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용재공◆이종준

[제4장 능동재사(陵洞齋舍)] 權幸(권행) 공 (고려개국공신) 생애와 묘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4. 21. 15:48

[제4장 능동재사(陵洞齋舍)] 權幸(권행) 공 (고려개국공신) 생애와 묘

*청남 권영환
*출처: http://www.andongkwon.pe.kr/coding/sub2/sub1.asp?bseq=3&cat=-1&sk=&sv=&yy=&page=1&mode=view&aseq=4025

徐四佳(서사가) 居正(거정)이 성종 7년 병신(1476)에 成化譜(성화보)를 편찬하였는데 그 서문에 「權太師(권태사)공은 원래 신라 宗姓(종성) 金氏(김씨) 었는데 古昌(고창)군수로 있을 때 견훤이 「 왕도 경주에 침입하여 그 왕을 죽이고 왕비를 능욕하니 고려여 태조가 이를 무찌르기 위하여 견훤과 대전하게 되었는데, 태사공이 古昌(고창)의 여러 사람과 상의하여 「견훤은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이니 우리도 고려에 歸附(귀부)하여 이 痛墳을 설치하지 않으리오.」하여 태조에게 歸附(귀부)하니 태조가 「幸(행)은 능히 機(기)에 밝고 權道(권도)에 통달하다.」 하여 權氏(권씨)를 사성하고 본군을 식읍으로 하며. 고창군을 승격하여 安東府(안동부)라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공의 묘소는 500여년 동안 실전되었는데 성화 년간에 平昌(평창)郡守 雍(옹)(태사공 17대손)이 「동국여지승람」을 보고 尋得(심득)하여 加封(가봉)하고 다시는 失傳되지 않기 위하여 遺命(유명)으로 자신을 階下(계하)에 附葬(부장)하게 하였다.
雍(옹)의 사후 아들 裕(유)와 綽(작)이 선친의 묘를 계하에 부장하고 그 전말을 綽(작)이, 사위 慵齋(용재) 李宗準(이종준) 찬의 묘비를 세우고, 태사공 묘 앞에도 短碣(단갈)를 세워 두었다. 이 묘비는 뒤에 부러졌음으로 선조 21년 무자(1588)에 경상도 관찰사 權克智(권극지)가 다시 세웠는데 외손이 西厓(서애) 柳成龍(류성룡)이 찬하고 21대손 鳶魚亭(연어정) 權晤(권오)가 글씨를 썼다 한다.
그 후 신축(1661)에는 영주군수 權聖源(권성원)이 신도비를 건립하였고 숙종 26년 경진(1700)에 비문이 파손되었음으로 磨石(마석)하여 다시 刻字(각자)하였으나 마모가 너무 심하여 영조 22년 병인(1746)에 관찰사 權赫(권혁)이 改堅(개견)하였다.
공의 묘소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한국 십대명당의 하나로 손꼽히는데 天燈山(천등산)으로부터 主龍(주룡)이 癸方(계방)에서 入首(입수)하여 子坐(자좌) 午向(오향)에 자리하며 乾巽得午破(건손득오파)의 玉女端坐形局(옥녀단좌형국)아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