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용재공◆이종준

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2. 11. 16:12

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1454년(단종端宗 2, 갑술甲戌) 추정∼1499(연산군燕山君 5, 기미己未).
○字는 중균(仲均)이요, 號는 용재(慵齋). ○성종(成宗) 정유(丁酉)에 진사(進士)하고 성종(成宗) 을사(乙巳)에 문과갑과(文科甲科) 이등(二等)으로 급제. 교리검상(敎理檢詳)에서 사인(舍人)으로 특진(特進)하고 어세겸추록(魚世謙推麓)으로 호당(湖堂)에 올라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후은(厚恩)을 입고 수선(修選)에 올라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中國) 북경(北京)에 가서 시(詩)와 서화(書畫)로 화도(華都) 진경(震驚)케 하니 후(後)에 우리나라에 오는 중국사신(中國使臣)은 선생(先生)의 시(詩)를 암송(暗誦)하며 극찬(克讚). ○외직(外職)으로 의성현령시(義城縣令時)에 국옥(鞠獄)의 명단(明斷)과 교관(校官)이 건이며 경상도지도(慶尙道地圖) 제작 또는 향자제(鄕子第)를 가르치는 등(等)의 선정(善政)을 있지 못하는 백성들이 불망비(不忘碑)를 세우고 칭송(稱頌)하였다.
○일찍이 점필재(佔畢齋) 김선생(金先生) 문하(門下)에 들어가 김한훤(金寒暄), 정일두(鄭一蠹), 김탁영(金濯纓), 권수헌(權垂軒), 박우졸(朴迂拙), 재제현(齋題賢)과 도의로 사귀다가 연산(燕山) 무오(戊午)에 구현(九賢)의 수현(首賢)으로 화(禍)를 입어 국살(鞫殺)당하였다. 중종(中宗) 병인(丙寅)에 소설복관(昭雪復官)하고 숙종조(肅宗朝)에 증홍문관부제학(贈弘文館副提學)에 은전이 내리고 경광서원(鏡光書院), 백록리사(栢麓理社), 주강정사(周岡精舍)에 입향(入享). ○문집(文集)이 반질 세전(世傳).

○配는 영가권씨(永嘉權氏) 작(綽)의 女. ○墓는 금계(琴溪) 사망동(沙芒洞), 지금의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상하분(上下墳). ○묘지명(墓誌銘)은 사제(舍第) 홍준(弘準)이 짓고, 묘갈명(墓碣銘)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지었으며 묘표음기(墓表陰記)는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가 짓고, 가장(家狀)은 임여재(臨汝齋) 유규(柳氵+奎)가 지음. 유허비문(遺墟碑文)은 흥해(興海) 배동환(裵東煥)이 지음.

*출처: 1987년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



한자: 李宗準
이칭/별칭: 중균(仲勻),용재(慵齋),용헌(慵軒),부휴자(浮休子),상우당(尙友堂),태정일씨(太庭逸氏),장륙거사(藏六居士)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배종석

[상세정보]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균(仲勻), 호는 용재(慵齋)·용헌(慵軒)·부휴자(浮休子)·상우당(尙友堂)·태정일씨(太庭逸氏)·장육거사(藏六居士). 할아버지는 대사헌 이승직(李繩直), 아버지는 진사 이시민(李詩敏),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권계경(權啓經)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종준은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5세에 글을 익혀 7세에 글의 뜻을 통했다. 10세 때 아버지에게 “경서는 모두 성현이 전해 준 문자이고 때론 그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다. 『주역(周易)』은 문왕(文王), 주공(周公), 공자(孔子) 세 성인이 직접 쓴 책이니 이야말로 진정한 성인의 책이다. 학자(學者)는 『주역』을 가장 중시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높이 평가하였다. 13세에 문장을 이루었는데 청수(淸秀)한 풍채에 도량이 쇄락(灑落)하여 신선이 하강한 듯했다고 한다.

일찍이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에게 사사했는데 김종직이 “중균을 보면 가슴이 시원하게 트인다.”라고 했을 만큼 맑고 빼어난 풍채에 성품이 단아하였다. 김종직 문하에서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 우재(迂齋) 박한주(朴漢柱),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등과 가까이 사귀며 도의로 상호 격려하였다.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초급 관직을 거쳐 1487년 이조좌랑으로 일본 사신 호송관에 차출되었는데 호송관으로 동래에 이르렀을 때 왜사가 선생의 서화를 얻고 보물을 얻었다고 기뻐하였다. 그 뒤 홍문관교리를 지내고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하였다. 사간원정언 재임 중 외척이 권세를 잡을 조짐을 간하여 강직하기로 조정에 알려졌다. 1494년 의성군수로 제수되어 부임 초에 교궁(校宮)의 퇴폐함을 보고 녹봉을 털어 이건한 뒤 유망자를 모아 송시습례(誦詩習禮)를 하게 하였다.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부관참시와 무오오현(戊午五賢)의 치죄를 반대하고 류자광(柳子光)을 극형토록 상주하였다가 오히려 죄를 받았다. 모진 고문에도 신색이 불변하며 말없이 땅바닥에 크게 ‘일(一)’자를 그어 표현하였다. 태장(笞杖) 80에 부령(富寧) 봉수노우역(烽燧爐于驛)으로 귀양 가던 도중 단천(端川) 마곡역에 이르러 이사중(李師中)의 시를 써서 붙였는데 그 시가 연산군을 원망하는 뜻을 품었다 하여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이듬해 장살당하였다. 이종준은 시와 서화에 능하였으며 의약, 복서(卜筮),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용재유고(慵齋遺稿)』가 있다. 그림으로 「송학도(松鶴圖)」가 있으며 의성 현령(義城縣令) 재임시 경상도 좌도의 지도 초본을 제작한 바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있었다.

