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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악부(遺山樂府) / 용재 이종준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2. 8. 6. 19:25

소장품 명칭 : 유산악부(遺山樂府)
국적/시대 : 한국-조선
용도/기능 : 문화예술-음악-서적-악서
크기 : 가로 : 16 세로 : 23.5
소장품 번호 : 민속024325
내용 : 이제현(李齊賢)이 원나라에서 수집한 여러 학자들의 악부(樂府)와 사곡. 경주목사인 이종준(李宗準)이 '弘治紀元之五年'에 간행. 목판본. 사주쌍변(四周雙邊). 반엽(半葉) 10행. 표지 오른쪽은 꼰실로 5바늘 꿰어 엮음. 표지 2장, 본문 84장. '鄭敍'의 題·목록·한라 상·중·하로 구성됨. 관주와 인장 4방이 찍혀 있음. 여백과 일부에 보정된 글이 있음.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https://www.nfm.go.kr/common/data/home/relic/detailPopup.do?seq=PS0100200100102432500000

 

 

용재유고(慵齋遺稿) / 雜著


遺山樂府詩跋

樂府。詩家之大香奩也。遺山所著。淸新婉麗。其自視似羞比秦晁,賀晏諸人。而直欲追配於東坡,稼軒之作。豈是以東坡爲第一。而作者之難得也耶。然后山以爲子瞻以詩爲詞。如敎坊雷大使之舞。雖天下之工。要非本色。李易安亦云。子瞻歌詞。皆句讀不葺之詩耳。往往不協音律。王半山,曾南豐。文章似西漢。若作小歌詞則人必絶倒不可讀也。乃知別是一家。知之者小。彼三先生之集大成。猶不免人之譏議。況其下者乎。夫詩文分平側。而歌詞分五音五聲。又分六律。淸濁輕重。無不克諧。然後可以入腔矣。蓋東坡自言平生三不如人。歌舞一也。故所作歌詞間有不入腔處耳。然半山,南豐。皆學際天人。其於作小歌詞。直如酌蠡水于大海。豈可謗傷耶。吾東方。旣與中國語音殊異。於其所謂樂府者。不知引聲唱曲。只分字之平側。句之長短。而協之以韻。皆所謂以詩爲詞者。捧心而顰其里。祗見其醜陋耳。是以。文章巨公。皆不敢強作。非才之不逮也。亦如使中國人若作鄭瓜亭小唐鷄之解。則必且使人撫掌絶纓矣。唯益齋入侍忠宣王。與閻,趙諸學士游。備知詩餘衆體者。吾東方一人而已。然使后山易安可作。未知弊衣緩步。爲眞孫叔敖也耶。以此知人不可造次爲之。雖未知樂府。亦非我國文章之累也。愚之誦此言久矣。今以告監司廣原李相國。相國曰。子之言是矣。然學者如欲依樣畫胡蘆。不可不廣布是集也。於是就舊本考校殘文誤字。謄寫淨本。遂屬晉州慶牧使絍繡梓。時弘治紀元之五年壬子重陽後一日。都事月城李宗準仲匀。識。先生表德。從金而避 諱書匀。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8
한국문집총간 > 용재유고 > 慵齋先生遺稿 附訥齋遺稿 > 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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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2. 유산(遺山)이 지은 악부(樂府)를 진주목사에게 부탁하여 문집으로 간행할 때 쓴 발문.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http://kyujanggak.snu.ac.kr/home/index.do?idx=06&siteCd=KYU&topMenuId=206&targetId=379&gotourl=http://kyujanggak.snu.ac.kr/home/MOK/CONVIEW.jsp?type=MOK^ptype=list^subtype=sm^lclass=AL^mclass=^sclass=^ntype=mj^cn=GK04282_00



유산악부시의 발문[遺山樂府詩跋]
태원太原의 원호문元好問1) 유지裕之가 악부樂府를 짓고 『유산악부遺山樂府』라고 불렀다.

