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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이종준] 慵齋李先生遺墟碑銘(용재이선생유허비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8. 19:44

□용재공 이종준(慵齋公 李宗準)

【계대(系代)】 ①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 → 1世孫 ①정렬공(貞烈公) 규(揆) → 2世孫 판사복시사공(判司僕寺事公) 원림(元林) → 3世孫 ①화헌공(花軒公) 만실(蔓實) → 4世孫 ③대사헌공(大司憲公) 승직(繩直) → 5世孫 ⑤금호공(琴湖公) 시민(時敏) → 6世孫 ②용재공(慵齋公) 종준(宗準)


慵齋李先生遺墟碑銘(용재이선생유허비명) 병서(幷序)
-興海(흥해) 裵東煥(배동환)

永嘉府西琴溪里慵齋李先生之舊居也先生諱宗準字仲均慵齋其號系出慶州曾祖曰蔓實吏曹判書祖曰繩直大司憲考曰時敏號琴湖俱中生進 端宗癸酉禍坐禁錮文章風節負一世重望妣永嘉權氏縣監啓經女先生幼而岐嶷五歲屬文七歲讀書通大義十三歲文章筆法蒼古 成宗丁酉中司馬試乙巳登第丁未以正字遷吏郞戊申除弘文校理以魚世謙薦選湖堂賜暇讀書 上幸環翠亭先生應制居首聲名籍甚無爭鋒者尋拜正言時愼守勤始登淸顯先生以外戚得權之漸力諫其不可又與同僚啓請復 昭陵直聲振朝廷壬子拜副修撰癸丑以檢詳陞舍人又以書狀官赴燕先生詩律及書畵鳴於皇城稱三絶後華使至而傳誦甲寅除義城懸令到懸見校宮頽廢損廪移建聚鄕子弟誦詩習禮絃歌相聞詩人比武城戊午棄官歸鄕里是時柳子光李克墩搆陷淸流禍在朝夕先生與忘軒圍棋於杏亭人傳言紅衣官人一隊入洞門左右請撤棋先生徐曰未聞拿命則猶足閑散對局如故俄頃金吾郞果至先生曰老母在願與之訣金吾郞惻然而許之拜辭慈夫人夫人引范滂事喩之曰汝得其死我何悲爲汝徃善死善死無以我爲念與忘軒同席被拿就鞠之曰神色不變以手劃地作一字如長杠無一言也及定罪決杖八十流北界路經高山驛書「孤忠自許衆不與」一律于壁上而去監司以聞燕山主以爲有怨意逮鞠殺之是時朝廷危懼無敢言者獨洪虛白貴達上䟽救解不得先生臨刑 但勵聲曰首陽邈矣埋我無地聞者随淚返葬于琴溪仕望洞先生容貌雅潔如淸水芙蓉襟期瀅澈如氷壼秋月自幼服習乎賢庭義方之敎師事佔畢齋金先生畢齋之曰見李某胸衿邐落與寒喧一蠧迃拙齋濯纓睡軒秋江諸賢結道義交寔奎華極盛之會而及夫史禍作騈首就戮先朝之禮藥文物一敗塗地士氣沮喪國脈幾節天與人與于誰歸咎然而二氣循環未甞徃而不復 中宗丙寅天日重明雷雨渙降遘禍諸賢快雪幽枉先生亦復官爵後 肅宗朝因士林䟽請 贈弘文館副堤學享鏡光院又與季先生訥齋幷享栢麓社淸名直節愈久愈彰亘宇宙而長存以向又戕害忠賢者雲消霧滅人之視之曾犬彘之不若卽可見公論大定出於秉彜之所同也於乎君子之道守正而己不幸以遇變刀鉅鼎鑊不能動吾一髪故方先生之就鞠也陽陽如平常大書一字者但示其不貳其心也惟此皦然一片心可質神天雖屈於一時而伸於萬世使天下後世之人皆知君子之可慕小人之可誅而善惡邪正之間取舍得定則爲扶植世敎顧不大歟今距先生之世巳五百載矣當日毓靈降精播芬刺馥之地不忍荒廢方堅碑 舊墟以表之胄孫昌鎬承門父老命來余淸銘之顧藐然蔑識何敢異也而仍伏念先生吾先祖栢竹堂先生外曾孫也是時同居一巷至今上下遺址兩家先躅依然故在平日景慕先生有異於餘人恒稱吾家先生今兹之役僭乎云爾敢不效徵誠也謹齋沐而叙之以銘銘曰
鶴山嵬嵬洛水洋洋琴溪一曲宛在中央淑氣亭毓先生降嶽 宣陵晠際畢齋間席闇侃林立騈肩彙征鴻毛遇順奎聚精契合昭融賛襄聖化膾炙三絶聲振華夏崇極而圮唉彼蜮伏君子道消大禍罔極正氣不死烈日秋天天道好還不待百年嗣王褒贈多士尸祝睠兹墟里動摇葵麥商閭顔巷豈忍廢荒迺堅貞珉用寓羮墻脚樹復春講壇如昨遺風凛然起我後學草木含馨雲煙增采高山仰止景行行止


