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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파(慵齋公派) 세보(世譜)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6. 13:01

월성군(月城君)
대사헌공파(大司憲公)
용재공파(慵齋公派) 세보(世譜)


족보편찬일람[族譜編纂一覽]을 보면
숙종 갑자보는 1684년 8책 영암 망호리 간행,
영조 무진보는 1748년 16책 중협(重協) 서문으로 영암 망호리 간행,
순조 갑술보는 1814년 34책 괴산종중 문광면 광덕리 간행이다.

용재공파(慵齋公派)는
신묘보는 4책 판서 유원 서문,
갑인보는 상원 재학 서문으로 예천 자봉 간행이다.
신묘년(辛卯年)은 1831년. 갑인년(甲寅年)은 1854년이다.

영조 24년(1784)에
​[舊譜之刊甲子重回, 諸派之孫己易三代皆當追錄.....吾宗譜序戊辰始油之而甲戌只幷舊序今從之]로 완전한 족보 16권을 얻었다고 하는 무진보(戊辰譜)를 계승(繼承)한,
가장 최신 것으로, 慶州李氏世譜書所 도유사(都有司) 성호(成鎬) 발행(發行).

​계해년(癸亥年 1983) 대전 소재 보전출판사(譜典出版社)에서 인쇄(印刷)한,
판관공파(判官公派) 충민공파(忠愍公派)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용재공파(慵齋公派)
훈도공파(訓導公派) 재신공파(宰臣公派)에 관한 것을 가지고 기술한다.

용재공의 제(弟)인 눌재공의 자제(自製) 묘지명(墓誌銘)에
[凡人觀化之後倩人碣辭虛張逸筆以改其實尤可笑也]
평범한 사람이 죽고난 뒤에 묘갈의 내용을 남에게 청하여
붓을 들어 허장성세하여 사실을 바꾸면 더욱 우스꽝스러운 일이다.]라 하셨다.

지당한 말이다.

[七擧不中優]라 하셨는데, 누군가는 [戊午禍後不復以進取爲心杜門]이다.
[일곱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다 낙방하였으니]가
[무오사화를 겪은 뒤로는 다시 세상에 나아갈 뜻이 없어]로 변한 것이다.
이는 허장성세(虛張聲勢)를 넘어 환형(換形)이다.

[裔孫嘉善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
타인이 하여도 쑥스러울 진데 자제(自製)인데 이렇다.

그냥 예손(裔孫) 중협(重協)이라고 하여 모를 사람이 있을 것인가.

당시의 요식(要式)일지도 모르거니와
웃어른에 대한 평가는 재하도리(在下道理)에 어긋나는 일이나
흠(欠)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이러한 것이 더해질수록 족보에 대한 신뢰(信賴)는 흐려질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기실, 시조(始祖)에 관한 것은 물론, 월성이씨 전체에 대하여 의혹(疑惑)이 있다 여기니,
멸륜패상(滅倫敗常)인지, 창언정론(昌言正論)인지는 독자(讀者)의 의사여하(意思如何)이다.



[출처] 용재공파(慵齋公派) 세보(世譜)|작성자 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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