악부樂府2)란 시인들의 시를 모아 놓은 향기로운 큰 상자이다. 유산遺山이 지은 시는 맑고 신선하며 아름답고 고운데, 그가 스스로를 진관秦觀3)·조보지晁補之4)와 이하李賀5)·안수晏殊6) 같은 사람들과 견주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곧바로 동파東坡7)와 가헌稼軒8)의 작품과 견주어지고 싶어 하는 듯하니, 어쩌면 동파를 으뜸으로 여기고 작가 자신은 얻기 어려운 경지라고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후산后山9)은 자첨子瞻이 시로써 사를 썼으니 교방敎坊의 뇌대사雷大使가 추는 춤처럼 천하의 공교로움을 지니기는 했지만, 요컨대 본래의 면목은 아니라고 여겼고,10) 이이안李易安11)도 “자첨의 가사歌詞는 모두 구두句讀가 가지런하지 않은 시詩일 뿐이라서 이따금 음률이 어울리지 않는다. 왕반산王半山12)·증남풍曾南豐13)이 지은 문장의 풍격은 서한西漢의 것 같으나, 만약 작은 가사[小歌詞]14)를 짓게 되면 사람들이 반드시 포복절도하며 읽지 못할 것이니, 이에 사詞가 별도의 일가를 이루고 있지만 이를 아는 자들이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15)라고 하였다. 저 세 선생의 집대성한 경지로도 남의 비방을 면치 못하는데 더구나 그보다 못한 자의 경우임에랴.
대체로 시문詩文은 평측平側을 나누는데, 가사歌詞는 오음五音과 오성五聲으로 나누고, 또 육률六律을 나누어 청탁경중淸濁輕重이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린 뒤에야 가슴속으로 파고들 수 있다.16) 동파는 스스로 “평생 남만 못한 것이 세 가지인데 노래하는 것이 그중 하나이다.”17)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은 가사가 이따금 가슴속에 파고들지 않는 점이 있다. 그러나 반산과 남풍은 모두 학문이 하늘과 사람 사이에 깊은 연구가 있어 그들이 작은 가사를 짓는 것은 바로 표주박으로 큰 바다의 물을 뜨는 것과 같으니 어찌 비방하고 헐뜯을 수 있겠는가.18)
우리나라가 중국어와 음이 아주 달라서, 그들이 말하는 악부樂府라는 것에 대해서는 소리를 길게 늘어뜨려 곡으로 부르는 것인 줄을 모르고 다만 글자의 평측平側과 구句의 장단長短을 나누어 운을 맞추니, 모두 이른바 시로써 사를 지은 격이다. 가슴을 쥐고 찡그리면 그 마을 사람들은 못생긴 모습만 볼 뿐이다.19) 그러므로 문장에 뛰어난 사람이라도 모두 감히 억지로 짓지 않으니, 재주가 미치지 못해서가 아니다. 만약 또한 중국 사람에게 정과정鄭瓜亭과20)를 풀이하여 짓게 한다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손뼉을 치며 갓끈이 끊어져라 웃게 할 것이다. 오직 익재益齋가 원나라에 들어가 충선왕忠宣王을 모실 때 염복閻復·조맹부趙孟頫 등의 학사들과 교유하면서21) 시와 그 외의 여러 문체文體를 두루 알았으니 우리나라에 오직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후산과 이안처럼 사를 잘 짓는다 해도 해진 옷을 입고 천천히 걷는 사람이 진짜 손숙오孫叔敖인지는 알 수 없지 않겠는가.22) 이것으로 사람은 경솔히 악부를 지어서는 안 되며, 악부를 모른다 해도 또한 우리나라 문장의 누가 되는 것은 아님을 알겠다.
내가 이러한 말을 한 지 오래되었다. 이제 감사 상국相國 이광원李廣原23)에게 말하였더니 상국이 “그대의 말이 옳소. 그러나 학자가 조롱박을 본떠서 그리려면24) 이 문집을 널리 배포하지 않을 수 없소.”라고 하였다. 이에 옛날의 판본으로 남아 있는 글과 오자誤字를 교정한 다음 베껴 적어 정본淨本을 만들고 드디어 진주 목사晉州牧使 경임慶絍25)에게 부탁하여 목판에 새기게 하였다.

