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과거 240

기봉공(騏峰公) 이시성(李時省)

기봉공(騏峰公) 이시성(李時省) 1598(선조31)~1668(현종9).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자삼(子三). 호는 기봉(騏峰). 현감공 태남(泰男)의 아들이다. 일찍이 글 읽기를 즐겨 백사/이항복에게 학문을 배워 사마양시에 급제하고 사옹원참봉이 되었으나 술 마시고 시(詩) 짓는 것을 좋아하여 틈나는 대로 벗들과 명승지를 찾아 다니며 시를 짖고 노래하며 보내다가 1650(효종1)년 52세 늦은 나이에 증광시문과병과에 급제하고 공.예조정랑을 거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지냈다. 다시 중시문과병과에 급제하고 회양부사 통례원통례를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다 1667(현종8)년 승정원가승지에 발탁되었으나 대간에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저서: 기봉집(騏峰集) 등 자료제공: 이범우 중앙화수회 자문위원..

예빈시정(禮賓寺正) 이정남(李井男)

예빈시정(禮賓寺正) 이정남(李井男) 1585(선조18)~1653(효종4).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문숙(文叔). 백사공 항복(恒福)의 차남이다. 1612(광해군4)년 사마양시에 급제하고 장원서별제 풍저창주부를 거쳐 사헌부감찰을지냈다. 1623(인조1)년 공.호조정랑 통천군수를 지내다 1629(인조7)년 익위사위솔(翊衛司衛率)를 거쳐 사복시첨정 강화부경력을 지냈다. 1632(인조10)년 한성서윤(漢城庶尹)을 지내고 외직으로 담양부사를 거쳐 선공감첨정 광흥창수 사도시정을 지내고 이어 성천부사를 거쳐 중추부경력 예빈시정에 이르렀다. 자료제공: 이범우 중앙화수회 자문위원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정남(李井男) 1585년(선조 18)~1653년(효종..

오흥군(鰲興君) 이성남(李星男)

오흥군(鰲興君) 이성남(李星男) 1578(선조11)~1642(인조20).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명숙(明叔). 백사공 항복(恒福)의 아들이다. 1607(선조40)년 사마시에 급제하고 인조반정 때 부여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다시 한산군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뜻에 안맞아 사임하였다. 이후 충훈부도사를 거쳐 광흥창수를 지냈다. 1627(인조5)년 중추부경력을 지내고 1635(인조13)년 사섬시부정(司贍寺副正)을 거쳐 내사복시(內司僕寺)에 전임되었으나 병환으로 사직하였다. 1636(인조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피난시키려고 대가(大駕)를 준비하였으나 어마(御馬)를 관리하던 관원들이 도망쳐 없어져 직접 말을 끌고와 남한산성으로 모셨다. 1637(인조15)년 종친부전첨(宗親府..

사유재공(四留齋公) 이정암(李廷馣)

사유재공(四留齋公) 이정암(李廷馣) 1541(중종36)~1600(선조33).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유재(四留齋). 오재공 탕(宕)의 차남이다. 1560(명종15)년 식년시문과병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정자에 발탁되었다. 1578(선조11)년 양주목사에 등용되어 조광조의 도봉서원을 증수하였고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1584(선조17)년 사헌부장령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을 지내다 1587(선조20)년 동래부사 대사간을 거쳐 우승지 이조참의를 지내고 1592(선조25)년 선조를 호종하여 개성에서 방어하였고 개성이 함락되자 황해도에서 의병을 모아 활약하였다. 황해도초토사가 되어 왜군 삼천여명을 격파하였다. 이어 황해도관찰사 병조참판(兵曹參判)을 거쳐 1596(선조29)년 정라도관찰사지내고 충청도관..

고양군수공(高陽郡守公) 이몽서(李夢犀)

고양군수공(高陽郡守公) 이몽서(李夢犀) 1508(중종3)~1569(선조2). 조선 중기 문신 자는 희서(希瑞). 판서공 인신(仁臣)의 넷째 아들이다. 1537(중종32)년 사마시에 급제하고 1540(중종35)년 황산도찰방을 지내다 1545(인종즉위)년 돈령부직장을 거쳐 1546(명종즉위)년 내자시주부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1547(명종2)년 장흥고주부 창령현감을 거쳐 1553(명종8)년 사헌부감찰에 재임되었다. 1554(명종9)년 성주목판관을 지내고 안동부판관 사온서주부를 거쳐 평시서령(平市署令)에 이르렀고, 1560(명종15)년 고양군수(高陽郡守)에 올랐다. 고양군은 서울이 가까워 권세있고 존귀한 사람과 임금의 친척과 외척이 많이 살고 있어 오래 견디기 어려운 지역이라는 평이 많았지만 공평으로 다스려 ..

