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눌재공◆이홍준

[영가지(永嘉誌)] 畏影堂, 琴椅, 鄭惟一, 李苞, 李弘準, 郡守南義元墓, 進士李弘準墓, 察訪李徳璋墓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5. 7. 18:19

경북 유형문화재 제224호 영가지(永嘉誌)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유산 검색 > 영가지(永嘉誌)
*국역 출처: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 > 영가지


서자
종목: 경북 유형문화재 제224호
명칭: 영가지및책판(永嘉誌및冊板)
시대: 조선 선조 41년(1608)~대한제국(1899)
수량: 일괄(13책)
분류: 목판본/사간본
지정일: 1986.12.11
소유자: 권오기,권기백
소재지: 경북 안동시
문화재형태: 선장
형태서지: 1. 영가지 <권 1> 永嘉誌 <卷 一> - 조선 선조 41년(1608), 1책(冊).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21.8cm×18.0cm,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9자(字),주쌍행(注雙行),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32.0cm×22.0cm
~
4. 영가지 <권 4> 永嘉誌 <卷 四>
5. 영가지 <원> 永嘉誌 <元> - 조선 선조 41년(1608), 1책(冊).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3.8cm×18.2cm,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2자(字), 주쌍행(注雙行), 상하내향사판화문어미(上下內向四瓣花文魚尾); 31.7cm×24.2cm
6. 영가지 <형> 永嘉誌 <亨>
7. 영가지 <이> 永嘉誌 <利>
8. 영가지 <정> 永嘉誌 <貞>
9. 선조편집영가지 <제1책> 先祖編輯永嘉誌 <第一冊> - 대한제국(1899), 1책(冊).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0.6cm×17.6cm,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2자(字), 주쌍행(注雙行), 상하내향사판화문어미(上下內向四瓣花文魚尾); 32.2cm×22.2cm
~
12. 선조편집영가지 <제4책> 先祖編輯永嘉誌 <第四冊>
13. 간인시도 刊印時到 - 조선 선조 41년(1608), 1책(冊).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24.2cm×18.2cm,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9자(字); 30.3cm×21.7cm

해제
이 자료는 조선 중기 안동(安東) 지역의 지방지(地方誌)인 『영가지(永嘉誌)』와 이의 『책판(冊板)』이다. 영가(永嘉)는 화산(花山)과 함께 안동의 옛날 이름이다.
『영가지』의 편찬은 선조35(1602)년 권기(權紀, 1546~1624)가 스승 유성룡(柳成龍, 1542~1607)으로부터 편찬요목을 받아 동향인(同鄕人) 권행가(權行可)와 함께 편찬에 착수하였다. 이를 위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함주지(咸州誌)』의 편차를 참고하였으며, 그것을 다시 유성룡에게 질의한 다음 동향의 사우(士友)들과 함께 분담ㆍ집필케 하였으나, 유성룡이 죽자 중단되고 말았다. 그후 함안(咸安)의 읍지(邑誌)인 『함주지』를 편찬한 바 있는 정구(鄭逑, 1543~1620)가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오자, 권기ㆍ김득연ㆍ권오ㆍ이혁ㆍ배득인ㆍ이적ㆍ유우잠ㆍ이의준ㆍ권극명ㆍ김근 등을 소집하여 재편찬에 들어가 선조 41년(1608)에 완성하였다.
이때 편찬된 『영가지』의 초본(草本)이 부사(府司)에 소장된 채 지내오다가 영조 36년(1760) 서울 찬수청(纂修廳)에 바쳐졌고, 2년 후 서울에 올려진 것을 등초(謄草)하여 다시 부사(府司)에 비치하였다. 그 후 정조 8년(1784) 호장(戶長) 권창실에 의해 개장(改粧)되었는데, 당시 등초해 온 『영가지』 사본(寫本)은 18세기말부터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초고본(草稿本) 1책, 초고본 8권 3책, 정고본(定稿本) 8권 4책으로 전하였다.
내용은 권두에 권기의 서문, 본부도(本府圖)와 임하(臨河)ㆍ길안(吉安)ㆍ감천(甘泉)ㆍ내성(奈城)ㆍ일직(一直)ㆍ풍산(豊山)ㆍ개단부곡(皆丹部曲)ㆍ춘양(春陽)ㆍ소천부곡(小川部曲)ㆍ재산(才山) 등 안동부 내 각 현과 부곡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지도 다음에는 연혁(沿革)ㆍ읍호(邑號)ㆍ강역(疆域)ㆍ진관(鎭管)ㆍ호구(戶口)ㆍ산천(山川)ㆍ토품(土品)ㆍ향교(鄕校)ㆍ도로(道路)ㆍ제언(堤堰)ㆍ성씨(姓氏)ㆍ인물( 人物)ㆍ총묘(塚墓) 등의 목록을 수록하여 당시 안동부의 행정조직ㆍ사회경제ㆍ문화ㆍ풍속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영가지』는 전국 읍지 중에서도 편찬 시기가 빠른 17세기 초이며, 유성룡과 정구의 지휘하에 권기를 비롯한 당시 안동부(安東府)를 대표하는 유림들이 두루 편찬에 참여했기 때문에 체제가 정연하고 내용이 매우 충실하였다. 이들 자료는 전국 읍지의 전형(典型)이 되었으며 지방사 연구자료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畏影堂 【2선장 54~55쪽】
在乃城縣西 虎坪 進士李弘凖所構 李堣詩 有我卽有形 影分形爲两 隂陽遆隠見 動靜不相放 日用百爲多 一一輒效倣 臨之在左右 黶然難可罔 所慎豈止獨 屋漏 猶晃朗 顧爾心惕若 内省而存養 我語爾默識 我身爾虛像 周旋一堂中 終日吾所仰


