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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헌공 이승직] 先祖考嘉善大夫大司憲府君家狀(선조고가선대부대사헌부군가장)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8. 18:22

□대사헌공 이승직(大司憲公 李繩直)

【계대(系代)】 ①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 → 1世孫 ①정렬공(貞烈公) 규(揆) → 2世孫 판사복시사공(判司僕寺事公) 원림(元林) → 3世孫 ①화헌공(花軒公) 만실(蔓實) → 4世孫 ③대사헌공(大司憲公) 승직(繩直)



先祖考嘉善大夫大司憲府君家狀
(선조고가선대부대사헌부군가장)

-孫男(손남) 弘準(홍준) 撰(찬)

府君諱繩直子繩平系月城新羅佐命大臣李謁平之後也考大護軍蔓實祖司僕判事元林曾祖四宰貞烈公揆高祖三重大匡月城君之秀府君生於宣德戊午旣長有學行始以進士又擢生員筮仕 世宗朝以淸白見重位至二品居家莅官喜怒不形家有應門小奴以滌器不潔覆飯于溝婢僕入告淑人裵氏必待朝退而懲之具告其由乃曰此可取而不可怒也陋何食焉第視之當爲忠奴府君下世後終裵氏之世皓首幹家果有功焉又牧楊州有一員疎薄其妻聲失行訴狀自前等覈未得情下車之初首擧重獄爲先鞠之婢僕及子息招辭各異以爲疑獄其夫妻同囚獄廡隙房今一該事衙奴及解文老吏密守璧外必有相詰言語細記以告果夜半妻謂夫曰汝欲棄我雖不官誰能止之必以惡名加我使所生子女不得擧顔於鄕閭乎在獄中所生者亦非爾子乎何薄行之至是耶應曰旣發狀事至如此今若變辭則重罪及我余亦悔不可追也吏俱記始末夜半入之卽明庭燎座而斷獄其夫無辭自服不施刑立解寃抑朝野服其明威又承着發行請所重鄕生員監貢物乃囑焉曰脫有升合銖兩之贏則不得家分而戶與又用之無處君其知之交代又令監焉曰脫有升合銖兩之欠不得家收而戶合出處又無由君其知之適時判事金慶孫以生員過楊洲與上舍同宿枕上語及兩官淸濁相與歎服歲丙午余客京師舘于隣舍判事語余曰君之先祖淸白冠於當世此必未聞爲君陳之君其服膺云○又有一官屬人採覆盆子一盂以進使人取鹿皮靴子來卽賞之衙罷祖母奉問答以實祖母曰無乃傷惠耶曰自呑何難待而餉我誠也語其誠則靴子猶薄也
遞還之日品官衙前設祖席從容就坐乃今日各進一杯杯進受而不遺一人畧無辭色豈止百杯哉然平日不進一勺雖僚友親戚不知無量之飮以第一治超授堂上隣邑造上馬臺鞍籠見遺入京得友人弊裝而前所得者置之笥中不御意者以彼煩官所造未安于心而然也按慶尙道時往復家書至今盈箱書中只載木綿貼裏如此等衣服爾無他綃羅華美之物嘗入侍輪對適啓盜牛啓本 上曰朝臣不知盜肉而啖之者必有焉自後絶不進牛肉家中下人稱進賜責曰進賜乃宗親家號何不道上典耶禁不得言焉嘗曰若見娼流足似履虫擧體騷然不喜聲色如此大夫人鐵城李氏居抱川田庄別製衾枕襡而藏之必待歸覲而設與之曰此兒長於吾乳專受吾氣者也若良直從直乳婢所養多蕩性不與之若盜而覆焉必還索乃己○上擬大用拜大司憲未幾發背瘡上不遞其職瘡未合而臺中有重議出仕勞動復發而卒辛亥十一月也 上輟膳悲之命官賜察前配李氏都監正郞亮之女生四男一女長不敏正郎次命敏副正次勿敏文科主簿次靡敏女適縣監金巖後配裵氏司僕正尙志之女生二男一男早夭一男時敏成均生員○先祖考嘉言美行爲法於後世者多而家藏文蹟蕩失於癸酉之禍畧陣前聞之萬一以備後人之考覽