사옹원정공(司饔院正公) 이몽윤(李夢尹)

사옹원정공(司饔院正公) 이몽윤(李夢尹) 생몰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응신(應莘). 찬성공 예신(禮臣)의 아들이다. 1528(중종23)년 식년시문과병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에 이르고 외직 평안도사 양근군수를 지내고 평산부사 장단부사를 거쳐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 춘추관편수관 지제교를 거쳐 사옹원정(司饔院正) 등을 역임하고 관직을 마감하였다. 명종조에 영상/윤원형을 멀리 하였기에 관직은 주로 외직 생활을 하였다. 부임하는 곳마다 청렴근면하고 공명정대하게 직무를 수행하여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 조정에서는 권세를 탐하여 영상 윤원형에게 아첨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는 천성이 맑고 곧아서 권세있는 사람에 의해 좌우되지 않았으며 자신의 순탄한 벼슬살이 보다 올바른 삶을 살고자 노력하였다. 자료제공: 이범..

표덕공(表德公) 이구(李球)

표덕공(表德公) 이구(李球) 1488(성종19)~1550(명종5).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창서(昌瑞). 호는 표덕(表德). 양평공 철견(鐵堅)의 손자이다. 1510(중종5)년 33세에 무과시에 급제하고 훈령원봉사로 등관하여 오위부장을 거쳐 세자익위우익찬(世子翊衛右翊贊)에 이르렀다. 이어 병마만호(兵馬萬戶)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 1534(중종29)년 호군을 지내고 1536(중종31)년 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에 올랐다. 당시 영상/윤원형이 방자하게 권리를 남용하고 국정을 어지럽히니 충신과 백성들이 몸 둘 곳을 잃었다. 자료제공: 이범우 중앙화수회 자문위원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세촌공(細村公) 이문좌(李文佐)

세촌공(細村公) 이문좌(李文佐) 1461(세조7)~1491(성종22). 조선 중기 문신 자는 현도(顯道). 호는 세촌(細村). 전서공 원선(元善)의 현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풍채가 늠름하고 덕행이 남달랐으며 문장에 능하였다. 1483(성종14)년 춘당식년시문과갑과에 장원급제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유에 기용되어 홍문관박사를 거쳐 성균관전적을 지내다 1484(성종15)년 이조정랑을 지내고 승문원교검을 거쳐 춘추관기주관겸편수관(春秋館記注官兼編修官)을 지냈다. 사헌부감찰로 물망에 올랐으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올 때 부사가 비리를 범하여 논박하여 바로 잡은 것이 화근이 되어 1488(성종19)년 권력자들의 간교에 빠진 의정에서 안협현감(安峽縣監)으로 좌천되었다. 그 곳은 토질이 기름지지 못하고 여러 해 ..

이조판서공(吏曹判書公) 이인신(李仁臣)

이조판서공(吏曹判書公) 이인신(李仁臣) 1457(세조3)~1518(중종13). 조선 중기 문신 판관공 성무(成茂)의 장남이며 명장 몽린(夢麟)의 아버지이다. 1484(성종15)년 등준시문과에 급제하고 1489(성종20)년 승문원정자에 발탁되어 1492(성종23)년 여러 요직을 거쳐 장악원주부에 이르렀다. 1504(연산군10)년 갑자사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오르고 1506(중종1)년 병인사화에 형조좌랑에 전임되었다. 1508(중종3)년 예조참의에 특승되었고 1510(중종5)년 공조참판(工曹參判)을 거쳐 1512(중종7)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이르다 관직을 사임하고 파주로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1518(중종13)년 향년62세로 별세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자료제공: 이범우 ..

이조판서공(吏曹判書公) 이숭수(李崇壽)

이조판서공(吏曹判書公) 이숭수(李崇壽) 1425(세종7)~1489(성종20). 조선 전기 문무신 초명은 옥견(玉堅). 자는 미수(眉叟). 참판공 연손(延孫)의 아들이다.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예빈부봉사 사헌부감찰를 지냈다. 죽산현감.양천현령을 거쳐 돈령부첨정을 지내다가 1470(성종1)년 예빈시판관을 지내면서 무과시급제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오위도총부도총관 절충장군에 올랐다. 이모부인 세조께서 높은 관직을 제수하려 하였으나 처가의 본관을 양주조씨에서 한양조씨로 바꿔서 사용한 사실이 밝혀질까 두려워 사양하였다. 1453(단종1)년 계유사화, 1456(세조2)년 병자사화에 걸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단종 복위운동을 한 신하들을 살해하고 절의파(節義派)를 참형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