◎외영당(畏影堂)
내성현(柰城縣) 서쪽 호평(虎坪)에 있다. 진사 이홍준(李弘準)이 지은 것이다.

이우(李堣)의 시

내가 있으면
곧 형체가 있고
그림자 나뉘어지니
형체도 둘이 된다.

음과 양은 바뀌어
은은히 나타나고
움직임과 고요함은
서로 놓지 못하구나.

날마다 씀에
백 가지로 많은데
하나 하나
문득 본받는다.

다다르면
좌 우에 있어
가만히도
망녕되기 어려워라.

조심하는 바
어찌 홀로에 그치겠나
물시계 물방울
오히려 밝도다.

너를 돌아보니
마음은 두려워하여 삼가고
안으로 살펴서
본심의 착함을 기르라.

나는 말하노니
너는 묵묵히 알고
내 몸은
네겐 허상(虛像)이라.

한 집을
두루 돌아서
하루 종일
우리들이 우러르는 바이구나.

*참판(參判) 송재(松齋) 이우(李堣): 생원(生員) 금호공(琴湖公) 이시민(李時敏)의 사위[壻]



●琴椅 【4선장 18쪽】
居柰城縣 虎坪里 字仲材 癸酉 中司馬 己卯 登文科 官至府使 退陶先生 撰碣 銘曰禀性開警 爲治得其要 而務簡


◎금의(琴椅)
내성현(柰城縣) 호평리(虎坪里)에 살았다. 자(字)는 중재(仲材)이다. 계유(癸酉)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기묘(己卯)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퇴도선생(退陶先生)이 지은 갈명(碣銘)에 가로되,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였고, 정치를 함에 그 요령을 터득하여 간요(簡要)함에 힘썼다.”고 했다.