*백저문집(白渚文集) 下 卷之六 비명(碑銘) > 용재 이선생 유허비명(慵齋李先生遺墟碑銘) - 22


◈백저문집(白渚文集)은 배동환(裵東煥)의 文集이다.
○배동환(裵東煥) 1899년~1984년. 자는 인백(仁伯),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용재이선생유허비명(慵齋李先生遺墟碑銘) 병서(幷序) 역문(譯文)
-후학흥해(後學興海) 배동환(裵東煥)

영가(永嘉, 지금의 安東) 서쪽 금계리(琴溪里)는 용재(慵齋) 이선생의 옛날 살던 터이라. 선생의 휘는 종준(宗準)이요, 자는 중균(仲均)이며 용재(慵齋)는 그 호니 경주이씨(慶州李氏)다. 증조는 만실(蔓實)이니 이조판서(吏曹判書)요, 조부의 휘는 승직(繩直)이니 대사헌(大司憲)이고 부친의 휘는 시민(時敏)이요, 호는 금호(琴湖)니 생원진사(生員進士)에 합격했으나 단종(端宗) 1년 계유년(癸酉年, 1453) 중형(仲兄) 명민(命敏)의 화(禍)로 인하여 금고(禁錮)에 연좌(緣坐)되니 문장과 품절이 한때 명망을 짊어진다.
모친은 영가권씨(永嘉權氏) 현감(縣監) 계경(啓經)의 따님이다. 어려서부터 기상이 높았고 5세에 글을 부쳤으며 7세에 글을 읽어 대의(大義)를 통달하고 13세에 문장과 필법이 옛사람을 압도하였다. 성종(成宗) 7년 정유(丁酉, 1477)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을사(乙巳, 성종16 1485)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정미(丁未, 성종18 1487)에 정자(正字)로 이랑(吏郞)에 옮겼고 무신(戊申, 성종19 1488)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제수받았다. 어세겸(魚世謙)의 추천으로 호당(湖堂)에 뽑혀 여가를 주어 글을 읽게 하다[賜暇讀書].
임금께서 환취정(環翠亭)에 행차할 때 선생이 용재(慵齋)로 수위(首位)에 있어 명성이 자자하니 경쟁하는 자 없었다. 얼마 후에 정언(正言)에 배명(拜命)하니 이때 신수근(愼守勤)이 처음으로 청현직(淸顯職)에 오름에 선생이 외척으로 천리를 잡을 징조다 해서 그 불가함을 역간(力諫)했고 또 동료로 더불어 글을 올려 소릉(昭陵, 문종비 현덕왕후릉) 회복을 청하되 바른 소리가 조정을 진동하였다.
임자(壬子, 성종23 1492)에 부수찬(副修撰)이 되고 계축(癸丑, 성종24 1493)에 검상(檢詳)에서 사인(舍人)에 오르고 또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 중국 서울)에 갔을 때 선생의 시율(詩律)과 서화(書畫)로 황성(皇城)을 올려 울려 삼절(三絶, 시·서·화에 모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 또는 그 경지를 일컫는 품평어)이라 일컫더니 뒤에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선생의 시(詩)를 외우는 자 많았다.
