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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족보] 경주이씨(慶州李氏) 가문의 유래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2. 8. 29. 19:01

[한국인의 족보] 경주이씨(慶州李氏) 가문의 유래


[관향의 연혁]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 사로(斯盧)․ 사라(斯羅)로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國名)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고,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 경주군(慶州郡), 1955년에는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가문의유래]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신라건국(新羅建國)의 모체(母體)인 사로(斯盧)의 6부(六部) 중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을 다스렸던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신라 말에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의 이거명(李居明)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우리나라 대다수 이씨(李氏)의 조종(祖宗)으로 알려진 경주이씨는 대체로 고려초기(高麗初期)에서부터 훌륭한 인맥(人脈)을 형성하여 벌족(閥族)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도 수많은 명현(名賢)과 학자(學者)를 배출시켜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지위를 굳혔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소판공 거명의 9세손 총섬(寵暹)이 고려 성종(成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오인유(吳仁裕)․ 남궁원청(南宮元淸)․ 이윤관(李允貫) 등과 더불어 오묘(五廟 : 제후의 묘)와 사직(社稷)을 건립하였으며 국자감(國子監)에 과거제도(科擧制度)를 설립함으로써 면학의 기풍을 고취 시켰다. 한편 총섬(寵暹)의 7세손인 핵(翮 : 문하평리를 지내고 상서좌복야에 추증)의 아들 인정(仁挺)․ 진(瑱)․ 세기(世基) 3형제와 손자(孫子) 5형제가 모두 문과(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서사(書史)와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쳐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특히 충숙왕(忠肅王)이 즉위하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으로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진 진(瑱)은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시문(詩文)에 뛰어나 아들 3형제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당시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 후의 석학(碩學)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익재(益齋) 제현(薺賢)은 백이정(白頤正)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議贊化功臣)으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일곱 왕조(王朝)에 네 번이나 상부(相府)에 올라 정사(政事)를 돌보며 당대의 명문장가(名文章家)로 외교문서에 통달했었다.

특히 제현(薺賢)은 우리나라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원(元)나라 조맹부(趙孟부)의 서체(書體)를 도입하여 이를 널리 유행시켰고, 그의 저서(著書) 「익재난고(益齋亂藁)」의 소악부(小樂部)에 칠언절구 한시(漢詩)로 번역하여 실은 17수(首)의 민간가요는 오늘날 고려가요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다정한 문우(文友)였던 지대(之帶 : 한성판윤을 지냄)와 세조(世祖) 때 좌리3등공신(佐理三等功臣)으로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던 철견(鐵堅), 중종(中宗)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壯元) 급제하여 경산(慶山)과 초계현령(草溪縣令)을 지냈다.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던 을규(乙奎)가 뛰어났고,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 임해군(臨海君)에 추봉되었던 달존(達尊 : 익재 제현의 아들)의 6세손 공린(公麟 : 평안감사 윤인의 아들)은 사육신(死六臣) 박팽년(朴彭年)의 사위가 되었는데, 슬하에 아들 8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했다. 공린(公麟)의 장가 들던 날 집안이 청빈(淸貧)하여 폐백을 대 광주리(竹筐)에 담아 가지고 갔는 장모 이씨(李氏)가 예절을 모른다고 나무라자 박팽년은 “내가 이 사람을 고른 것이 이 까닭이오” 라고 하였다. 장가 든 첫날 밤 꿈에 늙은 첨지 8명이 절하면서 “우리들은 장차 솥에 삶겨져 죽게 되었는데 만약 생명을 살려 주시면 후하게 은혜를 갚겠습니다.” 하며 애원하였다.