홍치弘治 기원 5년(1492) 임자일 중양절 하루 뒤 도사都事 월성月城 이종준李宗準중균仲匀이 기록하다. 【선생의 자는 쇠 금金 부수인데 휘諱하여 균匀으로 썼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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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호문(元好問, 1190∼1257) : 자는 유지(裕之), 호는 유산(遺山)이다. 금(金)나라 때의 학자이며 시인이다. 벼슬이 행 상서성 좌사원외랑(行尙書省左司員外郞)에 이르렀다. 1234년 금나라가 멸망하자 원나라에서 벼슬하지 않고 저작에만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유산집』 등이 있다.

2) 악부(樂府) : 시체(詩體)의 이름으로, 당초에는 악부(樂府)의 관서에서 채집한 시가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나, 후대에는 위진(魏晉) 시대 이후부터 당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음악에 올릴 수 있는 시가들부터 악부에 나오는 옛 시의 제목을 모방한 작품들까지 모두 악부라고 통칭하였다.

3) 진관(秦觀) : 자는 소유(少游)로, 문사(文詞)에 능하였으며 소식의 천거로 태학박사(太學博士)가 되었다. 조보지(晁補之)·장뢰(張耒)·황정견(黃庭堅)과 함께 송나라 때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로 일컬어졌다. 저서로는 『회해집(淮海集)』이 있다.

4) 조보지(晁補之) : 자는 무구(无咎), 호는 귀래자(歸來子)이다. 서화와 시문(詩文)에 뛰어나, 산문은 유종원(柳宗元)을, 시는 도연명(陶淵明)의 풍격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저서로는 『계륵집(雞肋集)』 등이 있다.

5) 이하(李賀) : 자는 장길(長吉)이며, 중국 당나라 때 시인이다. 안수(晏殊)와 더불어 일곱 살에 문장을 짓는 데 능하여 둘 다 어려서 신동으로 알려졌던 인물이다. 과거에 낙방하고 9품 말단 관직을 지낸 뒤 27세에 요절했다. 염세적 색채가 짙으며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표현하였다. 초자연적인 제재(題材)를 잘 써서 ‘귀재(鬼才)’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6) 안수(晏殊) : 자는 동숙(同叔)이며, 북송(北宋) 때 문신이다. 송나라 최초의 동자(童子)를 위한 특별 시험에 합격하여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의 자격을 받았으며 벼슬이 재상 겸 추밀사(樞密使)에 이르렀다. 시문과 사(詞)에 능하였는데, 범중엄(范仲淹)·공도보(孔道輔)·구양수(歐陽脩) 등이 그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7) 동파(東坡) : 소식(蘇軾, 1036∼1101)의 호이다. 자는 자첨(子瞻)이다. 중국 북송의 문신이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아버지 소순(蘇洵), 아우 소철(蘇轍)과 함께 삼소(三蘇)라 불린다.

8) 가헌(稼軒) : 신기질(辛棄疾, 1140∼1207)의 호이다. 남송의 문신이자 시인인 소식과 함께 소신(蘇辛)이라 불렸는데, 남송 때 호방파(豪放派) 사인(詞人)으로, ‘사 중의 용[詞中之龍]’이라 불렸다. 호방하고 웅건하면서도 여리고 아름다운 풍격도 갖추었으며 전고를 잘 썼고, 나라의 통일을 회복하려는 애국적인 내용과 비분강개한 내용을 주로 썼다. 사집(詞集)으로 『가헌장단구(稼軒長短句)』가 있다.

