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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군 이지수] 金紫光祿大夫月城君祭壇碑銘(금자광록대부월성군제단비명) 并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8. 18:20

□월성군 이지수(月城君 李之秀)

【계대(系代)】 병부시랑공(兵部侍郎公) 이신우(李申佑) → 1世孫 ①천호장공(千戶將公) 작량(作良) → 2世孫 ①사간공(司諫公) 선경(善景) → 3世孫 ②검교대장공(檢校大將公) 방렬(方烈) → 4世孫 국자진사공(國子進士公) 황승(黃升) → 5世孫 ②사성공(司成公) 극량(克良) → 6世孫 ②국자진사공(國子進士公) 창규(昌規) → 7世孫 국자진사공(國子進士公) 분(賁) → 8世孫 ②문열공(文烈公) 충요(忠堯) → 9世孫 ①월성군(月城君) 지수(之秀)



金紫光祿大夫月城君祭壇碑銘 并序 二十一世
(금자광록대부월성군제단비명 병서 21세)

-宗裔(종예) 鍾醇(종순) 撰(찬)

勝朝之末에 有以盛德弘猷요 身致大官하고 食采郡邑하야 輝煌當時하며 芬芳百世하야 後孫이 熾昌하야 蔚爲我李氏大派之祖者는 乃金紫光祿大夫三重大匡尙書左僕射月城君乎인저

公의 諱는 之秀니 慶州之李는 皆以羅代六部村長諱謁平으로 爲鼻祖하야 世仍貴顯하다 中世祖諱居明은 官이 蘇判이요 生諱金現하니 兵部令이요 生諱金書하니 始仕麗朝하고 娶新羅敬順王女하야 爲配하다 傳之屢世하야 諱申佑는 兵部侍郎이요 又傳八世하야 兵部尙書諱忠堯는 即公의 고야라 妣는 原州李氏니 貞茂의 女라
公이 有二子하니 長은 揆니 忠惠王朝에 官至四宰하고 諡는 貞烈이요 次는 縉이니 宰臣이라 揆는 生元林하니 判司僕寺事요 縉은 生乙休允聃하니 司議署令이라 元林의 子는 蔓實이니 太宗朝에 登文科하야 吏曹判書요 延實은 縣監이니 自此로 籫纓奕閥과 學問節義-繼世不絶하니 特學其顯要而記之하면 蔓實之長子從直은 贈判書封鷄川君이요 二子良直은 文科司諫院으로 至禮判하고 三子繩直은 文科慶尙道觀察使로 至大司憲하여 以淸白으로 見重於世하다 從直이 有二子하니 吉祥은 爲縣監하야 以善政으로 聞하고 陽生은 世祖朝에 以敵愾功으로 封鷄城君하고 吉祥之五世孫은 弘震이니 光海時에 隱于三角山中하야 不出一步地하고 仁祖改玉에 以潛底舊諠로 累徵不起하야 因有處士稱하다 陽生의 子는 泰岳이니 戶曹判書로 封鷄善君하고 鷄善君의 子 橚은 正憲大夫知中樞鷄興君이요
良直의 子는 思剛이니 文科大司成이요 錄扈駕功하고 其弟臻剛은 府使라 思剛이 有二子하니 季孫은 文科執義니 見 端宗遜位하고 與弟末孫으로 聯棣落南하야 一則庄點于湖西之禮山花山下하고 二則湖南之南原하야 作詩以誓之하고 不復仕進하다 季孫之六世孫檍이 南漢之役에 白衣從軍하야 力戰死之하나 肅宗壬午에 命旌閭하다
繩直은 五子니 不敏은 判官이요 命敏은 贈戶曹參判이요 諡는 忠愍公이니 莊陵朝에 配食士壇하고 勿敏은 主簿요 靡敏이요 時敏은 號琴湖니 才華絶異하야 世稱神童하고 慷慨有氣節이러니 自 光陵之受命으로 南下永嘉之琴溪村하니 金梅月堂이 題琴湖高士하고 琴湖-有四子하니 崇準은 忠順衛요 宗準은 號慵齋니 選入湖堂하고 學問이 鳴世러니 以金佔畢齋門人으로 被成年禍하고 次는 弘準이니 號訥齋요 成均進士니 亦有學行하고 自撰誌文하야 爲世絶贊하여 兄弟-共享栢麓祠하니 世稱雙珠러라 公準은 訓導이니 鳴呼라

