중인 단호박이 굵기 별로 엄청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몇 마지기나 단호박 농사를 짓느냐?” 물으니 “한 7~8십 마지기 되요” 한다. “그렇게 대규모로 어떻게 하느냐?” 하니 웃으며 “봉화에 그 정도 규모 단호박 농사를 짓는 사람이 십여 명은 되요” 한다.

저수지를 향해 좀 더 위쪽으로 올라가니 저수지 옆에 아름다운 정원의 멋진 2층 집이 저수지와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다. 두리번거리다 발걸음을 떼어 놓으려니 “어떻게 오셨어요. 어디 가시는 데요?”하는 목소리가 2층 창문을 통해 들려온다. 간단히 목적을 이야기 하니, 집 주인이 내려와 테이블에 앉아 명함을 건네며 수인사를 나눴다.
귀촌 10년차 이종학(60)씨로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공기 좋은 농촌으로 귀촌을 결심하고 찾다가 은봉에 정착했다고 한다.
50평은 넘음직한 잘 가꾸어진 잔디밭과 나무들, 농구대를 비롯한 미끄럼틀, 어린아이들의 놀이터로 만든 정원임을 알 수 있다.

“어찌 이런 아름다운 어린이용 정원을 만들었어요? 무슨 특별한 연유라도 있나요”

“처음 이사와 심심해하는 막내아들을 위해 만들었지요. 요즘은 그냥 나무 손질하는 재미로 삽니다.” 부인이 찻잔을 들고 자리에 같이 앉았다.

“동네 사람들과는 서로 잘 어울리시나요?”

“예, 잘못 지내는 것도 없지만 잘 어울리기가 힘들어요. 대화의 관심사가 다르니까요” 그렇다. 귀촌 귀농인들이 원동네 주민들과 어울리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왕 은봉에 온 김에 눌재(訥齋) 이홍준(李弘準) 선생의 묘소가 있다기에 찾아보려는 길에 우연히 송천익(63)씨를 만났다. 송천익씨는 이 마을 태생으로 외지에 나가 살다가 2007년 귀향하여 지금은 몇 년째 물야면 풍물놀이패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다. 은봉에는 혼자 귀향, 소를 키우고 있단다.

그가 가르키는 멀지않은 곳의 산소를 찾았다. 서남향의 산 중턱의 보기에도 잘 앉은 산소는 벌초도 잘 되어 있었다.
成均進士訥齋先生李公之墓. 配 宜人 咸昌 金氏 祔 란 묘비가 그분의 묘임을 말해준다.

눌재(訥齋) 이홍준(李弘準) 선생의 字는 군식(君式)이며, 경주 이씨로 이시민(李時敏)의 둘째 아들로 안동 서후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1486년 성종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형 종준(宗準)이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참형을 당하는 것을 보고 내성현 범들마을에 낙향하여 운둔생활을 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천성향약(川城鄕約)를 만들어 향토문화와 미풍양속의 진작에 힘썼으며, 1523년 졸하여 백록서원에 배향되었다.
천성은 내성의 옛 이름이다.

봉화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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