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 묘소 세거지/월성군파세거지

내고장 명문가를 찾아서 - 경주이씨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2. 24. 23:54

내고장 명문가를 찾아서 - 경주이씨


2012년 07월 16일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기원전(紀元前) 177년 한무제(漢武帝) 6년 갑자(甲子)에 하늘로부터 진한(辰韓)땅의 표암봉인 박 바위로 처음 내려 오셨고 양산촌장(楊山村長)으로서 부족(部族)들을 다스리며 혁거세(赫居世)를 양육 시켜서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시는데 6부촌장의 의장(議長)으로써 역사적으로 유명한 화백회의(和白會議) 제도(制度)를 시행 하셔서 오늘날의 민주주의제도를 구현시킨 선구자였음을 호언 할 수 있다.
서기 32년 신라 3대왕인 유리왕(儒理王) 9년에는 진한(辰韓) 6촌을 6부로 개칭할 때 지금의 경주(慶州)시 일원에 해당되는 양산촌(楊山村)은 급(及)부라 바꾸어 부르고 성씨를 이씨(李氏)라 사성(賜姓) 하였으니 경주라는 지명을 붙여서 경주이씨(慶州李氏)라 부르기에 이르렀다.

우리 시조께서는 마한(馬韓) 태조(太祖)의 사위로 태화공주(泰華公主)와 배사(配四)를 하셨으며 자손들의 무궁한 발전으로 귀족(貴族)으로서 신라(新羅) 백제(百濟) 고려(高麗) 등 국내에서 갑족(甲族)이요 진골로써 자랑스러운 씨족(氏族)으로 번창하여 오고 있다.
서기 536년에는 법흥왕(法興王)께서 우리 시조 알평공(謁平公)께 문선공(文宣公)이라 시호(諡號) 하셨고 서기 656년에는 무열왕(武烈王)께서 우리 시조를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追奉) 하셨으니 마땅히 왕위(王位)임을 자랑 할 수 있다.

이씨(李氏)는 문헌에 451본 혹은 546본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시조가 밝혀진 성씨는 120본 내외이고, 그 중100본 정도가 현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 이씨성이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史)》에 보면 32년(유리왕 9년)에 신라 6부촌장(六部村長)에게 사성한 6성(李?崔?孫?鄭?裵?薛)중의 하나인 〈李〉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新羅 王室의 성인 김씨 성조차도 6세기 초엽인 법흥왕(法興王)에서 진흥왕(眞興王)대에야 등장했다는 통설에 비추어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라고는 하나 이씨의 시원 역시 그보다 오래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존하는 이씨가 100여 본이라고 하지만 그 중 주류를 이루는 관향은 불과 30본 내외이다.

위의 100여 본을 계통별로 분류하면 신라 6부촌장의 한 사람으로 신라 유리왕때 이씨로 사성 받은 알평계(謁平系)가 경주이씨(慶州李氏)를 주종으로 하여 여러 본관으로 분관되었고, 신라 때 사공(司空)을 지낸 리한(李翰)을 시조로 하는 전주리씨(全州李氏)와 경주이씨(慶州李氏) 분관된 우계(羽溪) 가평(加平) 재령(載寧) 아산(牙山)이씨 등이 있으며, 당(唐)나라에서 귀화한 연안이씨, 김수로왕의 둘째아들로 모성(母姓)을 따라 허씨(許氏)로 했다가 당나라 현종(玄宗)으로부터 이씨로 사성 받은 인천이씨(仁川李氏), 원(元)나라에서 귀화한 청해이씨(靑海李氏)등으로 구분된다.