*청송부사(靑松府使) 금의(琴椅): 진사(進士) 눌재공(訥齋公) 이홍준(李弘準)의 사위[壻]



●鄭惟一 【4선장 21쪽】
字子中 號文峯 居柰城縣 塔坪里 遊退陶門下嘉靖壬子 中司馬 戊午 登第歴敭䑓閣 李樑子庭 薲 登第唱榜之日 舉朝 奔走 後 拜 猶恐不及 公以 正言 獨在 榻前 毅然不動觀者莫不愕然 官至大司諌


◎정유일(鄭惟一)
자는 자중(子中)이요, 호는 문봉(文峯)이다. 내성현 탑평리(塔坪里)에 살았으며 퇴도의 문하에서 유학했다. 가정 임자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무오년에 급제하여 대각(臺閣)*)을 두루 거쳤다. 이량(李樑)의 아들 정빈(庭薲)이 급제하였는데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온조정의 벼슬아치들이 인사함이 남보다 늦을까 걱정하여 분주하였는데, 공(公)은 정언(正言)으로서 탑전(榻前)에 홀로 앉아 의연(毅然)하게 동요하지 않았으니 이를 보고서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 대각(臺閣):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통틀어 이르는 말.
*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 진사(進士) 눌재공(訥齋公) 이홍준(李弘準)의 외손(外孫)



●李苞 【4선장 28~29쪽】
字仲容 弘凖 孫 居奈城縣 虎坪里 中嘉靖司馬性讜直憤 守令之苛政 明廟朝 進剥民圖 上極加褒奨 除集慶參奉 遂以其圖 造屛 設 御座甞於母病 割股食火 母病卽愈


◎이포(李苞)
자는 중용(仲容)이고 홍준(弘準)의 손자이다. 내성현 호평리에 살았다. 가정년간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성품이 곧아, 수령의 가혹한 정사에 분개하여 명종조(明宗朝)*)에 ‘박민도(剝民圖)’를 올렸다. 임금이 극도로 표창하여 집경참봉(集慶參奉)을 내려 주었다. 마침내 그의 그림으로 병풍을 만들어 어좌(御座)에 세웠다. 일찍이 어머니가 병이 들었을 때 다리를 베어 먹이자 어머니의 병이 곧 나았다.

*) 명종조(明宗朝): 조선 제13대 임금(1534~1567, 재위 1545~1567). 이름은 환(峘)이고 자는 대양(對陽)이다. 중종(中宗)의 둘째 아들이자 인종(仁宗)의 아우이다.



●李弘凖 【4선장 33쪽】
字君式 慵齋宗凖弟 居奈城縣 虎坪里 中司馬 弘治戊午士 林禍作 仍及仲兄 自是 無意世路 監司 以才行 薦 稱疾不出 因時弊上便冝封事 减任縣進 封之苦 嘗著家訓教子弟


◎이홍준(李弘準)
자는 군식(君式)인데 용재(慵齋) 종준(宗準)의 아우이다. 내성현 호평리에서 살았다.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홍치(弘治) 무오년에 사화*)가 일어나 그로 인해 화가 중형(仲兄)에까지 미쳤다. 이로부터 세로(世路)에 뜻이 없었다. 감사(監司)가 재행(才行)으로 천거했으나, 질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시폐(時弊)에 따라 편의봉사(便宜封事)를 올리어, 자기가 사는 고을에 부과된 곡물 바치는 고통을 덜어주도록 하였다. 가훈(家訓)을 지어 자제들을 가르쳤다.

*)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



●郡守南義元墓 【4선장 54~55쪽】
郡守南義元墓 在府北 燕飛院 東洞酉向 李弘凖 撰碣 公諱義元 字可冝 英陽世家 南君甫十代孫也 君甫 生公若 公若 生備 備生星老星老 生典書 有孫 有孫生典書輝珠 輝珠 生參判敏生 敏生 生壯元佑良 位至嘉靖 會寧府事 佑良 生致恭 致恭 娶司醞直長金坤之女 生公 公將種也 自少 多壯志 馳馬試劒 射穿柳葉 旣長 初職内禁衛 丙午 科爲郡守 任纘榜下 授昌洲僉使 尋拜三水郡 後以宣傳官 兼內乗 又出爲理山 入而以長興庫令 遷繕工僉正 丙寅秋 靖國有功 原從一等 授通政 朝廷 例 啓 還收出治礪山 未㡬 島夷 有變 移任樂安 公 爲人剛毅正直 筮仕以後 國耳忘家西北有績 中外有聲 遂靡監成疾 辭職歸家 藥餌無力 嗚呼痛㢤 公 娶參判李拱之女 生五男三女 男曰漢 淮 渭 溟 汴 女曰裴綸 權耆 一未笄 銘曰 樂安公 毅然衷 真英雄行已直處事實 身無失 仕盡心 不廢任 人共欽 天奪忙 壽不長 時所傷燕院東 震起峯 鬱葱籠 地不仁 埋善人 短碣新