공린(公麟)은 잠에서 깨어나 신부에게 물으니 자라 여덟 마리를 사다 부엌에 두었다고 말했다. 당시 첫날 밤을 지낸 신랑에게 정력을 보강하는 뜻에서 자라를 고아 먹이는 풍습이 있었다. 이에 놀란 공린(公麟)이 자라를 즉시 강물에 놓아 보내게 하였으나 자라 한 마리가 빠져 달아나니, 종이 삽을 가지고 잡으려다가 잘못하여 그 목을 끊어 죽였다. 그날 밤에 또 꿈을 꾸니 7명의 첨지가 와서 감사하다고 절을 하였다. 그 후에 공린(公麟)은 아들 8형제를 낳아 이름을 오(鼇)․ 구(龜)․ 원(黿)․ 타(鼉)․ 별(鼈)․ 벽(鼊)․ 경(鯨)․ 곤(鯤)으로 지었는데, 모두가 재주와 명성이 뛰어났고 문장과 행의(行義)로서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셋째 원(黿)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니 세상 사람들은 앞서 삽 끝에 목이 잘려 죽은 한 마리 자라의 옛일과 맞아 떨어졌다고 했다. 특히 원은 문행(文行)이 뛰어나 순숙(筍淑)의 아들 8형제를 비유한 <순씨팔룡(筍氏八龍)>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명(慈明)과 같다는 칭찬을 받았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시호(諡號)를 주는 관청의 태상(太常)에 있으면서 김종직(金宗直)의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하자고 의논하였다는 죄목으로 나주(羅州)에 유배되었다. 갑자사화 때 죄가 가증되자 종이 원(黿)을 업고 도망하려 하였으나 그는 “임금의 명(命)은 피할 수 없다.” 하며 끝내 형벌에 다달아 굽히지 않으니 연산군(燕山君)이 더욱 노하여 죽음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별(鼈)은 형인 원(黿)과 함께 울면서 작별하고 과거의 뜻을 단념한 채 평산(平山)으로 내려가 그가 사는 집을 <장육당(藏六堂)>이라 하며 호(號)를 삼았다.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의하면, 그는 늘 소를 타고 술을 싣고 다니면서 고을의 노인들과 더불어 낚시질과 사냥을 하였다. 또한 시(詩)를 읊고 술을 따르면 해가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몰랐고 술에 취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였다고 한다. 한편 검교정승(檢校政丞) 세기(世基 : 문희공)의 후손(後孫)에서는 그의 손자(孫子) 경중(敬中)․ 달충(達衷)․ 성중(誠中) 3형제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고려조에서 판병부사(判兵部事)를 지내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던 경중(敬中)의 손자 정보(廷俌)가 고려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한 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정보의 후손에서는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정암(廷馣)과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한 정형(廷馨)․ 정혐(廷嫌) 3형제가 현달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적병이 해서(海西)에 몰려들었을 때, 정암(廷馣)은 원근(遠近)에 격문을 띄워 의병(義兵)을 모아 김덕함(金德諴)․ 조정견(趙廷堅) 등 의병장의 호응을 받아 연안성(延安城)을 사수하기로 하고, 대장기(大將旗)와 <분충토적(奮忠討賊)>이라고 쓴 기를 세우과 왜적과 대치한 후 사기가 침체되어 응전할 용기를 상실한 의병들에게 유명한 <독전연설(督戰演說)>을 하고 더 저항할 수 없는 사람은 떠나가라고 하면서 성문(城門)을 열어주었다.

천 여명이 넘던 의병 중에 생명을 정암에게 맡기겠다는 나머지 2백 여명과 5일 동안에 주야로 접전한 끝에 마침내 적을 물리쳤다. 같은 시기에 그의 아우 정형(廷馨)은 좌승지(左承旨)로서 선조의 피난을 수행하다가 개성(開城)의 성거산(聖居山)에서 적의 북진을 저지함으로서 많은 전과를 올렸고 남도와 행재소(行在所)간의 연락 및 교통을 보장했다. 특히 정형(廷馨)은 사문(史文) 학자로서도 재질이 뛰어나 「동각잡기(東閣雜記)․「황토기사(黃兎記事)」․「수춘잡기(壽春雜記)」등 많은 저서(著書)를 남겨 명망이 높았다. 계림군(鷄林君) 달충(達衷)의 후손에서는 세조(世祖)때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판서(判書)에 오른 승상(升商)과 흥상(興商)이 유명했다.

