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종보/제404호 3면] 2025년 6월 25일 수요일
[역사탐구②] 명민, 황보인 김종서와 함께 저자에 효수되다
충민공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이명민(李命敏-월성군파 중조 21世)은 수양대군이 정권 찬탈을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에 김종서, 황보인 등과 함께 피살되어 저자에 효수된 인물이다. 그는 건축-토목 전문가로 세종과 문종으로부터 많은 신뢰를 받았으며, 사헌부지평과 호조정랑을 거친 문무관 출신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그런 그가 왜 피살되었는지, 그리고 일족에게 가해진 연좌의 참상까지도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歷史 사전은 물론, 경주이씨 종친들에게서조차 그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게 하고 있다. 하여 가급적 실록을 그대로 전제하되, 되도록 관찰자 관점에서 재구성하였다. 〈편집자 주〉
권남, 수양대군에게 "안평대군이 역모 꾸민다” 고하다
수양대군이 정란을 결행하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실록에 따르면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15일 전, 권남이 수양대군에게 “안평대군 세력이 반역을 꾸미고 있다”라는 내용을 고하였다. 역모의 실체적 진실은 알 수 없지만,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영의정 황보인의 가동(家?)으로 권람의 종 계수(桂壽)와 더불어 혁공(革工)을 동업(同業)하는 자가 있는데,” 계수에게 말하기들,
“우리 주인 영상(領相)이 김정승(김종서) 등 여러 재상과 더불어 모여서 의논하여, 장차 임금을 폐하고 안평대군을 세워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오는 10월 12일과 22일로 기한을 정하였다”하니, 말하기를,
“안평대군이 우리 주인에게 묻기를 어떤 꾀로 국사를 많이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우리 주인이 말하기를,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할 날이 급박한데 수리하는 날이 늦는다고 아뢰어 외방(外方)의 군인 수천 명을 불러서 이명민으로 하여금 아울러 거느리게 하고, 또 비밀히 항해도 충청도 두 도(道)의 물가에 있는 한두 주군(州郡)의 군사를 징집하여 배에 싣고 와 마포(麻浦)에 대면 대군께서 새벽을 타 거느리고 들어와 이명민과 합세하면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더라” (중략…) (단종실록7권, 단종1년 9월25일 무인1번째기사 1453년)
계유정난으로, 명민의 친인적 쑥대밭 되다
마침내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10일(음력), ‘안평대군의 역모’에 철퇴를 가한다는 명분으로 황보인 김종서 등 대신 수십 명을 피살하고 정권을 잡는 이른바 계유정난을 획책한다. 실록을 요약하면 권남, 한명회, 홍달손. 강곤, 홍윤성 등은 수양대군의 명에 따라 정적 제거에 나선다. 김종서와 김승규 부자는 수양대군이 수하를 데리고 집으로 찾아가 칼로 베고, 안평대군은 강화에서 사약으로 죽이고 황보인, 이양, 조극관 등은 궁으로 들게 하여 제3문에서 철퇴로 죽이고 윤처공, 이명민, 원구, 조번 등은 집으로 사람을 보내 칼로 베었다. 그런데 김종서와 이명민은 이튿날 다시 깨어나 김종서에게는 홍달손, 이명민에게는 박제함을 보내 다시 베었다. 이들 가운데 김종서 부자, 황보인, 이양, 조극관, 민신, 윤처공, 조번, 이명민, 원구 등은 모두 저자에 효수되었다. (단종실록8권, 단종1년 10월10일 계사1번째기사 1453년)
명민을 역모의 군사동원 주모자로 지목하다
의정부에서 단종에게 고한 안평대군의 모역(謀逆)은 23가지다. 이중 명민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것은 3가지다. 이중 2가지는 명민을 군사동원 주모자 중 한 사람으로 지목한 것이다.
