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과거/경주이씨◇인물

우당공(友堂公) 이회영(李會榮)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6. 8. 14:49

우당공(友堂公) 이회영(李會榮)


1867(고종 4)~1932. 독립운동가

이회영(1867년~1932)은 서울 출신으로 호는 우당(友堂), 좌찬성 유승(裕承)과 정경부인 동래정씨와의 사이에 7남 중 4남으로 태어났다.

1906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안창호(安昌浩)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의 분야를 담당하고 만주에 광복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협의한 다음 간도 용정(龍井)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숙장(塾長)으로 선임하여 교육을 시행토록 하였으나 1907년에 이상설이 네델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정사로 파견되었으므로 여준(呂準)을 파견하여 교무행정을 맡도록 조치했다.

이듬해에 보재(溥齋. 상설의 호)가 열강을 역방하면서 주권회복의 활동을 하고 돌아오자 공이 만주로 찾아가서 앞으로의 진로를 숙의하였는데, 장차의 구국활동은 분담하기로 합의하고 국내활동은 공이 맡고 국외활동은 보재가 담당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공은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는 교육의 진흥이라” 고 단언하고 동지들을 각 학교에 파견하여 민족의식교육에 힘쓰도록 독려하고 공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하여 민족의 각성을 축구하는 정신운동에 앞장섰다.

1909년 봄에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金九)·이동녕·주진수(朱鎭洙)·안태국(安泰國)·이승훈(李昇薰) 등과 비밀리에 신민회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로 합의하고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를 후보지로 결정하였다.

1910년에 나라가 망하자 6형제 전가족이 만주로 솔가 망명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에 교민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1912년에 독립군지도자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를 세웠는데 이것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전신이었다.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온 민족이 고무되었고 공도 오세창(吳世昌)·한용운(韓龍雲)·이상재(李商在) 등과 비밀리에 회동하고 고종의 국외망명을 계획하고 시종(侍從) 이교영(李喬永)을 통하여 고종에게 상주하여 고종의 재가를 얻었으나 얼마 후에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시니 모든 계획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1919년 2월에 북경의 공의 자택에서 공과 이시영·이동녕·조성환·이광(李光)과 함께 회동하고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한 다음 국내외에 이 소식을 알리기로 하였다. 3·1운동 직후 본국에서 민족대표로 파견된 여운형(呂運亨)·현순(玄楯)과 북경에 있던 이시영·이동녕·조성환·이광 등과 함께 상해로 내려가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참여했으나 동지들끼리 의견차이로 싸우는 것을 보고 북경으로 돌아와서 항일투쟁을 계속하고,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만주와 중국에 있던 동지들이 상해로 집결하여 조직한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의 의장에 추대된다.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항일구국연맹은 3대 강령 (1) 일본군기관과 수송기관을 파괴할 것. 2) 일본의 요인 및 친일파를 숙청할 것. 3) 일본의 외교기관을 폭파할 것을 발표하고, 중국국민당을 찾아가서 자금과 무기의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그해 11월 만주에 연락 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의 구축과 주만일본군사령관의 암살을 결행할 목적으로 대련(大連)으로 가는 기차에서 일본경찰에게 잡혀 잔혹한 고문 끝에 여순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년(고종 4)~1932년
일제강점기 신민회 중앙위원, 항일구국연맹 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우당(友堂). 서울 출신. 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이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7년 2월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4월경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활약하였다.

한편,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협의하여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책임자로 하여금 교포 교육에 주력하도록 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릴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呂準)을 만주로 파견하였다.

그 뒤 1908년 헤이그에서 돌아 온 이상설을 만나기 위해 만주로 찾아가서 앞으로의 진로를 협의한 끝에 국외활동은 이상설이, 국내활동은 자신이 담당하기로 협의하고 귀국하였다.

우선 교육진흥운동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 동지들을 각 학교에 파견하여 교육에 진력하도록 하고, 자신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1909년 봄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金九)·이동녕·주진수(朱鎭洙)·안태국(安泰國)·이승훈(李昇薰) 등과 비밀리에 신민회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를 후보지로 결정하였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전가족이 만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하였다. 1911년 교민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1912년 독립군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뒤의 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W.)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자극되어 국내외에서 독립기운이 활발해지자 오세창(吳世昌)·한용운(韓龍雲)·이상재(李商在) 등과 밀의한 뒤, 고종의 국외망명을 계획하고, 시종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고종에게 상주하여 쾌락을 얻었으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上海)에 수립되었으나 의견 차이로 분란이 끊이지 않자 상해보다는 북경(北京)에 체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국에 있던 동지들이 상해로 집결하여 조직한 항일구국연맹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행동강령으로 일본군기관 및 수송기관 파괴, 일본요인 및 친일파 숙청, 일본외교기관 폭파 등을 결정하고, 중국국민당과 교섭하여 자금과 무기지원을 확약받았다.

그 해 11월 만주에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을 조직하여, 주만일본군사령관 암살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대련(大連)으로 향하던 도중, 대련의 일본수상경찰에 잡혀 악독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다음백과: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46635