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충민공◇이명민

[경주이씨종보/역사탐구①] 충민공 명민(命敏), 세종(世宗)·문종(文宗)이 극찬한 건축가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5. 7. 11. 12:32

[경주이씨종보/제403호 5면] 2025년 5월 30일 금요일
[역사탐구①] 충민공 명민(命敏), 세종(世宗)·문종(文宗)이 극찬한 건축가


충민공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이명민(李命敏-월성군파 중조 21世)은 수양대군이 정권 찬탈을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에 김종서, 황보인 등과 함께 피살되어 저자에 효수된 인물이다. 그는 건축-토목 전문가로 세종과 문종으로부터 많은 신뢰를 받았으며, 사헌부지평과 호조정랑을 거친 문무관 출신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그런 그가 왜 피살되었는지, 그리고 일족에게 가해진 연좌의 참상까지도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歷史 사전은 물론, 경주이씨 종친들에게서조차 그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게 하고 있다. 하여 가급적 실록을 그대로 전제하되, 되도록 관찰자 관점에서 재구성하였다. 〈편집자 주〉


명민, 내불당 신축과 경찬회로 세종의 신임 얻다
명민은 세종조(世宗朝)에서 1453년(단종1년) 계유정난으로 피살될 때까지 숭례문-경회루 등의 증축•증수와 창덕궁 부속건물의 신축, 함경도 육진(穴鎭)과 한양성을 축성(築城)한 전문인으로, 보기 드물게 사헌부 관직까지 지낸 인사다. 그는 세종조에서 대사헌을 지낸 이승직(李繼直)의 적자(차남)로,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민신(閔仲)과는 친사돈 간이다.
무관 명민이 건축-토목-영선(營繕) 등의 역사(役事)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민신의 천거에 의해서다. 공조에서 받은 관직은 수 선공녹사(守 繕工錄事, 종7품)다. 첫 보직은 경복궁 내의 내불당(內佛堂) 신축 감독이다. 불당은 3년 만에 완공(1448년)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경찬회는 세종을 비롯하여 수양, 안평대군 등의 종실과 중신들이 참여한 가운데 5일 동안 밤낮으로 열렸다. 척불(斥佛) 정책을 폈던 세종이 내불당을 신축하고 법회까지 연 것은 두 가지 이유다. 첫째는 정소공주, 광평대군, 평원대군 등 자식들이 잇따라 병사하고, 불교 신자인 소헌왕후마저 병석에 눕자, 이를 위로하고, 친동생 효령대군이 스님이 된 것과도 무관치 않다. 그리고 한글 창제에 따른 한글 보급을 불교 서적의 간행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것이 그 두 번째다. 명민은 불당신축의 공으로 품계를 뛰어 올려 받는다. 나라 재정을 보는 호조 좌랑(戶曹佐郞, 종6품)이다(세종실록 122권, 세종30년12월5일 정사1번째기사 1448년).

세종, 한글 보급 위해 불경 찍는 인경지 제작·감독도 맡겨
실록을 보면, 명민에 대한 세종의 신뢰가 나온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조정랑 이영서와 호조좌랑 이명민에게 명하여 인경지(印經紙, 불경을 박아 낼 때 쓰는 종이)를 조지소(造紙所)에서 만드는 것을 감독하게 하라. 명민이 처음에 선공녹사로서 토목공사를 맡아 볼 때 잘 판비(判批, 신하가 아뢰고 왕이 답하는 토론식의 문답)하여 이루므로, 드디어 인연이 되어 임금이 알게 되었다. 명민은 얼마 아니 되어 낭관(郞官)으로 높이 올랐는데, 모든 감독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명민으로 하게 하라” 하였다(세종실록127권, 세종 32년 윤일월 20일을 축 3번째 기사 1450년).

이명민이 증축·증수한 궁궐 건물.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숭례문·경회루·한양성·인정전(경복궁)