公이 以勝朝藎臣으로 職在一品하고 榮名이 滿朝野하여 及至孫曾하야 乃公乃卿이 指不勝屈하니 宣乎國史家牃之可與天壤으로 傳之無弊而一自麗革으로 文獻之蕩佚者-十居八九하니 可勝言哉아 雖然이나 閱世累百에 雲仍之布濩八域者-其數不億하니 德厚流光에 此可以㮣公矣라 事蹟之不傳이 於公에 文何加損焉이리요 諸後孫이 以其追遠報本之無所展誠으로 爲恨하야 亟圖設壇而享之하고 請其牲石之銘於不侫曰今世에 苦無秉筆하니 自爲同宗則幸無恝也하라
窃念公之世-玄遠하야 並與其生卒及配-俱無所據하니 難乎其爲銘矣라 然이나 公之位-非不顯矣며 公之時-非不陵矣則立朝行治-必有彬彬可觀이나 而其於杞宋에 何哉아 壇在於後孫楸鄕 安東郡琴溪面仕望里 坐之原하고 來請其銘者는 成鎬在英龍濬이요 始終幹事者는 寅燮東鎬台永甫也라

系以銘曰
猗月城君은 勝國藎臣이라 立朝事君하니 文質이 彬彬이라 位至一品하고 德孚萬人이라 食采封君하니 禮遇並臻이라 德流後昆하니 無竆千春이라 源深派長하니 文武縉神이라 世垂玄遠하니 文獻이 無因이라 生卒墓域이 一何沒湮고 雲孫不億에 感慕益新이라 築壇享之하니 周爰咨詢이라 置田置齋하니 齋宿明禋이라 我述銘辭하야 刻之貞珉하노라

丙寅 十一月 上潮


*1987년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


●금자광록대부월성군제단비명 병서 역문
(金紫光祿大夫月城君祭壇碑銘 并序 譯文)

-종예(宗裔) 종순(鍾醇) 지음

고려(高麗)의 말기에 이르러 성대한 덕과 훌륭한 도량으로 큰 벼슬에 오르고 군읍(郡邑)에 봉군(封君)되어 당시에 빛이 나고 백세(百世)까지 방명(芳名)을 남기었으며, 그 후손도 번창하여 우리 이씨 대파(李氏 大派)의 조상이 된 분이 있으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삼중대광(三重大匡)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 월성군(月城君)이다.

공(公)의 휘는 지수(之秀)이니 경주이씨(慶州李氏)는 모두 신라(新羅) 때에 육부촌장(六部村長) 휘 알평(謁平)으로 시조(始祖)를 삼아 대대로 귀하게 되고 현달(顯達)하였다.
중세조(中世祖)의 휘는 거명(居明)이요, 벼슬은 소판(蘇判)이다. 휘 금현(金現)을 낳으니 병부령(兵部令)이요, 휘는 금서(金書)를 낳으니 비로소 고려(高麗)조정에 벼슬하고 신라 경순왕(新羅 敬順王)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배위(配位)를 삼았다.