◎군수(郡守) 남의원(南義元)의 묘
부의 북쪽, 연비원(燕飛院) 동쪽 골에 있으니 유향(酉向)이다. 이홍준(李弘準)이 갈문(碣文)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의원(義元)이요, 자는 가의(可宜)이다. 영양세가(英陽世家)로 남군보(南君甫)의 10대손이다. 군보가 공약(公若)을 낳았고 공약이 비(備)를 낳았으며, 비는 성로(星老)를 낳았다. 성로는 전서(典書) 유손(有孫) 비를 낳았으며, 비는 성로를 낳았다. 성로는 전서(典書) 유손(有孫)을 낳았고, 유손은 전서(典書) 휘주(輝珠)를 낳았다. 희주는 참판(參判) 민생(敏生)을 낳았고 민생은 장원(莊元) 우량(佑良)을 낳았다. 벼슬이 가정(嘉靖)년간에 회령부사(會寧府事)에 이르렀다. 우량이 치공(致恭)을 낳았는데, 치공은 사온직장(司瑥直長)인 김곤(金坤)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은 장수 집안의 자손이다. 젊어서부터 씩씩한 뜻이 많아 말을 달리며 검술을 익혀 활을 쏘아 버들잎을 뚫기도 하였다. 성장하고 나서 처음으로 내금위(內禁衛)*)에서 일하다가 병오년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군수(郡守) 임찬(任纘)의 밑에 있었다. 창주첨사(昌洲僉使)에 임명되었다. 얼마 안 되어 삼수군(三水郡)으로 옮겼다가 뒤에 선전관(宣傳官)으로 내승(內乘)*)을 겸임하였다. 또한 외직으로 이산(理山) 군수가 되어 나갔다가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장흥고령(長興庫令)으로서 선공첨정(繕工僉正)으로 자리를 옮겼다. 병인년 가을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공을 세워 원종일등(原從一等)*)으로 공신록에 올라 통정(通政)을 제수 받았다. 조정에 규례대로 환수(還收)할 것을 여쭈고 외직으로 나아가 여산(礪山) 고을을 다스렸다. 얼마 되지 않아서 섬나라 오랑케들이 변(變)을 일으키자 낙안(樂安)으로 전근되었다. 공은 사람됨이 강직하였으며 벼슬길에 오른 뒤부터는 오직 나라만을 생각할 뿐, 집안일은 잊어 버렸다. 서북(西北)으로 다니면서 공적을 세워 그 명성이 중외(中外)에 까지 났었다. 마침내 국가 일을 쉬지 않고 열심히 하다가 병을 얻어 사직(辭職)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약을 달여서 먹어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아아! 원통하구나. 공은 참판(參判) 이공(李拱)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한(漢) · 회(淮) · 위(渭) · 명(溟) · 변(卞)이고 딸은 배륜(裵綸) · 권기(權奇)에게 시집보냈으며 하나는 아직 혼인하지 못했다. 명(銘)에 다음과 같이 적는다. ‘낙안공(樂安公)의 의연한 충정, 참다운 영웅이로세. 자신의 행동 곧게 하였고 일에 처해서는 진실로 했도다. 몸에는 실책이 없었고 벼슬엔 마음을 다했다네, 맡은 일 그만두지 않았으니 모두가 공경하였네, 하늘은 왜 이리도 바삐 앗아 가는지, 길지 않은 생애를 누렸구나. 그 때에 슬퍼했던 곳, 바로 연원(燕院) 동편이라네, 놀라 솟구친 봉우리 울창도 하구나. 땅은 어질지 못해, 이런 착한 사람을 묻어버리다니. 짧은 묘길 만이 새롭기만 하도다.”