*용재유고(慵齋遺稿) > 訥齋先生遺稿 > 先祖考嘉善大夫大司憲府君家狀
*용눌재집(慵訥齋集) > 訥齋先生遺稿 > 家狀 > 先祖考嘉善大夫大司憲府君家狀



○선조고가선대부대사헌부군가장(先祖考嘉善大夫大司憲府君家狀)
할아버지 이승직(李繩直)(1378-1431)의 일생을 적은 가장(家狀). 세종 때 청백리(淸白吏)로 2품의 지위에 올랐으며 평소에 어디서나 희로(喜怒)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함.
또 양주의 목민관이 되었을 때는 그 처가 실행(失行)을 하였다고 하여 소박하려는 사람이 소장(訴狀)을 내자 그 부부를 한 감옥에 가두어 대화로 화해하게 하였으며‚ 경상도에 안찰사로 있을 때는 목면으로 만든 옷만을 입었고 대사헌에 임명되었을 때에는 등에 종기가 났는데도 힘써 일하다 돌아가시니 왕도 슬퍼하셨다고 함.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선조고 가선대부 대사헌 부군의 가장
[先祖考嘉善大夫大司憲府君家狀]


부군의 휘는 승직繩直이고 자는 승평繩平이며, 본관은 월성月城이니, 신라 좌명대신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대호군 만실이고, 조부는 판사복시사 원림이며, 증조부는 의정부 우참찬 정렬공 규이고, 고조부는 삼중대광 월성군 지수이다. 부군은 선덕宣德 무오년1)에 태어났다. 자라서는 학행學行이 있어 처음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다시 생원시에 합격하여 세종조에 처음으로 벼슬하니, 청백리로 존중되었고 지위는 2품까지 이르렀다.

집에 있을 때나 관직에 임할 때 기쁘고 화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집에 문을 지키는 어린 종이 있었는데 씻은 그릇이 불결하다며 밥을 수채에 엎어 버렸다. 여종이 들어가 숙인 배씨에게 고자질하니, 배씨가 굳이 부군이 조정에서 물러나기를 기다려 징계하려고 그 이유를 갖추어 아뢰자, “이것은 취할 만하고 화를 낼 것이 못 되오. 더러운 음식을 어찌 먹을 수 있겠소. 두고 보시오. 충성스런 종이 될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 종은 부군이 세상을 떠난 뒤 배씨가 세상을 뜰 때까지 백발이 되도록 집안을 돌보는 데 과연 공이 있었다.

또 양주 목사가 되었을 때 관원 중에 아내가 도의에 어그러지는 행실을 했다며 아내를 소박 놓은 자가 있었다. 소장訴狀에 대해서는 전임 때부터 조사를 기다리며 아직 진상을 밝히지 못하였는데, 공이 부임 초에 가장 먼저 중대한 옥사로 거론하며 우선 심문하였다. 남녀 종과 자식의 진술이 각기 다르자, 의심스런 옥사라고 여기고 부부를 감옥에 같이 가두되 방은 다르게 하였다. 그 일을 맡은 관아의 한 종과 글을 아는 늙은 아전을 시켜 벽 밖에서 가만히 지켜보도록 하고, 반드시 서로 따지는 말이 있을 테니 이를 자세히 기록해서 고하라고 명하였다. 과연 한밤중에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이 나를 버리고 싶으면 관가가 아니라 해도 누가 제지하겠습니까. 굳이 제게 나쁜 누명을 씌워 낳은 자녀들이 고장에서 얼굴을 들 수 없게 합니까. 옥에 있는 자식도 당신 자식이 아닙니까. 어찌 이렇게까지 박대합니까?”라고 하였더니, 남편이 “고소장을 이미 내어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만약 말을 바꾸면 무거운 죄가 나에게 미칠 것이다. 나도 후회가 되지만 어쩔 수가 없다.”라고 답하였다. 아전이 일의 시종을 상세히 기록하여 한밤중에 바치자 즉시 명하여 정청政廳에 횃불을 밝히고 개좌開坐2)하여 옥사를 처결하니, 그 남편이 다른 말 없이 자복하였다. 형벌을 시행하지 않고도 즉시 억울함을 풀어 주니 조야朝野가 그의 밝고 위엄 있음에 탄복하였다. 또 어떤 일에 차출되어 출발할 때 신임하는 고을 생원을 청해 납세의 물건을 감찰하게 하면서 “한 되나 한 홉, 수銖나 양兩3)의 남는 것이 있더라도 집집마다 나누어 주어서는 안 되오. 또 쓸 곳이 없으니 그대는 그러한 점을 아시오.”라고 당부하였다. 교대할 때 또 감찰하게 하면서 “한 되나 한 홉, 수나 양의 모자라는 것이 있더라도 집집마다 거두어서는 안 되오. 근거 또한 없으니 그대는 그것을 아시오.”라고 당부하였다. 마침 당시에 판사判事 김경손金慶孫이 생원일 때 양주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생원들과 함께 유숙하면서 잠자리에서 두 관리의 청탁淸濁을 말하다가 서로 탄복하였다.

