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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이종준] 慵齋李公墓石陰記(용재이공묘석음기)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8. 19:40

□용재공 이종준(慵齋公 李宗準)

【계대(系代)】 ①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 → 1世孫 ①정렬공(貞烈公) 규(揆) → 2世孫 판사복시사공(判司僕寺事公) 원림(元林) → 3世孫 ①화헌공(花軒公) 만실(蔓實) → 4世孫 ③대사헌공(大司憲公) 승직(繩直) → 5世孫 ⑤금호공(琴湖公) 시민(時敏) → 6世孫 ②용재공(慵齋公) 종준(宗準)


慵齋李公墓石陰記(용재이공묘석음기)
-木齋 洪汝河(목재 홍여하) 撰(찬)

公諱宗準。字仲匀。號慵齋。月城李氏。世居安東金溪里。父。生員時敏。祖。大司憲繩直。曾祖。大護軍蔓實。中成化丁酉進士。乙巳文科。與金濯纓馹孫,權睡軒五福友善。以名節相激勵。歷仕亦大抵相同。公襟韻灑落。望之如神仙中人。爲文章。卓偉高古。書畫俱妙絶。嘗赴燕京。出宰聞韶。人得其揮灑之跡。至於訴牒胡題。藏襲珍之。喬桐朝。坐金權史事。北竄拿還。將置重典。吾先祖文匡公上書救解。主竟不聽。時弘治戊午歲也。後百七十餘年。金溪人立祠俎豆公。歲辛亥。金啓光守豐基郡。爲礱石樹墓道。索余銘。余惟喬桐主方肆虐酗怒。名流被戮者。動以百數。吾文匡莫之敢救。銳爲救公。陳懇獻忠。寧同死是甘。士大夫至今談之。余文匡裔孫也。其於識公之墓。敢辭拙文。是爲銘。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8
*한국문집총간 > 용재유고 > 慵齋先生遺稿 附訥齋遺稿 / 附錄 > 慵齋李先生墓石陰記[洪木齋汝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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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1. 홍여하(洪汝河)(1621-1678)가 지은 음기(陰記). 시서화(詩書畵)에 대한 재주와 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1467-1498)과 매우 친하게 지낸 일.
김일손·권오복의 사사(史事)(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국문당할 때 자신의 선조 문광공(文匡公) 홍귀달(洪貴達)(1438-1504)이 구하려 했다는 일을 적었으며‚ 풍기군수(豊基郡守) 김계광(金啓光)이 묘도(墓道)를 만들면서 명(銘)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여 쓴다고 함.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목재집(木齋集)은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의 文集이다.
○홍여하(洪汝河) 1620년(광해군 12)~1674년(현종 15). 자는 백원(百源), 응도(應圖), 호는 산택재(山澤齋), 목재(木齋), 대박산인(大朴山人)이고 본관은 부계(缶溪)이다.


*목재집(木齋集). 한국고전번역원


묘석 음기墓石陰記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공의 휘는 종준宗準이며 자는 중균仲勻이고 호는 용재慵齋이다. 월성 이씨는 대대로 안동 금계리金溪里에 살았다. 아버지는 생원 시민이고, 할아버지는 대사헌 승직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대호군 만실이다. 성화 연간 정유년(1477)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을사년(148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탁영 김일손·수헌 권오복과 벗으로 친하게 지냈으며 명예와 절조로 서로 격려하였고 지낸 벼슬 또한 대략 서로 같았다.
공은 흉금이 깨끗하여 멀리서 보면 인간 세계 속에 있는 신선 같았다. 문장을 지으면 탁월하고 고상하였으며 서화는 모두 절묘하고 빼어났다.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을 때와 지방으로 나가서 의성[聞韶] 현령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의 필적筆跡을 구하였고, 심지어 아무렇게나 쓴 소송 문서조차도 갈무리하여 대대로 전하는 보배로 여겼다. 연산군조에 김일손·권오복의 역사 기록과 관련된 일1)에 연좌되어 북방으로 귀양 가던 중 잡혀서 돌아와 장차 무거운 형벌에 처해지려 할 때 우리 선조 문광공文匡公(홍귀달洪貴達)이 글을 올려 구하려 했지만, 연산군은 끝내 듣지 않았다. 그때가 홍치弘治 무오년(1498)이다. 170여 년 뒤에 금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공을 제사 지냈다. 신해년(1671)에 김계광金啓光이 풍기군豐基郡을 다스릴 때 비석을 만들고 묘도墓道를 세우려고 하면서 나에게 명문銘文을 부탁했다.
내가 생각건대, 연산군이 잔학하고 흉포하게 화를 낼 당시에 죽은 이름난 선비들이 거의 수백 명이나 되었으며, 우리 문광공도 감히 구하지 못하였다. 앞장서서 공을 구하기 위해 간절한 말을 아뢰고 충성을 바쳐 차라리 함께 죽을지라도 이를 달게 여겼으니, 사대부들은 지금도 그 일을 이야기한다. 나는 문광공의 후손이니 공의 묘지에 기록하는 것을 감히 문장이 졸렬하다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명銘을 짓는다.