*) 내금위(內禁衛): 조선 시대, 임금을 호위하는 일을 맡은 부대
*) 내승(內乘): 고려 시대, 임금이 타는 수레나 가마를 맡아 관리하던 관청
*) 원종공신(原從功臣): 조선시대에 정공신이 되지 못한 유공자들을 포상하기 위하여 책봉된 준공신. 원종공신의 등급도 정공신의 예에 따라 1등 원종공신, 2등 원종공신, 3등 원종공신으로 구별하였다.



●進士李弘凖墓 【4선장 72쪽】
在皆丹部曲 雲峰山 自製碣銘云 噫恱生惡死 人之常情 以死爲諱 口不敢言 惑之甚矣 有如㓒園叟之忘骸 王楊孫之裸葬 世無人矣 其知生死之說 而不爲之懷者 有㡬人哉 予甞有詩曰 無生卽無死 有生即有死 生死两悠悠 造物無終始 雖不及達觀之徒 所見 如斯而已 凢人觀化之後 爲子孫者 倩人碣辭 虛張逸筆 以沒其實 尤可笑也 此老平生 以懶拙自任 恒力農以給妻孥 七舉不中 優游溪山 以是終焉 銘曰 既無才 又無德 人而已 生無爵 死無名 魂而已 憂樂空毁譽 息土而已


◎진사(進士) 이홍준(李弘準)의 묘
개단부곡(皆丹部曲) 운봉산(雲峯山)에 있다. 스스로 갈명을 지어 이르기를 다음과 같이 했다. “아!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함은 인간의 상정(常情)이라, 죽음을 꺼려 입으로 감히 말하지 못함 또한 미혹됨이 심하다. 저 장자(莊子)가 형해를 잊는다는 것과 왕양손(王楊孫)이 벌거벗은 몸으로 장사를 지낸다는 말과 같은 것은 지금 세상엔 다시없구나. 그는 생사(生死)를 잘 알면서도 이를 마음속에 두지 않는 자라 하겠다. 이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 일찍이 시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생(生)이 없으면 곧 사(死)도 없고
생이 있으면 곧 사가 있게 되나니
생과 사는 모두 덧없는 것이요
조물(造物)도 끝과 시작이 없는 것을

비록 달관(達觀)에 이르지 못한 무리라 하더라도, 본 바가 이와 같을 뿐이다. 대개 사람이 관화(觀化)한 뒤에 자손 된 자가 남에게 갈사(碣辭)를 청하여 헛된 이야기를 늘어놓고 붓을 제멋대로 놀리어 그 실상을 없게 만드니 더욱 가소롭구나, 이 늙은이는 평생토록 게으르고 졸렬한 것으로 자임(自任)하여 항상 농사에 힘씀으로써 처자식을 먹여 살렸고 일곱 번이나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했지만 계산(溪山)에서 우유(優游)*)하면서 평생을 마쳤다. 이에 명(銘)하여 말하노라,
‘이미 재주도 없고 또 덕도 없으니 사람일 뿐이요, 살아서 작록도 없고 죽어서 명성도 없으니 혼일 뿐이며, 근심과 즐거움이 없어지고 헐뜯음과 칭찬이 사라졌으니 흙일 뿐이로다.”