병오년(1486)에 내가 서울에서 객지 생활을 하면서 판사의 이웃집에 숙소를 두었다. 판사가 내게 “돌아가신 그대 조부의 청렴결백함은 당대에 으뜸일세. 이는 필시 듣지 못하였을 것이오. 그대를 위해 일러 주니 그대는 마음에 새겨 힘쓰도록 하시게.”라고 하였다. 【원문빠짐】 한 관속이 복분자 한 사발을 따서 바치자, 사람을 시켜 사슴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가져오게 하여 즉시 상을 주었다. 관아 일이 끝난 뒤 할머니의 질문을 받고 사실대로 답하자, 할머니가 “은혜를 손상시킨 것4)이 아니겠느냐.”라고 하니, “자신이 삼켜 버리는 것이 무엇이 어려웠겠습니까. 가지고 와서 제게 준 것은 정성입니다. 그 정성을 말하자면 가죽 신발도 오히려 박합니다.”라고 하였다.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오던 날 품관品官5)과 아전이 이별 연회의 자리를 마련하자 조용히 자리에 나아가 곧 “각자 한 잔씩 가지고 오시오.”라고 명하고는 잔을 올리면 받아 마시면서 한 사람도 빠트리지 않았고, 조금도 사양하는 기색이 없었다. 어찌 백 잔에 그쳤겠는가. 그러나 평소에는 한 잔도 마시지 않았으니, 동료나 친척들도 주량이 한정 없는 줄 몰랐다. 치적이 제일 뛰어나서 등급을 뛰어넘어 당상관에 임명되니, 이웃 사람이 상마대上馬臺(말에 오를 때 쓰는 받침대)와 안롱鞍籠(수레나 가마를 덮는 우비)을 만들어 보내 주었는데, 서울에 들어가서는 벗의 낡은 것을 얻어 쓰고 지난번에 얻은 것은 궤짝 안에 두고 쓰지 않았다. 생각건대, 저것이 업무가 많은 관원이 만든 것이라 마음에 미안하여 그러한 것이리라.

경상 감사로 있을 때6) 집과 오고 간 편지가 지금도 상자에 가득한데, 편지 중에는 무명 첩리貼裏7)와 같은 의복에 대한 말만 실려 있고 다른 비단으로 만든 화려한 물건에 대한 말이 없다. 한번은 입시入侍하여 윤대輪對8)할 때 마침 소를 훔친 사건에 관하여 계장啓狀을 아뢰자, 주상이 “조정의 신하 가운데 도둑질한 고기인 줄 모르고 먹은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더니, 이후로는 결코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 집의 하인들이 나리라고 부르면 꾸짖으면서 “나리[進賜]라는 말은 종친 집에서 쓰는 호칭이다. 어찌하여 상전上典이라 말하지 않느냐.”라고 꾸짖으며 금지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일찍이 “기생을 보면 발로 벌레를 밟은 것처럼 거동이 불편하다.”라고 하였으니 풍악과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어머니(이홍준의 증조할머니) 철성 이씨鐵城李氏는 포천抱川의 시골집에 살면서 따로 이불과 베개를 만들었다가 싸서 보관해 두고 반드시 귀성하러 올 때를 기다려 펴주면서 “이 아이는 내 젖을 먹고 자라 오로지 내 기운을 이어받은 자이다. 양직良直과 종직從直9)은 젖먹이 종의 젖을 먹고 자라 방탕한 성품이 많다.”라고 하며 주지 않았고, 만약 몰래 가져가서 덮으면 굳이 다시 찾아내고야 말았다. 【원문 빠짐】

