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용재공◆이종준

始祖 太師公 墓所와 陵洞齋舍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4. 21. 16:12

始祖 太師公 墓所와 陵洞齋舍
시조 태사공 묘소와 능동재사


안동권씨 종보 제483호 2015년 9월 1일 (화요일) 1면, 3면

*출처: 안동권씨 대종회
http://andongkwon.org/bbs/board.php?bo_table=z6_85

태사공실기와 능동실기 묘도편이나 모재 김안국(金安國)의 모재장원기에 태사공 묘소(太師公墓所)는 천등산에서 내려와 조화곡(造火谷) 자좌오향(子坐午向)이며 옥녀단좌형(玉女端坐形)에 금차척지혈(金叉擲地穴)이라 하였으며 마을 이름은 금계(金溪)이니 속칭 검제 또는 능동(陵洞)이라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안동부편 총묘조에는 “권행의 묘는 본파곡리(本破谷里)에 있다”고 하였고, 안동읍지에는 “20世 부사 권소(權紹-20世 檢校公派 桐溪公 達手의 子)가 권심행(權審行-21世 僕射公派 野翁公 檥의 子) 권몽두(權夢斗-22世 僕射公派 判書公 靷의 7대종손), 외손 유공계(柳公季)로 하여금 사초케 하고 한식에 제향을 올렸다.”고 하였다.

안동읍지(安東邑誌)인 《영가지(永嘉誌)》의 총묘조(塚墓條)에는 3태사의 묘에 대해서

고려 태사 권행묘 : 부서(府西) 본파곡리(本破谷里)에 있고 태사를 장사한 후 그 동호(洞號)를 능동(陵洞)이라 하였다. 가정(嘉靖:명 세종) 정사(丁巳:명종 12, 1557)에 부사(府使) 권소(權紹)가 능 아래에 사는 성손(姓孫) 권심행(權審行)·권몽두(權夢斗)와 외손 유공계(柳公季)로 하여금 흙을 바꾸고 사초(莎草)를 고쳐 한식(寒食)에 묘소에 올라가 행사(行事) 하였는데 그 축문(祝文)에 이르기를 ‘천등의 남쪽 줄기에 수봉(壽封:오래 갈 봉분)을 이처럼 높이니 공덕은 외흡(巍洽)한데 후예는 여유롭고 종중은 융숭하여 매세 한식에 정결한 제향을 공경히 올리오니 오르내리심이 계신 듯 성대한 형용이 밝게 드러난다’고 하였다.


태사공실기 천등산기(天燈山記)

천등산은 안동부 서쪽 20여리에 있는데 그 근원은 태백산에서 비롯하여 여러 고을을 연이어 내려와서 그 줄기와 굽이를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봉정사의 뒷 산에 와서 재기(再起)한 봉우리 가운데 한 가지가 남쪽으로 굽어 내려와 흩어져 여러 갈래를 이루었는데 그 작은 가지의 하나가 서쪽으로부터 동쪽가지와 더불어 둥굴게 돌아 산중에 안장한 고려 때의 태사(太師) 권공 행(幸)의 조역(兆域)을 포용하고 있다. 여기에 태사공이 조장(厝葬)된 이래 6,7백년이 되도록 자손이 심히 성하였으나 재장자(再葬者)가 전무하고 산소 역시 황폐하니 그 조역(兆域)을 분별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성화(成化) 연간에 18대손인 평창군사(平昌郡事) 휘 옹(雍)(17世이므로 시조의 16대손인데 잘못 기록되었음)이 충주로부터 부인(府人) 이조정랑 배소(裵素)의 딸을 아내로 맞아 부(府)의 땅인 풍산현 하회촌(豐山縣 河回村)에 거주하면서 하루는 여지승람(輿地勝覺)을 펴 보다가 시조 태사공(始祖 太師公)의 묘소가 소재한 곳을 알았다. 그러나 비갈(碑碣)이 없고 세월이 미매(迷昧)하여 좆을 만한 표지(標識)가 없었는데 술사(術士)와 더불어 산록(山麓)을 올라가 두루 답사한 끝에 지석(誌石)을 얻어내 이로써 태사공의 진짜음택(眞宅)을 발견하였다. 이에 흙을 모아 봉분을 쌓고 장차 입석을 하려다 이루지 못하고 졸하게 됨에 임종시 그 아래 장사해 줄 것을 명탁하였다. 그런데 부인 배씨가 공의 생존시 먼저 졸하여 이미 태사의 계하 수보되는 곳에 장사했으므로 공의 분묘는 그 밑에 차례로 안장되었다. 그후 평창공의 아들 유(裕)와 작(綽) 등이 이미 평창공의 묘전에 입석을 하고 세계(世系)를 상록(詳錄)하였으며 또 선지(先志)를 받들어 태사의 묘에 단갈(短碣)을 세우니 비갈의 뒷면에 있는 말은 곧 유(裕)의 사위 이종준(李宗準)이 짓고 쓴 바였다.