가평(加平) 강진(康津) 강화(江華) 개성(開城) 결성(結城) 경산(京山) 경주(慶州) 고령(高靈) 고부(古阜) 고성(固城) 공주(公州) 광산(光山) 광양(光陽) 광주(廣州) 광평(廣平) 금구(金溝) 김포(金浦) 나주(羅州) 남평(南平) 농서(농西) 단성(丹城) 단양(丹陽) 담양(潭陽) 대흥(大興) 덕산(德山) 덕수(德水) 덕은(德恩) 동성(東城) 벽진(碧珍) 봉산(鳳山) 부안(扶安) 부여(扶餘) 부평(富平) 상주(尙州) 서림(西林) 서산(瑞山) 성산(星山) 성주(星州) 수안(遂安) 수원(水原) 순천(順天) 신평(新平) 아산(牙山) 안산(安山1) 안산(安山2) 안성(安城) 안악(安岳) 양산(梁山) 양산(陽山) 양성(陽城) 양주(楊州) 여주(驪州) 연안(延安) 영천(寧川) 영천(永川) 영해(寧海) 예안(禮安) 옥구(沃溝) 온양(溫陽) 용궁(龍宮) 용인(龍仁) 우계(羽溪) 우봉(牛峰) 울산(蔚山) 원주<新> 원주<舊>음죽(陰竹) 익산(益山) 인제(麟蹄) 인천(仁川) 임강(臨江) 장기(長기) 장수(長水) 장흥(長興) 재령(載寧) 전의(全義) 전주(全州) 정선(旌善) 정주(貞州) 진보(眞寶) 진안(鎭安) 진위(振威) 진주(晋州) 차성(車城) 창녕(昌寧) 천안(天安) 청송(靑松) 청안(淸安1) 청안(淸安2) 청주(淸州) 청해(靑海) 초산(楚山) 충주(忠州) 태안(泰安) 태원(太原) 통진(通津) 평산(平山) 평양(平壤) 평창(平昌) 하빈(河濱) 하음(河陰) 학성(鶴城) 한산(韓山) 함안(咸安) 함양(咸陽) 함평(咸平) 합천(陜川) 해남(海南) 해주(海州) 홍주(洪州) 화산(花山) 회덕(懷德) 흥양(興陽)

기원전 117년 한무제 원수6년 갑자에 하늘로부터 진한 땅의 표암봉인 밝 바위로 처음 내려오셨고, 양산촌장으로서 부족들을 다스리며 혁거세를 양육 시켰고 신라초대왕으로 추대하시는데 6부 촌장의 의장으로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화백회의제도를 시행하셔서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를 구현 시키신 선구자였음을 호언 할 수 있다.
서기 32년 신라 3대왕인 유리왕 9년에는 진한 6촌을 6부로 개칭할 때 지금의 경주시 일원에 해당되는 양산촌의 급량부라 부르고 성씨를 이씨(李氏)라고 사성 하였으니 경주라는 지명을 붙여서 경주이씨(慶州李氏)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신라건국(新羅建國)의 모체(母體)인 사로(斯盧)의 6부(六部) 중 알천양산촌(閼川陽山寸)을 다스렸다.
우리나라 대다수 이씨(李氏)의 조종(祖宗)으로 알려진 경주이씨는 신라 말에 소판(蘇判)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의 이거명(李居明)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대체로 고려초기(高麗初期)에서부터 훌륭한 인맥(人脈)을 형성하여 벌족(閥族)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조선조에 와서도 수많은 명현(名賢)과 학자를 배출시켜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지위를 굳혔다.

시조 : 이 알평(李 謁平)
표암, 자: 천서(始祖 諱 謁平 號 瓢巖 字 天瑞)

표암재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되었다.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회가 소유하고 있다. ‘박바위’, ‘밝은 바위[光明巖]’라는 뜻을 가진 바위로, 탈해왕릉(脫解王陵) 서북쪽의 박바우산에 있다. 경주이씨 시조이자, 신라 6촌(六村) 가운데 근본이 되는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시조인 이알평(李謁平)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라고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본래 일본 사람인 호공(瓠公)이 처음 동해에서 건너올 때 허리에 찬 표주박[瓠]을 이곳에 풀었는데, 그뒤 호공은 박혁거세를 도와 나라 건립에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BC 69년에 6촌장이 여기에 모여 화백회의를 열고 신라 건국을 의결했다고도 전해진다.
경주이씨의 근원지이며, 신라건국의 산실이자 화백이라는 민주정치 제도가 시작된 성스러운 곳이라는 뜻을 새기기 위해 1806년(순조 6)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졌다. 이어 1925년 표암재(瓢巖齋)가 건립되고, 전사청(典祀廳), 내외삼문(內外三門), 경모대비(景慕大碑) 등이 건립되었다. 해마다 3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봉행한다.
慶州李氏(月城李氏) 시조 은열왕 알평공 慶州市 동천동에는 慶州李氏 시조 알평공의 위패를 모신 시조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여러 종문들의 뜻을 모아 始祖하강지 아래에 악강묘, 표암재와 시조 경모비를 세우니 표암이란 이름은 시조하강신화에서 유래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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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명문가를 찾아서 - 경주이씨


