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 묘소 세거지/문중◆◆이야기

2016년 가을 시사 참례기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9. 6. 11:17

시사에 참례하기 위해 모인 우리는 안동시청에서 9시경에 만났다. 종손인 중명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차종손, 안동에 사시는 집안 어른 두 분이 계셨다. 대구에서는 효목동에 사시는 준환 할배, 재식․재학․재용 아재, 호규 아재, 철진 형님, 그리고 나와 가장 가까운 기원 아재, 도청에 근무하는 동록씨였다. 승용차 세대에 나눠탄 우리 일행은 우모소(금역당 산소)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달렸다. 선착장의 접안 시설에 오르니, 찬바람이 불어와 몸을 움츠리게 만든다. 어제는 날씨가 많이 따뜻했는데, 오늘은 흐려서인지 쌀쌀한 느낌이다. 조금 기다리니 12명이 정원(定員)인 작은 배가 도착했다. 선장님이 나눠준 종이에 생년월일과 이름을 적은 후에 배는 출발했다.

 


 

   선착장을 출발한 배는 임연대를 향해 나아가다가 좌로 선회한다. 안동호의 잔잔한 물결에 주변 산의 울긋불긋한 단풍이 비치니, 이곳이 아름다운 도목촌(桃木村)임을 느낀다. 임연선조는 이곳에 터를 잡은 후 도목촌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도촌팔영(桃村八詠)이란 시를 지었다. 다음은 도촌팔영에서 가을을 노래한 부분이다.

 

           陣陣西風入夜牕 (끊임없이 부는 가을바람 밤 창에 들어오고)

           叫霜新雁下澄江 (섧게 우는 햇기러기 맑은 강에 내려앉네)

           一輪山月明如晝 (두둥실 산에 뜬 달 대낮처럼 밝은데)

           黃菊叢邊擁酒缸 (노란 국화 떨기 옆에 술동이 끌어안았네)

 

  안동호의 가을은 아름다웠지만, 춥기도 했다. 우모소 시사에 올 때는 날씨가 따뜻하더라도 좀 두꺼운 옷을 입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배안에서 주변 풍경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멀리 우모소가 보인다. 벌초를 하기 위해 배를 타야하고, 시사에 참례하기 위해서도 배를 타야 하는 풍경은 안동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모습이다. 다행히 배삯은 무료라고 한다. 국가에서 원인 제공을 했으니, 최소한의 편의는 제공하는 모양이다.

  종손이 탈상을 했으니, 올해 시사는 작년과는 달리 제대로 격식을 갖추었다. 산신제도 있었고, 축도 있었고, 초헌관과 아헌관, 종헌관이 술을 올렸다. 제를 마친 뒤에는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이런 저런 애기를 나누었다. 종손인 중명은, 따로 식사할 시간이 없으니 음복이라도 많이 하라고 권한다.

 

학봉 종손인 문소 김흥락이 쓴 금역당의 비문


   우모소(금역당 산소)에서 나와 간 곳은 서후면 금계에 있는 매일산(梅日山)이었다. 이곳은 백죽당의 4대손인 창원 교수공의 산소가 있는 곳이다. 공의 휘(諱)는 정(禎)으로 나의 20대조가 되시는 녹사공(錄事公)의 둘째 아드님이니, 나에게는 방조(傍祖)가 된다. 주손(胄孫)이 되시는 연웅(淵雄) 할배가 초헌을 하시고, 중명이 아헌을 맡았다. 산소 앞에는 최근에 세운 비석이 서 있었다. 새 비석 옆에는 옛 비석의 받침돌이 남아 있었다. 오래된 비석이어서 그랬는지 누군가가 갖고 가버려서 후손들이 다시 비석을 세웠다. 다행히 비문(碑文)의 글이 다른 집안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승훈랑 창원교수흥해배공지묘              성균진사이홍준근찬                          방후손 덕환근추록우후

                                                                                                   방후손 승환 근서

 

   비석을 살펴보니 눌재(訥齋) 이홍준(李弘準)이 비문을 썼다. 눌재의 부(父)는 이시민(李時敏)으로, 나의 22대조이신 백죽당의 외손자가 된다. 형인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과 함께 학문으로 이름난 분이다. 촌수를 따져보니, 교수공과 눌재 이홍준은 6촌간이다. 비석의 옆면을 보니, 비석을 다시 세울 때, 그 전말(顚末)을 기록한 주실 할배(諱 德煥)와 비문의 글씨를 쓰신 능혜 할배(諱 昇煥)의 諱가 새겨져 있어 감회가 새롭다. 교수공의 산소 밑에는 종손의 4대조가 되시는 생원공(生員公:諱 善萬)의 산소가 있어 다함께 참례하였다.

 

   그 다음으로 간 곳은 20대조인 녹사공(錄事公)의 산소였다. 비석을 보니, ‘가각고녹사흥해배공지묘 영인 안동권씨부(架閣庫錄事興海裵公之墓 令人安東權氏祔)’라고 쓰여 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가각고(架閣庫)’는 고려 말 ~ 조선 초에 걸쳐 국가의 주요 문서를 관리하던 기관이었다. 녹사공(錄事公)은 벼슬이 높으시지는 않았지만,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던 ‘배문(裵文)’을 대표하면서 안동의 향촌사회를 이끌었던 분이다. 비문(碑文)은 六代孫이 되시는 금역당(琴易堂)께서 지었다. 시사를 지낸 후 분축(焚祝)을 하는데, 어린 차종손이 다가와 재미있어 한다. 앞으로 종손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아이인데, 성격이 원만하고 총명해 보인다.