갑인(甲寅, 성종25 1494)에 의성현령(義城懸令)이 되다. 현(懸)에 이르러 향교(鄕校)의 퇴락함을 보고 비용을 내서 향교를 옮겨 다시 세우고 향중자제(鄕中子弟)들을 모아 시(詩)를 외우게 하고 예(禮)를 익히게 하니 현송(絃誦, 거문고를 타면서 시를 읊음)의 소리가 서로 들려 때의 사람들이 무성(武城)에 비유하더라. 무오(戊午, 연산군4 1498)년에 벼슬을 보리고 형리로 돌아오니 이때 류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이 청류명현(淸流名賢)을 모함하여 화가 조석(朝夕)에 있는지라 선생이 망헌(忘軒, 이주李胄)과 더불어 행정(杏亭, 은행나무 정자)에서 바둑을 둘 때 사람들이 전하되, 『붉은 옷을 입은 일대가 동구(洞口)에 들어온다』 하니 좌우에서 바둑을 거두라 하나 선생이 가로대 잡으라는 명(命)을 받지 않았으니 죄인이 아니라면서 여전히 바둑을 두더니 조금 있다가 금오랑(金吾郞)이 과연 이르거늘 선생이 말씀하기를 『노모(老母)가 계시니 고별을 원하노라』 하니 금오랑(金吾郞)이 측은히 여겨 허락하거늘 모부인(母夫人, 母親)께 배사(拜辭)하니 모부인(母夫人)께서 옛날 범방(范滂)의 일을 들어 비유하며 가로대 『네가 죽을 땅을 얻었으니 네가 어찌 슬퍼하랴 내가 가서 죽음을 잘하고 나는 생각지마라』 하다.
망헌(忘軒, 이주李胄)과 동석(同席)에서 잡혀 국문당하는 날에 신색(神色, 언색顔色의 높임말)이 변치 않고 손으로 땅을 그어 장대 모양으로 한일자(一)를 쓰고 한마디 말도 없었다. 죄를 확정하되 80대 매를 맞고 북계(北界)로 귀양 가게 되니 길이 고산역(高山驛)을 지나게 된지라.
「고충자허중불여(孤忠自許衆不與, 충성심을 자기는 허락하되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라고 벽 위에 쓰고 갔더니 감사(監司)가 나라에 알린 대 연산주(燕山主)가 자기를 원망하는 뜻이 있다 해서 다시 잡아 죽이니 그때 조정이 겁을 내어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으되 홀로 홍허백(洪虛白) 귀달(貴達)이 글을 올려 구원타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형(刑)을 받을 때 고리를 가다듬어 가로대 『수양산(首陽山)이 멀고 머니 내가 묻힐 땅이 없구나』 하니 듣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더라. 금계(琴溪) 사망동(仕望洞)에 반장(返葬, 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제가 살던 곳이나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지냄)하다. 선생은 용모가 단아하기를 맑은 물에 핀 부용(芙蓉, 연꽃)과 같고 흉금(胸襟)에 티가 없기를 빙호(氷壺)에 비친 추월(秋月)과 같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어진 가정에서 의방(義方)의 교육을 받았고 뒤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김선생에게 글을 배우니 점필재(佔畢齋) 김선생이 큰 그릇인 줄 알고 가로대 『내가 이모(李某)를 보니 가슴이 트이는 것 같다』고 하였다.
한훤(寒喧, 김굉필金宏弼)·일두(一蠧, 정여창鄭汝昌)·오졸재(迃拙齋, 박한주朴漢柱)·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제헌(諸賢)으로 도의의 사귐을 맺다. 이때가 소인(小人) 전성기(全盛期)라 사화(史禍)가 일어나자 일대 현인(賢人)들이 떼죽음을 당하니 조정의 역대 예악(禮藥) 문물(文物) 일체(一切)가 땅에 떨어지니 사기가 죽고 국맥(國脈)이 떨어질 뻔하니 하늘의 운이요, 사람의 장난이라 그 허물을 뉘에게 돌리리오.
