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용재공◆이종준

삼구정(三龜亭)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2. 12. 11:00

삼구정(三龜亭)


한자: 三龜亭
분야: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76[지풍로 1975-1]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정진영

[상세정보]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에 있는 조선 중기 정자.

[개설]
삼구정은 안동김씨 소산마을 입향조인 김삼근(金三近)의 손자 김영전(金永銓, 1439~1522)이 지례현감으로 있던 1495년(연산군 1)에 지은 것이다. 당시 김영전은 88세의 노모 예천권씨를 즐겁게 하려는 효심에서 아우 김영추(金永錘), 김영수(金永銖)와 함께 삼구정을 건립하였다. 삼구정이란 정자 앞뜰에 거북이 모양의 돌이 세 개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거북이는 십장생 중의 하나이므로 모친이 거북이처럼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동안 몇 차례 중수한 것으로 보이며, 1947년에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현판은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이 썼다.

[위치]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동오(東吳)라 불리는 높이 2m 가량 되는 봉우리의 머리에 앉아 있다. 북쪽으로는 좀 거리를 두고 학가산이 둘렀고, 동서남 세 곳은 큰 들이라 조망이 시원하게 트여 있으며, 남쪽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곡강이 흐르고 있는 절경에 자리 잡았다.

[형태]
정자의 토석담 밖에는 노거수가 몇 그루 둘러서 있어 더욱 운치를 돋우고 있다. 서측 담에 둔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삼구정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앞 왼쪽으로 삼구석이 보인다. 비교적 큰 잡석으로 기단을 쌓았고,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나 2개소에는 탑의 옥개석이 사용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전부를 우물마루로 시설하였다.

기둥 위에는 앙서로 된 쇠서를 하나 내어 보머리를 받친 초익공으로 마무리하였다. 5량가로 모를 죽인 방형의 단면을 가진 대량을 전후 평주 위에 걸었고, 이 위에 화반과 첨차를 十자로 걸어 포대공을 짠 후 종량을 얹었으며, 그 위에 파련대공을 세웠는데, 고급스러운 기법을 사용하였다. 네 모서리의 추녀 밑에 활주를 세워 지지하였고 서편 사래 끝에는 용머리 장식 기와 1개가 끼워져 있다.

[현황]
삼구정은 1985년 12월 30일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3호로 지정되었다. 2009년 현재 김백년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비록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중수와 중건을 거치면서 구조부 결구 양식의 원형이 다소 훼손되었지만 다른 부분은 변함없이 유지되어 있어 조선 중기 정자 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안동문화재대관』 (안동시, 2007)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Contents?local=andong&dataType=01&contents_id=GC02400812


소산리 삼구정三龜亭


삼구정三龜亭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76[지풍로 1975-1]에 있는 정자.

소산마을 입구 야트막한 언덕에 세워진 삼구정은 동오東吳라 불리는 높이 2m 가량 되는 봉우리의 꼭대기에 앉아 있다. 북쪽으로는 좀 거리를 두고 학가산이 둘렀고, 동·서·남 세 곳은 큰 들이라 조망이 시원하게 트여 있으며, 남쪽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는 절경에 자리 잡았다.

안동김씨 소산마을 입향조인 김삼근金三近의 손자 김영전金永銓이 지례현감으로 있던 1495년(연산군 1)에 지은 것이다. 당시 김영전은 88세의 노모 예천권씨를 즐겁게 하려는 효심에서 아우 밀양부사 김영추金永錘, 영천군수 김영수金永銖와 함께 건립한 정자이다. 예천 권씨는 여름철이 되면 집에서 나와 이 언덕의 나무그늘에서 쉬기를 즐겨했다. 이를 본 아들들이 힘을 모은 것이다.

삼구정이란 정자 앞뜰에 거북이 모양의 돌이 세 개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정자 뜰에 3기의 고인돌이 있는 것이 마치 거북이 세 마리가 엎드린 것 같다고 해 삼구정이라 이름 붙였다. 거북이는 십장생 중의 하나이므로 모친이 거북이처럼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정자는 송림에 둘러싸여 운치가 뛰어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3호이다. 서측 흙돌담에 둔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동남향하여 본 건물이 있고, 그 앞 좌측으로 삼구석三龜石이 있다. 바닥은 우물마루로 깔고, 벽체 없이 개방하였다.

비교적 큰 잡석으로 기단을 쌓았고,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나 그 중 두 개는 탑의 옥개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원주를 사용하였고, 가구는 5량가로 대량을 전후 평주위에 걸었다.

옛 정자는 임진왜란 때 일부가 불에 타 1605년에 다시 중수했다고 한다. 그동안 몇 차례 중수한 후, 1947년에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조선 초기에 건립된 정자건축으로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세부구조양식이 다소 변형되었지만, 당시의 배치·평면구성·건물규모 등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정자건축이다.