뒤에 유와 작 등이 옛 거소인 평창으로 돌아가니 사위인 호군(護軍)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 유 소(柳諱沼) 부처가 남록에 합장되고 이로부터 유씨가 세수(世守)하게 되었다. 유소의 아들 자온 증 참의(參議)부부가 북록 태사공 묘소로부터 400보 떨어진 곳에 합장되었고 그후 감사(監司) 유중영(柳仲郢)을 평창공아래 한 단락에 장사했던 것이다.


天燈山。在安東府西二十餘里。其源始於太白山。自鳳停寺後岳。再起爲峯。中一枝南俯而下。散爲諸派。又一枝自西回環。與東枝俱抱。高麗時太師權公幸。葬于山中。歷六七百年。子孫甚盛。然而無繼葬者。山亦荒廢。不辨兆域。成化間。太師十八代孫平昌郡事諱雍。自忠州娶府人吏曹正郞裴素女。居府地豐山縣河回村。一日。披輿地勝覽。知始祖太師墓所在。而無碑碣。歲月迷昧。無從標識。與術士徧登山麓。求誌石以見 太師眞宅

명종 12년(1557년) 안동부사로 부임해 온 권소(權紹)는 태사묘(太師廟)를 중수하고 태사공묘를 정수하면서 위토답을 최초로 마련하였으니 퇴계의 중수기에 상세히 나와 있다. 가첩에는 제곡 1백석을 더하고 비복도 재사에 배치하였다고 기록되었다. 1557년 권소는 능동묘제를 한식일에 한번 지내오던 것을 한식과 10월 중정에 추향제를 올리도록 하였다.

선조 21년(1588년) 22세 충숙공 권극지(權克智-樞密公派 正獻公系 參議公 齡의 증손)가 경상감사로 부임해 능동묘소를 성배하고 묘갈(墓碣)을 바꾸어 세웠다. 유성룡이 짓고 22세 권오(權晤)가 쓴 묘비문에 선조 21년 관찰사 극지가 순시 차 당도하여 제사를 올렸는데 마칠 무렵 하인이 잘못 비석을 건드려 깨지니 다시 세웠다고 한다.

선조조 능동실기 제영(題詠)에 22世 석주 권필(權韠-樞密公派 文忠公6대손)이 성묘하고 능동제영이라 시를 지었으니

家牒稿成 題于卷尾
羅王聖骨是吾先(신라왕의 성골이 바로 우리 선조시니)
西始鳴鷄事渺然(시림에서 닭 울던 일 그 자취 아득하다)
錫邑今方三七代(식읍 하사 받은 것이 바야흐로 21대)
開邦舊已一千年(나라 연 지 아득히 1천년이 지났다네)
翰林詞藻風聲遠(한림의 문장은 풍성이 아득하고)
僉議尊榮福慶綿(첨의 존영은 복과 경사 이어졌네)
小子怛然憂失墜(소자는 실추할까 두렵고 근심하여)
錄爲家牒要流傳(가첩으로 기록하여 오래 전하려 하네)
* 태사께서 내게 21대조이니 삼칠이라 했다.

현종 2년(1661년) 24세 탄옹 권시(權諰)가 지은 태사공(太師公) 신도비문(神道碑文)에는 21세 영의정 권철(權轍-樞密公派 文忠公 近의 5대손)이 관찰사가 되어 위토를 마련하였다.

