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一)/월성군◇이지수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월성군(月城君) 제단비명(祭壇碑銘) 병서(并序)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2. 10. 15:22

金紫光祿大夫 月城君 祭壇碑銘 并序 二十一世
(금자광록대부 월성군 제단비명 병서 21세)


-宗裔 鍾醇 撰(종예 종순 찬)

勝朝之末(승조지말)에 有以盛德弘猷(유이성덕홍유)요 身致大官(신치대관)하고 食采郡邑(식채군읍)하야 輝煌當時(휘황당시)하며 芬芳百世(분방백세)하야 後孫(후손)이 熾昌(치창)하야 蔚爲我李氏大派之祖者(울위아이씨대파지조자)는 乃金紫光祿大夫三重大匡尙書左僕射月城君乎(내금자광록대부삼중대광상서좌복사월성군호)인저

公(공)의 諱(휘)는 之秀(지수)나 慶州之李(경주지이)는 皆以羅代六部村長諱謁平(개이라대육부촌장휘알평)으로 爲鼻祖(위비조)하야 世仍貴顯(세잉귀현)하다

中世祖諱居明(중세조휘거명)은 官(관)이 蘇判(소판)이요 生諱金現(생휘금현)하니 兵部令(병부령)이요 生諱金書(생휘금서)하니 始仕麗朝(시사려조)하고 娶新羅敬順王女(취신라경순왕녀)하야 爲配(위배)하다

傳之屢世(전지누세)하야 諱申佑(휘신우)는 兵部侍郎(병부시랑)이요 又傳八世(우전팔세)하야 兵部尙書諱忠堯(병부상서휘충요)는 即公(즉공)의 고야(考也)라 妣(비)는 原州李氏(원주이씨)니 貞茂(정무)의 女(여)라

公(공)이 有二子(유이자)하니 長(장)은 揆(규)니 忠惠王朝(충혜왕조)에 官至四宰(관지사재)하고 諡(시)는 貞烈(정렬)이요 次(차)는 縉(진)이니 宰臣(재진)이라

揆(규)는 生元林(생원림)하니 判司僕寺事(판사복사사)요 縉(진)은 生乙休允聃(생을휴윤담)하니 司議署令(사의서령)이라

元林(원림)의 子(자)는 蔓實(만실)이니 太宗朝(태종조)에 登文科(등문과)하야 吏曹判書(이조판서)요 延實(연실)은 縣監(현감)이니 自此(자차)로 籫纓奕閥(찬영혁벌)과 學問節義(학문절의)-繼世不絶(계세불절)하니 特學其顯要而記之(특학기현요이기지)하면 蔓實之長子從直(만실지장자종직)은 贈判書封鷄川君(증판서봉계천군)이요 二子良直(이자양직)은 文科司諫院(문과사간원)으로 至禮判(지예판)하고 三子繩直(삼자승직)은 文科慶尙道觀察使(문과경상도관찰사)로 至大司憲(지대사헌)하여 以淸白(이청백)으로 見重於世(견중어세)하다

從直(종직)이 有二子(유이자)하니 吉祥(길상)은 爲縣監(위현감)하야 以善政(이선정)으로 聞(문)하고 陽生(양생)은 世祖朝(세조조)에 以敵愾功(이적개공)으로 封鷄城君(봉계성군)하고 吉祥之五世孫(길상지오세손)은 弘震(홍진)이니 光海時(광해시)에 隱于三角山中(은우삼각산중)하야 不出一步地(불출일보지)하고 仁祖改玉(인조개옥)에 以潛底舊諠(이잠저구훤)로 累徵不起(누징불기)하야 因有處士稱(인유처사칭)하다 陽生(양생)의 子(자)는 泰岳(태악)이니 戶曹判書(호조판서)로 封鷄善君(봉계선군)하고 鷄善君(계선군)의 子(자) 橚(숙)은 正憲大夫知中樞鷄興君(정헌대부지중추계흥군)이요

良直(양직)의 子(자)는 思剛(사강)이니 文科大司成(문과대사성)이요 錄扈駕功(녹호가공)하고 其弟臻剛(기제진강)은 府使(부사)라

思剛(사강)이 有二子(유이자)하니 季孫(계손)은 文科執義(문과집의)니 見(견) 端宗遜位(단종손위)하고 與弟末孫(여제말손)으로 聯棣落南(연체락남)하야 一則庄點于湖西之禮山花山下(일칙장점우호서지례산화산하)하고 二則湖南之南原(이칙호남지남원)하야 作詩以誓之(작시이서지)하고 不復仕進(불복사진)하다

