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충순위공이숭준

[영가지(永嘉誌)] 進士贈左承㫖裴巘墓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5. 9. 16:23

경북 유형문화재 제224호 영가지(永嘉誌)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유산 검색 > 영가지(永嘉誌)
*국역 출처: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 > 영가지


서지
종목: 경북 유형문화재 제224호
명칭: 영가지및책판(永嘉誌및冊板)
시대: 조선 선조 41년(1608)~대한제국(1899)
수량: 일괄(13책)
분류: 목판본/사간본
지정일: 1986.12.11
소유자: 권오기,권기백
소재지: 경북 안동시
문화재형태: 선장
형태서지: 1. 영가지 <권 1> 永嘉誌 <卷 一> - 조선 선조 41년(1608), 1책(冊).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21.8cm×18.0cm,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9자(字),주쌍행(注雙行),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32.0cm×22.0cm
~
4. 영가지 <권 4> 永嘉誌 <卷 四>
5. 영가지 <원> 永嘉誌 <元> - 조선 선조 41년(1608), 1책(冊).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3.8cm×18.2cm,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2자(字), 주쌍행(注雙行), 상하내향사판화문어미(上下內向四瓣花文魚尾); 31.7cm×24.2cm
6. 영가지 <형> 永嘉誌 <亨>
7. 영가지 <이> 永嘉誌 <利>
8. 영가지 <정> 永嘉誌 <貞>
9. 선조편집영가지 <제1책> 先祖編輯永嘉誌 <第一冊> - 대한제국(1899), 1책(冊).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0.6cm×17.6cm,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2자(字), 주쌍행(注雙行), 상하내향사판화문어미(上下內向四瓣花文魚尾); 32.2cm×22.2cm
~
12. 선조편집영가지 <제4책> 先祖編輯永嘉誌 <第四冊>
13. 간인시도 刊印時到 - 조선 선조 41년(1608), 1책(冊).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24.2cm×18.2cm,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9자(字); 30.3cm×21.7cm

해제
이 자료는 조선 중기 안동(安東) 지역의 지방지(地方誌)인 『영가지(永嘉誌)』와 이의 『책판(冊板)』이다. 영가(永嘉)는 화산(花山)과 함께 안동의 옛날 이름이다.
『영가지』의 편찬은 선조35(1602)년 권기(權紀, 1546~1624)가 스승 유성룡(柳成龍, 1542~1607)으로부터 편찬요목을 받아 동향인(同鄕人) 권행가(權行可)와 함께 편찬에 착수하였다. 이를 위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함주지(咸州誌)』의 편차를 참고하였으며, 그것을 다시 유성룡에게 질의한 다음 동향의 사우(士友)들과 함께 분담ㆍ집필케 하였으나, 유성룡이 죽자 중단되고 말았다. 그후 함안(咸安)의 읍지(邑誌)인 『함주지』를 편찬한 바 있는 정구(鄭逑, 1543~1620)가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오자, 권기ㆍ김득연ㆍ권오ㆍ이혁ㆍ배득인ㆍ이적ㆍ유우잠ㆍ이의준ㆍ권극명ㆍ김근 등을 소집하여 재편찬에 들어가 선조 41년(1608)에 완성하였다.
이때 편찬된 『영가지』의 초본(草本)이 부사(府司)에 소장된 채 지내오다가 영조 36년(1760) 서울 찬수청(纂修廳)에 바쳐졌고, 2년 후 서울에 올려진 것을 등초(謄草)하여 다시 부사(府司)에 비치하였다. 그 후 정조 8년(1784) 호장(戶長) 권창실에 의해 개장(改粧)되었는데, 당시 등초해 온 『영가지』 사본(寫本)은 18세기말부터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초고본(草稿本) 1책, 초고본 8권 3책, 정고본(定稿本) 8권 4책으로 전하였다.
내용은 권두에 권기의 서문, 본부도(本府圖)와 임하(臨河)ㆍ길안(吉安)ㆍ감천(甘泉)ㆍ내성(奈城)ㆍ일직(一直)ㆍ풍산(豊山)ㆍ개단부곡(皆丹部曲)ㆍ춘양(春陽)ㆍ소천부곡(小川部曲)ㆍ재산(才山) 등 안동부 내 각 현과 부곡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지도 다음에는 연혁(沿革)ㆍ읍호(邑號)ㆍ강역(疆域)ㆍ진관(鎭管)ㆍ호구(戶口)ㆍ산천(山川)ㆍ토품(土品)ㆍ향교(鄕校)ㆍ도로(道路)ㆍ제언(堤堰)ㆍ성씨(姓氏)ㆍ인물( 人物)ㆍ총묘(塚墓) 등의 목록을 수록하여 당시 안동부의 행정조직ㆍ사회경제ㆍ문화ㆍ풍속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영가지』는 전국 읍지 중에서도 편찬 시기가 빠른 17세기 초이며, 유성룡과 정구의 지휘하에 권기를 비롯한 당시 안동부(安東府)를 대표하는 유림들이 두루 편찬에 참여했기 때문에 체제가 정연하고 내용이 매우 충실하였다. 이들 자료는 전국 읍지의 전형(典型)이 되었으며 지방사 연구자료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進士 贈左承㫖 裴巘墓 【4선장 65~66쪽】
在乃城縣西南 虎崖山外麓 曾孫 忠清都事 龍吉撰碣 公諱巘 字巘之 世爲慶之興海郡人 公年十有五 通禮公 殁 公 外除 懼不克世家業 負笈尋師 厲志篤行 中正德丙午司馬 遂絶意 進取惟訓 子弟 不倦 春及則必晨出㘴大門外 閱赴南畝者 闕者必罰 里無惰農 即古者 距冬至四十五日 始出學傳農事之義也 人勸之廣文 笑曰廣文 亦官耶 公天性慷慨剛直 不屈而撗逆之來 亦不與之較 公 生於成化壬寅 殁於嘉靖甲申 後 用孫觀察使貴 追 贈承政院左承㫖 兼 經筵參䝺官 妣 錦城朴氏 忠義衛磁之女 左議政 錦川府院君 平度公訔之曾孫 生於成化丙午 殁於嘉靖戊申 生三男三女 男天錫 贈兵曺參判 天佑 學生天柱 定虜衛 女適士人琴應釣 權頔 部將 琴友仁 參判 生二男一女 長先府君 三益 即觀察使 次三近 女士人李應祚 學生一男六女 男三省 女適士人安惕 朱敬 孫汝覺 通政 李苓 士人 金麟祥 通政權得經 定虜生二女 適忠義衛 李百春 士人黃悅 側生子 三老琴士人 生一男 仰聖權士人 生三男三女 男慎言 謹行 謹身 女適士人 南應吕 曺憲 鄭維 廉部將 生一男 奉先 曾祖 錄事 諱孝長 祖昭威 將軍 諱袵 考 贈左通禮 諱以純 高䴡 興海君 諱詮 六代孫也 始葬公乃城縣西虎崖山外麓逮夫人之殁移窆于中岡而以夫人祔焉