효종 4년(1653년) 경상감사 24세 동곡(東谷) 권우(權堣-추밀공파 정헌공계 충숙공 節의 6대손)가 묘소 우측에 공터를 마련하여 재사(齋舍)를 창건하니 대청 4간에 협실 각 2간과 협실 아래 동서재 각 3간, 정면 4간에 곳간 등 4각형으로 16간으로서 비로소 태사공 묘소를 전수하는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1687년 24세 하당 권두인(權斗寅)이 재사기를 썼다.

효종 10년(1659년) 영천군수 25세 호연(浩然) 권성원(權聖遠-侍中公派 花川君 5대손)이 태사공 신도비 수갈을 발의하여 석역소를 설하고 풍기에서 7척의 돌을 벌채하여 외손 이인(李土+寅)이 도왔으나 호연공이 한성서윤으로 부임해 중단되었다가 현종 4년 호연이 선산부사로 부임하여 재착수하였는데 하세하니 24세 권정(鋌)과 심(淰) 입석하였다.

신도비문(神道碑文)은 현종 2년 한성우윤 탄옹 권시(權諰-24世 樞密公派 正獻公의 10대손)가 짓고 글씨는 외손 이조참의 이경휘(李慶徽)가 썼으며 두전(頭篆)은 외손인 사헌부 장령 허목(許穆)이 썼으며 음기는 외손 예조참판 조복양(趙復陽)이 짓고 병조판서 외손 김좌명(金佐明)이 썼다.

숙종 3년(1677년) 12월 능동재사에 각파 대표가 참석하여 종약을 제정하고 족회(族會)를 설하였다.

숙종 8년(1682년) 25世 경상감사 시경(是經-樞密公派 正獻公系 忠烈公 順長의 아들)이 상석을 개조하고 향로석, 문관석, 망주석 등을 세웠으며 재사가 협소하므로 누각을 세우기로 하여 1684년에 7간의 누각을 준공하니 위층에 1백인이 앉을 수 있고 아래층에 좌우 곳간을, 중앙에 통로를 만들고 재사 동쪽에 3간 신주(神廚)를 세우고 담장을 두르니 곧 추원루(追遠樓)이다. 능동실기 신도비각 중수기에 안동부사로 재임 중인 26세 유회당 권이진(權以鎭-樞密公派 正獻公 12대손)이 신도비각을 세우고 영조 1년(1725년) 경상감사로 와 족회를 베풀었다.

영조 18년(1742년) 유문에서 능동재사의 수묘군(守墓軍) 승도(僧徒)를 모두 내쫓고 점거하는 사변이 일어났는데 비변사에서는 제사를 내려 “태사의 묘도를 수호하는 절목은 타인이라도 공경하고 삼가는 여지가 있거늘 추로지향(鄒魯之鄕)을 돌보지 않아 이 같은 행위가 자행된다니 실로 지극히 한심하다.” 하였다.

영조 29년(1753년) 능동재사에 원인 모를 화재가 나 건물이 전부 소실되었다. 정조 20년(1796년) 언덕에 보판각을 건립하였는데 이는 후 갑인보 목판을 보존키 위해 세운 것이고 순조 26년(1826년) 중건하고 고종 33년(1896년) 이건하였다.

헌종 4년(1838년) 이재 권돈인(權敦仁-32世 侍中公派)이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능동재사에 화수회(花樹會)를 열고 위토를 더하도록 하였으며 헌종 5년 예천군수 권용만(權用萬)이 위토를 더하였다.

고종 27년(1890년) 재사 동쪽 전사청(典祀廳)의 하례방을 보수하였는데 권연호(權淵浩)의 재사중수기에는 병신(1896년) 4월 8일 밤 숙직자가 실화하여 불길이 치솟고 70여간이 모두 소진되어 현액(懸額)과 신필(信筆)이 모두 타 버리고 오직 장판각(藏板閣)만이 모면하였다 하였다.

1897년 4월부터 능동재사(陵洞齋舍)중건이 시작되어 3년만인 광무 3년(1899년) 완공되었다 하며 추원루에 8개 주련을 붙였는데 충장공 권율도원수 10대손인 경농 권중현(權重顯)이 지었다.