현판 글씨는 『용재유고』를 쓴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1458년(추정) ~ 1499년 연산군 5)이 썼다.

그는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서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가는 도중에 단천군 마곡역을 지나다가 시 한 수를 써놓고 갔다. 송나라 이사중이 바른말 하다 귀양가는 당개를 송별하면서 지은 시였다. 이를 본 함경도관찰사 이승건이 이는 나라를 비방하고 왕을 농간한 것이라고 조정에 고하였다.

마침내 연산군이 그가 원망하는 뜻을 가졌다 하여 서울로 압송하여 국문하는 도중에 죽었다. 홍귀달이 그를 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석실산인은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652년)을 말한다. 그는 서울에서 출생했다. 장동김씨 파조인 김번의 증손자이다. 돈령부 도정 극효의 아들이며 우의정 상용의 동생이다.

병자호란때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김상헌은 호란이 끝나자 소산마을에 들어와 김번의 옛집을 누각으로 고치고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으로 청원루라 이름했다. 그때 마을 앞에 있는 삼구정에 올라 인근 경치를 돌아보며 8곳 아름다운 경관을 정하고 ‘삼구정팔경三龜亭八景’이라 불렀다.

김상헌의 ‘삼구정 팔경’을 받아 계곡谿谷 장유張維와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삼구정팔영三龜亭八詠’을 지었다. 이른바 ‘계택상월谿澤象月’ 중 2명의 대문장가가 답시를 쓴 것이다.

계택상월은 조선 중기 네 사람의 문장가를 말한다. 앞에서 말한 장유와 신흠에다가, 택당澤堂 이식李植과,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를 보탠 것을 말한다. 네 문장가의 호를 한 자씩 연결한 것이 계택상월이다.



장교관가(長郊觀稼)
너풀너풀 춤을 추는 천 이랑의 벼들이
논두렁에 즐비하게 비단결을 이루었네.
다만 바라노니 좋은 날씨 계속되어
이 즐거움을 영원히 누렸으면.

곡저타어(曲渚打魚)
곡강(曲江) 물가에다 어구를 펼쳐 두니
그물 친 곳엔 물이 어찌나 많은지.
참으로 우스워라 피라미 떼들은
낚싯줄을 입에 물고 꼬리를 흔들어대네.

삼복피서(三伏避暑)
인간세상 삼복이면
대지가 뜨겁기 불과도 같은데
이 정자만은 도대체 어찌하여
시원한 바람이 머리 위로 불어올까.

중추완월(仲秋翫月)
일 년 중의 중추절
중추 이날 밤 달이
마음속 깊은 곳을 깨끗이 맑게 하니
나는 달의 보금자리를 더듬네.
- 상촌 신흠의 시 ‘삼구정팔영’중 뒤의 4영

학교청봉(鶴嶠晴峯)
왕자는 어느 해에 궐 밖 유람 즐겼던가
복 받은 뜰 옛날 이름 천년토록 전해 오네.
맑은 하늘 부용 색깔 수려한 산봉우리
계수나무 부여잡는 시인의 가을이로다.

마애초벽(馬崖峭壁)
맑은 물굽이 짓누르며 우뚝 솟은 푸른 단애
천길 층층 쌓인 철벽 기어오를 수 없어라.
단풍잎과 들꽃은 색칠한 듯 붙어 있고
물결에 일렁이는 서늘한 그림자 기막히네.

현리연화(縣里煙花)
강물 가에 누워 있는 풍산 옛 고을
난리 뒤 누대도 절로 새로워졌구나.
해마다 흐드러진 꽃 올해도 활짝 피었나니
그 풍광 영락없이 무릉도원 봄빛일세.

역동한송(驛洞寒松)
일백 살 소나무 숲의 새로운 모습
안팎으로 비취색 고르게 깔린 언덕.
그 시절엔 사슴뿔도 거의 막아냈으련만
지금은 모두 변해 늙은 용의 비늘 같네.
- 계곡 장유의 시 ‘삼구정팔영’ 중 앞의 4영
그러나 앞 부분은 사진에 담지 못했다.



상사 김세경 씨가 자신의 마을 풍산현 삼구정의 모습으로써 나에게 기문을 부탁 하였다. 내가 살펴보니 풍산은 안동부의 속현이다. 서쪽 5리 쯤에 마을이 있는데 금산촌이라 하고, 그 동쪽 20보 쯤에 봉우리가 있어 동오라고 한다. 높이가 겨우 예닐곱 길 밖에 안 되는데, 정자는 봉우리의 꼭대기에 걸터앉았다. 동· 서· 남쪽이 다 큰 평야로 형세가 확 트여서 바라봄에 끝이 없다.