9) 후산(后山) : 진사도(陳師道)의 호이다. 자는 무기(無己) 또는 이상(履常)이다. 북송의 강서시파(江西詩派) 시인으로, 젊었을 때 증공(曾鞏)에게 배웠고,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사람됨이 고아하고 절개가 있어 안빈낙도했지만, 어려움 속에 곤궁하게 살다가 추위와 병에 시달리다 죽었다. 저서로는 『후산집』 등이 있다.(『宋史』 卷444 「陳師道傳」)

10) 뇌대사(雷大使)가……여겼고 : 뇌대사는 송나라 신종(神宗) 때의 무용가 뇌중경(雷中慶)을 말한다. 진사도는 무용가가 젊은 나이의 여자라야 하는데 뇌중경이 남자로서 춤을 추니, 비록 춤의 기교가 지극하다고 이름이 났으나 춤이 지닌 본래의 면목을 보여 주지는 못하듯이 소식이 ‘시를 짓는 기법과 풍격으로 사를 쓴 것[以詩爲詞]’을 두고 소식이 시와 사의 경계를 섞어 버렸다고 보아 이를 비판한 말이다.(『后山集』 卷23 「詩話」)

11) 이이안(李易安) : 이안은 이청조(李清照)의 호이다. 송대 여류사인(女流詞人)이며, 이안거사(易安居士)를 줄인 말이다. 완약사파(婉約詞派)의 대표자이다. 문인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했으나 여진족이 개봉(開封)을 점령했을 때 집과 장서(藏書)가 불태워졌고 남편과도 사별하여 강남을 전전하다가 죽었다. 전후 인생의 희비가 극명한 대비를 이룬 삶 속에서 여성 특유의 예리함과 강렬한 어법 구사로 유명하며, 그녀의 사는 이욱(李煜)이나 안기도(晏幾道)의 전통을 따른 청려(淸麗)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12) 왕반산(王半山) : 반산은 왕안석(王安石)의 호이다. 왕안석은 인종 때 진사시에 급제하고, 벼슬은 재상에 올랐다. 왕안석의 시는 맑고 전아하며 산문은 웅건, 간결하고 힘이 있어서 명성이 높다. 저서로는 『임천집(臨川集)』이 있다.

13) 증남풍(曾南豐) : 남풍은 증공(曾鞏)의 호이며, 자는 자고(子固)이다. 왕안석과 함께 당송팔대가에 속한다. 증공은 젊어서부터 문명을 떨쳐 구양수(歐陽脩)의 인정을 받았다. 한유(韓愈)를 추종하였으며, 구양수와 마찬가지로 ‘문이명도(文以明道)’를 주장하고 글 또한 구양수의 글처럼 평이했으나 유려하고 명확한 문장을 구사하였다. 저서로는 『원풍유고(元豐類稿)』 등이 있다.

14) 작은 가사[小歌詞] : 문장의 내용으로 보아 짧은 사(詞)를 두고 하는 말로 보인다. 사는 중국 남조(南朝) 시기에 싹을 터서 송대(宋代)에 들어와 가장 전성기를 이룬 문학 형식으로, 장단구(長短句)·곡자(曲子)·곡사(曲詞) 등으로도 불린다. 음악의 악곡(樂曲)에 맞추어 가사를 메워 넣는 시가(詩歌)로, 서강월(西江月)·접련화(蝶戀花)·보살만(菩薩蠻) 등 곡조를 지칭하는 사패(詞牌)에 맞추어 짓는다.

15) 자첨의……있다 : 이청조의 「사론(詞論)」에 나오는 말이다. 서한(西漢) 시기는 유향(劉向)의 『설원(說苑)』과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가의(賈誼)와 조조(晁錯)의 정론(政論) 등으로 대표되는 기사(記事)와 서정(抒情) 및 의리(議理)를 밝힌 산문으로 대표된다.

16) 시문(詩文)은……있다 : 이청조의 「사론」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이종준 자신의 시문에 대한 의견을 밝힌 말이다.

17) 평생……하나이다 : 『쌍교수필(雙橋隨筆)』·『설부(説郛)』·『고금사문유취속집(古今事文類聚續集)』등 여러 책에서는 소식이 말하는 ‘남만 못한 것’으로 “바둑 두는 것, 술 마시는 것, 노래 부르는 것[着棋吃酒唱曲]”이라 기록하고 있다.

18) 반산과……있겠는가 : 이 말은 이청조의 「사론」에서는 안수·구양수·소식을 두고 한 말인데, 이종준은 왕안석과 증공에 해당하는 것으로 바꾸어 말하고 있다.