[상훈과 추모]
이홍준(李弘準)이 가장(家狀)을, 이현일(李玄逸)이 묘갈명을, 홍여하(洪汝河)가 묘표음기(墓表陰記)를, 배동환(裵東煥)이 유허비명(遺墟碑銘)을 지었다. 1506년(중종 1)에 신원되고 복관되었으며 숙종조에 홍문관부제학에 추증되었다. 경광서원(鏡光書院)과 백록리사(栢鹿里社)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갈암집(葛庵集)』
송지향, 『안동향토지』(대성문화사, 1983)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http://www.ugyo.net)


*출처: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

 

 


용재 이종준

성명 : 이종준(李宗準) 1499년
본관 : 경주(慶州)
자 : 중균(仲均)
호 : 용재(慵齋)
출생지 : 안동(安東) 금계(金溪)
출신지 : 안동(安東)
분묘지 : 안동(安東) 금계(金溪)
입사경로 : 1477년(성종 8) 진사시(進士試) 합격, 1486년(성종 17) 별시(別試) 갑과 급제
내관직 :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외관직 : 북평사(北評事), 의성현령(義城縣令)
증직및기타 :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타고난 침착성
그는 어려서부터 말을 빨리 하거나 안색이 갑자기 변하는 일이 없을 정도로 늘 침착한 태도를 취하였다. 다음의 일화는 그의 침착함을 잘 보여준다.

당시에 유자광, 이극돈 등이 권세를 부리면서 사화를 일으켰다. 이종준 역시 사화에 연루될 상황이었는데도 그는 태연자약하였다. 그리고 이주와 함께 바둑을 두고 있는데, 붉은 옷을 입은 이들이 동네 어귀로 들어서고 있다고 다급하게 전하는 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종준은 “아직 나를 잡아들이라는 명을 듣지 못했다.”면서 여유롭게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빼어난 풍모
아울러 그는 빼어난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탁월한 풍모에 대해 그의 스승인 김종직은 “이종준은 속된 기운이 없이 청수한 풍모를 지녔다.”고 평하였다.

장육거사라는 호가 생긴 유래
신포(申誧)는 시화와 술을 즐겼는데, 스스로 장육이라고 호를 하였다. 이종준이 그 호를 좋아하여 술 한 병과 호를 바꿀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리하여 이종준에게 장육거사라는 호가 생겼다.

탁월한 강직함
강직함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가 정언(正言)이었을 때, 왕의 장인인 신수근(愼守勤)이 청현직에 오르자 외척이 권력을 갖게 될 조짐이라 하여 강력히 반대하였다. 아울러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모진 국문을 받았음에도 안색하나 흐트러지지 않으면서 아무말 없이 한일자를 땅바닥에 그었다. 그의 이런 성격에 감동 받았던지, 그가 부리던 종 중에서 글을 읽을 줄 알았던 귀성(貴成)이란 자도 함께 국문을 받으면서 아무말 없이 한일자를 그었다고 한다.

시선(詩仙) 이종준
이종준은 탁월한 문재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빼어난 문재는 권경유(權景裕)와의 첫 대면에서 잘 나타난다. 남효온과 이종준이 달밤에 꽃구경을 하다가 권경우의 집 근처에 이르렀다. 남효온이 권경우에게 “회현방 살구 꽃 아래 이인(異人)이 시를 읊고 있기에 불러 함께 왔다. 그의 말과 시는 세속에 얽매어 있지 않으니 필시 신선인가 보다.”라고 하였다.

권경우는 신을 거꾸로 신고 나와서 이종준을 맞아 함께 달빛 아래 앉았다. 종준이 시를 지으니 시가 매우 격이 높고 고고하자 권경우가 탄복하고 무릎을 꿇으면서 “누추한 곳에 뜻밖의 수재(秀才)가 방문하니 이는 천행(天幸)이다.”라고 하고, 시와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날이 밝자 그가 바로 이종준임을 알고 손바닥을 치며 웃으면서 평생지기가 되었다고 한다. 무풍 부정은 그를 “우리나라의 시선(詩仙)이다.”라고 하였다.

무오사화에 연루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서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가는 도중에 단천군 마곡역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곳에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말 하다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하면서 지은 시 한 수를 써놓고 갔는데, 함경도관찰사 이승건(李承健)이 이는 나라를 비방하고 왕을 기롱(譏弄:헐뜯고 농간함)한 것이라고 조정에 고하였다.

