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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사] 第7節 文學 이지(李址), 이재학(李在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3. 7. 19:33

[봉화군사] 第 7節 文 學


이지(李址)
호는 대박자(大朴子) 또 벽사(碧沙) 월성군 지수(之秀)의 후이다. 우애가 지극하고 효행이 대단하였으며 학문이 깊어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충순위공(忠順衛公) 이숭준(李崇準)의 6세손. 父는 약곡공(藥谷公) 이재현(李再炫)

이재학(李在學) 1865~?
字는 덕명(德明) 호는 건축재(建畜齋) 본관은 경주로서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제자백가를 통달하였으며 주문공십회(朱文公十誨)와 원개겸칠계서(苑盖謙七戒書)를 좌우명으로 하였다. 경술국치 이후는 두문불출하였으며 저서로는 문집이 전한다.
*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의 14세손. 父는 태악공(泰岳公) 이규형(李奎炯)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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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李 址)
호는 대박자(大朴子) 또 벽사(碧沙) 월성군 秀의 후이다. 우애가 지극하고 효행이 대단하였으며 학문이 깊어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이 욱(李 頊) 1641~1726
자는 경중(敬仲), 호는 석포(石浦) 본관은 전주로서 추만의 손자이다. 과거장에 나아가 응제가 뜻과 같지 못하여 답지를 버리고 나왔다. 그 답지를 주워서 낸 사람은 합격하였다. 이렇듯 관직에는 뜻이 없고 책과 더불어 세월을 보냈다. 저서로는 가훈 한 권이 전한다.

이 해(李 海)
호는 운주(雲洲) 본관은 전주로서 추만의 후이다. 예학을 전공하여 제 행사에 보배로운 존재였다. 그 외 이기설에도 깊은 연구를 하였다.

금 담(琴 曇)
字는 백화(伯華) 본관은 봉화로서 鳳先의 현손이다. 경신옥사 때 영남유림에서 상소를 하려고 할 때 큰 화가 들 것을 예측하고 중지시켜 화를 면했다.

강원일(姜元一)
호는 태백산옹(太白山翁) 본관은 진주로 잠은의 후이다. 지조가 투철하고 특히 시문에 능하였다.

권 율(權 葎) 1382~1712
字는 만중(蔓仲)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세 살에 글을 짓고 열 살에 경서를 깨우쳤다. 저서로는 성리문(性理文), 만제(輓祭) 충사록(衷辭錄)이 있다.

권방도(權邦度) 1798~1876
字는 대이(大而) 호는 두와(蠹窩)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문장이 뛰어나 많은 책을 지었는데 효제록(孝悌錄), 충재내외손자록, 석천지 등이 전한다.

이진희(李鎭禧)
호는 졸제(拙?) 본관은 진성으로 난은의 후이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저서로는 졸재집이 발간되었다.

강 의(姜 漪) 1801~?
字는 문보, 호는 어초은(漁樵隱) 본관은 진주로서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실천궁행 하였다.

이형상(李衡相) 정조 때~
字는 강수(江叟) 호는 성림(聲林) 본관은 진성으로서 난은의 후이다. 평생을 학문에만 연구하면서 제자들만 길렀다. 저서로는 유고가 있다.

배상협(裵相協) 1766~1810
字는 군섭(君燮), 호는 송려(松廬) 본관은 흥해로서 상지의 후이다. 중용지도에 생활의 일체를 맡기고 문필에도 능하였다. 文集이 있다.

권일찬(權日燦) 1784~1855
字는 명중(明仲) 호는 오연(鼇淵) 본관은 안동으로 동강의 후이다. 경서를 열심히 연구하여 학문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배시진(裵是袗) 1730~1794
字는 형여(형如) 호는 월주(月洲) 본관은 성주로서 진구의 손자이다. 덕망이 높고 문장이 뛰어났다. 저서로 유고 4권이 전한다.

