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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코리아뉴스] 연산군 금표비, 멸문지화 무풍군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10. 24. 16:07

연산군 금표비, 멸문지화 무풍군

등록날짜 [ 2015년06월18일 20시18분 ]

- '이곳에 들어오는 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목을 치리라!‘
- 권력투쟁의 두 축 가운데, 한 축은 적으로 돌리지 말라.



[더코리아뉴스] 권순삼 선임기자 = 연산군시대 금표비(燕山君時代禁標碑)는 조선 제10대 왕인 연산군(재위 1494∼1506)이 자신의 유흥지에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 세운 비다. 당시 금표 구역은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파주시·양주시·포천시·남양주시·광주시·구리시·김포시 등이었다. 《연산군일기》에는 1504∼1506년에 이르는 금표의 내용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금표비가 있는 고양시는 연산군 시대에 고양군이었는데, 1504년(연산군 10) 왕의 유흥지가 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다시 고양군이 되었다.

현재 금표비가 있는 곳은 원래의 자리가 아니다. 금표비가 최초 발견된 곳은 이곳에서 북쪽 능선으로 150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조선 제3대 왕인 태종의 아들인 온녕군의 손자 금천군 이변이 묻혀있는 묘소였는데, 문중에서 묘역을 보수할 때 출토되었다. 출토 당시 금표비는 상단과 하단의 왼쪽 일부가 떨어져 있었으며, 땅속에 오랫동안 묻혀 있어서 지금도 황토빛이 뚜렷이 남아 있다. 비 앞면에는 '금표내범입자 논기훼제서율처참(禁標內犯入者 論棄毁制書律處斬)'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 금표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왕명을 어긴 것으로 보아 목을 참한다는 내용의 비문이다. 연산군의 폭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금표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웠는데, 높이 147㎝, 가로 55㎝, 두께 23㎝이며, 현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연산군 시대의 금표비다.

무풍군 이총(당시는 ‘무풍정’이었다)은 사림파의 거두인 김종직의 제자였다. 당시 사림파의 구성원이었던 김일손, 김굉필, 정여창 등과 교류하고 있었으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의 사위이기도 했다. 종친 중에서 안평대군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학문과 예술이 뛰어나서 사림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무풍군 이총 일가의 비극은 1498년 7월에 일어난 무오사화가 발단이 되었다. 신진세력(사림파)과 기성세력(공신, 훈구파) 간의 권력투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훈구세력은 인척과 정실을 통해 벌족을 형성하고 있었다. 결국 훈구세력인 유자광과 연산군에 의해 이미 사망한 김종직은 부관참시 당하고, 김일손 등 많은 사림파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무풍군 이총 역시 ‘종친이 사림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왕실을 비방’한다는 죄목을 씌워 함경북도 온성으로 유배를 당했다. 유배지에서 귀양생활을 하던 중 도성으로 압송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함경남도 단천군 마곡역에서 있었던 ‘벽서(대자보) 사건’ 때문이었다.

용재 이종준은 김종직의 문하생이었는데, 의성 현령이었다. 무오사화 때 사형을 당한 김일손 등의 죄를 묻지 말고 유자광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곤장 80대를 맞고 함경남도 부령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무풍군 이총과 이종준은 의정부 녹양역에서 동행하여 함경도 단천 마곡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이종준은 마곡역 벽에 송나라 이사중이 직언을 한 죄로 귀양을 가는 당개를 위해 지은 송별시를 써 붙이고 귀양지로 향했다. “직언과 충언을 올리는 자는 나 하나 뿐이요, 다른 이는 감히 함께 하지 못하는구나(孤忠自許衆不與)”로 시작하는 이사중의 시를 통해 간신과 연산군을 원망하는 자신의 뜻을 간접적으로 밝힌 것이다.

함경도 관찰사 이승건이 벽서를 발견한 후, 마곡역 관리의 진술을 통해 이종준이 한 짓임을 알자, 이것은 ‘나라를 비방하고 왕을 헐뜯는 것’이라 조정에 보고했다. 시가 문제되자 이종준은 그 시를 쓴 사람은 바로 무풍군 이총이라 무고해 버렸다. 같은 문하생이었는데, 왜 이종준은 무풍군을 무고한 것일까? 아마도 두려움과 공포 때문이었으리라!

무풍군 이총과 이종준 모두 11월 17일 함경도에서 도성으로 끌려왔다. 무풍군 이총은 1499년 2월 25일 곤장 100대를 맞고 거제도로 다시 유배되었고, 이종준은 무고죄로 100여 일의 재판을 거쳐 3월 2일 처형당했다.

무오사화로 사림이 위축되자 이제는 훈구세력과 연산군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훈구세력 중 외척인 신수근을 중심으로 임사홍이 연산군을 지원하면서 나머지 훈구세력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 연산군과 훈구세력의 갈등이 격화되자 임사홍이 꺼내든 카드는 바로 연산군의 생모이자 성종의 후궁인 ‘폐비윤씨’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은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은 사람이든 훈구세력이든 무차별적으로 부관참시 및 참형을 시키고, 유배에 처했다.

폐비윤씨의 복위문제와 관련하여 1504년(연산군 10)에 일어난 ‘피의 숙청’인 갑자사화는 무풍군과 무풍군의 아버지 우산군 및 아들 등 6부자에게 비극을 안겨주게 되었다. 6월 1일, 무풍군의 아버지 우산군 및 아들 등 6부자는 남해의 절도로 유배당하고, 이틀 후인 6월 3일, 무풍군은 머리, 몸, 팔, 다리가 잘리는 능지처참을 당하고, 11일 저자거리에 효수되고 말았다. 2년 후인 1506년(연산군 12),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때 처벌받지 않은 사람에게 죄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병인사화다. 이 병인사화로 무풍군의 아버지 우산군 및 아들 등 6부자는 6월 24일, 사약을 받고 일시에 끔찍한 죽음을 당했다.

무풍군 일가가 멸문지화를 당한 3개월 후인 9월 18일, 사림과 훈구세력 모두를 적으로 돌린 연산군은 중종반정에 의해 폐위되었다. 무풍군을 비롯한 7부자의 신원이 회복되었고(이들 7인을 칠공자(七公子)라 한다), 묘지가 하사되었다. 현재 이들 묘소 중 무풍군의 형제인 한산군의 묘를 제외하고는 이장 등을 통해 묘소가 모두 이곳에 있다. 다행히도 6형제 모두 후손을 두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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