마침내 연산군은 그가 원망하는 뜻을 가졌다 하여 서울로 압송, 국문 도중 죽었다. 홍귀달(洪貴達)이 그를 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가족이야기

조 : 이승직(李繩直)
생부 : 이시민(李時敏)
모 : 안동권씨(安東權氏) 권계경(權啓經)의 딸
형제 : 이홍준(李弘準)


수양(首陽)과 그의 집안
이종준 집안이 안동에 내려오게 된 계기는 수양대군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즉 이종준의 큰아버지인 이명민(李命敏)이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연루되어 수양대군(首陽大君) 일파에게 세 아들과 함께 살해되자 당시 진사였던 이시민은 벼슬을 포기하고 낙향했던 것이다.

이종준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모진 국문을 받은 끝에 죽었다. 그런데 그는 죽음에 임해서도 안색이 태연했으며, 소리를 가다듬어 “수양산이 먼데 내 묻힐 곳이 어디랴.”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죽으면서 이종준은 수양대군과의 질긴 악연을 떠올렸던 것일까?

집 앞에 은행나무를 심다
이종준의 부친인 이시민이 대청 앞에 은행나무를 심고 말하기를, “살구나무는 공자가 강학(講學)하던 나무이다. 훗날 군자가 이 나무 아래에서 강학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종준이, “우리나라에도 성인이 있습니까?”하고 묻자, 이시민이, “성인의 도를 행하면 성인인 것이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기자의 유풍이 지금도 전하고 있는데 어찌 현인, 군자가 없겠느냐.” 하였다.

사지로 가는 아들을 태연히 보낸 어머니
이종준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잡혀 가게 되자, 노모를 한 번 뵙게 해달라고 금부도사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종준이 어머니에게 인사하자, 그의 어머니는 중국 한나라 때 범방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그에게 의롭게 죽으라고 말하였다. 즉 범방은 환관의 횡포에 저항하다 잡혀 가게 되자,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당대의 명사와 함께 죽는 것이 영광이고, 이미 의롭다는 명예를 얻었으니 구차하게 살려고 하지 말라.”고 하면서 태연히 아들을 보냈었다. 이종준의 어머니도 “네가 죽어도 나는 슬퍼하지 않으련다. 너는 가서 의롭게 죽고, 나를 염려하지 말아라.” 하면서 태연히 보냈다.


학문이야기

스승 : 김종직(金宗直)
향사 : 경광서원(鏡光書院), 백록리사(栢鹿里社)
학파 : 퇴계 학파

교유인물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남효온(南孝溫), 권오복(權五福), 박한주(朴漢柱) 등

주역을 높이 평가
이종준이 10세 때 부친에게 말하기를, “경서는 모두 성현이 전해 준 문자이고 때론 그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다. 주역은 문왕과 주공, 공자, 세 성인이 직접 쓴 책이니, 이야말로 진정한 성인의 책이다. 학자는 주역을 가장 중시해야 한다.”고 하였다.

학문이 즐겁다
이종준에 대한 부친의 기대는 매우 컸다. 대대로 서울에서 벼슬하던 그의 집안이 이종준의 부친 대에 와서 몰락하자 이종준이 다시 벼슬길에 올라 집안을 일으켜 주길 바랐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형과 동생, 모두 학문에 뜻과 재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종준에게는 주색을 멀리하고 행동을 조심할 뿐 아니라, 부랑아들과의 교제도 하지 않도록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이종준 역시 부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부친상을 당한 이후 어머니의 명으로 산에 들어가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같이 입산했던 배연(裵裀)은 가끔 책을 덮고 쉬기도 하는데 그는 쉼없이 공부만 하였다. 몇 달이 지나도 여전하자 배연이 그의 체력에 감탄하였다. 그러자 그가 말하기를, “지극한 즐거움이 여기에 있는데, 피곤할 일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였다.

폭넓은 학문
그의 학문은 성리학에 국한되지 않았다. 시는 이미 신선의 경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았고, 서화 역시 일가를 이루었다. 이외에 의약, 복서(卜筮),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다.


저작이야기

공동저작
「경상도지도」

문집명
『용재집(慵齋集)』

작품
「송학도(松鶴圖)」

중국·일본을 감명시킨 서화(書畵)
이종준은 서화에 능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없고, 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송학도」가 그의 작품으로 전하고 있다. 그의 서화는 당대에도 유명하였다.

그가 일본 사신의 호송사에 임명되어 동래에 가자 일본 사신이 그의 서화를 원하였다. 그가 청을 받아들여 서화를 그려 주자, 일본 사신은 “비로소 천하의 중보(重寶)를 얻었다.”고 기뻐하였다.

또 서장관으로 중국에 갈 때 중국의 어느 역관에 있는 그림 병풍을 보고 붓과 병풍을 모두 뭉개버렸다. 그림이 변변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돌아오는 길에 중국 역관이 소병(素屛) 2개를 마련하여 글과 그림을 원하자, 한 폭에는 글씨를 한폭에는 그림을 그려주었는데 보는 이마다 그 솜씨의 절묘함에 모두 탄성을 질렀다.

*출처: http://blog.daum.net/kil093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