후손 개립(介立)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훈공을 세워 무명(武名)을 떨쳤다. 임진왜란 때 <육전의 충무공>으로 명성을 떨쳤던 수일(守一 : 성중의 7세손)은 장군이면서도 사병과 함께 먹고 자서 사병들에게 정신적인 숭앙을 받았고 전투를 하기 전에 정보와 첩보를 선행시켜 백전백승의 전과를 올렸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는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겸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안현(鞍峴 : 길마재) 결전에서 이괄의 군대를 격파하여 진무2등공신(振武二等功臣)으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낸 후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1583년(선조 16)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40여 년 간 무신으로 대공(大功)을 세웠으면서도 그가 입은 옷 가운데서 깁지 않은 옷을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은 효종(孝宗) 때의 명장 매죽헌(梅竹軒) 완(浣)인데, 1602년(선조 35)에 출생하여 1624년(인조 2) 23세 때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지방의 수령을 역임한 후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승진, 병자호란 때 김자점(金自點)의 휘하에 별장(別將)으로 출전하여 정방산성에서 전공을 세우고, 포도대장(捕盜大將) 등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기로 이름났던 완(浣)이 수어사(守禦使)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의 휘하에 있던 관리 하나가 죄를 범하여 죽게 되었다.

그런데 그 죄인의 누이가 인선대비전(仁宣大妃殿)의 시녀(侍女)였으므로 대비가 불쌍히 여겨 숙경공주(淑敬公主 : 효종의 여섯째 딸)를 시켜 죄를 가볍게 다스려 달라는 사청(私請)을 하자 “관리가 죄가 중해서 가히 용서할 수 없으니 대비의 명령을 받아도 그 뜻에 맞추어 법을 굽힐 수 없는데, 하물며 샛길로 전해온 말임으로 더욱 받아 들일 수 없으니 공주는 다시 이같은 청을 하지 마시오” 하니 대비가 듣고 부끄러워하고 헌종은 더욱 공경하고 두려워했다. 그의 집이 동소문 옆 낙봉(駱峰) 아래에 있어서 인평대군(麟坪大君 : 인조의 셋째아들)의 집과 같은 마을이었는데 훈련대장(訓鍊大將)에 임명되자 급히 안국방(安國坊)으로 옮기면서 말하기를 “군사를 맡은 신하로서 하루라도 왕자(王子)와 서로 이웃에서 같이 살 수 없다”고 하였다.

진천(鎭川)의 수령으로 나갔던 몽량(夢亮)은 아전과 결탁하여 상전을 모략했던 종의 횡포를 엄하게 다스려 당시 잦은 사화(士禍)로 몰락한 선비들의 억울함을 씻어 주었고, 그의 아들 백사(白沙) 항복(恒福)이 경주이씨 가문을 더욱 빛냈다. 1556년(명종 11) 참찬(參贊) 몽량(夢亮)의 아들로 태어난 항복(恒福)은 처음 출생해서 이틀이나 젖을 먹지 않았고 사흘 동안 울지 않아 집안 사람이 걱정하여 장님으로 하여금 점을 치게 하니 “근심할 것 없습니다. 마땅히 극귀(極貴)할 것입니다.” 라고 축하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총명하고 영리함이 남보다 뛰어나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칼과 거문고로 글귀를 지으라고 하니, 즉시 <칼은 장부의 기상을 가졌고(劍有丈夫氣), 거문고는 천고의 음성을 간직했다.(琴藏千古音)>고 응대하여 사람들이 그가 장래에 큰 그릇을 이룰 것으로 알았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선 항복은 임진왜란 때 다섯 차례나 병조판서(兵曹判書)로서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국난을 수습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이어 호성일등공신(扈聖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그는 곧고 맑은 성품과 풍부한 기지로 <오성과 한음>의 일화(逸話)를 남겼다. 이덕형(李德馨)․ 이정립(李庭立)과 더불어 과거의 동방으로 <삼리(三李)>로 일컬어졌고, 또한 이덕형․ 이원익(李元翼)과 함께 <혼조삼리(昏朝三李)>로 불리워졌다.