숭례문-경복궁-창덕궁 등 궁궐 신축·증축·증수 전문가
부패 감찰위해 명민을 사헌부지평에 겸직시키다
문종(文宗)도 명민에게 깊은 신뢰와 관심을 보였다. 선공 감 직책의 도청(都廳)을 맡은 명민에게 지방의 탐관오리를 감찰할 수 있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정5품)까지 겸직 시켰다(문종실록3권, 문종즉위년9월10일 신해3번째기사 1450년).
또 5품 직사(職事)를 거치지 않고 수 선공감부정(守 繕工監副正, 종4품)을 제수받았을 때도 감쌌다. 의정부에서 반대 의견을 내자 임금이 말하기를, “명민은 비록 5품 직사를 거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전에 봉훈대부(奉訓大夫)와 봉직대부(奉直大夫)로 수(守) 4품에 있는 자이니, 무엇이 이명민에게 방해되겠느냐? (중략…) 이름을 들은 지 오래되었고, 사람됨이 우직(愚直)하고 다른 죄루(罪累)가 없으니 비록 감찰(사헌부)을 제수하더라도 무슨 방해됨이 있겠느냐?” 하였다. 실로 믿음의 극찬이다. (문종실록10권, 문종1년10월12일 정축 3번째기사 1451년) 부정(副正)은 본래 종3품 관직이다. 허나 종4품으로 명하기도 한다.
문종의 명민에 대한 신뢰는 실록에 또 나온다. 명민이 양녕대군의 사인(使人)이 청탁하자, 이를 거부하며 ‘사인을 구타한 죄로 2등(等)을 감해야 한다’라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임금이 말하기를, “이명민의 죄는 양평대군의 청을 듣지 아니한 일로써 단정한 것이 아니라, 대군의 사인을 예로 대접하고 청을 듣지 아니하였으면 가하거니와 어찌하여 성을 내어서 구타해 내칠 것인가? 그러나 율문(律文)에 혹 부당함이 있으면 2등을 감하라 하였다.” 윤허하지 않았다(문종실록6권, 문종 1년 3월19일 무오4번째기사 1451년).
명민이 시행한 역사는 다양하다. 물론 위로 도제조가 있지만, 도청을 맡아 경복궁과 근정전, 경회루-창덕궁과 인정 전-숭례문-흥인문-사직단 등을 증축·증수하였다. 외세를 막는 축성에도 힘을 쏟았다. 세종이 심혈을 기울였던 함길도 6진 중 종성, 온성의 축성과 한양성도 쌓았다. 단종하에서도 경기도-강원도-충청도-황해도의 선군(船軍)을 동원하여 축성하느라 밤낮을 쉬지 않았다. 축성은 한 번에 수천 명씩의 군인이 동원되어 임금을 비롯해, 조정에서도 크게 관심을 기울이는 역사다.

그림은 세종 30년(1448년) 음력 7월, 세종이 경복궁 안에 지은 내불당(內佛堂).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명민은 내불당 신축의 공으로, 세종으로부터 호조좌랑을 제수받았다.


단종, 명민을 종3품 선공감부정에 제수하다
함경도 6진 중 온성과 종성, 한양성도 축성
단종(端宗)이 즉위하였다. 단종은 자신의 고명대신을 중심으로 40여 명에게 관직을 내렸다. 황보인이 영의정으로 유임되고 김종서를 좌의정, 정분을 우의정에 제수했다. 정분과 민신이 선공제조(繕工提調, 종2품)에 제수되고 이명민 또한 선공감부정으로 도청 업무를 맡았다. 명민은 모든 역사의 적재적소에 군 병력을 차출하여 썼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측근인 정인지가 병조판서로 제수되면서 병력 동원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공사에 차질을 빚어지자, 황보인이 정인지를 판원사로 내쳤다. 이를 계기로 고명대신들을 향한 수양대군의 견제는 눈에 뜨이게 심해졌다. 특히 무관 출신인 명민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군인 동원과 통솔 능력 때문이다(단종실록4권, 단종즉위년 12월11일 기해1번째기사 1452년).
급기야 수양대군의 장자방 한명회가 명민의 정치적 색깔을 확인하고자 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전후로 보아 명민의 군사동원 능력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 어느 날, 황보인과 김종서의 지시로 갑자기 창덕궁 증수가 시작되는 바람에 장안의 석공과 목공이 모두 동원되어 목수를 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명민, 수양대군의 장자방 한명회와 격하게 충돌하다
“하루는 한명회가 이명민을 역소에 나타났는데, 마침 수양대군이 사람을 시켜 재인(목수)을 청하니,” 명민이 답하기를, “공역(工役)이 바야흐로 많아서 감히 명령을 듣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실록은 이어진다.
이에 한명회가 희롱하기를, “네(명민)가 안평대군(이 용)을 위하여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세웠고, 또 담담정(淡淡亭)을 용산강(龍山江) 위에 지었으며 또 김정승(김종서)을 위하여 별실을 짓는 데에 재목과 기와를 운반해 주고, 집을 얽고 담을 바르는 일을 일찍이 어렵지 않게 하였다. 같은 왕자인데 홀로 수양대군에게는 어찌하여 한 장인(匠人)을 아까워하는가?” 하니, 이명민이 말하기를,
“네(한명회)가 어찌 알겠느냐? 안평대군은 일국에서 우러러보는 바인데,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양대군 같은 이는 비록 명하는 바를 따르지 않을지라도 내게(이명민)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당시 명민은 선공감부정으로 사헌부지평과 호조정랑(정5품) 등의 관직을 차례로 지냈고 숭례문 역사를 감독하여 몇해 사이에 1급을 더하여 종3품 부정에 올라 있던 시기다. 민신과의 관계도 실록에 나온다. “명민의 사위(민보계)의 아비가 민신이다”. 명민이 딸을 민신의 며느리로 준 친사돈 사이다.(단종실록7권, 단종1년9월5일 무오1번째기사 1453년)
하지만, 명민이 수양대군과 한명회를 싸잡아 조롱한 것은 ‘한명회의 살생부’에 오르고도 남을 응대다. 실록을 종합해 보면, 명민은 건장한 체격에 우직하고 관직에 충실한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었던 같다〈다음호에 2편〉.

상우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