여러 대를 내려와 휘 신우(申佑)는 병부시랑(兵部侍郞)이요, 8세를 내려와 병부상서(兵部尙書) 휘 충요(忠堯)는 공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원주이씨(原州李氏) 정무(貞茂)의 따님이다.
공이 2자를 두었으니 맏이 규(揆)는 충혜왕(忠惠王) 조정에서 벼슬이 사재(四宰)에 이르고 시호는 정렬(貞烈)이요, 다음 진(縉)은 재신(宰臣)이다. 규(揆)는 원림(元林)을 낳았으니 사복시판사(司僕寺判事)요, 진(縉)은 윤담(允聃)을 낳았으니, 사의서령(司議署令)이다.
원림(元林)의 아들 만실(蔓實)은 태종조(太宗朝)에 문과(文科)로 이조판서(吏曹判書)이고, 연실(延實)은 현감(縣監)이다. 이때부터 혁혁한 문벌과 학문 절의가 대대로 계승하여 끊기지 않았으니 특별히 그 현달한 자를 들어서 기록하자면 만실(蔓實)의 맏자제 종직(從直)은 증직이 판서(判書)로 계천군(鷄川君)을 봉하고 둘째자제 양직(良直)은 문과(文科)로 사간원(司諫院)을 지나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고 셋째 자제 승직(繩直)은 문과(文科)로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 대사헌(大司憲)에 이르고 청백(淸白)으로 세상에서 추중을 받았다.

종직(從直)은 2자를 두었는데 길상(吉祥)은 현감(縣監)이 되어 선정(善政)으로 알려졌고 양생(陽生)은 세조조(世祖朝)에서 적개(敵愾, 역적을 물리침)의 공로로 계성군(鷄城君)을 봉하고 길상(吉祥)의 5세손 홍진(弘震)은 광해(光海) 때를 당하여 삼각산중(三角山中)에 은거하여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는데 인조(仁祖)가 반정하매 잠저(潛底, 임금이 되기 전)의 옛 정의로 여러 번 불렀으나, 일어나지 않으므로 처사(處士)의 칭호를 받았고 양생(陽生)의 자제 태악(泰岳)은 호조판서(戶曹判西)로 계선군(鷄善君)을 봉했으며, 계선군(鷄善君)의 자제 숙(橚)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知中樞) 계흥군(鷄興君)이다.

양직(良直)의 자제 사강(思剛)은 문과로 대사성(大司成)인데, 호가(扈駕, 왕을 모시고 도망감)한 공로에 책록되었고, 그 아우 진강(臻剛)은 부사(府使)이다. 사강(思剛)이 2자를 두었는데 계손(季孫)은 문과 집의(執義)인데 단종(端宗)이 왕위(王位)에 쫓겨남을 보고 아우 말손(末孫)으로 더불어 같이 낙남(落南)했는데 형은 호서(湖西) 예산(禮山)의 화산(花山) 아래에 터를 잡고 아우는 호남(湖南) 남원(南原)에 정착하여 시(詩)를 지어 맹세하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계손(季孫)의 6세손 억(檍)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전쟁에 백의(白衣, 벼슬하지 않은 선비)로 군사를 따라 힘껏 싸우다가 죽었으므로 숙종(肅宗) 임오(壬午, 1642)년에 정문(旌門)을 명했다.

승직(繩直)은 5자를 두었으니 불민(不敏)은 판관(判官)이요, 명민(命敏)은 증직이 호조참판(戶曹參判)이며, 시호는 충민공(忠敏公)으로 장릉(莊陵, 단종端宗의 릉陵)조에 사단(士壇)에 배향되었고 물민(勿敏)은 주부(主簿)요, 미민(靡敏)이요, 시민(時敏)은 호가 금호(琴湖)인데 재주가 특이하여 세상에서 신동(神童)으로 칭하고 강개(慷慨, 의기심이 우뚝함)하여 기절(氣節)이 있었는데 광릉(光陵, 세조世祖의 릉陵)이 왕위에 오르매 영가(永嘉, 안동安東)의 금계촌(琴溪村)으로 내려가서 김매월당(金梅月堂, 이름은 시습時習)이 금호고사(琴湖高士)라는 액자를 써주었다.