이후 전사청을 중신(重新)하고 유사가 재숙할 성경재(誠敬齋)를 지었으며 이해 가을 중건할 것을 모의하여 여러 회의기구에 배당해 자금을 모아 이듬해 본채 21간을 세우니 당(堂) 4간 서재 4간 당 북쪽에 사경재(思敬齋) 2간, 남쪽에 주사(주방) 5간 동익에 제기보관소 서익에 곡식저장소를 지었으며 1899년 2월 안동에서 의연금으로 추원루(追遠樓)를 복원하니 위층은 당헌(堂軒), 아래층은 곳간을 세우니 총 28간이라 하였다. 귀산 권제영(權濟寧)이 지은 재사중수기실에는 병신년 4월 불이 누각에서 번져 실당으로 만연하여 70여간이 회신되고 임사청(任事廳)과 전사청만 남았으니 계유년(1753년) 재앙보다 더 혹독하였다.

광무 5년(1901년) 능동 동구 가까이 신신도비(新神道碑)를 수갈했는데 고유문은 권연호(權淵浩)가 지었다. 신도비 재건소지에 1661년 4주갑(周甲)이 되니 비신 전후가 갈라지고 글자가 마멸되어 새로 세워야겠다고 1890년 의논하였는데 병신년(1896년) 화재가 나 네 번의 한서(寒暑)가 지나 9월에 준공하였다고 한다. 신도비 상량문은 33세 권상한(權相翰)이 지었으며 신도비 터는 풍산 유씨 제전이므로 다른 위토와 상환하였다 한다.

광무 7년(1903년) 안동권씨경중대종중보소(安東權氏京中大宗中譜所)를 설치하고 서울과 안동으로 나누어 족보수단을 받아 대종중은 최초로 항렬자(行列字)를 제정 공포하였는데 3월 3일 대종중 명의로 전국에 통문을 보냈으며 31세부터 60세까지 세차배정항렬록을 발송하여 현재 사용하고 있다.

추밀공파 32세 죽농 권중석(權重奭)은 한성판윤, 의정부참찬, 군무총장을 지내고 육군무관학교 교장을 지냈는데 퇴임하면서 1907년 정미보를 발행하였으며 경농 권중현(權重顯-32世 樞密公派)은 참찬과 대신을 지냈는데 융희 3년(1909년) 태사공실기(太師公實記)를 발간하였으며 운곡서원(雲谷書院)부지를 환속(還屬)하는데 힘썼다. 권중석이 주관하여 발간한 이 실기는 안동 태사묘(太師廟)와 능동재사(陵洞齋舍) 운곡서원(雲谷書院)을 집대성한 권문의 큰 보감이다.

1969년 봉우 권태훈(權泰勳)은 능동실기를 국역하여 ‘초역능동실기(抄譯陵洞實記)’를 발간하였다.

1972년 재일(在日) 후손들이 모국을 방문하여 구신도비 비각을 중건하고 둘레 담장을 쌓았다.

이해 11월 능동 종약소(宗約所)를 안동권씨대종회(安東權氏大宗會)로 개칭하고 규약을 개정하였으며 대종회에 관리위원회를 두었다.

1976년 대종회관리위원회를 종무위원회로 개칭하였다.

1980년 능동재사의 진입로를 확포장하고 주차장을 마련하였으며 1981년 평창공 배부인 묘를 평창군 묘에 합폄함으로써 태사공묘소 춘추향사에 제전을 넓혔다. 1984년 1월 10일 능동재사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183호로 지정되고 구신도비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87년 추밀공파 36세 중앙화수회장 권달안(權達顔)의 주선으로 신신도비각을 중수하였으며 1990년 12월 능동(陵洞) 봉암(鳳巖) 양소 재사중수위원회를 구성하여 1998년 2월 능동재사가 100년 동안 낡아 중수를 하였다.