임금이 크게 기용하려고 대사헌에 임명하였는데 얼마지 않아 등창이 났지만, 관직을 교체하지 않았다. 등창이 미처 아물지 않은 채 사헌부에 중요한 의논이 있어 출근하여 과로하다가 다시 등창이 터져 세상을 떠나니 신해년(1431) 11월이었다. 임금이 수라상에 반찬을 덜게 하며 슬퍼하였고, 관원을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전 부인 이씨李氏는 도감 정랑都監正郎 이량李良의 따님이다. 4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불민不敏은 정랑正郎이고, 차남 명민命敏은 부정副正이고, 삼남 물민勿敏은 문과에 급제하여 주부主簿이며, 사남은 미민靡敏이다. 딸은 현감 김암金巖에게 시집갔다. 후실 배씨裵氏는 사복시 정司僕寺正 배상지裵尙志의 따님이다. 2남을 낳았는데, 한 아들은 요절하였고 한 아들 시민時敏은 성균관 생원이다. 【원문 빠짐】

돌아가신 조부의 훌륭한 말과 행실은 후세에 귀감이 될 것이 많으나 집에 보관해 둔 문적文蹟을 계유정난 때 잃어버렸다. 전날 들었던 것의 만분의 일이라도 대략 진술하여 후세 사람이 살펴볼 것에 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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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덕(宣德) 무오년 : 선덕은 명나라 제5대 황제 선종(宣宗)의 연호(1426∼1435)인데, 선덕 연호에는 무오년이 없다. 바로 뒤의 「선부군가장(先府君家狀)」에서 부친 이시민(李時敏)이 선덕 경술년(1430)에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선덕 연대는 아닐 것으로 추측된다. 1430년 이전의 무오년은 고려 우왕 4년인 1378년이다.

2) 개좌(開坐) : 관서에서 공사(公事)를 처리하기 위하여 관원들이 자리를 정하고 기구를 갖추어 벌여 앉는 것을 말한다.

3) 수(銖)나 양(兩) : 매우 작은 무게 단위로, 1근의 1/16이 1냥(兩)이고, 1냥의 1/24이 1수(銖)이다.

4) 은혜를 손상시킨 것 : 주지 않아도 될 상을 주었다는 말이다.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취해도 좋고 취하지 않아도 좋을 때 취하면 청렴을 상(傷)하게 되고,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을 때 주면 은혜를 상하며, 죽어도 좋고 죽지 않아도 좋을 때 죽으면 용감함을 상한다.”라는 말뜻을 가져왔다.

5) 품관(品官) : 주현(州縣)에 유향소(留鄕所)를 설치하여 고을에 사는 유력한 자를 좌수(座首)·별감(別監)·유사(有司)에 임명하여 수령을 보좌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향리(鄕吏)를 규찰하며, 정령(政令)을 전달하고 민정(民情)을 대표하게 하던 유향 품관(留鄕品官)을 말한다.

6) 경상 감사로 있을 때 : 이승직(李繩直)은 1427년에 경상도 감사를 지낸 기록이 있다.(『世宗實錄』 9年 12月 13日)

7) 첩리(貼裏) : 철릭(天翼)·철릭(天益)·첩리(帖裡)·첩리(帖裏)라고도 한다. 조선 시대 문사(文士)의 상의(上衣)로 사용되었으며 조복(朝服)의 중의(中衣)로도 사용되었다.

8) 윤대(輪對) : 각 관사의 당하관(堂下官)들이 돌아가면서 낙점을 받아 매월 1일, 11일, 21일에 대전(大殿)에 들어가서 정사의 이해(利害)에 대한 물음에 대답하는 것을 말한다.

9) 양직(良直)과 종직(從直) : 이만실(李蔓實)의 아들이자 이승직(李繩直)의 형제이다. 종직은 계천군(鷄川君)이고, 양직은 시정(寺正)을 지냈다.(『嘉梧藁略』 冊16 「贈兵曹參議李公墓碣銘」)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2020년 10월) > 눌재선생유고 > 가장家狀 > 선조고 가선대부 대사헌 부군의 가장[先祖考嘉善大夫大司憲府君家狀]
*한국국학진흥원: https://www.koreastudy.or.kr/



●선조고가선대부대사헌부군가장 역문
(先祖考嘉善大夫大司憲府君家狀 譯文)