전후(戰後)에 정승에 올라 당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당쟁(黨爭)을 조정하는데 진력했던 항복(恒福)은 조선조(朝鮮朝)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우러름을 받았으나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다가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어 63세로 생을 마쳤다. 광해군 때 일이다. 탄핵을 당하고 동대문 밖 노원(蘆原) 마을에 살다가 한 번은 평민 옷을 입고 지팡이 하나로 청평산(淸平山)에 유람갈 때에 소양강(昭陽江)에 이르니, 한배에 탄 젊은이들이 정승인 줄 모르고 버릇없이 굴면서 거기까지 온 이유를 물었다.

항복(恒福)이 말하기를 “이곳이 산수(山水)가 좋다는 말을 듣고 살아볼까 하고 왔소” 하니 젊은이들은 더욱 방자하여 등 너머로 한 산을 가리키며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말이 저 산이 떠서 들어왔기 때문에 이사 와서 사는 사람들이 치부(致富)한다고 하는데 당신도 와서 살면 좋을 것이오” 하고는 귀에다 대고 서로 말하기를 “이 사람의 관자놀이에 옥관자가 둥그니 필시 납속당상(納粟堂上 : 벼슬할 자격도 없는 자가 조정에 곡식을 바치고 당상관의 벼슬을 얻은 사람)인 모양이다”하고는 가 버렸다. 항복은 모욕을 당한 젊은 그들을 생각하고는 아래와 같은 시(詩)를 지었다.

만년에 소양강 아래서(晩計昭陽下)

그대들과 함께 낚시대로 늙으리(同君老一竽)

생계가 박할까 근심하지 말게나(莫憂生事薄)

부래산이 저기 있잖은가(自有浮來山)

소양강 건너 부래산(浮來山)은 옛날에 둥둥 떠서 들어온 산이라 이 지방에는 외래의 사람이 들어오면 잘 산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다. 항복(恒福)의 증손(曾孫) 세필(世弼)은 이조참판 시술(時術)의 아들로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송시열(宋時烈)과 박세채(朴世采)에게 학문을 배워 특히 예학(禮學)으로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홍주목사(洪州牧使) 세구(世龜)의 아들 광좌(光佐)는 숙종(肅宗)과 영조(英祖) 대에 걸쳐 명상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다시 영의정에 오른 광자(光佐)는 실록청 총재관으로 숙종(肅宗)과 경종실록(景宗實錄)의 보유편(補遺篇)편찬을 담당했다.

영조(英祖)의 간곡한 부탁으로 노론의 민진원(閔鎭遠)과 제휴하여 노․소론의 연립 정권을 수립, 당쟁 완화에 노력했다. 좌의정을 지내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던 태좌(台佐)의 아들 종성(宗城)은 영조(英祖) 때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으며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이조판서 계조(啓朝)의 아들 유원(裕元)은 고종(高宗) 때 영상(領相)으로 유명했다. 저동(苧洞)에 살았던 그는 대원군(大院君)의 개혁정치를 반대하다가 파직되기도 했으나 후에 다시 영의정에 복귀하여 대원군과의 반목으로 맞섰다. 유원(裕元)이 남산 동쪽 기슭에 정각(亭閣)을 하나 새로 짓고 많은 조신(朝臣)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던 날 은퇴 중인 대원군도 초대되어 한자리에 있었다.