금양몽(琴養蒙) 1693~1774
字는 형지(亨之) 호는 쌍호(雙湖)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이다. 농은의 문인으로 학문에 깊이 정진하였으며 제자를 많이 길렀다. 저서로는 쌍호집이 전한다.

윤동설(尹東卨)
호는 사우당(四友堂) 본관은 파평으로서 한 가지라도 깊이 있게 하려고 하며 성의 또한 대단하여 학문이 깊었다. 유고가 전한다.

권정교(權正敎) 1738~1799
字는 대일(大一), 호는 송관자(松館子) 본관은 안동으로서 대졸자의 손자이다. 다재다능하여 시 · 서(書) · 그림에 능하며 유곡삼절의 한 사람이다.

금사원(琴思遠) 1670~1743
字는 근보(根甫) 호는 고산(孤山)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이다. 예기(禮記)를 깊이 연구하여 승사록(承仕錄)을 만들었다.

금봉주(琴鳳柱) 1675~1747
字는 백아(伯雅)호는 하정(荷亭)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이다. 특히 주서에 연구가 깊었다.

김낙이(金樂履)
본관은 선성으로 백암의 후이다. 성리학을 연구하여 유고가 있다.

금 적(琴 籍) 1672~1704
字는 문보(文甫) 본관은 봉화로서 學達의 아들이다. 기국과 도량이 깊고 넓어 학문에 연구가 깊었다.

박주원(朴周元) 1761~1819
호는 경괴당(敬槐堂) 본관은 무안으로서 수서의 후이다. 성리학에 연구가 깊었고 특히 시문에 능하여 유고가 있다.

이한중(李漢中) 1775~
字는 백황(伯黃) 호는 녹문(鹿門) 본관은 진성으로서 난은의 현손이다. 당시 당쟁으로 조정이 혼란함을 혐오하여 오직 학문연구만 하여 특히 천재시인이라 하였다. 지금도 녹문집중시편(鹿門集中詩篇)은 많은 애송을 받고 있으며 분천 녹문산에 조대차구(釣臺茶具)가 남아 있다.

김재로(金載璐) 1850~1929
字는 성석(聖錫)호는 백우(白愚) 본관은 의성으로서 황파의 후이다.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향토문학진흥에 크게 공헌하였다. 저서로는 백우집 8권 4책이 전한다.

이문상(李文相) 정조 때~
호는 태화당(太華堂) 본관은 진성으로서 난은의 후이다. 마음이 맑고 깨끗하며 책을 한번 들면 놓지를 않았다. 특히 글씨를 잘 썼는데, 저서로는 태화문집이 있다.

이옥상(李鈺相) 1835~
字는 경온(景溫) 호는 양로헌(養老軒) 본관은 진성으로서 자신의 깊은 학문을 제자들에게 열심히 깨우쳐 주었으며 저서로는 양로헌집이 전한다.

이중정(李重定)
字는 경초(景初) 호는 수헌(수軒) 평생을 책과 더불어 살아 박학하여 사림으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이석응(李錫應)
호는 경독제(耕讀齌) 기질이 정순하고 순박하고 학문 또한 해박하여 유고가 있다.

이석순(李錫純) 1817~1890
字는 聖古段, 본관은 全州이다. 호는 매계(梅谿) 이학(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저서로는 매계집이 전한다.

김재두(金載豆斗) 1852~1930
字는 여칠(汝七) 호는 묵암(黙庵) 본관은 의성으로 황파의 후이다. 황전 ․ 예안 ․ 풍기에 학당을 세워 많은 제자를 길렀다. 저서로는 묵암집이 간행되었다.

권상기(權相琦) 1841~1891
字는 경일(擎日) 호는 죽옥(竹屋) 본관은 안동으로서 행동 하나하나에 뜻이 있고 학문이 순수하고 깊었다. 저서로는 유고가 전한다.

이경연(李慶淵) 1825~1899
字는 선응(善應) 호는 농재(聾齋) 본관은 전주로서 지조가 굳고 매사에 처리가 분명하고 학문 또한 깊었다.

