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눌재공◆이홍준

[국학연구 Vol.34] 화산삼걸(花山三傑)의 성립(成立)과 의의(意義)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5. 22. 20:53
[국학연구 Vol.34] 화산삼걸(花山三傑)의 성립(成立)과 의의(意義)

이종호 (李鍾虎, 안동대학교)

1. 머리말
2. 화산삼걸의 성립과 교유
3. 화산삼걸의 성격과 의의
4. 맺음말

2. 화산삼걸의 성립과 교유
2) 『남주일록』과 화산삼걸의 교유

(일부분)
화산삼걸의 현실인식과 관련하여 『남주일록』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인물이 있다. 성품이 충성스럽고 강직하였고 수령의 가혹한 정사에 분노해서 명종에게 「박민도剝民圖」를 그려 바친 이포李苞(자 仲容)이다. 명종은 그가 올린 상소문을 보고 크게 칭찬하고 벼슬을 내려 집경전集慶殿 참봉參奉에 제수했다. 그리고 「박민도」를 병풍에 그려 어좌에 세워두었다고 한다.1)

이포는 경주인으로 안동 금계리로 입향한 이종준李宗準(1454~1499, 자 仲勻, 호 慵齋)의2) 아우 이홍준李弘準(자 君式, 호 訥齋)의3) 손자로 내성현奈城縣 호평리虎坪里에 거주했다. 부친은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을 지낸 이덕장李德璋이고 모친은 류자온柳子溫의 딸로 류공권柳公權의 누이였다. 그러므로 이덕장은 류공권의 자형姊兄이 되고, 류경심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또한 이포와 류경심은 내외종內外從 간이 된다. 이덕장에 대한 자료가 없어 구체적인 생애를 알 수 없다.4)

이포는 1549년 사마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그리고 1554년 4월 앞서 말한 「박민도」를 올려 명종의 칭송을 받아 참봉에 제수됨으로써 그의 이름이 조야에 널리 알려졌다. 이포가 「박민도」를 그린 것은 국왕이 보다 소상하게 백성들의 고생하는 모습을 느껴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백번 귀로 듣는 것보다 한번 눈으로 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 생각했다.5)

『남주일록』에서는 4월 8일 “이포가 소를 올려 극렬하게 수령이 백성을 학대하는 상황을 말하고, 또한 그림으로 형상을 그려 「박민도」’라 제목 했다. 당시의 의론이 매우 그를 비난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포)이 온축한 사상을 볼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실록에서는 4월 27일 “경상도 안동부에 거주하는 생원 이포가 상소하고, 또한 민간이 겪고 있는 고통스런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바쳤다”라6) 했다. 그렇다면 이포가 상소한 날자가 4월 8일 이전이라고 봐야 한다. 이미 4월 8일쯤, 올린 상소에 대한 세인들의 비난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장문보는 상소문과 박민도 를 통해 이포의 사상을 감지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그의 사상에 동의했다고 본다. 그들이 공유했던 사상이 무엇이었을까? 다시 말해 그들의 ‘현실인식’의 핵심이 무엇이었겠는가?
이포가 명종에게 올린 상소문에 그 해답이 있다. 이포는 소장 머리말에서 이렇게 적었다.

오늘날 백성을 해치는 폐를 조목조목 진술하니 전하께서는 헤아려 주소서. 민생의 초췌와 호구戶口의 감수, 군졸의 유망流亡, 전야田野의 황폐가 지금보다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문음門蔭의 사람은 대부분 권귀權貴의 자식이거나 뇌물을 바친 사람들인데, 대부분 수령이 되어서는 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거두어 들여, 우리 백성들을 해치는 것을 이루 다 거론할 수 없으므로 우선 그 심한 것만을 들어 말하겠습니다.7)

소장의 내용을 다 말하지 않더라도 이포가 말하고자 하는 중심 주제를 알 수 있다. 즉 ‘수령이 되어서는 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거두어 들여, 우리 백성들을 해치는 것’, 즉 수령의 폐해와 그 제거방법이 논의의 핵심이다. 백성을 병들게 하는 폐해의 근원이 지방수령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다만 이포와 같이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선비가 없었을 뿐이다. 이포는 수령의 출신성분을 먼저 지적했다. 문음으로 수령직에 임명되는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세세한 상소문의 내용은 다른 지면을 빌려 논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더 이상 논하지 않기로 한다.
명종은 이포의 상소를 통해 “요즘 수령들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일은 치지도외하고 백성에게 긁어내는 것만을 일삼아 나라의 근본이 날로 병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나라를 유지하기가 어렵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포의 상소를 대신들에게 보인 뒤에 해조該曹에 내려 실천 가능한 내용을 연구하여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8) 또한 명종은 경상감사에게 지시하여 이포의 인물됨을 알아보도록 한 뒤 등용여부를 판단하고자 했다.9) 그 결과 마침내 1554년 6월 1일 이포는 제릉참봉에 제수되었다. 그 이유는 이포가 올린 상소문이 당시의 폐단을 논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고 정직했기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날 퇴계도 병조참의로 임명되었다.10)

명종은 자신이 즉위한 지 10년 동안 백성을 구제한다고 노력해 왔는데도 현실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포의 상소를 보고 깨달았다.11) 그래서 명종은 이포의 소장을 보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당시 대신 가운데 일부는 이포의 상소를 한낱 유자儒子의 말에 불과하다 하여, 소장에서 구사한 언어가 중도를 잃어 좀 과한 듯하니, 충서忠恕의 논論이라 볼 수 없다고 평가절하 했다.12)