그러나 천지이수가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중종(中宗) 1년 병인(丙寅, 1506)에 천일(天日)이 다시 밝고 우뢰(雨雷)와 비가 내려 화(禍)를 당한 제현(諸賢)의 억울한 죽음을 쾌히 신원(伸冤)하고 또한 관작(官爵)을 회복한 뒤에 숙종조(肅宗朝)에 와서 사림(士林)의 청원으로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堤學)을 받아 경광서원(鏡光書院)에 입향(入享)되고 동생 눌재선생(訥齋先生)과 함께 백록사(栢麓社)에 입향(入享)하니 맑은 이름과 곧은 절개는 오래갈수록 더욱 빛이 나서 천지와 함께 길이 남을 것이나 지나간 날 충현(忠賢)을 죽인 자는 구름이 사라지고 안개 녹듯 하고 사람들이 개와 돼지만도 못하게 보니 공론(公論)의 결정이 떳떳한 바를 볼 수 있다.
슬프다 군자의 도는 바른 것을 지킬 따름이니 불행히 변을 만나 칼과 기름 솥에도 한 터럭도 움직이지 않는 고로 선생이 국문(鞫問)을 당할 때 늠름하기를 평상시와 같이 크게 한일자를 쓴 것은 그 마음이 두 가지가 아닌 것을 보였으니 이 밝은 일편단심(一片丹心)이 가히 신명과 하늘에 밝으니 비록 한 때는 굴했으나 만대에 펼치니 뒤 세상 사람으로 군자는 사모하고 소인은 미워함을 알게 하여 착한 것은 취하고 악한 것은 버리며 바른 것은 얻고 간사한 것은 버린즉, 세상 교육을 위하여 크지 않을까.
이제로부터 선생의 세상이 이미 5백 년이 지난 지라 당일 심령(心靈)을 기르고 정기(精氣)를 내리어 향기가 가득하든 이 땅의 황폐(荒廢)함을 참아 볼 수 없어 옛터에 비(碑)를 세워 표(表)를 할세. 주손(胄孫, 맨 먼저 낳은 손자) 창호(昌鎬)가 문중(門中) 부로(父老)의 명을 받들어 나에게 와서 사명을 청하니 막연(藐然)한 멸식(蔑識)이 어찌 감히 당하리오마는 엎드려 생각건대 선생은 나의 선조(先祖) 백죽당선생(栢竹堂先生)의 외증손(外曾孫)이라 이때 한마을에 함께 살던 위아래 남은 터가 완연하니 평일 선생을 경모함이 다른 사람과 달라서 항상 우리 선생이라 불렀으니 이제 이일에 참람(僭濫)하나 감히 적은 정성을 다하지 않으리요. 삼가 목욕재계하고 위와 같이 쓰고 이어서 명(銘)을 지으니 명(銘)에 가로대,
학가산(鶴駕山)은 높고 낙동강(洛東江) 물은 출렁출렁 금계(琴溪) 한구비가 완연히 중앙일세 맑은 기운이 높이 서리니 선생이 나셨도다. 선능(宣陵, 조선 성종과 성종의 계비 정현 왕후의 능)의 밝을 때요, 필재(畢齋)의 사석(師席)이라 어둡고 곧은 이가 숲같이 섰도다. 어깨를 모아 함께 가니 순풍을 만난 기러기 털이로다. 정기가 규성에 모이니 융융(融融)하게 합했도다. 선생의 교화를 찬양하니 삼절(三絶, 시詩·서書·화畵)이 뛰어났다. ​명성이 중국에 진동하다 높은 것이 다하니 내리막길이로다. 저 여우가 엎드렸으니 군자(君子)의 도(道)가 사라졌네.
큰 화(禍)는 망극(罔極)하나 정기(正氣)는 죽지 않어 열일추천(烈日秋天)이라 천도(天道)가 돌아옴에 백년을 기다리지 않고 뒤 임금이 포증(褒贈)을 했고 사림(士林)에서 봉향(奉享)하네. 저 빈터를 보라 규맥(葵麥)만 흔들거리네. 상려(商閭)와 안항(顔巷)을 어찌 폐허로 만들쏜가. 이에 비(碑)를 세우고 제사를 모시다. 압각수(鴨脚樹, 은행나무)에 봄이 돌아오니 강단(講壇)이 옛날과 같네. 유풍(遺風)이 늠름하여 우리 후학(後學)을 일으켰네. 초록이 향기를 머금고 구름과 연기도 채색(采色)을 더했도다. 높은 산을 우러르고 밝은 행실을 본받을지어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