유원(裕元)은 대원군에게 이 정각의 이름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자 대원군은 마침 이 정각의 정원에 두 그루의 회(檜)나무가 있었기로 쌍회정(雙檜亭)이라 하고 손수 붓을 들어 현판을 써주었다. 그러나 후일에 대원군이 말하길 송(宋)나라의 진회(秦檜)는 한 그루의 회(檜)로서 나라를 망쳤는데 두 그루 회나무의 쌍회정은 보다 심할 것이라고 한 말이 유원(裕元)의 귀에 들어왔다. 유원(裕元)은 즉시 현판을 두들겨 부수고 회나무 두 그루를 베어 버린 후 대원군을 배척하는데 선봉이 되었다고 한다. 경주이씨의 또 다른 인맥(人脈)으로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12세손 신우(申佑 : 고려 때 병부상서를 지내고 원주백에 봉해짐)의 10세손인 규(揆)는 고려 때 찬성(贊成)을 역임한 후 충혜왕(忠惠王)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규(揆)의 현손(玄孫)으로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한 종준(宗準)은 호당(湖堂)에 뽑혔고, 문장(文章)과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났다. 그가 일찌기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갔을 때 역관(驛官)에 있는 병풍의 그림이 좋지 못함을 보고 붓으로 칠해 버렸다. 역관이 통역을 불러 힐문(詰問)하자 통역은 “서장관이 글씨를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리므로 반드시 그 뜻에 만족하지 못하여 그렇게 한 듯합니다” 하자 역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준(宗準)이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곳에 이르니 새 병풍을 두 벌 펼쳐 놓았으므로 종준이 한편에서는 글씨를 쓰고 한편에서는 그림을 그리니 모두 정묘(精妙)한 경지에 이르러 보는 사람이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 뒤 종준의 벼슬이 사인(舍人)에 이르렀으나 연산군(燕山君) 때 북계(北界 : 함경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고산역(高山驛)을 지나가다가 옛적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말을 하다가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할 때 지었던 글을 비유하여 <외로운 충성을 다른 이는 따르지 못하리라 자신하다(孤忠自計衆不興)>는 율시(律詩) 한 수를 벽 위에 써 놓고 갔다. 후에 감사(監司)가 이것을 임금에게 올리니 연산군을 원망하는 뜻이 담겼다고 하여 잡아다가 국문하고 죽였다고 한다. 구한 말에 와서는 고종(高宗)때 총융사(摠戎使)를 거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와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지낸 현직(顯稷)과 평안도 암행어사(暗行御史)를 지내고 교정청(校正廳) 당상(堂上)에 올랐던 유승(裕承)이 유명했다.

희수(喜秀)는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다. 군수(郡守) 유헌(裕憲)의 아들 주영(冑榮)이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과 장례원경(掌禮院卿)을 지낸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갔으며 하영(夏榮)은 중추원고문(中樞院顧問)을 역임하였다. 이조판서(吏曹判書) 유승(裕承)의 아들 시영(始榮)은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柳河縣)에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승만(李承晩)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여 부통령을 사퇴했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의 폐기를 상소하고 자결을 시도했던 상설(相卨)은 1910년 류인석(柳麟錫) 등과 함께 <성명회(聲鳴會)>를 조직하여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통박하는 성명서를 전국에 발송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투옥되었다.

이듬해 석방, 이동녕(李東寧)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권업보(勸業報)」를 발행하여 교포의 계몽과 산업발전에 이바지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순국한 시영(始榮)과 해방 후에 상해(上海)에서 교포의 보호에 진력했던 상정(相定)이 용맹을 떨쳤으며, 신한독립당 감찰위원장을 역임한 규채(圭彩)는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회영(會榮)․ 상용(相龍)과 함께 명문의 전통 가문인 경주이씨를 더욱 빛냈다. 근대에 와서는 삼성 기업군의 총수 호암(湖岩) 병철(秉喆)이 한국경제발전의 기수로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3남 건희(健熙)가 유업을 계승하여 한국경제(韓國經濟)의 지반(地盤)을 다지고 있다.

*출처: 한국인의 족보: http://www.anyroo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