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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천군 12세손 초헌공 이발] 楚軒先生李公行狀(초헌선생이공행장)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8. 21:07

□계천군(鷄川君) 12세손 초헌공(楚軒公) 이발(李發)

【계대(系代)】 ①계천군(鷄川君) 이종직(李從直) → 1世孫 ①현감공(縣監公) 길상(吉祥) → 2世孫 ②광주목사공(光州牧使公) 영(聆) → 3世孫 ①강서현령공(江西縣令公) 세양(世良) → 4世孫 ①증판윤공(贈判尹公) 호(豪) → 5世孫 ②사복시판관공(司僕寺判官公) 유정(惟精) → 6世孫 ①첨정공(僉正公) 질(晊) → 7世孫 진사공(進士公) 태응(台應) → 8世孫 ①현(絢) → 9世孫 ①봉노(鳳老) → 10世孫 ④협(莢) → 11世孫 ①사눌(思訥) → 12世孫 초헌공(楚軒公) 발(發)



楚軒先生李公行狀(초헌선생이공행장)
–門人(문인) 黃禮源(황예원) 撰(찬)

公姓李諱發字仲華楚軒其號也系出慶州新羅佐命大臣諱謁平麗初兵部侍郎諱申佑麗季金紫光祿大夫三重大匡諱之秀入我 朝吏曹判書諱蔓實雞川君諱從直之後也雞川君生諱吉祥蔭仕縣監縣監公生諱聆牧使牧使公生諱世良縣令縣令公生諱豪參奉贈漢城府右尹即公之先祖也扈 聖功臣司僕寺判官諱惟精贈濟用監僉正諱晊成均進士諱台應即公之五六七代祖也高祖諱絢曾祖諱鳳休祖諱莢考諱思訥俱不任妣全州李氏範錫女也公生于 正廟庚子四月二十三日卒于 哲廟甲寅四月八日享年七十有五葬于甘棠之泉洞子坐先塋前配白川趙氏邦藺女生六男曰翼夏曰翼商改昌雨曰翼周曰翼魯出系曰翼漢曰翼東改東雨翼夏生四女取昌雨第二子相浩爲嗣女淸風金東植慶州金學洙利川徐榮東密陽朴萬祚昌雨生四男壽麟相浩出系相淵相源翼周生一男一女男相湧女慶州崔孝達翼魯生二男一女男相泌相泳女順興安福天翼漢生二男三女男相淨相潤女玄風郭再祿全州崔成祿白川趙斗星東雨生一男二女男相準女幷未筓相浩男晉炯金學洙男徐榮東男朴萬祚男並幼壽麟生一男一女男觀炯女未筓相淵生二男一女男咸炯漸炯女幼相源生一女幼相湧男斗炯相必生二男一女男光炯粲炯女幼相淨二女郭再祿二男趙斗星一男並幼內外子子孫孫根於公之一身柯葉蕃衍有方與未艾之象嗚呼先生簪纓後裔仍寓西土頂針七代文獻世有大方家聲積累之蔭丕闡于公自幼篤學講業于家庭博涉經史究覽墳籍十三成文章十有六七名播道內首爲八才士之冠冕其聰明姿質天所賦命也庚戌丁內艱年纔十一而執喪哀毀踰節乙丑丁外憂于京師之貞洞旅次孑孑隻影半千里奔喪送終禮制極盡誠敬返葬于鳳陽甘棠下泉洞子坐之原每以病席之不得侍湯臨終之未承遺命冤積于心晨夕拜墓泣血三載古人蒙莪之感風樹之哀比諸公情狀猶屬歇後耳旣失怙恃遂無意於進取隱居敎授弟子稍益精舍不能容敎誨之諄諄必因其才有如化工隨物賦形飮河各充其量觀於言談舉止不問可知爲先生弟子也公之學以德行爲本才藝爲末嘗曰入則孝出則恭汎愛親仁行有餘力則以學文者此非聖人之訓乎而吾與汝所當書紳而刻心者也余雖鹵莽負笈從公受業門下者盖亦有年矣觀夫子之孝思也德行也不亦君子乎聞夫子之談笑焉訓戒焉其惟逸士乎餘事功令之作亦冠絶當世公固不以文而傳名者雖以文而傳亦足以壽公名也昔李漢目爲昌黎之集蘇軾手述居士之傳先生學行不讓乎韓歐二公而小子薄識有愧于蘇李諸賢然辱知最厚且親遂攟摭見聞謹書如右後之君子必不以余言爲妄

*慶州李氏鼎珉錄 v2 (泰炯 編輯)


●초헌선생이공행장(楚軒先生李公行狀) 역문(譯文)
-문인(門人) 황예원(黃禮源) 찬(撰)