이포의 상소가 말하고자 한 것은 굶주리는 백성을 효과적으로 구제하기 위해서는 지방수령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포는 ‘기민을 진휼하여 구제하는 사업’(賑救飢民之事)이야말로 16세기를 살아가는 양심적인 지식인이 감당해 내야할 책무라고 생각했다. 장문보는 경상도사가 되어 실제로 그 사업의 최전선에서 활동하였다. 장문보가 안동에서 변영청이나 이포를 만나 밤새 등불 심지를 돋아가며 도란도란 나누던 이야기의 주제도 ‘기민을 진휼하여 구제하는 사업’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장문보의 남주일록은 흥미 있는 장면 하나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11월 13일자 기록이 그것이다. 그날 화산삼걸이 모두 이용의 집에 모였다. 남주일록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는 이용은 누구인가? 이용은 앞서 살폈던 별좌 이굉의 아들이다. 이용의 선대는 여러 대에 걸쳐 문음門蔭으로 발신했다. 다만 반드시 시문詩文 공부에 종사해서 사마시만은 놓치지 않고 합격하여 생원 진사가 됨으로써 향촌지식인으로서 체모를 유지해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용은 운이 따르지 않아 사마시에 누차 낙방했다. 그런데 1554년(갑인) 나라에 엄청난 기근이 들자, 조정에서 ‘진휼을 도우면 벼슬길로 나갈 수 있다’(助賑入仕)는 명령을 내렸다. 그때 홀어머니 이씨부인은 벼슬도 못하고 지내는 아들이 걱정되었다. 억지로 모집에 나가라고 떠밀었다. 조정에 있는 지인도 그에게 출사를 권유했다. 부득이하여 이용은 관에 재물을 바치고 후릉厚陵 참봉을 제수 받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모친 생각에 중간에 그만두고 낙향한다. 왜냐하면 자기 부친인 이굉도 모친을 모시기 위해 출사 후 중도에 낙향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13)

1) 『永嘉誌』 卷7, 「善行」, “性讜直, 憤守令之苛政, 明廟朝, 進剝民圖, 上極加褒獎, 除集慶參奉, 遂以其圖造屛設御座.”
2) 李宗準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문과를 거쳐 舍人을 역임했는데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사화에 피화된 중종대에 모두 復官되었는데, 유독 이종준만 後嗣가 없어 복관을 청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숙종 15년(1689)(숙종15)에 와서야 부제학으로 증직되었다고 한다. 李玄逸(1627~1704), 葛庵集 卷24, 墓碣, 慵齋先生李公墓碣銘 ; 中宗實錄 4年 己巳(1509) 7月 1日(辛卯)條를 참조.
3) 李弘準은 안동 금계리에서 출생하여, 1486년 사마시에 입격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戊午士禍로 죄를 받아 형 종준이 죽자 출사를 단념하고 가족을 이끌고 奈城縣으로 이거하여 隱居講學하며 지냈다. 중국 藍田呂氏의 遺規를 바탕으로 「奈城洞約」을 만들어 시행하여, 내성현의 기풍을 크게 바꾸었다. 중종반정 후 덕행으로 천거되어 조정의 부름이 있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고 한다.
4) 이덕장이 죽자 아들 李苞가 퇴계에게 碣陰銘 찬술을 부탁한 듯하다. 그러나 이포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퇴계는 자기의 글이 ‘쓰기에 적합하지 못할 것’(甚知不中)이라 하면서, 다른 이에 청탁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退溪集』 卷24, 書, 「答鄭子中」을 참조.
5) 『明宗實錄』 9年 甲寅(1554) 4月 27日(丁酉)條, “然耳之所聞, 不如所見, 故臣取生民艱苦之狀, 萬分之一, 圖畫以進.”
6) 『明宗實錄』 9年 甲寅(1554) 4月 27日(丁酉)條, “慶尙道安東府居, 生員李苞上疏, 且圖民間疾苦之狀以進.”
7) 『明宗實錄』 9年 甲寅(1554) 4月 27日(丁酉)條, “竊以今日病民之弊, 條陳之, 伏惟殿下, 裁度之. 民生之憔悴, 戶口之不繁, 軍卒之流亡, 田野之荒廢, 未有甚於此時也. 門蔭之人, 率多權貴之子, 賄賂之人, 得爲守令, 斜科橫歛, 以殘吾民者, 不可悉擧, 姑取甚者言之.”
8) 『明宗實錄』 9年 甲寅(1554) 4月 27日(丁酉)條를 참조.
9) 『明宗實錄』 9年 甲寅(1554) 4月 27日(丁酉)條, “且李苞人物可用與否, 聞見馳啓事, 下諭監司.”
10) 『明宗實錄』 9年 甲寅(1554) 6月 1日(庚午)條를 참조.
11) 『明宗實錄』 9年 甲寅(1554) 4月 27日(丁酉)條를 참조.
12) 『明宗實錄』 9年 甲寅(1554) 5月 11日(庚戌)條를 참조.
13) 朴承任(1517~1586), 嘯皐集 卷4, 續集, 墓誌, 參奉李君(容)墓誌 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