◎진사(進士) 증좌승지(贈左承旨) 배헌(裵巘)의 묘
내성현(柰城縣) 서남쪽 호애산(虎崖山) 바깥 기슭에 있다. 증손인 충청도사(忠淸都事) 용길(龍吉)이 갈문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헌(巘)이요, 자는 헌지(巘之)이다. 경상도 홍해군 사람이다. 공의 나이 열 다섯에 통례공(通禮公)이 죽었다. 공이 외직에 제수되자 가업을 능히 이을 수가 없다고 두렵게 여겨 보따리를 싸 질머지고 스승을 찾아 나섰다. 매서운 의지력으로 독실히 실천하여 정덕(正德) 병오년(1486, 성종1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벼슬에 나아가려는 생각을 끊고 오직 자제들을 훈도하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봄이 오면 반드시 새벽에 나아가 대문밖에 앉아서 남쪽 이랑으로 농사하려 가는 사람들을 살펴서 빠진 사람이 반드시 벌을 주었다. 그래서 마을에서 농사를 게을리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는 바로 옛날에 동지(冬至)로부터 45일이 지나면 비로서 나아가 농삿일을 배운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문학을 넓혀야 한다고 권유하면, 웃으며 가로되, “문학을 넓히는 것 또한 벼슬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였다. 공은 천성이 강개(慷慨)하고 강직(剛直)하여 남에게 굽히지 않았으나, 횡역(橫逆)이 닥치면 또한 그들과 겨루려고 하지도 않았다. 공은 성화(成化) 임인년(1482, 성종13)에 태어나 가정 갑신년(1524, 중종19)에 죽었다. 뒤에 손자가 관찰로서 귀해지자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금성박씨(錦城朴氏)인데, 충의위(忠義衛) 자(磁)의 딸로 좌의정 금천부원군(金川府院君)인 평도공(平度公) 언(언)의 증손이다. 성화(成化) 병오년에 태어나 가정 무신년에 죽었다. 3남 3녀를 낳았다. 맏아들 천석(天錫)은 증병조참판(贈兵曺參判)이었고, 둘째 천우(天佑)는 학생(學生)이었으며, 셋째 천주(天柱)는 정로위(定虜衛)이었다. 딸은 사인(士人) 금응균(琴應均), 권적(權적), 부장(部將) 금우인(琴友仁)에게 시집갔다. 참판(參判)은 2남 1녀를 낳았다. 맏아들은 선부군(先府君) 삼익(三益)이니 곧 관찰사(觀察使)였고, 둘째는 삼근(三近)이다. 딸은 사인(士人) 이응조(李應祚)에게 시집갔다. 학생(學生)은 1남 6녀를 낳았다. 아들은 삼성(三省)이고, 딸은 사인인 송척(宋惕) · 주경(朱敬) · 손여각(孫汝覺), 그리고 통정(通政) 이령(李笭), 사인 김린상(金麟祥), 통정 권득경(權得經)등에게 시집갔다. 정로(正虜)는 2녀를 낳아 충의위(忠義衛) 이백춘(李百春)과 사인 황열(黃悅)에게 시집보냈다. 첩으로부터 아들 하나를 얻었으니 삼로(三老)이다. 금사인(琴士人)은 1남을 낳으니 앙성(仰聖)이고, 권사인(權士人)은 3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신언(愼言) · 근행(勤行) · 근신(謹身)이고 딸은 사인 남응려(南應呂) · 조헌(曺憲) · 정류렴(鄭維廉)에게 시집보냈다. 부장(部長)은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봉선(奉先)이다. 증조는 녹사(錄事) 효량(孝良)이고, 조(祖)는 소위장군(昭威將軍) 임(秹)이며 고(考)는 증좌통례(贈左通禮) 이순(以純)이다. 고려 흥해군(興海君) 전(詮)의 6대손이다.”

*증병조참의(贈兵曹參議) 사인공(士人公) 이응조(李應祚): 충순위공(忠順衛公) 이숭준(李崇準)의 증손(曾孫). 생부(生父)는 장사랑공(將仕郎公) 창(菖). 숙부(叔父) 이(苡)에게 출계(出系)



●進士 贈左承㫖 裴巘墓 【8선장 65~67쪽】
●進士 贈左承旨 裴巘墓 【12선장 58~59쪽】

 

[사인공 이응조] 영가지(永嘉誌).pdf
1.89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