고려 삼한벽상삼중대광 아보공신 태사권공 신도비명 병서 요지(高麗 三韓壁上三重大匡 亞父功臣 太師權公 神道碑銘 幷序)

공의 휘는 행(幸)이고 본디 김씨로서 신라와 동성이다. 신라 말엽에 김선평(金宣平) 장정필(張貞弼)과 더불어 고창군(古昌郡)을 수호하는데 견훤(甄萱)이 신라에 침입하여 임금을 시해(弑害)하고 나라를 뒤엎은지라 고려 태조가 구원코자 와서 고을 북쪽의 병산책(甁山柵)에 둔치고 견훤과 서로 대치하였다. 공(公)이 김, 장 2인과 모의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의리로서 훤(萱)과 더불어 하늘을 이고 살 수가 없는데 힘을 돌보아서는 능히 보복할 수가 없으니 어찌 왕공(王公)에게 투귀(投歸)하여 함께 이 도적을 멸하지 않으리오” 하고 드디어 고을을 들어 고려 태조를 도와 병산(甁山)의 승첩(勝捷)이 있게 하니 의성(義聲)이 대진(大振)하였다. 이에 고려 태조가 기뻐하며 이르기를 “김행(金幸)은 기미(幾微)를 밝혀 권도(權道)에 통달하였으니 가히 권도에 능하다 할 것이다.” 하고 곧 권(權)으로 성을 내리고 대상(大相)을 배하였으며 군(郡)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키고 그 식읍(食邑)으로 봉(封)하니 지위는 삼한벽상삼중대광 아보공신 태사(三韓壁上三重大匡 亞父功臣 太師)에 이르렀으며 졸(卒)하매 부(府)의 서쪽 천등산(天燈山) 조화곡(造火谷) 감좌(坎坐)언덕에 장사하였다. 아들은 인행(仁幸)이고 벼슬은 낭중(郎中)이며 아들 책(冊)을 낳았는데 책은 스스로 구하여 본부(安東)의 이서(吏胥)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여러대에 걸쳐 자손이 호장(戶長)과 장교(將校)가 되었다. 그후로 자손이 더욱 크게 번창하여 규조(珪組)가 무수히 연잇고 대를 빛내며 서로 바라보듯 끊이지 안했다. 사당(祠堂)을 부(府)에 세우고 공을 제사(祭祀)하는데 김공(金公)과 장공(張公)도 더불어 제사하며 권씨가 대대로 제사(祭祀)일을 도맡아 주장(主掌)하였다.

성화(成化)연간에 평창군사 옹(雍-17世 樞密公派)이 진성으로 탐구하여 찾아내 비갈(碑碣)을 세워 표시하였다. 만력(萬曆) 무자(戊子1588년)에 22世 판서(判書)극지(克智-樞密公派)가 영남의 觀察使가 되어 宗人을 모아 제사를 지내면서 墓碣이 넘어진 것을 돌을 사들여 다시 세웠다. 가정(嘉靖) 임인(壬寅1542년) 외손(外孫) 김광철(金光轍)이 부사로 와서 묘(太師廟)를 새롭게 지었다. 21世 영의정(領議政) 철(轍-樞密公派)이 관찰사(觀察使)가 되어 제전(祭田)을 마련하였고 수호(守戶)를 두었다. 병진(丙辰1556년)에 20世 부사(府使) 소(紹-檢校公派)가 그 제전을 더하고 1백석의 곡식을 공급하여 이를 수리(首吏)로써 권씨 성을 가진 자가 관장하면서 제수에 공여토록 하고 묘역을 다스려 한해에 한 번씩 제향을 올리게 하였다. 계해(癸亥1563년)에는 20世 안동부사(安東府使) 응정(應挺-給事中公派)이 묘(太師廟)에 비(碑)를 세웠다. 만력 계축(癸丑1613년) 24世 길천군(吉川君) 반(盼-樞密公派)이 관찰사(觀察使)로 와 묘우(廟宇)를 중수(重修)하고 춘추 중정(中丁)일 제향을 올리게 하였다. 계사(癸巳1653년)에 24世 관찰사(觀察使) 우(堣-樞密公派)가 묘소 아래에 재사(齋舍)를 창건하고 호구(戶口)를 들여 살면서 지키게 하였다.

기해(己亥1659년) 25世 영천군수 성원(聖源-侍中公派)이 묘소를 전성(展省)하면서 시(諰-24世 樞密公派)에게 기록할 것을 촉탁하였다. (하략)

신축1661년 9월24일 한성우윤 권시(權諰)지음. 외예 이조참의 이경휘(李慶徽) 씀. 외예 사헌부장령 허목(許穆) 전(篆)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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