△앞서 거사 15일 전에 권남이 수양대군에게 고한 내용 가운데 이명민의 군사동원에 관한 그것이다. 이명민이 경기, 충청 등지에서 수군 수천을 마포 나루에 대면 이용이 군을 이끌도록 하는 것이다. △또 이명민은 따로 역도 중에서 용감한 자를 뽑아 경중으로부터 응하면 또 한 뜻을 이룰 수 있다하여 그리하자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황보인, 민신 등이 안평대군의 심복 이명민으로 하여금 많이 역도를 맡아서 응원에 대비하고(중략…), 영선에 필요한 물건을 물 쓰듯 하였다는 내용이다. (단종실록8권, 단종1년10월23일 무신2번째기사 1453년)
어쨌든 대명률에 근거한 난신에 대한 연좌 처결이 시작되었다. 수양대군은 “이용, 이우직, 황보인, 김종서, 이양, 조극관, 민신, 윤처공, 이명민, 김연, 조번, 김승규, 원구, 이현로, 대정, 하석 등 주형(誅刑)을 받 사람의 아비와 16세 이상 자식은 영원히 관노에 붙여라. 또 나이 15세 이하 및 모녀, 처첩, 조손, 형제, 자매 또는 자식의 처첩은 영원히 외방 관노에, 백숙부와 형제의 아들은 외방에 안치하라. 주형 받은 자들 이외에는 재산을 적몰하지 말라” 하였다. (단종실록8권, 단종1년 10월13일 병신6번째기사 1453년)
실록에는 명민의 일족에 대한 이야기가 산발적으로 나온다. 부인, 사위, 조카 등이다. 먼저 명민의 부인이다. 난신의 부녀를 공신들에게 나누어 준 처결에 나온다. “이소동의 아내 천지, 이공희의 아내 동이, 심상좌의 아내 미비을개와 딸 계금은 계양군 이증에게 주고(중략…) 이명민의 아내 맹비는 좌승지 한명회에게 주고(실록 원문:李命敏妻孟非賜左承旨韓明澮)(중략…)” “주고”의 수가 1백여 명에 달하였다고 쓰여 있다. (세조실록5권. 세조2년9월7일 갑술4번째기사 1456년)
조카들의 방면도 나온다. “15년 후, 외방에 안치되었던 명민의 조카 맹준, 은동, 은철, 흥조, 영조, 철동, 환승, 연동, 말손, 오을, 미동, 잉질동, 중동 등 13명이다.” (세조14년9월6일 임술3번째기사 1468년)
간략하지만 사위의 기록도 있다. “명민의 사위의 아비가 민신(이조판서)이다.” (단종실록7권 단종1년9월5일 무오1번째기사 1453년)
하지만, 부인, 사위, 조카에 대한 기록도 있으면서 아들에 대한 기록이 없다. 경주이씨 족보(2015년 월성군파 계천군계 가승보)를 보면 명민은 4남 1녀를 두고 있다. 건금(乾金), 건옥(乾玉), 건철(乾鐵) 3형제는 왕명에 따라 교살(矯殺)되고 당시 15세 미만인 건석(乾石)만이 생존하였으며, 사위는 민보계(閔甫啓)로 이조판서 민신의 아들이라고 쓰여있다. 왕명으로 3형제가 교살되었다고 했는데, 실록에 그 처결 기록이 없는 것이다. 실록에 乾金, 乾玉, 乾鐵 3형제는 안평대군의 장자방 이현로의 아들로 나와 있다. 더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단종실록12권. 단종2년8월15일 1번째기사 1454년).
명민 정조 때 장릉에 배향, 종2품 병조참판에 추증
수양의 계유정난 정당성 결여, 실체적 진실 추적해야
단종은 숙종 때 왕으로 복원되었다. 그러나 단종의 장릉(영월) 배향은 정조 때 이루어졌다. 충절의 장판옥(藏版屋)에는 공신 별로라 230명의 위패가 모셔졌다. 정단(正壇)에는 판서급 이상의 안평대군 이용,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를 위시하여 32인이, 그다음 별단(別壇)의 상단에는 조사위(朝士位)라 하여 평안감사 조수량, 충청감사 안완경, 선공감부정 이명민 등 8인이, 그리고 그 하단에 190위가 배향되었다. 그런데 순조 때 조사위에 4명, 환관, 여인 등 38명이 추가되어 현재는 268명에 이른다. 숙종 때 명민에게는 종2품 병조참판 추증과 함께 충민공이 내려졌다. (정조실록32권, 정조15년2월21일 병인2번째기사 1791년)
실록을 보면 계유정난의 정당성은 그 부족함이 너무 많다. 사태를 조작한 혼적들이 곳곳에 있다. 실체적 진실은 계속 추적되어야 한다.
상우 편집위원
전 문화일보 사회부장
전 문화일보 논설실장
전 가천대학교 부총장
전 중앙화수회 부회장
현 중앙화수회 중앙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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