이두진(李斗鎭)
호는 모헌(慕軒) 본관은 전주로서 부친의 7년 병환을 극진히 받들어 사람들이 효자라 칭하였으며 학문 또한 해박하였다.

권양하(權養夏) 1847~1909
字는 양수(陽叟) 호는 옥윤(玉潤) 본관은 안동으로서 학행이 뛰어나 유고가 있다.

황기도(黃基道)
호는 극재(克齋) 성리학에 연구가 깊었다.

금상열(琴尙烈)
호는 한와(閑窩) 본관은 봉화로서 문곡의 후이다. 경사에 도통하였고 글씨도 정결하였다.

이주연(李珠淵)
호는 늑재(扐齋) 본관은 전주로서 두진의 아들이다. 예기와 시문에 능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금이탁(琴以鐸)
字는 경원(警遠) 호는 농와(聾窩) 본관은 봉화로서 군위공의 후이다. 성품이 청순하고 학문에 부지런하며 효도와 우애가 깊었다.

김휘려(金輝礪)
본관은 신성으로 백암의 후이다. 평소 학문에 게으르지 않았다.

이영필(李英弼) 1848~1916
字는 경립(景立), 호는 지포(芝圃), 본관은 全州이다. 서(栖)의 현손으로 주서에 능하였다.

이석영(李錫永) 1825~1898
字는 세윤(世胤), 호는 계소(溪巢), 본관은 전주로서 경현의 손자이다. 배움에 성의가 있어 그 자체를 행동에 옮겨 언제나 의젓하였다. 유고가 전한다.

금영희(琴永羲) 1786~1856
字는 극초(極初) 호는 묵와(黙窩) 본관은 봉화로서 군위공의 후이다. 성품이 차분하면서 무게가 있고 공부하고 연구할 때도 지구력이 있어 학문에 성공하여 제자를 많이 길렀다. 저서로는 유고가 전한다.

금우규(琴禹圭)
호는 죽하(竹下) 본관은 봉화로서 梧의 후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매일 아침 사당에 절하고 묘에 가서 통곡하였으며 학문에도 부지런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저서로는 유고가 전한다.

김재성(金載聲)
호는 후암(后巖) 본관은 의성으로서 책 읽기를 좋아하며 식사하는 것도 잊고 노력하여 학자가 되었다.

김준호(金峻鎬) 1851~1923
호는 학산(鶴山) 본관은 의성으로서 타인과 학문에 대한 토론을 즐겨하였다. 저서로는 鶴山集이 있다.

금욱열(琴郁烈) 1809~1869
字는 종백(從伯) 호는 난옹(爛翁) 본관은 봉화로서 천성이 과묵하여 점잖으며 학문 또한 깊어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이직필(李直弼) 1860~1922
字는 경이(敬而) 호는 백엄(白广) 본관은 전주로서 덕행이 높았다.

이성필(李聖弼) 1858~1928
字는 경기(敬基) 호는 백오(白吾) 본관은 전주로서 학문이 높았다.

전성열(全性烈) 1822~1869
字는 성언(聖彦) 호는 양정(養靜) 본관은 옥천으로서 야옹의 후이다. 학문에 전심전력하여 덕망이 높았다. 유고가 있다.

김 훈(金 壎)
본관은 선성으로서 석의 동생이다. 경서에 역점을 두고 연구하여 문집을 간행하였다.

권상익(權相益) 1867~1954
字는 순겸(舜謙) 호는 치석헌(치石軒)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대대로 문필가의 후예로 문장과 글씨가 뛰어났다. 항상 의관정제 하였고 언어가 부드럽고 자손들을 자상스럽게 가르쳤다. 만년에 시력을 잃었으나 四書五經을 외웠으며 문밖의 사람소리만 들어도 누군가를 알고 안부를 물었다. 멀리서 보면 위엄이 서리고 가까이서 보면 봄바람 같았다. 저서로는 치석집이 있다.