19) 가슴을……뿐이다 :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하는 말의 성조를 길게 늘어뜨려 사(詞)를 지음으로써 그 내용과 형식이 자연스러운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모르기에 글자의 평측과 구의 장단을 나누고 운에 맞추는 등 그 형식만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미인 서시(西施)가 가슴 병을 앓아 찡그리는데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그 마을의 못생긴 여인 동시(東施)가 보고 부러워하여 가슴을 쥐고 찡그리자 사람들이 보기 싫어 문을 닫았다는 고사가 있다.(『莊子』 「天運」)

20) 소당계小唐鷄 정과정(鄭瓜亭)과 소당계(小唐鷄) : 정과정은 고려 인종과 의종 때의 문인 정서(鄭敍)가 지은 향가계 고려가요로, 우리나라에서 충신이 임금을 그리는 내용으로 된 문학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소당계는 「오관산곡(五冠山曲)」으로 「목계가(木鷄歌)」라고도 한다. 효자인 문충(文忠)이 어머니가 날로 노쇠하여 감을 보고 슬퍼하여 지은 노래이다. 가사는 전하지 않고 제목과 그 유래만 『고려사』에 전하며, 이제현(李齊賢)의 한역시(漢譯詩)가 전하고 있다.(『圓齋集』 卷上 「東國四詠」, 『高麗史』 卷56 「地理志」,『新增東國輿地勝覽』 卷12 「長湍都護府」, 『益齋亂稿』 卷4 「小樂府」)

21) 익재(益齋)가……교유하면서 :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원나라에서 충선왕(忠宣王)의 원나라 체류를 승인하자 충선왕이 원나라에 가서 연경(燕京)의 저택에 만권당(萬卷堂)을 지었는데, 익재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이때 원나라에 가서 10년 가까이 만권당을 근거로 조맹부(趙孟頫)·장양호(張養浩)·원명선(元明善) 등과 깊은 교분을 맺었다.(『高麗史』 卷34 「忠宣王世家二」, 閔賢九 『高麗政治史論』 고려대학교출판부 2004년 269∼270쪽.)

22) 해진……않겠는가 : 우맹(優孟)이 손숙오(孫叔敖)의 의관을 쓰고 손숙오로 가장(假裝)하였던 것처럼,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중국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사를 지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우맹은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유명한 배우이다. 당시에 정승 손숙오가 그에게 잘해 주었는데, 손숙오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이 가난에 시달리는 것을 알고는, 그의 흉내를 연습한 뒤에 그의 의관을 착용하고 임금에게 나아가 그 자손에게 땅을 봉해 주도록 설득하였다고 한다.(『史記』 卷126 「滑稽傳」)

23) 이광원(李廣原) : 광원은 이극돈(李克墩, 1435∼1503)의 봉호이다. 자는 사고(士高),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전례(典禮)에 밝고 사장(詞章)에 능한 훈구파의 거물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24) 조롱박을 본떠서 그리려면 : 옛사람의 문장을 모방함으로써 익숙히 익히려고 한다는 말이다. 송나라 도곡(陶糓)의 문한(文翰)이 당대의 으뜸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를 천거하자 태조가 웃으면서 “듣건대 한림학사는 제서(制書)를 초(草)할 때 모두 옛사람이 저술해 놓은 구본(舊本)을 점검하여 말만 바꾸어서 쓴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세속에 이른바 옛사람의 양식에 따라서 호리병을 그린다는 것이니, 무슨 힘을 쓴 것이 있겠는가.”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東軒筆錄』 卷1)

25) 경임(慶絍) : 성종(成宗) 18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진주 목사에 임명된 기록이 있다.