-손자(孫男) 홍준(弘準) 지음

부군의 이름은 승직(繩直)이고 자는 승평(繩平)이며, 본관은 경주(慶州)니 신라(新羅) 좌명대신(佐命大臣) 휘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이다.
부친은 벼슬이 대호군(大護軍)이고 이름은 만실(蔓實)이며, 조부는 벼슬이 사복판사(司僕判事)고 이름은 원림(元林)이다. 중조는 벼슬이 사재(四宰, 우참찬右參贊)고 시호는 정렬공(貞烈公)이며 이름은 규(揆)다. 고조는 삼중대광월성군(三重大匡月城君)이고 이름은 지수(之秀)니, 부군이 선덕(宣德, 명종 성종의 연호) 무오(戊午, 세종20 1438)에 출생하였다.
성장하면서 학행(學行, 학문과 행실)이 있어 처음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고 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여 세종조(世宗朝)에 처음 벼슬하니 청백한 것으로 추증되어 지위가 2품에 이르렀고 집에 있어서나 벼슬에 임해서나 기쁨과 성냄을 나타내지 않았다. 집에 조그만 아이 종이 있었는데 그릇을 깨끗이 씻지 않았다고 하여 밥을 수채에 버렸으니 비복(婢僕)이 들어와서 숙인 배씨(裵氏)에게 고했다.
부군이 퇴조(退朝, 퇴근)하면 징계하리라 생각하고 있더니 퇴조하매 그 사유를 상세하게 고하였더니 부군이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취할 점이 있고 성낼 것이 못 된다. 더러운 음식을 어찌 먹겠느냐? 두고 보라 반드시 충성스러운 하인이 될 것이다, 하시더니 부군이 하세한 뒤에 배씨가 세상을 뜰 때까지 백발이 되도록 집안일을 돌보아 과연 공로가 있었다.

양주목사(楊州牧使)가 되었을 때, 자기 아내를 소박한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아내가 실행(失行, 행실을 잃다. 즉, 정조를 타인에게 제공하다) 하였다고 떠들면서 소장(訴狀)을 직접 가지고 왔다. 그 전임목사가 핵실(覈實)하여도 실정을 얻지 못한 것을 부군께서 부임하자 제일 먼저 중대 사건으로 신문하였는데 비복(婢僕)과 자식들의 진술이 다 달랐다.
이것은 의심나는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부부를 틈이 조금 있는 감옥에 가두고 그 일을 맡은 관아의 한 종과 글을 아는 늙은 아전에게 벽 밖에서 가만히 지켜보도록 명하면서 반드시 서로 책망하는 말이 있을 터이니 적어서 받치도록 하라. 밤중에 아내가 남편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나를 버리고 싶어 하면 관이 아니라도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하필 나에게 꼭 불리한 누명을 씌어 소생 자녀들이 고향에서 얼굴을 못 들게 하오? 지금 옥에 갇혀있는 아이들도 또한 당신의 자식이 아닌가.
어찌 이렇게 사람을 박대하오. 하니 남편이 말하기를 벌써 소장을 제출하여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지금 와서 말을 바꾸면 중죄(重罪, 무거운 형벌)가 나에게 내릴 터이니 나도 후회가 되지만 어떻게 할 수 없다. 하거늘 아전이 그 전말을 상세히 기록하여 밤중에 갖다 바쳤다. 곧 뜰에다 횃불을 밝히게 하고 결심하니 남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복을 하니 형벌을 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조정에서나 야에서 그 밝고 위엄 있는 데 대하여 탄복하였다.

차출됨에 출발할 때 중망이 있는 고을 생원들을 청하여 납세의 물건을 감찰케 하고 부탁하기를 한 되 박한 근이 남는 것이 있더라도 집집마다 돌려주어서는 안 된다. 또 쓸 곳이 없으니 군이 알아서 처리하라 하고 교대하여 또 감찰케 하되 한 되, 한 홉, 한 량이라도 부족하면 집집이 거두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할 만한 이유가 없는 것이니 군이 알아서 하라고 하였다.
그때 마침 판사(判事) 김경손(金慶孫, 판사는 중추부 종1품 벼슬)이 생원일 때에 양주를 지나게 되었다. 그 고을 생원들과 같이 유숙하면서 누운 채 양관의 청탁(淸濁)을 말하다가 서로 탄복하였다.