 

                                      나의 20대조이신 녹사공의 산소 모습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지평공의 산소였다. 금계의 학봉(鶴峯) 종택 뒤편에 있다고 들었지만,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지평공은 백죽당의 장자(長子)로 사헌부 지평 벼슬을 하셨다. 형제가 모두 네 분인데, 둘째 관찰공(諱 桓)은 관찰사를 지내셨고, 셋째(諱 楠)와 넷째(諱 杠)아우 두 분도 모두 이조정랑을 지내셨다. 이로 인하여 당시 사람들은 우리 가문을 ‘배문(裵文)’이라 칭송하였다.

지평공 산소 뒤에는 오랜 세월동안 지평공 산소를 지켜온 아름다운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지평공의 산소는 잘 관리되고 있었다. 산소 주변에는 4천여 평의 위토(位土)가 있어 제수 비용을 충당하고 있었다. 집안 어른 한 분이 건너편 산을 가리키며 말씀하시길..., ‘원래 우리 집안의 산이었는데, 학봉 집안에게 떼어 주었다.’고 하신다.


                                              백죽당 자손들의 가계도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에서 펴낸 『안동 금계마을 - 천년불패의 땅』 p48을 보면, 우리 집안의 가계도가 나온다. 이 가계도를 보면, 지평공의 손자이신 교수공(諱 禎)의 손녀가 안동권씨 권덕황(權德凰)이란 분에게 출가하셨는데, 이 분의 따님이 학봉 김성일에게 출가하셨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 집안의 재산이 의성김씨에게 상속되었던 것이다.

시사를 지내기 위해 산소 앞에 섰을 때, 효목동에 사시는 준환 할배는 조용히 말씀하신다. ‘옛날 같으면 정말 큰 행사였는데....’ 조상에 대한 추모의 정이 옛날 같지 않으니, 시사에 참례하는 인원도 갈수록 줄어들고.....

 

                              지평공 산소와 산소를 지켜온 아름다운 소나무 그리고 차종손


   이로써 오늘 예정된 일정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하나가 남았다. 고려 말에 백죽당 선조께서 이곳 금계로 낙향하시면서 안동의 유학은 본격적으로 발달한다. 백죽당께서 맨 처음 터 잡으셨던 곳에는 용의 알처럼 둥근 용암(龍巖)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꼭 한번 현장을 답사하고 싶었다. 우리 가문과 금계 마을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글이 있다. 안동대학교에서 펴낸『안동 금계마을 - 천년불패의 땅』을 보면,

 

  『永嘉誌』와 『金溪誌』를 보면 금계에 처음으로 입향한 사람은 흥해인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1351~1413)이다. 『金溪誌』에서는 백죽당의 옛집이 용암에 있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흥해배씨가 안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백죽당의 부친인 흥해군 배전이 일직인(一直人) 손홍량(孫洪亮)의 사위가 되어 처가 마을을 따라 안동으로 옮겨와 살명서이다. 이때가 바로 고려 말이다. 고려 말에 흥해배씨는 중앙관료로서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배상지가 금계에 입향하게 된 것은 안동권씨 좌윤공파(左尹公派) 희정(希正)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배상지의 아들 4형제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장남 裵權은 지평, 차남 桓은 감사, 삼남 楠은 감찰, 사남 杠은 이조정랑에 올랐다. 배권의 종손 以純은 금계를 떠나 봉화 호평에 옮겨 살다가 16세기 중반에 손자 天錫이 잠시 금계 옛터로 돌아와 살았지만 곧 임하 挑木으로 옮겨갔다. 배상지의 다른 아들의 후손들도 대부분 안동의 다른 지역이나 영주․예천 혹은 강원도로 옮겨갔다. 반면에 배씨의 외손과 사위들은 대부분 금계의 터전에서 대대로 거주하였다. 상지의 사위 이승직 가문, 배권의 손자 예안훈도 禎의 손서 權德凰과 그의 사위 김성일 가계가 바로 그것이다. 중종 때에 이조판서를 역임한 磨厓 權輗가 금계에 거주하게 된 것도 조부 권자겸이 배강의 사위가 된 때문이었다.

이처럼 금계의 흥해배씨는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에 이르는 시기에 금계, 더 나아가서는 안동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가문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잏의 조선 후기에는 후손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 살게 됨으로써 그 영향력이 많이 줄어들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금계지』 「인물조」에도 11명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안동 금계마을 - 천년불패의 땅』(p43~44)

 

                                    백죽당의 집터에 있었다고 전해오는 용암


   학봉 종택 근처 길가에는 용암(龍巖)이 있었다. 정말 알처럼 둥근 바위였다. ‘용암 옛터’라 쓰여진 안내판이 있었는데, 의성 김씨의 입장에서 쓰여 있었다. 우리 가문이 금계를 떠난 뒤, 의성김씨가 새로운 주인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허전한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용암에서 우리는 내년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기원 아재를 안동시청까지 태워드리고, 대구로 차를 몰았다. 운전을 위해 음복주 한잔도 하지 않았는데, 졸음이 온다. 껌을 씹으면서 뒷좌석을 보니, 재식이 아재는 정신없이 주무시고 있다.


*출처: 栢竹門響 http://cafe.daum.net/qorwnr/fKNi/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