26) 휘(諱)하여 균(匀)으로 썼다 : 선조의 이름이 균(鈞)이므로 이를 피하여 균(勻)으로 기록했다는 말이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2020년 10월) > 용재선생유고 > 발跋 > 유산악부시의 발문[遺山樂府詩跋]
*한국국학진흥원: https://www.koreastudy.or.kr/

 



【번역문】

악부는 시인들의 큰 향기 상자이다. 유산 元好問이 지은 것은 청산하고 아름다워 절로 泰觀 · 晁端禮 · 賀鑄 · 宴殊 등 여러 사람들과 견줄 만하게 보인다. 그런데 나만 蘇東坡 · 辛棄疾의 작품에만 미루어 짝하려고 하니 어찌하여 소동파를 제일로 삼아서 작자들로 하여금 짓기 어렵게 하는가?
그러나 陳師道는 “소동파는 시를 짓는 솜씨로 詞를 지으니 마치 교방의 雷大使의 춤과 같아서 비록 천하의 공교함일지라도 요컨대 본래의 빛깔이 아니다.”라고 하였고, 李淸照 역시 “소동파의 가사는 모두 구두가 이어지지 못한 시일 뿐이라서 가끔씩 음율에 맞지 않는다. 王安石 · 曾鞏의 문장은 西漢과 비슷하여 만약 小歌詞를 짓는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기절하고 쓰러지며 읽지 못할 것이다. 바로 특별한 一家임을 알 수 있었는데 아는 자가 적다.”라고 하였다. 저 소동파, 왕안석, 증공 세 사람의 문집이 크게 이루어져서 오히려 사람들의 기롱과 의론을 면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그 아래에 있어서랴.
무릇 시문은 평측을 나누고 또 6율을 나누어 청탁과 경중이 조화를 이루지 않음이 없으며 그런 뒤에야 가락에 맞게 된다. 대게 소동파는 스스로 말하기를, “평생 동안 세 가지가 남과 같이 못했는데 歌舞가 그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지은 가사 중에는 가락에 맞지 않는 곳이 있다.
그러나 왕안석과 증공은 모두 하늘과 사람 사이에서 배워 그 소가사를 짓는데 있어서 참으로 바가지 물을 떠서 큰 바다에 붓는 꼴 같으니 어찌 헐뜯고 비방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이미 중국의 語音과 달라서 이른바 악부라는 것에 있어서 소리를 내고 노래를 부를 줄 모른다. 다만 글자의 평측을 나누고 구절의 장단을 갈라서 운에 맞추니 모두 이른바 시 짓는 재주로써 詞를 짓는 것이다. 西施가 가슴을 움켜쥐고 눈살을 찡그리며 다닌 것을 좋다고 그대로 흉내내고 있으니 다만 그 추하고 못난 것만 본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문장의 대가들은 모두 억지로 짓지 않으니 재주가 미치지 않아서가 아니다. 또한 중국 사람으로 하여금 鄭瓜亭이나 小唐鷄의 노래를 짓게 한다면 반드시 사람들은 손바닥을 비비고 갓 끈을 끊고야 말 것이다.
李齊賢이 충선왕을 모시고 閻復, 조맹부와 더불어 놀았는데 시의 나머지 여러 시체를 알아서 갖춘 자는 우리나라의 한 사람 뿐이었다. 그러나 진사도, 이청조로 하여금 짓게 하였다면 담방이를 입고 느릿느릿 걸으면서 정말 孫叔敖가 되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이로써 보면 사람들이 갑자기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겠으니 비록 악부를 모르더라도 또한 우리나라 문장이 모자란 것은 아니다.
내가 이 말을 한 지 오래되었다. 이제 감사 廣原 이상국에게 알렸더니 이감사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그러나 배우는 자들이 만약 겉모양만 본받아 다 입을 뇌까리고 웃는 꼴을 짓고 있으니 이 노래집을 분포하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엣 본을 가져다 빠지고 잘못된 글자를 고증하고 교정하여 깨끗한 본을 동사한 다음 드디어 진주 慶牧使에게 맡겨 출판하도록 하였다.

성종 23년(1492) 9월 10일 도사 월성 이 중균 종준이 쓰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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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慵齋遺稿』, 雜書, ≪遺山樂府詩跋≫



*출처: 『慵齋 李宗準의 文學思想』 -15세기 사림파 문학 연구의 일환으로-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원 강사 (한문학 전공) 조기영(趙麒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