季孫之六世孫檍(계손지육세손억)이 南漢之役(남한지역)에 白衣從軍(백의종군)하야 力戰死之(역전사지)하나 肅宗壬午(숙종임오)에 命旌閭(명정려)하다

繩直(승직)은 五子(오자)니 不敏(불민)은 判官(판관)이요 命敏(명민)은 贈戶曹參判(증호조참판)이요 諡(시)는 忠愍公(충민공)이니 莊陵朝(장릉조)에 配食士壇(배식사단)하고 勿敏(물민)은 主簿(주부)요 靡敏(미민)이요 時敏(시민)은 號琴湖(호금호)니 才華絶異(재화절이)하야 世稱神童(세칭신동)하고 慷慨有氣節(강개유기절)이러니 自(자) 光陵之受命(광릉지수명)으로 南下永嘉之琴溪村(남하영가지금계촌)하니 金梅月堂(김매월당)이 題琴湖高士(제금호고사)하고

琴湖(금호)-有四子(유사자)하니 崇準(숭준)은 忠順衛(충순위)요 宗準(종준)은 號慵齋(호용재)니 選入湖堂(선입호당)하고 學問(학문)이 鳴世(명세)러니 以金佔畢齋門人(이김점필재문인)으로 被成年禍(피성년화)하고

次(차)는 弘準(홍준)이니 號訥齋(호눌재)요 成均進士(성균진사)니 亦有學行(역유학행)하고 自撰誌文(자찬지문)하야 爲世絶贊(위세절찬)하여 兄弟(형제)-共享栢麓祠(공향백록사)하니 世稱雙珠(세칭쌍주)러라

公準(공준)은 訓導(훈도)이니 鳴呼(명호)라

公(공)이 以勝朝藎臣(이승조신신)으로 職在一品(직재일품)하고 榮名(영명)이 滿朝野(만조야)하여 及至孫曾(급지손증)하야

乃公乃卿(내공내경)이 指不勝屈(지불승굴)하니 宣乎國史家牃之可與天壤(선호국사가첩지가여천양)으로 傳之無弊而一自麗革(전지무폐이일자려혁)으로 文獻之蕩佚者(문헌지탕일자)-十居八九(십거팔구)하니 可勝言哉(가승언재)아 雖然(수연)이나 閱世累百(열세누백)에 雲仍之布濩八域者(운잉지포호팔역자)-其數不億(기수불억)하니 德厚流光(덕후류광)에 此可以㮣公矣(차가이개공의)라

事蹟之不傳(사적지불전)이 於公(어공)에 文何加損焉(문하가손언)이리요

諸後孫(제후손)이 以其追遠報本之無所展誠(이기추원보본지무소전성)으로 爲恨(위한)하야 亟圖設壇而享之(극도설단이향지)하고 請其牲石之銘於不侫曰今世(청기생석지명어불녕왈금세)에 苦無秉筆(고무병필)하니 自爲同宗則幸無恝也(자위동종칙행무괄야)하라 窃念公之世(절념공지세)-玄遠(현원)하야

並與其生卒及配(병여기생졸급배)-俱無所據(구무소거)하니 難乎其爲銘矣(난호기위명의)라 然(연)이나 公之位(공지위)-非不顯矣(비불현의)며 公之時(공지시)-非不陵矣則立朝行治(비불릉의칙립조행치)-必有彬彬可觀(필유빈빈가관)이나 而其於杞宋(이기어기송)에 何哉(하재)아 壇在於後孫楸鄕(단재어후손추향) 安東郡琴溪面仕望里(안동군금계면사망리) 坐之原(좌지원)하고 來請其銘者(내청기명자)는 成鎬在英龍濬(성호재영용준)이요 始終幹事者(시종간사자)는 寅燮東鎬台永甫也(인섭동호태영보야)라

系以銘曰(계이명왈)

猗月城君(의월성군)은 勝國藎臣(승국신신)이라 立朝事君(입조사군)하니 文質(문질)이 彬彬(빈빈)이라

位至一品(위지일품)하고 德孚萬人(덕부만인)이라 食采封君(식채봉군)하니 禮遇並臻(예우병진)이라 德流後昆(덕류후곤)하니 無竆千春(무궁천춘)이라

源深派長(원심파장)하니 文武縉神(문무진신)이라 世垂玄遠(세수현원)하니 文獻(문헌)이 無因(무인)이라 生卒墓域(생졸묘역)이 一何沒湮(일하몰인)고 雲孫不億(운손불억)에 感慕益新(감모익신)이라

築壇享之(축단향지)하니 周爰咨詢(주원자순)이라 置田置齋(치전치재)하니 齋宿明禋(재숙명인)이라 我述銘辭(아술명사)하야 刻之貞珉(각지정민)하노라

丙寅 十一月 上潮(병인 11월 상조)


*출처: 1987년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


금자광록대부 월성군 제단비명 병서 역문
(金紫光祿大夫 月城君 祭壇碑銘 并序 譯文)


-종예 종순(宗裔 鍾醇) 지음

고려(高麗)의 말기에 이르러 성대한 덕과 훌륭한 도량으로 큰 벼슬에 오르고 군읍(郡邑)에 봉군되어 당시에 빛이 나고 백세(百世)까지 방명(芳名)을 남기었으며, 그 후손도 번창하여 우리 이씨 대파(李氏 大派)의 조상이 된 분이 있으니, 금자광록대부 삼중대광 상서좌복사 월성군(金紫光祿大夫 三重大匡 尙書左僕射 月城君)이다.