부림缶林 홍여하洪汝河2)가 삼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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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일손(金馹孫)……일 : 무오년(1498)에 김일손이 『성종실록』의 사초(史草)에 자기 스승인 김종직 (金宗直)이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기 위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은 사실이 적발되었고, 김일손의 집에서 이 일에 대해 이목(李穆)·권오복(權五福) 등과 주고받은 서신이 발견되었던 일을 말한다.
2) 홍여하(洪汝河, 1620∼1674) :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산택재(山澤齋), 본관은 부계(缶溪)이다. 165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병조 좌랑이 되고, 사간에 이르렀다. 1689년 부제학에 추증되고, 상주의 근암서원(近嵒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목재집』 등이 있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2020년 10월) > 용재선생유고 > 부록附錄 > 묘석 음기墓石陰記
*한국국학진흥원: https://www.koreastudy.or.kr/



●용재 이공 묘석 음기〔慵齋李公墓石陰記〕 <번역문>

공의 휘는 종준(宗準)이고, 자는 중균(仲匀)이며, 호는 용재(慵齋)이고, 경주 이씨로 대대로 안동(安東) 금계리(金溪里)에 살았다. 아버지 시민(時敏)은 생원이었고, 조부는 대사헌 승직(繩直)이다. 증조부는 대호군(大護軍) 만실(蔓實)로 성화(成化) 정유년(1477, 성종8)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을사년(1485, 성종16)에 문과에 입격했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ㆍ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2)과 우의가 도타웠고 이름과 절개로 서로 격려했으며 지낸 벼슬 또한 대개 서로 비슷했다.
공은 흉금이 깨끗하여 사람들이 바라보기를 마치 신선 가운데 있는 사람인 듯 했다. 짓는 문장은 웅대하면서도 고고(高古)하였고 서화(書畵)는 모두 절묘했다.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었다. 의성〔聞韶〕 현감으로 나가자 사람들이 그의 글씨를 얻었으며, 아무렇게나 쓴 소첩(訴牒) 하나도 갈무리하여 대대로 전하는 보물로 삼았다.
연산군조에 김일손ㆍ권오복의 사사(史事)에 연좌되어 북방으로 귀양갔다가 나환(拿還)되어 장차 무거운 형벌에 처해지려 했다. 우리 선조 문광공(文匡公)3)이 상소를 올려 구하려 했지만 임금은 끝내 듣지 않았다. 그때가 홍치(弘治) 무오년(1498, 연산군4)이며, 170여 년 뒤에 금계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고 공을 제사지냈다. 신해년(1671, 현종12) 고을 사람 김계광(金啓光)4)이 풍기 군수(豐基郡守)로 부임하여 돌을 다듬어 묘도(墓道)를 세우려고 나에게 명문을 부탁했다.
나는 생각하건대, 연산군은 잔학하고 흉포하여 이름난 선비들을 죽인 것이 짐짓 백여 명이었으며, 우리 문광공도 감히 구하지 못하였다. 나아가 공을 구하기 위해 간절한 말을 아뢰고 충성을 바치다가 차라리 함께 죽을지언정 이를 달게 여겼으니, 사대부들이 지금도 이야기 하는 일이다. 나는 문광공의 후손으로 공의 묘지를 기록함에 감히 졸렬하다고 사양할 수 있으랴. 이것으로 명(銘)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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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일손(金馹孫) : 1464~1498. 본관은 김해,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ㆍ소미산인(少微山人)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며, 무오사화 때 처형되었다.
2) 권오복(權五福) : 1467~1498. 본관은 예천, 자는 향지(嚮之), 호는 수헌(睡軒)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며, 무오사화 때 처형되었다.
3) 문광공(文匡公) : 시호가 문광인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을 가리킨다.
4) 김계광(金啓光) : 1621~1675. 그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겸(景謙), 호는 구재(鳩齋)이다. 저서로는 《구재문집》 4권이 있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전재동 (역) | 2014
*고전번역서 > 목재집 > 목재집 제7권 / 갈명(碣銘) > 용재 이공 묘석 음기〔慵齋李公墓石陰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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