2012년 08월 14일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그로부터 백년이 지나 제 3대 유리왕 9년 서기 32년에 여섯 마을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내릴 적에 알천 양산촌은 급량부라 일컫고 이씨로써 성을 삼아 비로소 경주를 본관으로 한 큰 집안이 열리게 되었구 무릇 2,000여 년을 거쳐 오는 동안에 차성, 우계, 합천, 가평, 평창, 아산, 재령, 원주, 장수, 진주, 영천, 흥향, 울산, 등 많은 지종으로 나뉘어 가지와 줄기마다 꽃 피고 열매 맺듯 역대를 통하여 뛰어난 문무장상들이 헬 수 없이 배출되었음을 보거니 이 어찌 깊은 뿌리에서 솟아오르는 진액의 덕택이 아니며, 또한 이 어찌 시조의 끼치신 은혜가 아닐까 보냐, 그의 혈통을 받은 자손들이 거룩한 유적지를 그냥 보지 못하여 순조때 표암 위에 시조의 자취임을 새겼고, 순종 때에는 바위 아래 표암제를 세웠으며, 또 근래에 국가에서 거룩한 유적임을 찬양하여 묘우를 세웠고, 터전을 확장하며 장원과 송죽으로 경내를 미화하여 조상을 사모하는 자손들의 마음은 기쁘기 여지없다.
그러나 공의 사적은 결코 한씨 족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사의 근원이므로 나는 굳이 그 유적을 찾아 알천 동북쪽 금강산 내린 맥이 마지막 맺힌 표암 위에 올라 눈을 감고 2천년전 민족의 옛 조상을 사모하며, 다시 그 혈통의 큰 인물들이 대대로 겨레 위해 큰 업적 끼친 것들을 헤아려 볼 때 감격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명활산 금오산 선비 산이 에워 둘렸고, 문천이 알천이 형산강으로 흘러드는 곳 신라의 옛 서울 알평어른 내리신 자취 2천년 묵은 역사 흐리듯 또렷도 하다 옛 조상 축복을 받아 자손과 겨레 영광 있으리!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어느날 慶州 하늘에 한 줄기 서운이 감돌더니 빛을 타고 신인 한 분이 홀연히 인간세상으로 내려오셨다. 용모가 비범하고 덕과 위엄이 가득했다는 그 선인이 바로 경주이씨 시조 알평공 이시다. 慶州 표암봉, 이른바 박 바위에 하강하시니 광임대는 시조께서 첫발을 디디셨던 장소라고 전해진다.

당시 慶州를 다스리던 진한은 여섯 부락의 연맹체로서 나라에는 질서가 없고 百姓은 우매하였다. 이에 알평공께서 알천 양산촌장으로 추대되시어 각종 문물제도를 정비하셨다. 특히 국사를 결정할 때 한 사람이라도이의를 제기하면 안건으로 채택치 않는 만장일치 제도를 확립하셨는데 이는 후일의 신라 화백제도로 계승되어 三國統一의 原動力이 되었다. 다른 村長들과 百姓들의 존경의 대상으로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었으나 始祖께서는 13세의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40여 년간 섭정함으로써 新羅建國의 기반 마련에 온 힘을 쏟으셨다.

建國後에는 아찬의 벼슬에 올라 국가의 근본이 되는 경제와 국방을 안정시키셨다. 3대 유리왕은 건국원훈인 알평공에게 이씨 성을 사성 하니이로써 이천년 경주 이씨의 도도한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알평공 이후의 기록이 실전되어 천여 년의 세계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는 알평공을 시조로 소판공 거명을 중 시조로 선대의 세계를 정립하고 있다.
시조와 진한(辰韓) 6촌경주이씨의 시조(始祖)는 알평(謁平)이고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다.『 삼국유사』에는 기원전 117년에, 경주이씨의 시조인 <알평공>이 하늘에서 신라의 4영산(靈山)의 하나인경주 서북에 있는 금강산(金剛山)의 표암봉(瓢巖峰)에 내려왔다고 있다.