*) 우유(優游): 1.유유자적하다 2.우물쭈물하다 3.망설이다



●察訪 李德璋墓 【4선장 73~74쪽】
在皆丹部曲 雲峯山 退陶先生 撰碣 公諱德璋 慶州人 新羅始祖 赫居世 佐命大臣 謁平之後 曽祖某 大司憲 祖某 生貟 考某 進士 公 生於成化壬寅 少習舉業 嘗舉於鄕試 禮圍不中 䕃補黃山道察訪 嘉靖 癸未 丁外艱 服闋 爲家貧親老 求再遂禄仕計 勉赴京師 明年 四月 遇病不起 享年四十二 癸未 葬于皆丹縣 雲峯山 艮㘴之原 公 自少 軒輊尚氣 不肎齷齪 庸流中 其在京師 日嘗草疏 欲陳時事而已戒 出位而止 教子弟 甚嚴 鄕里後生 亦加勧督 不以生産 作業 爲務 嘗稱貸以自給 公配曰 豊山柳氏 進士子温之女 工曺典書 従惠之後 成化癸卯 生禀性 閒静 平居無疾言遽色 公没家益貧 猶不聼家人之嘆 貧曰 吾分止是 何恨焉 其訓子以爲 寧受凍餒 不可取不義之物 睦族交隣 盡心無慊 或援貧以周急 又未嘗虛受人饋 族人 有以祀事見推 柳氏無辨而行其祀惟謹曰 彼之用心 如此 雖強令行之 祖考肎享之乎 數歲 其人 感愧而止 其宅心精且善 皆此類也 生四男 一女 後公十餘年 相繼死 其季曰 己酉生貟齊陵參奉 女適生貟李薰 嘉靖丙辰 柳氏 没 祔葬于公 銘曰月城之李 遙遙厥緖 公則是承 其儀 舉舉以充觀國 胡命之阻 試于郵官 思馬斯臧 中替求復 爲親在堂 齋志永已 旅櫬悲傷 公有贒婦 豊山茂族 淑愼其身 閨門雍穆 亦旣長育 粲粲蘭玉 喪禍仍荐 克持其家季也 至性 誠孝靡他 天之報隲 於是匪差 有崇其原 白楊號風 同其翳然 永保幽宮