정자 남쪽에는 큰 하천이 있어 곡강이라 부르는데 곧 낙동강이다. 깊은 소가 하나 있는데 마라담이라 하고, 소 위에는 절벽이 힘차게 높이 솟았다. 가히 만 길이나 된다. 강 위에는 긴 수풀이 잇따라 십리가 넘는다. 정자 북쪽에 또 산이 있으니 학가라 한다. 두 시내가 이 산에서 나와 낙동강으로 들어가는데, 물이 모이는 곳은 병담이 되며 혹은 화천이라고 부른다.

그 위에 또 석벽이 있어 천여 길이나 되며, 병벽이라고 한다. 두 시내의 북쪽에 기묘한 바위가 있어 주암이라고 한다. 시내 양쪽 가에는 밤나무 천여 그루가 있어 층층이 푸르름이 어지럽게 퍼진다. 정자 아래에는 벼논과 보리밭이 있어 봄이면 푸른 싹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누런 구름 같은 벼가 물결친다. 진실로 기이하게 경치 좋은 곳이다.

화산은 김씨의 본관이 된다. 김씨는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큰 벌족이다. 그의 외할아버지 권상국 제평공은 조정에서 높은 이름이 있었는데, 권씨는 곧 그의 따님으로 나이 88이다. 그 분의 아들 영전· 영추· 영수 등이 다 가까운 고을의 수령이 되어서 봉향하기를 지극히 하였다.

또 이 정자를 지어서 아침저녁으로 놀고 쉬는 곳으로 하였다. 정자의 터에 돌이 세개가 있는데, 형상이 마치 엎드린 거북 같아서 그대로 삼구라고 이름 지었다. 늘 좋은 때와 길한 날을 당하면 어미니의 가마를 부축하여 정자에 올라가니, 노래자 같은 채색 옷이 앞뒤에 찬란히 비치고 귀여운 손자들이 뜰에 가득하였다. 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서 모시면 어미니는 엿을 머금고 기뻐하신다. 그 즐거움을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대저 세상사람들은 거처는 있으나 경치는 얻지 못하였고, 경치는 얻었으나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데, 지금 같은 경우는 땅은 그 경치를 얻었으며, 사람은 그 어짊을 얻었고, 어버이는 그 수壽를 얻었으니 아름다움이 다 갖추어졌다. 어찌 착함을 쌓고 경사스러움을 기른 소치가 아니겠는가?

무릇 짐승으로 장수하는 것은 거북만한 것이 없고, 물건 중에 굳기로는 돌만한 것이 없다. 사람의 자식된 자라면 어버이께서 장수하기를 거북처럼 오래 하고, 돌처럼 강건하기를 바라는 것이 누구나 원하는 바이다. 지금부터 증손· 현손에 이르기까지, 또 거기서 잉손·운손등 먼 후손에 이르기까지, 그들로 하여금 각각 그 어버이 섬기기를 오늘날 하는 것처럼 하게 하여 세세토록 바꾸지 않는다면, 고을은 장수하는 고을되고 사람은 장수하는 백성되어 마땅히 아름다운 이름을 역사에 남길 것이다.

나같은 사람은 비록 고향이 있었으나 조그마한 곳이요, 명리의 굴레에 매여 물러날 수 없으며 또한 신령스런 뿌리가 이미 멀어져 부모 모두 상사가 있었다. 비록 오정의 영화를 가져, 자로와 같이 쌀을 지고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하여도 끝내 할 수가 없으니, 더욱 김씨의 여러 어진 이들이 능히 그 어버이를 봉양하고 즐겁게 해 드림을 아름답게 여긴다. 허백당 성현成俔 쓰다.

성현(1439 세종 21 ~ 1504)은 연산군 시절 대제학을 지냈다.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
를 당했다. 주요 저서로는 『악학궤범』,『허백당집』,『용재총화』등이 있다.

성현은 지중추부사를 지낸 성념조와 순흥 안씨 사이에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안유의 손녀이며, 그의 처가는 한산 이씨로 목은 이색의 현손녀이다. 성현이 태어난 곳은 확실하지 않으나 현재의 아현동 약현성당 근처 약전에서 주로 살았다. 12세에 부친을 잃고 18세 차이가 나는 큰형 성임을 아버지처럼 모시고 살았다. 성현은 김수온에게서는 음악을, 강희맹에게서는 그림을, 서거정에게서는 문장을 배웠다.



김기보는 정자를 지은 김영수의 증손자.





류중영柳仲郢(1515년 중종 10 ~ 1573년 선조 6)은 영의정 류성룡의 아버지다. 황해도 관찰사와 예조참의를 지냈다.



삼구정 중수기 김신근




​김상용金尙容1561(명종 16)∼1637(인조 15)

김번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김생해이고,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김극효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의 딸이다. 좌의정 김상헌의 형이다.

동생 김상헌의 삼구정 8경을 차운하여 지은 시.


*[출처] 소산리 삼구정三龜亭|작성자 자부
http://kwongunho.blog.me/221159230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