신라 6촌(村)은 알천 양산촌 (閼川楊山村)·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취산 진지촌(嘴山珍支村)·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등인데『 삼국사기』에는 유리왕(儒理王)9년 봄에 6부(部)의 이름을 고쳤는데, 양산부(楊山部) → 밑돌부(及梁部)(李氏)/고허부(高墟部)→새돌부(沙梁部)(崔氏)/대수부(大樹部)→점돌부(漸梁部)(孫氏)/우진부(于珍部)→본피부(本彼部)(鄭氏)/가리부(加利部)→한기부(漢祇部)(裵氏)/명활부(明活部)→습비부(習比部)(薛氏)로 했다고 있는데『, 삼국유사』에는 이와 달리 새돌부(沙梁部)를 정씨(鄭氏)의 본관으로 기록하고 있다. 시조의 영지(領地)인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은뒤에 밑돌부(及梁部)가 되는 뿌리의 마을로 6촌의 모체이고 밑돌부의 촌장인 알평(謁平)은 6촌의 부족사회를 영도하는 수장이었다.

우리나라 이씨(李氏)중 많은 본관중(本貫中) 스스로 정통(正統)이오 대종(大宗)임을 내세우고 있는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신라6촌(新羅六村)의 알천양산촌급량부(閼川楊山村及梁部)의 촌장(村長)으로 전하는 표암입알평(瓢岩入謁平)을 시조(始祖)로 하며 소판공 거명(蘇判公 居明)을 중시조(中始祖)로 하고있다.
본군(本郡)에는 중종(中宗)때 교리(校理)를 역임(歷任)한 용재 이종준(慵齋 李宗準)과 진사 눌재 이홍준(進仕 訥齋 李弘準)의 후손(後孫)이 봉화석평(奉化石坪) 소천등지(小川等地)에서 집성촌(集成村)을 이루는 외에 문충공 백사 이항복(文忠公 白沙 李恒福)과 운곡 이광좌(雲谷 李光佐)등의 후손(後孫)들도 각처에 살고 있다.

이종준(李宗準) ?~1499
자(字)는중균(仲均) 호(號)는 용재(庸齋)이며 성종 1485년 병과2인자로 급제하여 교리, 정랑, 일본사신의 호송관에 차출되었는데 공의 글씨와 그림을 보고 천하의 보물을 얻었다고 하였다.
사인이 되고 어세겸의 추천으로 호당에 뽐혀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고 수찬이 되었다.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다 왔다. 의성현감시 봉급으로 교학진흥에 썼고 경상도지도를 제작하였다. 군민들의 그를 위해 선정비를 세웠다.
연산4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모진 국문을 받고도 신색에 변함이 없었다.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가던 중 단천 마곡역에 이르러 이사중의 시귀를 벽에 써붙였더니 감사 이승건이 공이 왕을 원망한다고 일러바쳐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을때 오직하나 일자만 써서 굳은 의지를 보였다. 죽음에 임하여「 수양산이 멀거니 내 묻힐 땅이 어디메냐」하니모두들 눈물을 흘렸다. 저서는 용재집이 전한다.

이홍준(李弘準)
자(字)는 군식(君式) 호(號)는 눌재(訥齋)이며 성종17년에 진사하고 무오사화 때 그 형 용재가 참혹한 변을 당한 이후 봉화읍 연수봉 밑으로 옮겨앉아 외영당(畏影堂)을 지었다. 묵재 습득공과 함께 천성향약(川城鄕約)을 지었다.

이덕장(李德璋) 1482~?
자(字)는 경부(慶簿) 눌재의 아들로 선조 때 통훈대부를 하였다.

이상현(李相鉉) 1817~?
자(字)는 정임(鼎任) 호(號)는 만오(晩悟)이며 기국이 중후하고 학문의 성취도가 빨랐으며 후학도 많이 길렀다. 저서로 만오집이 전한다.

이규형(李奎炯) 1843~?
자(字)는 치등(致登) 호(號)는 태악(泰岳)이며 의와 선에 맞지 않으면 행신을 하지 않았고 오직 학문연구에만 몰두하였다.

이재학(李在學) 1865~?
자(字)는 덕명(德明) 호(號)는 건축재(建畜齋)이며 사서오경과 재자백가를 통달하였으며 주문공십회(朱文公十誨)와 원개겸칠계서(苑盖謙七戒書)를 좌우명으로 하였다. 그리고 경술국치 이후 두문불출하였다. 저서로는 건축재집이 전한다.