공의 성은 이(李)요, 휘는 발(發)이며 자는 중화(仲華)요, 호는 초헌(楚軒)은 그 호라. 관은 경주(慶州)니 신라(新羅) 좌명대신(佐命大臣) 휘 알평(謁平)과 고려(高麗) 초 병부시랑(兵部侍郎) 휘 신우(申佑)와 고려(高麗) 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삼중대광(三重大匡) 휘 지수(之秀)와 이조판서(吏曹判書) 휘 만실(蔓實)과 계천군(鷄川君) 휘 종직(從直)의 후손이다. 계천군(鷄川君)이 휘 길상(吉祥) 생하니 음직현감(蔭職縣監)이요, 현감(縣監)이 휘 영(聆)을 생하니 목사(牧使)요, 목사(牧使)가 생 휘 세양(世良)하니 현감(縣令)이요, 현감(縣令)이 생 휘 호(豪) 하니 참봉(參奉)으로 증한성부(贈漢城府) 우윤(右尹)하니 공의 선조요, 호성공신(扈聖功臣)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과 휘 유정(惟精)과 증제용감첨정(贈濟用監僉正) 휘 질(晊)과 성균진사(成均進士) 휘 태응(台應)은 공의 5·6·7대조다. 고조의 휘는 현(絢)이요, 증조의 휘는 봉휴(鳳休)요, 조의 휘는 협(莢)이며 고의 휘는 사눌(思訥)이니 모두 벼슬 아니하다. 비(妣)는 전주이씨(全州李氏) 범석(範錫)의 따님이니 정묘(正廟) 경자(庚子) 4월 23일에 공이 출생하고 철묘(哲廟) 갑인(甲寅) 4월 8일에 졸하니 향년(享年)이 75세다. 감당(甘棠)의 천동(泉洞) 선영전(先塋前) 자좌(子坐)에 안장했다.
배(配)는 백천조씨(白川趙氏) 방린(邦藺)의 따님으로 생 6남하니 익하(翼夏), 익상(翼商, 창우昌雨로 고침), 익주(翼周), 익노(翼魯) 출가, 익한(翼漢), 익동(翼東. 동우東雨로 고침)요, 익하(翼夏)는 생 4녀하고 창우(昌雨)의 2자 상호(相浩)로 입양하고 딸은 청풍(淸風) 김동식(金東植), 경주(慶州) 김학수(金學洙). 이천(利川) 서영동(徐榮東), 밀양(密陽) 박만조(朴萬祚)에 출가했고 창우(昌雨)는 생 4남하니 수인(壽麟), 상호(相浩)는 출가, 상연(相淵)·상원(相源)이요, 익주(翼周)는 생 1남 1녀하니 남에 상용(相湧), 여에 경주(慶州) 최효달(崔孝達)이요, 익노(翼魯)는 생 2남 1녀하니 남에 상필(相泌)·상영(相泳)이요, 여는 순흥(順興) 안복천(安福天)이며 익한(翼漢)은 생 2남 3녀하니 남에 상정(相淨)·상윤(相潤)이요, 여는 현풍(玄風) 곽재록(郭再祿), 전주(全州) 최성록(崔成祿). 백천(白川) 조두성(趙斗星)이며 동우(東雨)는 생 1남 2녀하니 남에 상준(相準)이요, 여는 어리고 상호(相浩) 남은 진형(晉炯)이다. 김학수(金學洙) 남과 서영동(徐榮東) 남과 박만조(朴萬祚) 남은 다 어리고 수인(壽麟)은 생 1남 1녀하니 남은 관형(觀炯)이요, 여는 미출가 상윤(相淵)이 생 1남 1녀하니 남에 함형(咸炯)·점형(漸炯)이요, 여는 어리고 상원(相源)은 생 1남 1녀하니 어리고 상용(相湧) 남은 두형(斗炯)이요, 상필(相必)은 생 2남 1녀하니 남에 광형(光炯)·찬형(粲炯)이요, 여는 어리고 상정(相淨)은 2녀하니 어리고 곽재록(郭再祿) 2남과 조두성(趙斗星) 1남은 어리고 내외(內外) 자자손손(子子孫孫)이 공의 한몸에 뿌리를 두어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장내가 유망하다.
슬프다, 선생은 잠영(簪纓) 후손으로서 서로(西路)에 우거(寓居)하여 7대 동안에 문헌(文獻)이 대로 있고 대방가(大方家) 명성과 누가 쌓인 음덕(蔭德)이 공에게 이르러 크게 떨쳤다. 어릴 때부터 글 배우기를 독실(篤實)히 하고 가정(家庭)에서 수업하여 정자(亭子)를 널리 연구하여 13세에 문장(文章)을 성취하고 16세, 17세에 다음이 도내에 전파되어 팔재사(八才士)에 으뜸이 되니 그 총명한 재질(才質)은 하늘이 낸 바이라. 경술년(庚戌年)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니 나이 겨우 11세에 집상(執喪)을 하되 슬퍼함이 정도에 지나치고 을축년(乙丑年)에 서울 정동여관(貞洞旅館)에서 부친이 돌아가니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빈천리(半千里) 길을 분상(奔喪)을 하여 초종장례(初終葬禮)를 극진하고 봉양감당(鳳陽甘棠) 하천동(下泉洞) 자좌(子坐)에 안장했다. 항상 병석에서 시탕(侍湯)도 제대로 못 하고 임종 시 유언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 원한이 되어 조석(朝夕)으로 묘소에 가서 절하고 삼년(三年)을 피눈물을 흘리니 옛사람 시전(詩傳)에 육아편의 느낌과 풍수의 슬픔을 공의 정상에 비교하면 그 경중이었던가 이미 양친을 다 잃고 세상에 나갈 생각이 없어 숨어서 후진들 교육에 힘쓰니 제자는 날로 많아져서 집에 수용을 다 못할 지경이라. 순순히 가르치되 그 재주에 따라 가르치니 대목(大木)이 나무 쓰듯 제자리에 맞도록 하고 물을 담아도 그릇을 맞도록 가르치니 그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보아 묻지 않아도 선생 제자인 줄 알더라. 공의 학문은 덕행으로 근본으로 삼고 재주로 끝으로 삼아서 항상 말하기를 집에 들어가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어른에게 공순(恭順)하고 널리 사랑하고 어진 이를 친하고 행동부터 배우고 힘이 남겼던 글을 배우라는 말이 참으로 성현(聖賢)의 말이라. 내 너희들과 함께 마음에 새길 바라고 하셨으니 내 비록 노둔(老鈍)하나 책을 끼고 공을 쫓아 문하(門下)에서 수업한 지 여러 해인지라 선생의 효행과 덕행을 보면 군자(君子)가 아닌가.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