금호공(琴湖公)이 4자를 두었으니 숭준(崇準)은 충순위(忠順衛)요, 종준(宗準)은 호가 용재(慵齋)인데 호당(湖堂, 나라에서 여가를 주어 글 읽는 곳)에 뽑혔고, 학문이 세상에 울리었는데 김점필재(金佔畢齋, 이름은 종직宗直)의 문인으로 무오(戊午, 1498)년 사화(士禍)를 당했다.
다음은 홍준(弘準)이요, 호가 눌재(訥齋)인데 성균진사(成均進士)로 또한 학행이 있었고, 자기의 묘지문(墓誌文)을 지어 세상에서 일컫게 되었고 형제(兄弟)가 같이 백록사(栢麓祠)에 배향되어 세상에서 쌍주(雙珠)라 칭하였다.
다음은 공준(公準)이니 훈도(訓導)라.

아! 공이 고려조(高麗朝)에 세록(世祿)의 신하로 벼슬이 일품(一品)에 이르러 영광된 이름이 조야(朝野)에 가득하였고 손자와 증손에 이르러 공경(公卿)을 지낸 분이 손가락을 굽혀 셀 수 없이 많았다.
마땅히 국사(國史)와 가첩(家牒)에 기재하여 천지(天地)로 더불어 같이 전할 것인데 고려(高麗)가 망함으로부터 문헌(文獻)이 유실된 자가 十에서 八·九분이나 되니 차마 말할 수가 있으리오, 그러나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 자손이 팔도(八道)에 분포하여 사는 자가 그 숫자를 세지 못하겠으니 덕이 두려우매 유파(流派)가 더욱 빛이 나므로 여기에서 공을 헤아릴 수가 있다.
사적이 전하지 못한 것이 공에게 무슨 가손(加損)이 있겠는가?
여러 후손들이 추모하고 보답하는 정성을 펼 곳이 없으므로 한을 삼아 급히 설단(設壇)하고 제사 지낼 것을 도모하여 비석의 명문(銘文)을 나에게 청하면서 이르기를, 『지금 세상에 병필가(秉筆家, 남의 글을 짓는 큰 문학가文學家)가 없으니, 자네가 동종간(同宗間)이 되었음, 즉 행여나 모른 체하지 마오』 한다.

저기 생각건대, 공의 세대가 요원하여 생졸(生卒)의 연도와 배위까지도 모두 근거 삼을 바가 없으니 명문(銘文)을 쓰기가 어렵도다. 그러나 공의 지위가 현달하지 않음도 아니며 공의 시대가 융성하지 않음도 아닌즉 조정에 나가서 행한 사적이 반드시 훌륭하여 볼만함이 있을 것인데 그 문헌(文獻)의 증거가 없으니 어찌할까, 단소(壇所)는 후손(後孫)이 거주하는 고장 안동군(安東郡) 금계면(琴溪面) 사망리(仕望里) 좌(坐)에 있고, 나를 찾아와 명문(銘文)을 청하는 자는 성호(成鎬)·재영(在英)·용준(龍濬)이요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주선하는 자는 인호(寅鎬)·동호(東鎬)·태영(台永)보(甫, 아무개)이다.

명(銘)으로 이어서 이르기를,
아! 월성군(月城君)이여 고려(高麗)의 세신(世臣)이네, 조정에 나가 임금을 섬기니 문채(文彩)와 덕을 갖추었다.
벼슬은 일품에 이르고, 명망은 모든 사람에게 흡족하였네, 땅을 주어 월성군(月城君)에 봉하니 경례와 대우가 아울러 지극했구나, 음덕이 후손에게 흘렀으니, 천년(千年)에 무궁하리라.
원천이 깊고 유파(流派)가 길으니 문관(文官) · 무관(武官) 그리고 유현(儒賢)이 배출하였네, 세대가 요원하므로 문헌(文獻)의 징빙이 없네, 생졸년도(生卒年度)와 묘소(墓所)조차 어찌하여 모두 인몰 되었던가? 자손이 번창하니 느끼는 생각 더욱 새로웠고, 단을 모아 제향을 올리니 여러 의사 일치되었네.

위토와 제실을 마련하고 재게하며 제사 올리었네, 내가 명(銘)을 지어 좋은 비석에 새기노라.

병인(丙寅) 1986年 11月 상순


*1987년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