이준호(李俊鎬) 1902~?
자(字)는 영로(英魯) 호(號)는 영초(嶺樵)이며 경서연구에 성실하였으며 특히 예서에 밝았다. 또한 선대의 사력을 정리하였다. 저서로 유고가 전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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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명문가를 찾아서 - 경주이씨(慶州李氏)


2012년 08월 20일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이포(李苞) 1549~?
자(字)는 중용(仲容)이며 눌재 홍준의 손자로 일찍이 생원을 하였다. 성품이 충성스럽고 강직하여 수령의 가혹한 정사에 격분하여 박민도(剝民圖)를 그러 조정에 올리니 임금께서 극찬하고 그 그림으로 병풍을 만들어 정치에 크게 반영시키고 그 공으로 집현전 참봉을 제수받았다. 원래 출천지 효자로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할 때 극진히 구료하여 치료한 행신으로 효자 정려가 내려졌다.

이석호(李錫鎬) 1885년 ~ 1941년
자(字)는 무일(茂一)이며 호(號)는 해암(海庵)으로 문예(文藝)에 뛰어났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을 당하면서 나라없는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고 분연(紛衍)히 광복(光復)의 뜻을 가지고 권경섭, 김창돈, 권인환, 유연화등과 신간회(新幹會)를 조직(組織)하고 청년활동(靑年活動)을 하였으며 신학문(新學問)을 쉬지않고 닦았으나 여러 가지 불편함이 있어 춘양(春陽)에 옮겨 뜻있는 사람들과 세상(世相)을 탄식(歎息)하며 나라와 민족(民族)을 걱정하는 애국지사(愛國志士)였다.

현대인물(現代人物)

이종락(李鐘洛)
봉화(奉化) 해저(海底)에서 출생(出生)하여 석포(石浦), 동양(桐陽), 봉성(鳳城), 초등학교장(初等學校長)을 역임(歷任)하였다.

이성호(李成鎬)
1913년생(年生)으로 소천분천(小川分川)에서 출생(出生)하여 한문수학(漢文受學)을 하여 춘양면장(春陽面長), 봉화향교(奉化鄕校) 전교(典敎), 새마을훈장(勳章)을 받았다.

이제돈(李濟敦)
1923년생(年生)으로 소천분천(小川分川)에서 출생(出生)하여 한문수학(漢文受學)을 하여 소천면장(小川面長)을 역임(歷任)하였다.

이제응(李濟膺)
1930년생(年生)으로 소천분천(小川分川)에서 출생(出生)하여 소천초등학교(小川初等學校)를 졸업(卒業)하고 소천(小川), 석포면장(石浦面長)을 역임(歷任)하였다.

이관우(李寬雨)
1931년생(年生)으로 소천현동(小川縣洞)에서 출생(出生)하여 삼척공업고등학교(三陟工業高等學校)를 졸업(卒業)하고 산림청(山林廳)남 부영림서(南部營林署) 현동출장소장(縣洞出張所長), 청백리(淸白吏)공무원상수상(公務員賞受賞), 황조근정훈장(黃條勤政勳章), 봉화군의원(奉化郡議員)을 역임(歷任)하였다.

이승우(李承雨)
1937년생(年生)으로 명호풍호(明湖豊湖)에서 출생(出生)하여 봉화농업고등학교(奉化農業高等學校)를 졸업(卒業)하고 농수산부(農水産部), 농수산물유통공사(農水産物流通公事) 이사(理事)을 역임(歷任)하였다.

이상봉(李相奉)
1956년생(年生)으로 춘양의양(春陽宜陽)에서 출생(出生)하여 경북대학교(慶北大學校), 대학원(大學院)를 졸업(卒業)하고 철학박사(哲學博士)를 받았다.

이상철(李相哲)
1959년생(年生)으로 봉화내성(奉化乃城)에서 출생(出生)하여 성균관대학교(成均館大學校), 대학원(大學院)를 졸업(卒業)하고 공학박사(工學博士), 한국안전기술공단부장(韓國安全技術工團部長)을 하고 있다.

이석현(李晳賢)
1963년생(年生)으로 봉화내성(奉化乃城)에서 출생(出生)하여 서울대학교(大學校) 공대(工大), 대학원(大學院)를 졸업(卒業)하고 공학박사(工學博士), 인하(仁荷), 고대(高大) 교수(敎授)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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