공(公)의 휘는 지수(之秀)이니 경주이씨(慶州李氏)는 모두 신라(新羅)때에 육부촌장(六部村長) 휘 알평(謁平)으로 시조를 삼아 대대로 귀하게 되고 현달하였다.

중세조(中世祖)의 휘는 거명(居明)이요 벼슬은 소판(蘇判)이다. 휘 금현(金現)을 낳으니 병부령(兵部令)이요, 휘는 금서(金書)를 낳으니 비로소 고려(高麗)조정에 벼슬하고 신라 경순왕(新羅 敬順王)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배위를 삼았다.

여러 대를 내려와 휘 신우(申佑)는 병부시랑(兵部侍郞)이요, 8세(八世)를 내려와 병부상서(兵部尙書) 휘 충요(忠堯)는 공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원주이씨(原州李氏) 정무(貞茂)의 따님이다.

공이 2자(二子)를 두었으니 맏이 규(揆)는 충혜왕(忠惠王) 조정에서 벼슬이 사재(四宰)에 이르고 시호는 정렬(貞烈)이요, 다음 진(縉)은 재신(宰臣)이다.

규(揆)는 원림(元林)을 낳았으니 사복시판사(司僕寺判事)요 진(縉)은 윤담(允聃)을 낳았으니, 사의서령(司議署令)이다.

원림(元林)의 아들 만실(蔓實)은 태종조(太宗朝)에 문과(文科)로 이조판서(吏曹判書)이고, 연실(延實)은 현감(縣監)이다. 이때부터 혁혁한 문벌과 학문 절의가 대대로 계승하여 끊기지 않았으니 특별히 그 현달한 자를 들어서 기록하자면 만실(蔓實)의 맏자제 종직(從直)은 증직이 판서(判書)로 계천군(鷄川君)을 봉하고 둘째자제 양직(良直)은 문과(文科)로 사간원(司諫院)을 지나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고 셋째 자제 승직(繩直)은 문과(文科)로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 대사헌(大司憲)에 이르고 청백(淸白)으로 세상에서 추중을 받았다.

종직(從直)은 2자(二子)를 두었는데 길상(吉祥)은 현감(縣監)이 되어 선정(善政)으로 알려졌고 양생(陽生)은 세조조(世祖朝)에서 적개(敵愾:역적을 무리침)의 공로로 계성군(鷄城君)을 봉하고 길상(吉祥)의 5세손(五世孫) 홍진(弘震)은 광해(光海)때를 당하여 삼각산중(三角山中)에 은거하여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는데 인조(仁祖)가 반정하매 잠저(潛底:임금이 되기전)의 옛 정의로 여러번 불렀으나, 일어나지 않으므로 처사(處士)의 칭호를 받았고 양생(陽生)의 자제 태악(泰岳)은 호조판서(戶曹判西)로 계선군(鷄善君)을 봉했으며, 계선군(鷄善君)의 자제 숙(橚)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知中樞) 계흥군(鷄興君)이다.

양직(陽直)의 자제 사강(思剛)은 문과로 대사성(大司成)인데, 호가(扈駕:왕을 모시고 도망감)한 공로에 책록 되었고, 그 아우진강(臻剛)은 부사(府使)이다.

사강(思剛)이 2자(二子)를 두었는데 계손(季孫)은 문과 집의(執義)인데 단종(端宗)이 왕위(王位)에 쫓겨남을 보고 아우 말손(末孫)으로 더불어 같이 낙남(落南)했는데 형은 호서(湖西) 예산(禮山)의 화산(花山)아래에 터를 잡고 아우는 호남(湖南) 남원(南原)에 정착하여 시(詩)를 지어 맹세하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계손(季孫)의 6세손(六世孫) 억(檍)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전쟁에 백의(白衣:벼슬하지 않은 선비)로 군사를 따라 힘껏 싸우다가 죽었으므로 숙종(肅宗) 임오(壬午:1642)년에 정문(旌門)을 명했다.