김재기(金載琪) 1845~1922
字는 경회(景晦) 호는 석우(石愚) 본관은 의성으로서 황파의 후이다. 자신이 晝耕夜讀하였기에 제자들에게도 그렇듯 근면정신을 길러주어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전수남(全秀南) 1795~1867
字는 극로(極老) 호는 지암(志庵) 본관은 옥천으로서 야옹의 후이다. 학문을 하는 데 형식론보다 실천론에 더욱 분발하였다. 목표로 첫째, 글을 읽을 때 한 자라도 소홀히 하지 말 것. 둘째, 책을 대할 때는 밥을 3일간 굶은 자가 음식을 대하듯 할 것을 말했다. 경서 ․ 천문 ․ 산학에 연구가 깊었으며 제자들에게 소학과 삼강행실을 먼저 주입시켰다. 저서로는 자경록(自警錄)과 지암집이 전한다.

전규룡(全奎龍) 1856~1926
字는 희선(羲善) 호는 석엄(石广) 본관은 옥천으로서 야옹의 후이다. 학행도 철두철미하였고 효행 또한 그러했다. 친상을 당하여 3년간 여막생활을 하면서 죽과 소금으로만 먹고 오직 슬픔에만 잠겨 있었다. 저서로는 석엄집 4질이 간행되었다.

김익수(金益秀)
호는 쌍평(雙坪), 언제나 간결하고 종이 한 장이라도 소중히 다루었으며 좋은 일에는 타인의 선두에 서서 해결을 잘하는 학자로 유고가 전한다.

송세호(宋世鎬)
호는 우당(愚堂) 본관은 여산으로 언제나 분수에 넘치는 일은 하지 않고 독서와 더불어 일생을 지냈다.

전재용(全在鑛) 1877~1963
字는 순구(舜九) 호는 청간(聽澗) 본관은 옥천으로서 야옹의 후이다.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고 문장과 필력이 뛰어나 유고가 전한다.

이익로(李翊魯)
호는 백하(白霞) 본관은 진성으로 송재의 후이다. 경학에 뜻을 깊이 두어 매사에 실천하여 만인으로부터 칭송을 크게 받았다.

신하규(申夏圭) 1845~?
字는 내현(乃玄) 호는 노암(鷺巖) 본관은 평산으로 수은당의 후이다. 효행과 우애가 깊음은 물론 학문 연구에도 많은 노력을 하여 유고가 있다.

송수환(宋壽煥)
호는 구암(九巖) 본관은 야성으로서 눌재의 후이다. 매사에 신중하여 절도 있는 생활의 실천가로 예학에 연구가 깊었다.

이재학(李在學) 1865~?
字는 덕명(德明) 호는 건죽재(建畜齋) 본관은 경주로서 四書五經과 제자백가를 통달하였으며 주문공십회(朱文公十誨)와 원개겸칠계서(苑盖謙七戒書)를 좌우명으로 하였다. 경술국치 이후는 두문불출하였으며 저서로는 문집이 전한다.

이오상(李五相) 1845~?
字는 준오(俊五) 호는 간포(潤圃) 본관은 진성으로서 송재의 후이다. 시문에 능하여 시집과 간포집 2권이 전한다.

이득로(李得魯)
호는 정와(靜萵) 본관은 진성으로 송재의 후이다 풍채가 당당하고 용모가 수려하며 학문에도 뛰어나 타인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정로(李庭魯)
호는 소은(小隱) 본관은 진성으로 난은의 후이다. 학덕이 높아 퇴계백선집(退溪百選集)을 만들었다.

이승재(李承載) 1888~1950
字는 덕상(德象) 호는 원계(遠溪) 본관은 전주로서 학문과 덕망이 높았다.

이용락(李龍洛)
호는 청산(聽山) 글에 능통하며 행실이 타의 모범이 되어 모두들 우러러보았다. 저서로는 유고가 있다.

임 후(任忄厚)
字는 이성(而性) 호는 백은(白隱) 본관은 풍천으로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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