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 이종준과 압각수鴨脚樹
[출처] 역사이야기 - 이종준과 압각수鴨脚樹|작성자 푸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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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준李宗準(1458~1499)은 조선전기 의성현령,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자가 중균仲勻이고 호는 용재慵齋로, 부휴거사浮休居士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다섯 살에 글을 짓고, 일곱살에 대의에 통하였으며, 열세 살에 문장을 완성했다.
행장行狀에 "선생은 용모가 단정하고 우아하며 맑은 부용화 같았다. 지조가 맑고 깨끗하여 얼음처럼 청명했다. 문장이 뛰어나고 필체가 도도하여 참으로 한당漢唐의 문장과 같은 규모를 이루었다. 시 또한 우아하고 급박하지 않은 성정에서 나왔으니, 옛 시인의 풍격과 운치를 지녔다. 서화·의약·복서·음률에서도 정교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했다.
이종준은 김종직金宗直 문하의 인재들과 함께 15세기 신진 사림에 속한다. 그러나 경학이나 도학에 치중하지 않고,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한 예술적 재능으로 국내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이종준은 김종직에게 의학과 서화를 배웠다. 그의 시서화는 이른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경지로 일컬어졌다. 대상 자체를 나타내기보다는 정신과 정감을 나타내고하 한 것이다. 동학인 탁영 김일손은 이종준의 시서화 세계를 평하기를, "일찍이 그대가 나보고 우아한 문장을 탐한다고 조롱했는데, 그대가 참으로 그런 것 같구나. 글씨와 그림을 모르더라도 오히려 정신으로 그 오묘함을 알 수 있으니 서화와 시문은 거의 가슴속에 들어 있는 보따리다" 했다.
아버지 이시민李時敏은 종준이 어릴 때 손수 대청 앞에 은행나무 한 그루를 심고 압각정鴨脚亭(杏亭)이란 현판을 나무에 걸었다. 종준은 1477년(성종 8) 사마시에 급제하고, 1485년(성종 16, 을사년)에 문과 제2등으로 급제했다. 이때 잔치를 열고 북을 이 나무에 달았더니 나무가 흔들렸다고 한다. 이종준은 김종직의 문인들과 압각수鴨脚樹 아래에 모여서 학문과 도를 논했다.
연산군이 등극하여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이 격화되자, 이종준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그러나 훈구파 유자광·이극돈 등이 사림파에게 누명을 씌워 화가 언제 닥칠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종준은 근심하지 않고 태연하게 역시 김종직의 문인인 망헌忘軒 이주李胄(1468~1504)와 함께 압각수 아래에서 바둑을 두곤 했다. 어느 날 밖에 있던 사람이 붉은 옷을 입은 관원 한 무리가 곧장 동네로 들어왔다고 전하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바둑을 그만두라고 청했다. 그러자 이종준이 천천히 말하기를 "아직 나를 체포한다는 왕명을 듣지 못했다" 하고서, 오히려 한가하게 계속 바둑을 두었다. 잠시 후 금오랑金吾郞이 도착했다. 이에 이종준이 말하기를 "어머니가 계시니 영결永訣하길 원하오" 하자, 금오랑이 측은하게 여겨 허락했다. 공이 어머니께 절을 올리고 하직했다. 모부인母夫人이 공과 하직할 적에 중국 후한 때 환관의 참소로 억울하게 죽은 범방范滂의 고사를 인용하여 타이르기를, "네가 올바른 죽음을 얻었으니, 내가 어찌 슬퍼하겠느냐. 너는 가서 잘 죽거라, 그리고 나 때문에 걱정하지 말거라"했다.
이종준은 압각수 아래에서 이주와 함께 잡혀 갔다. 이종준은 '조의제문弔義祭文'이라는 사초를 빌미로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인 사림파를 처단하는 무오사화(1498) 때 처형되었다. 함께 잡혀간 이주는 무오사화 때는 생명을 건졌으나, 갑자사화(1504) 때 다시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무오사화 때 압각수 아레에서 이종준이 서울로 압송된 후 언제부턴가 이 은행나무는 말라서 고목으로 겨우 서 있었다. 여섯 번의 무오년이 지난 뒤, 1856년에 압각수 마른 등걸에서 싹이 터 점점 무성해져 나무가 다시 살아났다. 이에 멀리 살던 월성 이씨 후손들이 단壇을 만들고 시와 서문을 썼다. 이 글에 "기이하구나! 이 나무가 다시 살아남이여. 바로 이른바 '마른 버들에서 꽃이 핀다(고양생화枯楊生華: 『주역』 「대과괘大過卦」 구오효九五爻의 효사)'는 것이니, 선생의 덕이 다시 세상에 창성해질 것이다"했다. 이종준의 행장과 비갈碑碣의 내용을 인용하여 추억한 것이다. 이때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1827~1899)은 압각수에 대한 시와 서문을 지었는데, "우리 마을에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크기가 수십 아름이 된다. 고로古老들이 전하는 말에 용재慵齋 선생이 손수 심은 것이라고 한다. 그 아래가 바로 선생이 사시던 옛터다. 수십 년 전에 말라 있던 나무가 다시 무성해졌다고 하니, 기이한 일이다. 이제 선생의 후손이 이 은행나무와 함께 창성하려는가 보다. 사운시四韻詩를 지어 이를 기록한다."고 했다. 압각정 은행나무, 압각수는 거의 죽어가는 고목으로 있다가 다시 살아나면서 수백 년 전 무오사화로 희생된 사림파 선비의 기억을 되살렸다. 지금 나무는 볼 수 없고, 행정(압각정)이란 이름으로만 남아 용재 이종준을 추억하게 한다.
<글출처>
- 김덕현, 『안동 선비마을, 열두 검제』,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출처] 역사이야기 - 이종준과 압각수鴨脚樹|작성자 푸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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