승직(繩直)은 5자(五子)를 두었으니 불민(不敏)은 판관(判官)이요, 명민(命敏)은 증직이 호조참판(戶曹參判)이며, 시호는 충민공(忠敏公)으로 장릉(莊陵:단종端宗의 릉陵)조(朝)에 사단(士壇)에 배향 되었고 물민(勿敏)은 주부(主簿)요 미민(靡敏)이요, 시민(時敏)은 호가 금호(琴湖)인데 재주가 특이하여 세상에서 신동(神童)으로 칭하고 강개(의기심이 의뚝함)하여 기절(氣節)이 있었는데 광릉(光陵:세조世祖의 릉陵)이 왕위에 오르매 영가(永嘉:안동安東)의 금계촌(琴溪村)으로 내려가서 김매월당(金梅月堂:이름은 시습時習)이 금호고사(琴湖高士)라는 액자를 써주었다.

금호공(琴湖公)이 4자(四子)를 두었으니 숭준(崇準)은 충순위(忠順衛)요 종준(宗準)은 호가 용재(慵齋)인데 호당(湖堂:나라에서 여가를 주어 글 읽는 곳)에 뽑혔고, 학문이 세상에 울리었는데 김점필재(金佔畢齋:이름은 종직宗直)의 문인으로 무오(戊午:1498)년 사화(士禍)를 당했다.

다음은 홍준(弘準)이요 호가 눌재(訥齋)인데 성균진사(成均進士)로 또한 학행이 있었고, 자기의 묘지문(墓誌文)을 지어 세상에서 일컫게 되었고 형제(兄弟)가 같이 백록사(栢麓祠)에 배향되어 세상에서 쌍주(雙珠)라 칭하였다.

다음은 공준(公準)이니 훈도(訓導)라.

아! 공이 고려조(高麗朝)에 세록(世祿)의 신하로 벼슬이 일품(一品)에 이르러 영광된 이름이 조야(朝野)에 가득하였고 손자와 증손에 이르러 공경(公卿)을 지낸 분이 손가락을 굽혀 셀 수 없이 많았다.

마땅히 국사(國史)와 가첩(家牒)에 기재하여 천지(天地)로 더불어 같이 전할 것인데 고려(高麗)가 망함으로부터 문헌(文獻)이 유실된 자가 十에서 八·九분이나 되니 차마 말할 수 가 있으리요, 그러나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 자손이 팔도(八道)에 분포하여 사는 자가 그 숫자를 세지 못하겠으니 덕이 두려우매 유파(流派)가 더욱 빛이 나므로 여기에서 공을 헤아릴 수가 있다.

사적이 전하지 못한 것이 공에게 무슨 가손(加損)이 있겠는가?

여러 후손들이 추모하고 보답하는 정성을 펼 곳이 없으므로 한을 삼아 급히 설단하고 제사 지낼 것을 도모하여 비석의 명문(銘文)을 나에게 청하면서 이르기를, 『지금 세상에 병필가(秉筆家:남의 글을 짓는 큰 문학가文學家)가 없으니, 자네가 동종(同宗)간이 되었은 즉 행여나 모른 체하지 마오』한다.

저으기 생각컨데 공의 세대가 요원하여 생졸(生卒)의 연도와 배위까지도 모두 근거 삼을 바가 없으니 명문(銘文)을 쓰기가 어렵도다. 그러나 공의 지위가 현달하지 않음도 아니며 공의 시대가 융성하지 않음도 아닌즉 조정에 나가서 행한 사적이 반드시 훌륭하여 볼만함이 있을 것인데 그 문헌(文獻)의 증거가 없으니 어찌할까, 단소(壇所)는 후손(後孫)이 거주하는 고장 안동군 금계면 사망리(安東郡琴溪面仕望里) 좌(坐)에 있고, 나를 찾아와 명문(銘文)을 청하는 자는 성호(成鎬) · 재영(在英) · 용준(龍濬)이요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주선하는 자는 인호(寅鎬) · 동호(東鎬) · 태영보(台永甫)이다.

명(銘)으로 이어서 이르기를,

아! 월성군(月城君)이여 고려(高麗)의 세신(世臣)이네, 조정에 나가 임금을 섬기니 문채(文彩)와 덕을 갖추었다.

벼슬은 일품에 이르고, 명망은 모든 사람에게 흡족하였네, 땅을 주어 월성군(月城君)에 봉하니 경례와 대우가 아울러 지극했구나, 음덕이 후손에게 흘렀으니, 천년(千年)에 무궁하리라.

원천이 깊고 유파(流派)가 길으니 문관(文官) · 무관(武官) 그리고 유현(儒賢)이 배출하였네, 세대가 요원하므로 문헌(文獻)의 징빙이 없네, 생졸년도(生卒年度)와 묘소(墓所)조차 어찌하여 모두 인몰 되었던가? 자손이 번창하니 느끼는 생각 더욱 새로웠고, 단을 모아 제향을 올리니 여러 의사 일치되었네.

위토와 제실을 마련하고 재게하며 제사 올리었네, 내가 명(銘)을 지어 좋은 비석에 새기노라.

병인(丙寅) 1986年 11月 상순


*출처: 1987년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