병오(丙午)년에 내가 서울에 여행하여 판사의 이웃집에 사관을 정했을 때 판사가 나에게 ‘군의 왕고장(王考丈, 타인의 조부의 사후칭호)의 청백은 지금 세상에서 으뜸일세, 군이 듣지 못했을 것이므로 일러주니 가슴에 새겨 힘쓰도록 하게’라고 하였다. 또한 관속(官屬, 관아에 속해있는 사람)이 복분자(覆盆子, 산딸기)를 한 사발 따다가 받쳤다. 부군이 사람을 시켜서 녹피화자(鹿皮靴子, 사슴 가죽으로 만든 신발)를 가져오라고 하여 상으로 주고 복분자를 돌려주었다.
근무가 끝난 뒤에 조모가 조부에게 그러한 사실이 있었나 물었다. 조부는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조모가 아니 그것은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요.’라고 하였더니 관속 자기가 먹으면 되지 무엇이 어려울 것이 있소. 가지고 와서 나에게 주는 것은 성의요. 성의를 가지고 말한다면 신발이 오히려 박한 셈이요. 라고 하였다.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오던 날 품관(品官, 품계가 있는 관리)들이 관아 앞에다 목사를 위하여 환송자리를 베풀었다. 조용히 자리에 나아가서 앉아 각각 한 잔씩 가지고 오시오 라하고 술잔을 다 받아서 마시고 한 사람에게도 사양하는 빛이 없었다. 어찌 백 잔에 그치겠는가. 그러나 평일에는 한 잔도 마시지 않았으니 동료들이나 친척들도 주량이 이렇게 한없는지를 몰랐다.
치적이 우수함을 인정받아 당상관(堂上官, 통정대부 정3품 이상)으로 초수(超授, 몇 등급 뛰어넘어 관등을 제수하다) 되니 이웃 고을에서 상마대(上馬臺, 말 탈 때 사용하는 대)와 안장을 만들어 보내주었으나 서울에 들어가서는 친구의 해진 안장을 얻어서 사용하고 전번에 선사 받은 것은 궤짝 안에 두고 사용하지 않았다.
생각건대 번관(煩官, 업무가 번거로운 관리)이 만든 것이어서 마음에 미안해서 그렇게 한 것인지 모르겠다.

경상감사(慶尙監司)로 갔을 때 가정에 왕복한 서신이 지금도 상자에 가득한데 서신중에는 무명으로 안을 댄 의복만이 실려있고 다른 비단으로 만든 화려한 물건은 없다. 일찍이 입시하여 교대로 대할 때 마침 소를 훔친 사건에 관하여 계장이 올라왔다. 위에서 조정 신하들이 도적질한 고기인 줄 모르고 먹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 후부터는 부군이 소고기를 자시지 않았다.
가중 하인들이 혹 나리라는 말을 쓰면 부군이 책망하여 나리라고 하는 종친가에 쓰는 말이지 사가에서는 못 쓴다. 「상전」이라 하라 하셨다. 그러나 금하여도 듣지 않았고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창녀를 보면 발로 벌레를 밟는 것 같아서 몸이 숭클하다고 하셨으니 풍악과 여색을 좋아하시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대부인(大夫人, 모친) 철성이씨(鐵城李氏)가 포천 전장(田庄, 시골 농사 집)에 계시면서 금침을 만들어서 싸두었다가 귀성(歸省, 부모 뵈러 오는 것을 말함)하기를 기다려서 펴주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 애는 나의 젖을 먹고 자랐으니 오로지 내 기운을 이어받았고 양직(良直)과 종직(宗直)은 유비(乳婢, 계집종으로서 유모 노릇을 한 사람)의 젖을 먹고 자라서 방탕한 성질이 많기 때문에 주시지 않았다. 혹 훔쳐 가면 반드시 찾아서 돌려주셨다.
위에서 크게 등용하려 하여 대사헌을 제수하니 얼마 안 되어 등창이 났으나 위에서 그 직책을 해임하지 않더니 종기가 다 아물지 않았는데 사헌부에 출근하셔 과로로 인하여 등창이 다시 터져서 신해년(辛亥年, 세종13 1431) 11월에 별세하셨다. 위에서 수라상에 반찬을 덜게 하시고 슬퍼하셨고관원을 명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전취이씨(前娶李氏)는 도감정랑(都監正郞, 국상 국혼 또는 그 밖의 큰 국사가 있을 때 임시로 설치하는 벼슬)의 따님이고, 후취배씨(後娶裵氏)는 사복정(司僕正: 정3품 벼슬) 상지(尙志)의 따님이다. 우리 조부의 아름다운 말씀과 행실이 후세에 법이 될 만한 것이 많은데 집에 소장한 문적이 계유(癸酉) 화란(禍亂) 때 유실되었다. 대강 들은 것의 만분의 일이라도 기록하여 후인의 고람(考覽, 참고)에 갖추는 바이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