◎찰방(察訪) 이덕장(李德璋)의 묘
개단부곡(皆丹部曲) 운봉산(雲峯山)에 있다. 퇴도선생*)이 갈문(碣文)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덕장(德璋)인데 경주(慶州) 사람이다.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赫居世)의 좌명대신(佐命大臣), 알평(謁平)의 후예이다. 증조 모(某)*)는 대사헌이었고, 조(祖)모*)는 생원이었으며, 고(考)모*)는 진사(進士)였다. 공은 성화 임인년에 태어났다. 젊어서 과거업(科擧業)을 익혀, 일찍이 향시(鄕試)에는 합격하였으나 예위시(禮圍試)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음사로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에 임명되었다. 가정 계미년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다. 복(服)을 마치고 나서, 집이 가난하고, 부친이 노쇠하였기 때문에 두번이나 벼슬을 얻을 생각으로 힘써 서울에 올라갔으나 이듬해 4월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였다. 향년(享年)이 마흔 둘이었다. 계미년에 개단현(皆丹縣) 운봉산,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지내었다. 공은 젊어서 뜻이 높고 기백을 숭상하여 악착같고 어리석은 무리 속에 끼이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서울에 있을 때 하루는 일찍이 소(疏)를 초(草)하여 시사(時事)를 진언하고자 하였는데 얼마뒤에 나의 분수에 넘는 일이라 경계하고 그만두었다. 자제를 가르침에 매우 엄격하였고 향리의 후생들에게도 배우기를 권면하였다. 산업에 힘쓰지 않아 일찍이 칭대(稱貸)하여 자급(自給)하였다. 공의 처는 풍산 류씨인데, 진사 자온(子溫)의 딸로 공조전서(工曹典書) 종혜(從惠)의 후예이다. 성화 계묘년*)에 태어났으니, 품성(稟性)이 조용하여 평상시에도 성내는 말이나 성급한 기색이 없었다. 공이 죽을 때 집안이 더욱 가난해졌는데도 오히려 집안 사람들이 가난을 탄식하는 소리를 듣지 않고 가로대, ‘나의 분수가 여기에서 그치는데 무엇을 한탄하리오’하고 했다. 그 아들에게 훈계하기를, ‘차라리 얼어 굶어 죽을지언정, 의가 아닌 물건은 취하지 말라!’고 했다. 친척이나 이웃들과 화목하고 친했으며, 마음을 다해 혐섭함을 두지 않았다. 어떤 때는 가난한 살림속에서도 급한 사람을 도왔으며, 또 일찍이 남이 주는 선물을 속없이 받지 않았다. 족인(族人) 중에서 제사를 핑계대면서 지내지 않은 이가 있었다. 아무 말도 안하고 제사를 대신 지내 주었다. 삼가 가로대 ‘저 사람의 마음 씀이 이와 같거늘 아무리 억지로 행하게 만든다 해도, 조고(祖考)께서 그것을 흠향할 마음이 있겠는가?’ 하였다. 몇 년 뒤에 그 사람은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그 댁(宅)의 마음이 곱고 선하기가 모두 이와 같았다. 4남 1녀*)를 낳았으니, 맏이는 내(내). 둘째는 여(여). 셋째는 진(진)이었는데 공이 죽고 나서 10여년동안 잇달아 죽었다. 그 막내인 포(苞)는 기유년에 생원으로 제릉참봉(齊陵參奉)이 되었다. 딸은 생원 이훈(李薰)에게 시집갔다. 가정 병진년에 류씨가 죽었는데 공의 묘에 부장(袝葬)하였다. 명(銘)하여 말하노라. ‘월성 이씨는 그 유서(遺緖)가 멀고도 먼데, 공께서 이를 이었으니 그 모습이 단정도 하구나, 능히 나랏 일을 살필 수 있었거늘, 어찌하여 벼슬이 그리도 막혔던가. 우관(郵官)에 임명된 것이 그만이었으니 천리마 같은 인재가 이에 숨어 버렸도다. 중년에 다시 벼슬을 구하려 하였으니 이는 부친께서 살아 계셨기 때문이라. 뜻을 품고 영원히 돌아갔으니 나그네로 죽은 것이 비상(悲傷)하기만 하다. 현부(賢婦)가 있었으니 풍산의 훌륭한 씨족이라. 그 몸을 맑고 신중히하여 규문(閨門)이 화목하였다네. 또한 자손도 잘 길러 빛나는 난옥(蘭玉)과 같았다네. 상화(喪禍)가 거듭되었지만 능히 집안을 지탱시켰도다. 막내 아들은 성품으로 정성껏 효도하였으니, 그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었다. 하늘이 보답해 상을 내리심은 이에 조금도 틀림이 없기 때문이라. 그 언덕에 우뚝한 무덤, 백양목이 바람에 울부짖는다. 그 가려짐을 같이하면서 이 무덤을 영원히 보전하리라?”

*) 퇴도선생(退陶先生):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 증조 모(某): 대사헌(大司憲) 이승직(李繩直, 1378~1431)
*) 조(祖)모: 생원(生員) 금호(琴湖) 이시민(李時敏, 1430~1473)
*) 고(考)모: 진사(進士) 눌재(訥齋) 이홍준(李弘準, ?~1523)
*) 성화 계묘년: 1483년 성종 14년
*) 4남 1녀: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에는 맏이 잉(芿), 둘째 여(茹), 셋째 률(葎), 막내 포(苞), 사위 이훈(李薰).



●畏影堂 【6선장 60쪽】
●琴椅 【8선장 18쪽】
●鄭惟一 【8선장 20~21쪽】
●李苞 【8선장 28~29쪽】
●李弘準 【8선장 30쪽】
●郡守南義元墓 【8선장 54~55쪽】
●進士李弘凖墓 【8선장 72~73쪽】
●察訪 李徳璋墓 【8선장 73~75쪽】

●畏影堂 【10선장 54~55쪽】
●琴椅 【12선장 16쪽】
●鄭惟一 【12선장 19쪽】
●李苞 【12선장 26~27쪽】
●李弘準 【12선장 31쪽】
●郡守南義元墓 【12선장 52~53쪽】
●進士李弘準墓 【12선장 60쪽】
●察訪 李德璋墓 【12선장 6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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